여행이야기(향기)

[스크랩]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22

 

 

 

정몽주 [, 1337~1392]

본관 연일(). 자 달가(). 호 포은(). 초명 몽란()·몽룡(). 시호 문충(). 영천()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등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使)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使)·경영전영사(殿)·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이 있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