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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운 청백리(淸白吏) 황희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19

 

 

그리운 청백리(淸白吏) 황희

 

 

너그러움으로 세상을 보담다

하루는 계집종 둘이 시끄럽게 다투더니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쳤다.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냐오냐. 네 말이 옳구나. 저 애가 잘못이구나.”

그러자 다른 아이도 분을 이기지 못해 상대방의 잘못을 고해바쳤다.
그 아이의 말을 들은 주인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오냐오냐. 네 말이 맞다. 저 애가 틀렸구나.”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집에서 저런 분이 어떻게 정승 노릇을 하며 막중한 나랏일을 보실까?”
하고 핀잔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인 말도 옳구려”가 아니라, “하인도 다 하늘이 내려주신 이 땅의 백성인데 어찌 엄하게만 대할 수 있으리오?” 준엄하게 꾸짖으니, 이 사람이 바로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되 따스한 애민정신과 투철한 인본사상으로 관용의 리더쉽을 발휘한 재상,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첫손 꼽히는 명재상, 황희(黃喜)다.


출사를 결심하다

1363년,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인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開城)에서 태어난 황희는 고려 말부터 관리를 지냈다.

창왕(昌王) 1년인 1389년, 과거 급제 뒤 고려 시대 최고의 교육 기관인 고려 성균관(高麗成均館) 학관(學館)을 거치면서 청운의 푸른 꿈을 키우던 황희는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송악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다.

하지만 새 나라를 세운 이성계는 황희처럼 젊고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고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두문동에 함께 있던 고려의 원로 유신들 또한 ‘그대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죽는 것도 의(義)가 되겠지만 왕조의 변화와 아무 상관없는 만백성을 위해 나가서 정사(政事)를 잘 하는 것도 의로운 일'이라며 젊은 황희를 설득했고, 결국 황희는 어렵게 출사(出仕)를 결심했다.


소신과 원칙을 견지한 정치적 자세

그렇게 조선에 출사한 황희는 직예문 춘추관(直藝文春秋館), 사헌부 감찰(司憲監察), 형조?예조?병조?이조정랑 등을 거치며 조선 초,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방 강화, 4군 6진 개척, 농사의 개량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겨 세종대왕 시절에는 우의정과 영의정이 되어 18년간 청백한 재상으로 백성들을 돌보며 평생을 바친 것이다.

또한 황희는 정치를 함에 있어 원칙과 소신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조선의 3대 왕인 태종(太宗)이 장남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세자에서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충녕대군(忠寧大君), 후일 세종대왕이 되는 셋째 아들을 책봉하려 하자 황희는 본부인이 낳은 큰 아들이 왕위를 승계해야 한다는‘적장자(嫡長子) 승계 원칙’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러한 원칙이 깨지면 어렵게 세운 새 왕조가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인데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황희는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향을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의기가 곧아 바른 말을 잘 했던 황희는 벼슬을 하는 동안 2번이나 좌천됐고 4년 동안 유배살이를 해야 했다.


진정한 리더쉽을 보이다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도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았던 황희는 비가 새는 초가(草家)에 살면서 자신이 직접 채소밭을 가꾸고 관복 한 벌로 삶을 지내는 청렴함을 보였다.

그리고 ‘행도천법(行途薦法)’이라는 새로운 인재 선출 방식을 도입해 신분을 초월해서 능력 중심의 인재를 뽑을 수 있게 하니, 그 인재 중의 한 명이 노비로 태어나 뛰어난 능력으로 종 3품의 관직인 대호군(大護軍)의 자리에 오른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이다.

이런 황희에 대해 역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고 신중하며, 재상으로서 세상을 보는 눈과 깊은 생각이 있었다.
그는 집을 다스리는 데도 검소했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으며, 일을 의논할 때는 공명정대하여 원칙을 살리기에 힘썼다.”

그렇게 모두가 인정하는 청렴한 관리이자 명재상이었기에 황희 정승이 1452년,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백성이 모두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니 황희는 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공직자라 하겠다.

 

 

/KB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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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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