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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太宗을 도운 經世家 河崙 -李穡과 鄭夢周를 복권시키다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23

 

太宗을 도운 經世家 河崙
 
王權강화로 조선조 守成의 기틀을 다지다
 
申東埈 고려大 강사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鄭道傳·鄭夢周·河崙


  조선의 開國(개국)은 元·明 교체라는 東아시아 국제질서의 大격변이 빚어 낸 결과물이었지만, 내부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그것은 바로 朱子學(주자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들의 활약이었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鄭道傳(정도전)과 鄭夢周(정몽주), 그리고 河崙(하륜)이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조선조의 개국은 바로 이 3人을 대표로 하는 신흥사대부들이 엮어 낸 노선투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원래 鄭道傳은 經世家(경세가)인 동시에 혁명가라는 두 가지 성격을 띠고 있다. 혁명가 鄭道傳의 행보에 대비되는 인물은 鄭夢周였다. 경세가 鄭道傳에 대비되는 대표적인 인물은 河崙이었다.
 
  鄭夢周는 혁명세력들이 소위 「廢假立眞(폐가입진)」을 내세워 禑王(우왕)과 昌王(창왕)을 몰아낼 때 李穡(이색)과 달리 이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만은 반대했다. 鄭夢周의 행보는 「親改革(친개혁)」이기는 했으나,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는 「反革命(반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에 반해 河崙은 다른 의미에서 鄭道傳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 河崙도 기본적으로는 鄭夢周와 마찬가지로 조선조의 개국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鄭道傳이 易姓革命(역성혁명)에 성공하자 이내 입장을 바꿔 새 왕조에 참여했다.
 
  河崙은 왜 조선조 개국 후에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일까? 河崙은 기본적으로 鄭道傳과 달리 혁명가가 아닌 경세가였다. 그는 재상 중심의 나라를 건설코자 한 鄭道傳과는 정반대로 군주 중심의 강력한 王權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가 太宗 李芳遠(이방원)을 사주해 鄭道傳을 제거하고 조선조를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드는 데 발 벗고 나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太宗의 장인 閔霽의 친구
 
  河崙은 고려 충목왕 3년(1347) 12월에 순흥부사를 지낸 河允潾(하윤린)과 모친 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河崙의 집안 역시 대개의 토착 향리집안이 그렇듯이 派系(파계)가 선명치 못했다. 河崙의 외조모는 좌승상을 지낸 車蒲溫(차포온)과 첩 사이에서 난 孼族(얼족)이었다. 河崙은 鄭道傳과 마찬가지로 명문가인 연안 車씨의 얼족 외손이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온 史書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는 믿기 어려운 일화가 실려 있다. 河崙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두문동 72賢의 한 사람으로 평산에 퇴거 중이던 車原?(차원부)에게 반란 혐의를 씌워 내외의 족친 70여 명을 살해하고, 해주의 神光寺(신광사)에 소장된 車씨의 譜板(보판)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대략 조선조 내내 河崙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음을 방증하고 있다.
 
  河崙은 19세 때인 공민왕 14년(1365)에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官途(관도)에 들어섰다. 당시 문과시험의 座主(좌주)는 李仁復(이인복)과 李穡이었다. 이인복은 河崙을 보고는 큰 그릇으로 여겨 이내 동생인 李仁美(이인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이인복은 고려조 성리학의 원조에 해당하는 白臣頁正(백이정)과 權溥(권부)의 문생이었다. 그의 동생 李仁任(이인임)은 우왕 때 권력을 농단하면서 적잖은 비난을 받았으나, 이인복은 뛰어난 학문과 덕행으로 신흥사대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河崙은 巨儒(거유) 李穡과 이인복을 좌주로 두고 당대의 명문가인 星山(성산) 李씨와 통혼함으로써, 자신보다 먼저 출사한 鄭道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입장에서 관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河崙은 당대의 人材인 鄭夢周와 權近(권근), 鄭道傳, 李崇仁(이숭인), 吉再(길재) 등과 교유했다. 河崙이 교유한 인물 중에는 李芳遠의 장인인 閔霽(민제)도 있었다.
 
  閔霽는 鄭夢周와 동년배로 河崙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러나 閔霽는 河崙과 忘年之交(망년지교)의 친구로 지냈다. 훗날 河崙이 李芳遠과 연결된 데에는 閔霽의 역할이 컸다. 「태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河崙은 본래 관상 보기를 좋아했다. 閔霽에게 말하기를, 『내가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公의 둘째 사위와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公이 그 뜻을 전해 주시오』라고 했다. 閔霽가 太宗에게 말하기를, 『河崙이 군을 보고자 한다』고 했다. 太宗이 만나보자 河崙이 드디어 마음을 기울여 섬겼다>
 
  河崙은 공민왕 18년(1369)에 辛旽(신돈)의 문객으로 작폐를 일삼던 자를 탄핵하다가 파면됐다. 2년 뒤인 공민왕 20년(1371)에 신돈이 주살되자 그는 知榮州事(지영주사)로 복직되었다.
 
 
  鄭道傳, 『河侯는 해맑은 玉과 같으니』
 
조선 太祖 李成桂.

  공민왕 23년(1374)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鄭道傳은 이 사실을 明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親元派인 이인임의 미움을 샀다. 이듬해 鄭道傳은 北元(북원)의 사신이 고려를 찾아왔을 때 그를 영접하는 데 반대하다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 鄭道傳은 이후 10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이인임의 姪壻(질서·조카사위)인 河崙은 승승장구했다. 당시 河崙은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다른 신흥사대부들과 달리 北元 사신에 대한 영접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당시 權臣이던 이인임과 인척관계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北元을 明나라의 압박을 견제키 위한 지렛대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길이 엇갈리기는 했으나 河崙과 鄭道傳은 매우 가깝게 지냈다. 鄭道傳이 우왕 3~5년 사이에 다섯 차례에 걸쳐 河崙을 위해 詩를 써 주었다. 鄭道傳은 우왕 4년(1378)에 지은 詩에서 河崙을 두고 『河侯(하후)는 해맑은 玉과 같으니 티끌 없는 하나의 儒仙(유선)이다』 라고 묘사했다.
 
  鄭道傳이 우왕 8년(1382)에 함흥에 있는 이성계의 軍幕(군막)을 찾아가 易姓革命의 가능성을 타진할 때 河崙은 정3품 典理判書(전리판서)로 재직하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2년 뒤인 우왕 10년(1384)에 鄭道傳이 마침내 유배생활 10년 만에 복직되어 성절사의 일행으로 鄭夢周를 따라 明나라 수도로 가게 되었다.
 
  河崙도 이듬해인 우왕 11년(1385) 9월에 明나라가 고려의 오랜 숙원인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국왕 책봉을 인정하는 조서를 보내오자 사은사의 일원으로 明나라 수도로 갔다. 두 사람이 번갈아 使行(사행)이 된 것은 당시 고려의 조정이 두 사람에게 건 기대가 간단치 않았음을 뒷받침한다.
 
  河崙은 이때의 使行을 계기로 親明노선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이는 2년 뒤인 우왕 13년(1387) 6월에 그가 鄭夢周 등과 함께 호복의 혁파와 明나라 제도 도입을 건의한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그의 經世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河崙과 鄭道傳의 정치행보는 사실상 일치하고 있었다.
 
  河崙은 우왕 14년(1388)에 遼東攻伐(요동공벌)을 반대하다가 崔瑩(최영)의 노여움을 사 襄州(양주)로 유배를 갔다. 이때 鄭道傳은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같은 해인 창왕 원년(1388)에 李成桂(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鄭道傳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들은 河崙의 정치적 후원자인 이인임 세력을 몰아내고 實權을 장악했다.
 
 
  시련의 세월
 
  河崙은 유배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했으나, 이인임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인해 혁명세력으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이때 鄭道傳은 조준 등과 함께 대대적인 私田改革(사전개혁)을 단행하면서 혁명 반대세력의 제거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 와중에 河崙은 영흥군 王環(왕환)의 獄事(옥사)로 인해 또다시 유배 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王環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왕족이었다. 河崙은 王環이 영흥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가 무고혐의로 光州(광주)로 유배됐다. 이인임의 조카사위인 河崙에게 경계의 시각을 늦추지 않고 있던 혁명세력들이 사소한 사건을 구실로 河崙을 중앙정계에서 몰아낸 것이다.
 
  河崙은 공양왕 원년(1389) 12월에 또다시 金佇(김저) 사건에 연루돼 蔚州(울주)로 移配(이배)됐다. 이 사건은 廢黜(폐출)된 우왕이 김저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 것을 꼬투리 삼아 혁명파가 李穡과 이숭인 등을 일거에 제거키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듬해인 공양왕 2년(1390) 5월에 明나라 황제 朱元璋에게 李成桂가 요동을 공벌하려 한다고 무고한 소위 윤이·이초의 사건이 일어났다. 河崙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청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얼마 후 수재로 인해 풀려나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성세력의 역성혁명 의도가 명백해졌다. 이때 혁명세력과 행보를 같이해 오던 鄭夢周가 이탈해 고려조를 유지하려는 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河崙은 鄭夢周의 건의로 이듬해인 공양왕 3년(1391) 정월에 사면된 뒤 全羅道都觀察使(전라도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鄭夢周 세력의 결집에 위기의식을 느낀 鄭道傳은 마침내 상소를 올려 스승 李穡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李穡이 우왕의 복위를 꾀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혁명가 鄭道傳은 자신의 역성혁명 구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가차 없이 스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河崙과 鄭道傳은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이때 鄭道傳은 오히려 鄭夢周 세력의 역공을 받아 봉화로 유배되었다. 혁명세력의 최대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河崙은 공양왕 4년(1392) 정월과 2월에 공양왕에게 朱熹(주희)의 「仁字說」을 쓴 병풍을 바치면서 공양왕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했다. 이때 鄭道傳은 귀양이 풀려 영주로 돌아왔다가 곧 鄭夢周의 상소로 다시 甫州(보주)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變易」의 논리
 
鄭夢周

  이때 李芳遠이 수하들을 시켜 鄭夢周를 擊殺(격살)했다. 鄭夢周의 죽음으로 反혁명세력이 일거에 궤멸하자 河崙도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옥에서 풀려난 鄭道傳은 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공양왕을 압박해 李成桂에게 讓位(양위)케 했다. 河崙이 임지인 전라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조선이 개국을 선언한 뒤였다.
 
  河崙은 조선의 개창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일단 새 왕조가 들어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왕조에 出仕(출사)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조선조의 개창을 周易에서 말하는 「變易(변역)」으로 간주했다. 河崙은 變易을 이같이 해석했다.
 
  『예로부터 理亂(이란)이 순환하는 것은 天數(천수: 왕조의 수명)의 성쇠와 인사의 득실이 서로 관련되어 그런 것이다』
 
  그가 말한 「理亂」은 治世와 亂世가 교체한다는 孟子의 「一治一亂說(일치일란설)」을 바꿔 말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조선조의 개창을 變易으로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 때 變易은 반드시 새 왕조의 개창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고려조의 존속을 바란 鄭夢周도 變易의 논리를 추종하고 있었다. 그가 鄭道傳과 함께 「廢假立眞」의 흐름에 동조했다가 독자세력으로 뛰쳐나온 것은 혁명세력의 불순한 의도를 읽은 데 따른 것이었다.
 
  그가 이처럼 과감한 행동을 취한 데에는 기본적으로 고려조의 존속을 바라는 세력을 규합해 혁명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變易을 실질적으로 성사시키는 힘이 變易 논리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鄭夢周는 자신이 구상하는 變易의 논리를 힘으로 뒷받침하지 못해 끝내 패배한 셈이다.
 
  당시 河崙은 정몽주와 달리 變易의 중심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變易의 중심에서 한 발 벗어나 鄭夢周에게 성원을 보내는 입장에 서 있었다. 變易이 끝난 상황에서 河崙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變易의 이치를 받아들일 경우 이는 개인적 차원의 變節(변절)을 의미했다.
 
  周易은 삼라만상의 變易 이치를 언급하면서 「變通(변통)」을 강조하고 있다. 變通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變易의 논리를 인정치 않는 것으로, 이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天理(천리)」를 위배하는 것이다.
 
  고려조의 존속을 전제로 한 變易이든, 새 왕조의 개창을 전제로 한 變易이든 이미 變易이 이뤄진 상황에서 變通은 불가피했다. 河崙을 위시해 權近과 이첨 등이 두문동의 고려조 遺臣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조선조에 참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變節」 이후 河崙이 鄭道傳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은 조선조 통치권력의 운용방식 및 통치체제에 관한 것이었다. 鄭道傳은 새 나라의 정치이념 및 현실을 宰相(재상) 중심의 통치로 실현코자 했다. 그는 재상의 역할을 이같이 규정했다.
 
  『군주의 자질이 다양하기 때문에 재상은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군주로 하여금 大中(대중)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
 
  재상은 단순히 군주를 보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廟堂(묘당) 위에 서서 政令(정령)의 주체가 되어 주도적으로 政事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周禮(주례)에 기초한 鄭道傳의 재상 중심 국가 구상은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과 괴리된 매우 非현실적인 것이었다. 堯(요)·舜(순)·禹(우)·湯(탕) 등을 예로 들어 그가 가장 이상적인 君王으로 제시한 군주상은 신하에게 통치권력을 위임한 채 결재도장이나 찍는 무능한 군주의 모습을 호도한 것에 불과했다.
 
  河崙은 그 허구성을 통찰하고 있었다. 당시는 비상한 상황이므로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군주가 등장해 합리적인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기초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호정집」 議政府相規說(의정부상규설)에서 재상이 본받아야 할 인간상과 경계해야 할 인간상을 제시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周公(주공)과 子産(자산), 諸葛孔明(제갈공명) 등을 본받아야 할 재상의 實例로 거론했다. 이들은 군주를 보필하고 훈계하면서 왕도를 논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경계해야 할 재상으로 거론한 사람들은 前漢 때의 ?光(곽광)과 後漢 때의 梁冀(양기), 宋代의 王安石(왕안석) 등이었다. 이들은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이라는 것이다. 재상에 대한 평가 중 河崙과 鄭道傳이 가장 큰 시각차를 보인 인물은 곽광이었다.
 
 
  권신의 발호를 경계
 
前漢 宣帝 때의 權臣 곽광.

  원래 곽광은 漢武帝(한무제) 死後(사후) 漢昭帝(한소제)가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이내 全權을 장악한 뒤 군주를 멋대로 廢立한 權臣이다. 그는 昭帝가 21세로 죽은 뒤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昌邑王(창읍왕)이 방탕한 모습을 보이자 이내 그를 廢位시키고 宣帝(선제)를 옹립했다. 宣帝는 곽광이 病死한 뒤 전횡을 일삼던 그의 일족들을 반란을 획책했다는 이유로 일거에 주살했다.
 
  司馬光(사마광)은 「資治通鑑(자치통감)」에서 곽씨 일족은 벌 받아 마땅하지만, 곽광의 충훈만큼은 기려야 하는 데도 제사마저 끊어 버렸다며 한선제의 가혹한 처사를 지적한 바 있다. 鄭道傳 역시 유사한 입장에 서 있었다.
 
  『곽광은 漢武帝의 顧命(고명)대신으로 漢昭帝를 옹립했으니 그 공덕이 지극히 컸다. 그는 남이 자신의 죄를 고하자 禁中(금중)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待罪(대죄)하기도 했다』
 
  鄭道傳이 곽광을 이처럼 높이 평가한 것은 그가 李成桂에게 「곽광전」을 올린 뒤 곽광을 「廢假立眞」의 선례로 인용해 우왕을 폐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그러나 河崙의 곽광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였다.
 
  『곽광은 배움도 재주도 없었다. 그의 음탕한 아내는 사악한 꾀를 내 마침내 제사마저 끊게 만들었다』
 
  河崙은 곽광을 權臣의 전형으로 매도한 것이다. 확고한 王權을 기초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취지에서 보면 곽광에 대한 河崙의 평가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역사상 수많은 亂臣賊子(난신적자)들은 곽광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弑君簒位(시군찬위)를 합리화했다.
 
  당시 李成桂의 여러 아들 중 李芳遠을 제외하고는 창업의 대업을 이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 만일 鄭道傳이 선수를 쳐 李芳遠을 제거했다면 조선조는 司馬氏(사마씨)에게 나라를 빼앗긴 曹魏(조위)의 전철을 밟았을 공산이 컸다. 혁명가적 기질이 농후한 鄭道傳은 曹操(조조) 및 司馬懿(사마의)의 先例를 좇아 제2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더구나 당시 그는 재상 중심의 통치체제를 만들어 실질적인 통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만일 李芳遠의 거사가 없었다면 그는 어린 芳奭(방석)을 끼고 군신들을 호령하다가 자신의 당대 또는 후대에 시군찬위를 도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정승과 왕의 共治가 있을 수 있겠는가』
 
  河崙이 훗날 太宗이 世子에게 양위한 뒤 上王으로 물러나려고 할 때 이를 극구 만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太宗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李叔蕃(이숙번)은 이런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주상이 반드시 傳位(전위)코자 하면 국방은 제가 맡고, 그 외의 국무와 외교 등은 정승과 왕이 共治(공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때 河崙이 『어찌 정승과 왕의 共治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극구 반대했다.
 
  성리학에서 가장 바람직한 통치형태로 내세우는 것은 「君臣共治」이다. 그러나 사실 王權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가운데 「君臣共治」가 강조될 경우 군주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신하들은 주도권 장악을 위해 黨爭(당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南宋과 조선조가 국난의 상황에서조차 당파싸움을 일삼은 史實(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河崙은 바로 이런 점을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河崙의 이런 입장은 權近의 제자로 조선조 개국 후 칭병하여 출사치 않다가 太宗 원년에 河崙의 천거로 조선조에 가담한 卞季良(변계량)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군주의 직책은 정승 하나만 잘 선택하면 된다고 했으나, 이는 옛날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권력」은 천하인들이 두려워하는 바이고, 「이익」은 천하인이 추구하는 것이므로 권력과 이익의 칼자루는 하루라도 아랫사람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군주는 외롭고 신하는 많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외로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권력과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河崙의 논지인 동시에 太宗의 기본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太宗이 수차례에 걸쳐 禪讓(선양)의 뜻을 내비치면서 장차 王權에 위험이 될 소지가 있는 閔氏 戚族(척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太宗과 河崙은 시대상에 대한 판독과 해법에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룡산(공주) 천도에 반대
 
河崙의 라이벌 鄭道傳.

  河崙은 태조 2년(1393) 9월에 종2품인 京畿左道都觀察使(경기좌도도관찰사)로 제수되면서 조선조 개국 후 처음으로 출사케 되었다. 河崙은 출사하자마자 鄭道傳과 부딪치게 되었다.
 
  당시 최대 이슈는 遷都(천도)문제였다. 당초 李成桂는 공주의 계룡산 일대로 천도코자 했다. 풍수지리를 비롯해 의술 및 점복 등에 조예가 깊었던 河崙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상소를 올려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합니다.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는 데다가 동북쪽이 막혀 있고,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못해 새로운 도읍지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李成桂는 河崙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내 공주 일대에 대한 新都(신도)의 役事를 중단시켰다. 이는 최근의 행정수도 이전 논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李成桂는 書雲觀(서운관) 소장의 秘錄(비록)을 河崙에게 하사하면서 그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천도할 땅을 相地(상지)케 했다. 이에 河崙은 「毋岳(무악)」의 남쪽을 건의했다. 이곳은 지금 서울시 연희동과 신촌 일대에 해당한다.
 
  河崙은 「무악」 일대가 물류의 이동이 편하고 외향적인 지세를 갖춘 점에 주목했다. 李成桂가 이에 관심을 보이자 서운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이 크게 상한 데 따른 것이었다. 훗날 서운관원인 尹莘達(윤신달)이 太宗 때 「무악설」의 적합성을 다시 주장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때 鄭道傳은 무악 일대는 君王이 머물 만한 위치가 아니라고 반대하면서 천도 자체가 시기상조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李成桂의 천도 결심은 확고했다.
 
  이에 鄭道傳은 태조 3년(1394)에 무악으로의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河崙에 대한 견제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결국 李成桂는 서운관원들의 주장을 좇아 지금의 서울인 南京(남경)으로 천도했다.
 
  河崙의 「무악설」이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河崙은 李成桂의 신임을 크게 얻게 되었다. 河崙은 태조 4년(1395)에 부친상을 당해 일시 낙향해 侍墓(시묘)케 되었다. 이때 鄭道傳은 新宮 건설의 책임자가 되어 경복궁內 모든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鄭道傳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득의에 찬 시절이었다.
 
 
  表箋文 사건
 
  그러나 이듬해인 태조 5년에 이르러 明나라가 조선이 올린 「表箋(표전)」에 恭謹(공근)치 못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주관한 鄭道傳을 入朝(입조)시키라는 압력을 가하고 나서면서 鄭道傳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李成桂가 신하들에게 자문을 하자 모두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河崙만이 유일하게 鄭道傳의 入朝를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상황과 관련해 「태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태조가 비밀히 보낼지 안 보낼지를 廷臣(정신)들에게 물었다. 廷臣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했으나 오직 河崙만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했다. 鄭道傳이 이 얘기를 전해 듣고 크게 원망했다』
 
  당시 河崙은 鄭道傳이 직접 가서 해명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첩경으로 생각했다. 결국 李成桂는 河崙을 사자로 보내 이 문제를 해결케 했다.
 
  鄭道傳을 위시한 혁명세력은 河崙과 權近 등의 개국 후 참여파 인물들의 비약적인 성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상황은 鄭道傳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태조 6년(1397)에 들어와서도 鄭道傳을 제거코자 하는 明나라의 기도는 집요했다. 위기에 몰린 鄭道傳은 이를 정면으로 돌파키 위해 요동공벌을 공공연히 내세우며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이해 5월에 朴子安(박자안) 獄事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경상·전라 都安撫使(도안무사) 박자안이 密陽府(밀양부)에서 접대를 받고 돌아가던 降倭(항왜)의 잔당을 검거하려다가 놓친 사건이었다. 당시 河崙은 鄭道傳의 견제로 閑職(한직)인 계림부윤으로 좌천돼 있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수원부에 송치되었다. 결국 河崙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해 10월에 석방되었다.
 
  당시 河崙의 입장에서 볼 때 鄭道傳이 엄존하는 한 이제 중앙정계로 진출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河崙은 마침내 李芳遠과의 연계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왕자의 亂
 
河崙이 편찬한「東國史略」.

  태조 7년(1398) 河崙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河崙은 이를 李芳遠의 羽翼(우익)을 없애기 위한 조치로 단정했다. 「연려실기술」은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묘사해 놓았다.
 
  『河崙이 충청도 관찰사로 제수되자 靖安君(정안군·李芳遠)이 그 집 잔치에 참석했다. 여러 손님들이 앞에 나아가 술을 부을 적에 河崙이 일부러 취한 척하며 소반을 뒤엎어 정안군의 옷을 더럽혔다. 정안군이 大怒(대로)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河崙이 빈객들에게 말하기를, 「왕자가 노하여 가니 모름지기 사과해야 하겠다」고 한 뒤 급히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정안군이 앞으로 나아가면 河崙도 나아가고 정안군이 멈추면 河崙도 멈춰 섰다.
 
  정안군이 이내 河崙에게 그 이유를 묻자 河崙이 정안군에게 고하기를, 「왕자의 일이 위급합니다. 소반을 뒤집은 것은 傾覆(경복)의 환란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미리 알린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일화는 「호정집」과 「大東野乘(대동야승)」에도 나온다. 당시 河崙은 貞陵(정릉)의 移安軍(이안군)을 이끌고 서울로 오는 이숙번을 李芳遠에게 소개시켜 주면서 만일 일이 벌어지면 자신을 급히 부를 것을 당부했다.
 
  당시 李芳遠이 곧바로 河崙의 건의를 받아들였던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는 「태종실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뒷받침한다.
 
  『鄭道傳이 幼孼(유얼)을 끼고 여러 嫡子(적자)를 해하려고 하여 禍(화)가 不測(불측)하게 되었다. 이에 河崙이 이방원의 潛邸(잠저)로 가자 李芳遠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河崙이 대답키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미리 손을 써 이 무리를 쳐 없애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듬해 태조 7년(1398) 8월에 「제1차 왕자의 亂」이 일어났다. 河崙은 亂이 일어나자 급히 말을 달려 서울로 온 뒤 거사의 정당성을 널리 선전하면서 사람들을 모아 李芳遠을 지원했다. 결국 李芳遠은 거사에 성공했다. 이 亂으로 마침내 李成桂가 퇴위하고, 둘째 아들 芳果(방과)가 定宗으로 즉위했다.
 
  그는 이듬해인 정종 2년에 「제2차 왕자의 亂」으로 불리는 「芳幹(방간)의 亂」이 일어나자 이를 곧바로 진압한 뒤 바로 그 다음날 定宗을 압박해 李芳遠을 세자로 삼게 했다. 얼마 후 李芳遠이 보위에 오르자 그는 佐命功臣(좌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자신이 평소에 구상하던 경세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河崙은 定宗 2년 鄭道傳이 구상한 재상 위주의 통치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도평의사사를 議政府(의정부)로 고친 뒤 軍權(군권)을 분리시켰다. 이어 태종 5년에는 六曹(육조)를 격상시켜 의정부를 견제케 만들었다.
 
  태종 14년에 이르러서는 소위 「六曹直啓制(육조직계제)」를 채택해 6조판서가 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의정부는 허울만 남게 되었다. 이때 河崙은 明나라에 승상부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아예 의정부의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가 鄭道傳과 얼마나 대조적인 경세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
 
  태종 때 이뤄진 일련의 개혁조치는 모두 河崙의 구상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河崙은 기본적으로 富國强兵을 추구했다. 河崙이 취한 강병책은 「軍政과 軍令의 一元化를 통한 王權강화」에 그 기본적인 특징이 있었다.
 
  河崙은 강병책과 더불어 매우 정교한 외교책을 동시에 구사했다. 그는 태종 2년에 永樂帝(영락제)의 등극을 하례키 위한 賀登極使(하등극사)로 다녀왔다. 河崙은 영락제가 즉위하자 즉시 하등극사를 자처해 明나라로 가 誥命(고명)과 印信(인신)을 받아 왔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亂으로 보위에 오른 太宗의 입장에서 볼 때 고명과 인신은 즉위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당시 河崙은 무력으로 보위를 차지한 영락제를 재빨리 인정하고 나섬으로써 거뜬히 고명과 인신을 받아 온 것이다.
 
 
  史上 최초로 단군을 正史에 기술
 
  당시 河崙은 비록 의례적으로는 事大(사대)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매우 자주적이었다. 태종 12년 6월에 檀君(단군)에 대한 제사를 청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군에 대한 제사는 태조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는 하나 河崙은 이를 기자묘에 合祀(합사)시켰던 것이다. 이는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올 때마다 기자묘에 참배하는 것이 관례인 것을 고려해 조선의 시조인 단군을 중국 사신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주체의식은 그가 주도적으로 편찬한 「東國史略(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언급하며 관찬사서로서는 史上 최초로 단군을 正史에 기술해 놓은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자조선을 숭상하면서도 단군을 언급치 않았던 鄭道傳과 대비되는 것이다.
 
  河崙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華夷論(화이론)」을 받아들였으나 中華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중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곧 中華라고 본 것이다.
 
  河崙은 强兵을 위해서는 富國이 先決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屯田法(둔전법)과 煙戶米法(연호미법)의 시행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군량을 조달코자 했다. 漕運(조운)의 편리를 위해 용산강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서 배가 다니도록 하자고 건의한 데 이어 재화 유통을 촉진키 위해 楮貨(저화)를 발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河崙은 일련의 개혁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반대에 부딪혔다. 이는 그가 太宗의 절대적인 신임을 토대로 과감한 개혁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데 따른 당연한 後果(후과)이기도 했다. 李芳遠의 장인 閔霽는 『온 나라 사람들이 河崙을 鄭道傳에 비유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키도 했다.
 
 
  李穡과 鄭夢周를 복권시키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가 합장된 헌인릉.

  河崙은 태종 11년에 일어난 李穡의 묘지명 사건으로 인해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당시 河崙과 권근이 李穡을 위해 쓴 行狀(행장)과 묘지명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을 무함해 죄를 씌워 극형을 가하고자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臺諫(대간)들은 이를 꼬투리 삼아 河崙이 太祖 李成桂를 비난한 것이라고 탄핵하고 나섰다. 당시 권근은 태종 9년 이미 사망한 까닭에 이는 河崙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대간들은 河崙과 권근이 李穡·鄭夢周를 붙좇은 「大不敬罪(대불경죄)」를 저질렀다며 즉각적인 처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河崙은 네 번이나 상소를 올려 자신이 지목한 「공을 꺼리는 자」는 太祖가 아니라 鄭道傳이라고 적극 변명하고 나섰다. 太宗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이 사건은 급반전되어 오히려 개국공신인 鄭道傳과 남은 등을 처벌하는 문제로 변질되었다. 이에 이미 죽은 鄭道傳은 폐서인이 되고 그의 자손 또한 禁錮(관직임용을 금함)에 처해지게 되었다.
 
  당시 조선 개국을 주도한 鄭道傳을 비난하는 것은 자칫 李成桂까지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컸다. 이때 河崙은 「創業(창업)과 守成(수성)의 논리가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太宗을 설득했다.
 
  太宗이 이를 받아들이자 李穡과 鄭夢周는 조선조 내내 節義(절의)를 지킨 충신으로 숭앙받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게 되었다. 이에 鄭夢周에게 「文忠(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河崙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 遺策이 없었다』
 
  河崙은 태종 16년(1416) 봄에 이르러 나이 70세가 되자 致仕(치사: 은퇴)를 청했다. 太宗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다가 마침내 이를 허락했다. 河崙은 치사한 이해 12월 諸山陵考證使(제산릉고증사)를 자청해 朔北(삭북)에 있는 陵寢(능침)을 돌보던 중 턱 위 오른쪽에 종기가 나 자리에 눕게 되었다. 태종이 급히 內醫(내의)를 보내 그의 병을 돌보게 했으나, 그는 종기가 온몸으로 번져 이내 죽고 말았다.
 
  「태종실록」을 지은 史官은 그의 卒記(졸기)에서 그를 이같이 평해 놓았다.
 
  『河崙은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大體(대체)를 살리고 아름다운 謀策(모책)을 올린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 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하나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다. 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못 미칠까 두려워한 듯이 하였고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머물 때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히 휘파람을 불고 時를 읊으며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太宗과 河崙의 만남은 마치 春秋시대의 齊桓公과 管仲의 만남에 비유할 만했다. 河崙은 太宗과의 만남을 이같이 말했다.
 
  『위에는 마음을 극진히 하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마음을 극진히 하는 신하가 있으니 이러한 君臣이 서로 만나기는 예로부터 쉽지 않았다』
 
  太宗 또한 河崙이 죽었을 때 정인지를 보내 그의 죽음을 이같이 애도했다.
 
  『경은 뛰어난 자질로 잘 도모하고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 遺策(유책)이 없었다. 한결같은 德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나라를 보호하고 다스렸으니 哲人(철인)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후 대사에 임해 大疑(대의)를 결단하여 국가를 반석 위에 둘 사람으로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河崙이 「변절」한 뒤 「거사」를 성사시켜 추진한 일련의 「개혁」을 추진한 것은 개국 당시의 조선조가 처한 시대상을 정확히 판독한 위에 나온 卓異(탁이)한 경세철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河崙에 대한 평가는 조선조 500년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와 직결돼 있다. 조선 개국의 의미와 배경 등을 연구할 때 鄭道傳과 더불어 반드시 河崙을 검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하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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