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도)

[스크랩] [전북 완주]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선생 묘소-명나라 사신 朱之蕃 소점

장안봉(微山) 2012. 12. 20. 14:53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

 

1556(명종 11)∼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叟), 호는 표옹(瓢翁)ㆍ일호(一瓠)ㆍ백련거사(白蓮居士). 세웅(世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억수(億壽)이고, 아버지는 영(翎)이다. 어머니는 사온서영(司醞署令) 하세준(河世濬)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4년(선조 17) 유학으로서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ㆍ사과(司果)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완산에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9년 충청도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조정랑ㆍ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ㆍ사간원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ㆍ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곧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으로『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1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 행사직(行司直)으로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했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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