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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남 장성]효헌공 지지당 송흠(孝憲公 知止堂 宋欽)선생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20. 14:54

지지당 송흠(知止堂 宋欽)

본관()은 신평()이며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흠지(), 호()는 지지당() 혹은 관수정()이며 시호()는 효헌()이다. 1480년 사마시()를 거쳐 성종(, 재위 1469∼1494) 때인 14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연산군(, 재위 1494∼1506)의 폭정()을 비판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중종(, 재위 1506∼1544)이 즉위한 뒤인 1516년(중종 11) 홍문관() 정자()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며, 홍문관() 박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나이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오랜 기간 고향과 가까운 전라도()의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1528년 담양부사(使)가 된 뒤, 1531년 장흥부사(使)를 거쳐 전주부윤()이 되었다. 그리고 광주()와 나주()의 목사(使) 등을 거쳐 153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使)가 되었다. 하지만 98세가 된 노모()를 모시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01세까지 산 어머니를 지극히 섬겨 7차례나 효렴()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1538년에는 청백리()로 뽑혔으며, 한성부() 우윤(), 병조판서(), 우참찬() 등을 거쳐 1543년에는 종1품 판중추부사() 겸 경연지사()가 되었다.

송흠은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관수정()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면앙(俛) 송순(, 1493~1583)과 학포() 양팽손(, 1488~1545) 등이 그의 문하()이다. 1543년(중종 38년) 전라도 관찰사였던 송인수(, 1487~1547)는 중종의 명을 받아 장성의 삼계면() 사창리()에 송흠을 위해 기영정()을 세웠다. 송흠은 죽은 뒤 고향인 삼계면에 묻혔으며 수강사()에 배향()되었다.

송흠은 젊어서 최부(, 1454~1504)와 가까이 지냈는데, 송흠이 역마()를 타고 최부의 집을 찾아가자 사사로운 일에 어찌 역마를 이용하느냐고 질책을 받고 몹시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때의 교훈 때문인지 그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임지()로 가거나 떠날 때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하여 검소하게 행차해 삼마태수()라고 불렸다. 당시 조선에서는 관직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역마의 수를 법으로 정해 놓고 있었는데, 부사(使)의 경우에는 짐을 운반하는 태마(駄) 1필을 포함하여 모두 7필 정도의 말을 쓸 수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관은 7∼8필 이상의 말을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부임하기 일쑤였지만, 송흠은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하여 검소하게 행차했으며 짐도 단출하였다. 이로써 그는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한 관리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삼마태수'는 청백리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98세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전라도 관찰사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3년 동안 늘 곁에 머물며 정성껏 받들었다고 전해진다. 

[출처] 송흠 [宋欽 ] | 네이버 백과사전

 

 

 묘소 가는길

 지지당 송흠 묘소 전경

 

 지지당 송흠 묘소 전경

 

 

 

 

 

 

 

 

 

 

 

 

 

 

 송붕표 묘소 전경

 

 

 

 묘소에서 바라본 재실과 관수정 전경

 

 

 지지당 송흠선생 신도비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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