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당 송흠(知止堂 宋欽)
본관(本貫)은 신평(新平)이며 전라도(全羅道) 장성(長城)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흠지(欽之), 호(號)는 지지당(知止堂) 혹은 관수정(觀水亭)이며 시호(諡號)는 효헌(孝憲)이다. 1480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인 1492년 식년문과(式年科)에 급제하였고,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의 폭정(暴政)을 비판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이 즉위한 뒤인 1516년(중종 11)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며, 홍문관(弘文館) 박사(博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나이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오랜 기간 고향과 가까운 전라도(全羅道)의 외직(外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1528년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된 뒤, 1531년 장흥부사(長興府使)를 거쳐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그리고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의 목사(牧使) 등을 거쳐 153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하지만 98세가 된 노모(老母)를 모시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01세까지 산 어머니를 지극히 섬겨 7차례나 효렴(孝廉)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1538년에는 청백리(淸白吏)로 뽑혔으며,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병조판서(兵曹判書), 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1543년에는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경연지사(經筵知事)가 되었다.
송흠은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관수정(觀水亭)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면앙(俛仰) 송순(宋純, 1493~1583)과 학포(學圃) 양팽손(梁彭遜, 1488~1545) 등이 그의 문하(門下)이다. 1543년(중종 38년) 전라도 관찰사였던 송인수(宋麟壽, 1487~1547)는 중종의 명을 받아 장성의 삼계면(森溪面) 사창리(社倉里)에 송흠을 위해 기영정(耆英亭)을 세웠다. 송흠은 죽은 뒤 고향인 삼계면에 묻혔으며 수강사(壽岡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송흠은 젊어서 최부(崔溥, 1454~1504)와 가까이 지냈는데, 송흠이 역마(驛馬)를 타고 최부의 집을 찾아가자 사사로운 일에 어찌 역마를 이용하느냐고 질책을 받고 몹시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때의 교훈 때문인지 그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임지(任地)로 가거나 떠날 때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하여 검소하게 행차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렸다. 당시 조선에서는 관직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역마의 수를 법으로 정해 놓고 있었는데, 부사(府使)의 경우에는 짐을 운반하는 태마(駄馬) 1필을 포함하여 모두 7필 정도의 말을 쓸 수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관은 7∼8필 이상의 말을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부임하기 일쑤였지만, 송흠은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하여 검소하게 행차했으며 짐도 단출하였다. 이로써 그는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한 관리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삼마태수'는 청백리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98세의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기 위해 전라도 관찰사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3년 동안 늘 곁에 머물며 정성껏 받들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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