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장이란 조상의 분묘 위쪽에 후손의 분묘를 쓰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압장壓葬, 압장押葬, 도장倒葬이라고도 하는데
분묘의 뇌후腦後, 즉,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에 후손을 매장하는 형태이다
이 역장은 조선시대에 금기시 되었던 매장 형태 중 하나였다.
主山에서 혈穴로 내려오는 氣의 흐름을 단절하는 가장 나쁜 형태의 매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 이전에는 오히려 여러 유명한 인물들에게서 이 역장을 발견 할 수 있다.
즉, 예학의 거두 사계 김장생, 대학자 율곡 이이, 역시 대학자 우계 성혼 등등이
바로 이 역장 형태로 분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들이 역장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였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런 분들은 풍수에도 조예가 깊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이유는 바로 "주자성리학적 사회질서의 보급 여하"였다.
주자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일반, 구석구석까지 퍼졌느냐, 아니냐가 이 문제의 본질이다.
사실 역장은 풍수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정작 오래된 풍수책에는 이 역장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간혹가다 풍수상의 이유로 역장을 쓰는 경우는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이정구의 경우 묘를 순차적으로 쓸 경우,
후손 중 역적이 나온다는 말에 따라 역장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지리에 따른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아무런 문제 없이 역장을 행했던 것인데....,
이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성리학적 질서가 보급된 후인 17세기 중엽 이후이다.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출발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효종 대 이전까지 성리학의 이념은 아직 정착되지 못했었다.
오죽했으며 퇴계 선생이 혼자된 며느리에게 재가를 권유했겠는가...
이렇듯 조선 전반기에는 전대의 유풍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윤회봉사(아들, 딸이 돌아가며 제사 지내는 것), 재산의 균등 상속, 외손자의 제사 봉사,
딸, 사위, 외손의 선산 입장, 서자의 가계 계승.. 등등이 모두 허용되었다.
이러던 것이 어느덧 장남 만의 봉사,
아들에게만 재산 상속(그 중에서도 장남에게만 특히 많이 상속),
외손자의 제사 봉사는 어림도 없고,
서자가 있어도 이들은 가계를 계승하지도 못하고 제사를 받들지도 못할 뿐더러,
서자는 아무리 많아도 적자가 없으면 다른 곳에서 입양을 해와야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물론 외손, 딸, 사위의 선산 입장은 당연히 금지되어
선산은 종산이라 불리며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17세기 중반 이후의 조선의 상황이었다.
생소하던 외래의 이념은 어느덧 우리것화하여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조선성리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무렵을 전후로 조선에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종법질서가 발달하여,
종가의 개념이 생기고, 동족촌이 형성되는가하면, 선산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또 가문의 영광을 밝혀줄, 아들 중심의 족보(혹은 보학)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다 보니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묘소 위에
아들, 손자, 조카가 묘를 쓰는 것이 무엄하기 그지없는 고얀 놈의 짓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성리학적 종법질서가, 역으로 풍수상의 금기사항으로 채택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장의 형태는 위에서 언급한 위인들 외에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이후에는 모두 사리지고 있어 주목이 된다.
역시 성리학적 종법질서의 영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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