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새 나라,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1392년 새 도읍지로 한양(서울의 옛지명)을 선택했다.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함은 당시의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것으로 그에 따른 도시계획 또한 철저히 진행되었다. 한양의 지형과 지세에 맞게 도시가 계획된 것이다. 주궁인 경복궁은 현무(북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한 짐승, 거북과 뱀이 뭉친 모양)에 해당하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백호(서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한 짐승, 범)인 인왕산, 주작(남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한 짐승, 붉은 봉황)인 목멱산(남산), 청룡(동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한 짐승)인 낙산, 이 네 개의 산에 둘러싸인 곳에 터를 잡아왔다.
한양에서는 신분에 따라 사는 곳이 달랐다. 동네를 구분하여 세력이 있는 사람들은 북촌에,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남촌에, 그리고 상인 계급은 종로 변에, 그리고 성곽의 바깥 지역은 농사짓는 마을로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 예로부터 도시를 형성하는 기본 원칙으로 좌측에는 국가의 제례를 관장하는 종묘를 그리고 우측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되어왔다. 조선의 수도인 서울 역시 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경복궁의 좌측에는 종묘를 건축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동지가 되면 매년 다섯 차례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었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다.
조선 제일의 궁궐은 경복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가장 먼저 축조한 궁궐이 바로 경복궁이다. 조선시대 제일의 궁궐인 경복궁은 서울의 주산인 백악에 안겨있다. 경복궁의 서쪽에는 인왕산이 솟아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하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고 한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서로 다른 별개의 궁이면서도 하나로 합쳐진 궁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궁을 합하여 동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서울의 동쪽인 응봉 자락에 위치한다. 창덕궁은 응봉에서 흘러내리는 산자락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동편에는 창경궁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서쪽에 위치한 궁궐이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또 다른 궁궐인 덕수궁(경운궁)과 함께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다. 현재의 경희궁은 궁궐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궁궐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궁궐이 바로 덕수궁이다.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인데, 다른 궁과는 달리 시내에 위치한 것 같지만 실제는 낮은 산자락에 위치한 궁이다. 산자락이 너무 낮고 현재는 건물과 길로 눌리고 끊어져 있어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왕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렇다면 궁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바로 조선의 역대 왕들이 궁궐의 주인이었다. 왕에 따라 궁궐을 새로 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처를 선왕이 살던 궁에서 다른 궁으로 옮기기도 했다. 각 시기마다 궁궐의 주인은 당시의 국왕이었다.
조선의 왕은 조선의 주권자요 통치자였다. 궁궐은 그러한 국왕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궁궐은 국왕의 사적인 주거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고의 통치자인 국왕이 거의 모든 공적인 활동을 하던 곳이 바로 궁궐인 것이다. 국왕이 들어가 거처하는 궁궐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 이라 하였다.
국왕이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법궁 하나만 있어서는 불안했다. 불이 나거나 궁궐에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을 때 또는 어떤 특정한 사유로 인해 왕이 거처를 옮길 이유가 생길 경우 옮겨갈 궁이 필요했다. 그럴 때 대비해 마련한 궁이 바로 ‘이궁’ 이다.
왕과 왕실이 거처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대로 사용하는 궁을 ‘별궁’ 이라고 한다. 별궁 외에도 왕을 위한 궁은 더 필요했다. 왕이 왕릉을 행차할때 하루에 다녀올 수가 없을 때 행로에 하루나 며칠 묵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이런 경우를 위하여 두 세 채의 궁을 두었는데 이러한 역할을 하는 궁을 ‘행궁’ 이라 하였다.
그런데 왕이 사는 집에만 ‘궁’ 자가 붙는 것은 아니었다. 왕의 아버지가 사는 집을 궁으로 격상 시키기도 했다. 왕실 가족 가운데 왕의 아버지 정도의 격을 가진 사람의 집도 궁이라고 한 것이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살던 집인 운현궁이 대표적인 예이다. 운현궁은 현재도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궁궐 구성의 원칙적인 구성이 <오문삼조>였다. 궁궐은 궁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내부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각 구역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다섯 개의 문들이 배열되어 있다. 이 다섯 문 안에 ‘외조, 치조, 연조’ 라는 세 조정이 있어 <오문삼조>라는 궁의 공간구조가 형성된다.
왕이 신하를 만나는 곳 - 외전
외전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는 공간이다. 외전 중 핵심이 되는 공간이 바로 정전이다. 정전은 궁궐에서 외형상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공간으로 조정의 조회와 사신의 응대, 각종 잔치를 벌이는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이다.
궁궐의 큰 행사가 열렸던 - 정전
정전은 궁궐에서 가장 큰 행사가 열리던 곳이다. 새로운 임금의 즉위식이라던가, 외국의 중요한 사신이 와서 임금님께 인사를 하던 곳이다. 정전에서는 한 달에 네 번 정도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조회를 하기도 했다.
임금님이 일하던 곳 - 편전
임금님이 공부도 하고 신하들과 회의도 나누던 곳이 편전이다. 편전에서 있었던 회의는 그 내용이 모두 글로 기록되어 있다.
궁의 중앙에 위치한 내전은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과 일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위치만 궁의 중앙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궁의 핵심을 이루는 기능도 하였다. 내전은 크게 보아 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된다. 대전은 왕이 기거하는 공간이며, 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고 활동하는 공간이다.
침전 - 임금님이 잠을 자던 공간
중궁전 -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공간
왕비가 머물던 곳으로, 중전 또는 중궁이라고 부른다. 왕비는 궐내 모든 여인을 다스리는 일도 하였다.
대비전 - 임금님의 웃어른이 사는 곳
임금님에게도 효도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임금님의 어머님이나 웃어른들이 사는 곳을 대비전이라 하였다.
동궁은 왕위의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공간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내전의 동편에 그 처소를 마련했는데 그 이유는 세자를 ‘떠오르는 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궁에는 왕과 왕의 가족들을 시중드는 내시, 궁녀, 노복, 군병들이 많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먹고, 자고, 활동하는 공간이 바로 생활주거공간이다. 생활주거공간은 내전의 뒤편에 위치한다.
궁궐의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후원은 왕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의 휴식공간이다. 후원은 산골짜기, 연못, 아담한 정자 등이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후원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으며, 종친 모임과 같은 대규모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여러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서들을 이르는 말이다. 궐내각사에는 정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경비와 호위 등 군사 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왕실 시중과 궁궐의 시설 관리를 맡는 관리기구 등이 있다. 주요 기구로는 정승, 판서 등 고위 관리들의 회의 공간인 빈청,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들어와 인사 업무를 처리하는 정청,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언론 활동을 논의하고 준비하는 대청,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들의 관서인 승정원, 학문을 도야하여 왕의 주문에 대응하고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토론하는 홍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예문관, 실록 편찬 등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등이 있다.
궐외각사는 말 그대로 궁궐의 정문 앞 또는 궁궐과 가까운 곳에 설치된 관서들을 이르는 말이다. 경복궁의 경우 정문인 광화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 관료기구의 중추를 이루는 관서 건물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뒤로는 산이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자리를 배산임수라 한다.
배산임수는 명당자리의 기준이다. 실제로 경복궁의 경우 뒤로는 백악산과 응봉산이 감싸고 있고, 앞에는 청계천이 흐른다.
궁궐을 바라보면서 왼쪽에는 사직단이, 오른쪽에는 종묘가 있어야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은 왕실의 사당인 ‘종묘’와 토지의 신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왕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궁궐은 왕실의 존엄성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화려하게 건축되었다. 중국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아왔던 것과 같이 조선시대의 궁궐 조성 역시 중국의 궁궐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정사를 돌보는 공간,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과 이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 정원 공간 등 3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궐에는 여러 건물이 있는데 크기와 격에 따라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으로 구분한다. ‘전당합각재헌루정’은 품격이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가는 순서이며 건물들의 신분과 위계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공포를 기둥위와 기둥사이에도 꾸며 놓은 집. 갖은포집
'풍수지리(형세론과형국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풍수학에 동기감응론이란? (0) | 2013.04.17 |
---|---|
[스크랩] *** 朝鮮王의 諡號 分析 ~~~ (0) | 2013.04.17 |
[스크랩] 고향의 소리를 찾아서 (0) | 2013.04.17 |
[스크랩] 자연과 문물들의 슬라이드 감상 (0) | 2013.04.17 |
[스크랩]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이성계(李成桂) (0) | 2013.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