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서원 百原書院에 인재 선조님과 함께 배향 되신 모암 김덕숭, 송애 한산 이 여 선조, 행원 고성 이 부 중의 한분이신
모암 선생에 대한 글입니다 모암선생은 인재 선조님으로 부터 글을 배우셨고 총제공 의 부인이신 강릉 김씨 할머니와 자매간이시기도 하며 부父는 병.공 판서. 한성판윤 김천익 조祖는 충절공 김사혁 이시다
김덕숭
- 공의 호는 모암으로 1373년에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서 탄생하였다.
-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할 때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글이 나오면 몇 번이든지 되풀이하여 읽었으며, 특히 효경을 좋아하였다.
- 1401년에 목천 현감으로 있을 때 군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기 모두 편안하게 지냈다. 1404년에 부모 봉양을 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집으로 와서 있었다. 1403년에 사헌부 집의의 벼슬을 하였으며 1419년에 온양 군수 1426년에 한산군수로 나갔다. 1427년에 공의 나이가 55세였고, 아버지는 78세, 어머니는 77세였다. 벼슬길에 있었기에 부모 봉양을 하기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꿩고기, 어머니는 물고기를 좋아하셨기에 날마다 산에 가서 사냥을 하고 냇가에 나가서 고기잡이로 재미를 삼았다.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마음에서이다. 언제나 부모 생일이 되면 이웃에 있는 노인을 청하고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장수하기를 빌면서 술잔을 올리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러워 하였다. 근동네 사는 사람들 중에서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들 공의 덕을 본받아서 이름 높은 학자도 있었고, 한문의 깊은 뜻을 깨우친 사람도 90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 1421년에 공의 나이 59세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물고기 생각이 난다고 했다. 때는 엄동설한 추운 때였다. 여계소로 나가서 보니 얼음이 얼어서 도저히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얼음 위에 굻어 앉아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무릎이 있는 곳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더니 조그마한 굴이 생겼다. 즉시 도끼로 쳐서 굴을 크게 만들었다. 다시 기도를 올렸다. 얼마 뒤에 갑자기 잉어 두 마리가 튀어 나왔다. 매우 기뻐하면서 잉어를 들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끓여 드리었다. 또한 어느날 한 약구에 가서 약을 지으려 하니 약재료 3가지가 없다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약장수가 이에 감동하여 달려 왔다. 그는 한약방에 가지고 가서 약을 지은 뒤에 다려 드리어 어머니 병을 치료해 드렸다.
- 1434년 갑인 12월에 어머니가 작고하셨다. 정성껏 장례를 마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산소는 집에서 1km 정도 떨어져 아침 저녁으로 산소에 나가서 슬프게 곡을 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슬프게 하였다. 여묘를 사는 동안에도 아침 저녁으로 집에 와서 아버지께 문안을 드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른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 다니기가 어려울 터이니 말을 타고 다니라고 권하였지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어서 다니었다. 참으로 놀라운 정성이었다. 여묘를 살던 첫날밤에 범 두 마리가 와서 여막의 좌우에 앉아 지켜 주었는데, 낮에는 다른 곳으로 가고, 밤에는 와서 여막의 근방을 두루 살피었다. 3년상이 끝난 뒤에 가 버렸다고 한다. 동물까지도 공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
- 1436년 병진에 3년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부터 아버지 옆을 조금도 떠나지 아니하고 봉양에 정성을 다 하였다. 1437년에 장모 정씨를 모시고 왔는데 친어머니를 봉양한듯 하였다. 군내 유림들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세종 26년 1444년 72세때에 아버지는 95세였다. 세종임금께서 초정으로 오시게 되었다. 거기서 공의 효행이 지극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술20병, 말린 청어 50드름, 말린 돼지고기, 말린 노루고기 4마리, 말린 꿩고기30마리를 부모 봉양에 쓰라고 내리었다. 또 감사에게 명령하여 쌀 20가마를 보내라고 하였다. 하사품을 받은 공은 아버지를 모시고 행재소로 갔다. 그 곳에서 임금을 뵈었는데 부자분이 모두 머리가 백발이기에 누가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분별할구가 없어서 임금이 직접 물으시었다. 공은 즉시 이 어른이 아버지라고 아뢰자 모두들 놀래었다. 그 때 임금은 즉시 옷 한 벌씩을 하사하였다.
- 같은 해 7월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어머니 산소에 합장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잘 때에 요 이불을 덮지 아니하고, 밥을 금하고 죽만 들으며 초석 위에서 거처를 하기에 몸은 파리하고 곡을 할 때에 흘린 눈물은 하얀 수염에 묻어서 마르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초석위에서 자고 죽만 먹는 것은 장정도 어려운 일인데 70세가 넘어 몸이 쇠하였으니 자손에게 시키도록 하여달라고 하였지마는 듣지 않았다. 공은 그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를 땅에 모시고 자식된 도리에 어떻게 집에 가서 편안하게 지낼 수가 있겠는가 이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으며, 나이도 70세가 넘었으니 산소 옆에서 살다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였다. 새벽이 되면 일찍 일어나서 상옷을 입고 산소에 나가서 곡을 하였으며 해가 넘어가면 등불을 켜놓은 뒤에 밤이 새도록 끄지 않았다. 1446년 74세에 3년간 여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주를 모신 뒤에 아침 저녁으로 문안들 드렸고 초하루, 보름 날을 제사를 지내고 한식이나 칠석과 같은 명절에는 반드시 시식을 올렸다.
- 1448년 무진76새 4월에 감환으로 정침에서 고종하였다. 겨울에 진천 판사 송 기등 95인이 연명하여 현에 글을 내고 감사에게 보고하고 다시 조정에 글을 올리어 정려표묘의 은전을 입었다 자상한 이야기는 삼강행실도에 기록되어 있다. 또 임금이 직접 시를 지어서 내리었으니 "부모 봉야에 마음을 두었기에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에 평생을 바치었도다. 어머니 산소 옆에서 여묘를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을 드리고 나면 아버지께 와서 문안을 드리었도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다." 하였다. 또 한 수의 글뜻은 "아버지를 땅속에 장사 지냈으미 어떻게 집에 와서 있을 수가 있으리오. 70세가 넘어서 아버지 상을 당하였지마는 3년간 여묘를 살았도다. 평생을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니 묘소앞에 세운 비 정려문은 빛나기도 하여라." 라고 하였다. 대왕까지도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마지 않는 글이다. 이렇게 시를 지어서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였고, 특히 증직으로 이조참의를 내리었다. 이 사실을 중국 천자에게 글을 내었더니 천하대효라고 하여 유서를 내리었다.
- 1568년 무진에 평천부원군 신 잡과 회헌 이 정영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이월면 보현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다시 상소를 하여 윤혀를 받은 후에 백원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 참고 : 진천군지, 강능김씨
|
<강릉김씨>
강릉김씨는 김주원을 시조로 하고, 김사혁과 김천익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이다.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통일신라시대 선덕왕(宣德王) 시기에 시중(侍中)을 지낸 인물이다. 진천의 강릉김씨는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김사혁(金斯革)[1320~1385]과 그의 아들 김천익(金天益)을 입향조로 한다.
<뿌리>
시조 김주원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셋째 아들 김문주(金文注)의 현손이며, 각간(角干) 김유정(金惟靖)의 아들로서 혜공왕 때 시중을 지냈다. 785년 제37대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김주원을 후계자로 추대하였으나 큰 비로 알천(閼川)이 범람하여 미처 입궐하지 못하자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臣)으로 바꾸어 옹립하니 그가 38대 원성왕(元聖王)이다. 이에 왕위를 놓친 김주원은 후환이 따를까 염려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로 퇴거했다. 그러자 2년 후 조정에서는 그를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고 명주 등지를 식읍으로 내렸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강릉김씨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고려조에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은 문성공(文成公) 김인존(金仁存)[ ?~1127]이다. 그는 선종·헌종·숙종 3대를 섬겨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왕의 자문을 맡는 등 큰 구실을 했다. 조선조에서 강릉김씨는 영의정 1명, 문과 급제자 96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숙종~영조 대에 가장 많이 융성하였다. 특히 김인존의 16세손 김첨경(金添慶)[1525~1583]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김첨경은 사예(司藝) 김충정(金忠貞)의 아들로 선조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현손인 시(始)자 돌림의 여러 사촌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현달하였고, 그의 자손에서 판서급 인물이 많이 나와 강릉김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입향경위>
강릉김씨는 고려 우왕 때 김사혁이 아들 김천익과 함께 고려가 점점 무너지는 것을 한탄하며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로 이주하여 그 후손이 백곡면 석현리와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김천익의 아들 김덕숭(金德崇)[ ?~1448]의 효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김사혁의 묘가 백곡면 석현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김천익과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김귀성(金貴誠)의 묘가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 있다.
강릉김씨는 김사혁이 내주한 이후 총 206가구 51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와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2000년 현재 206호 524명이 진천군에 거주하고 있다.
<유적>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에 김사혁의 묘소와 유허비(遺墟碑), 그리고 절정지(節亭址)가 있다. 또한 1979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한성판윤을 지낸 김천익과 병조참판을 지낸 김귀성의 묘는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마을에는 김덕숭의 효자각이 있다. 김덕숭은 세종이 초정에 다녀갈 때 그 효행을 전해 듣고 곡식을 내리게 하였고, 사후 이조참의에 증직하고 어제시 3수를 내렸다. 후에 신잡(申磼)이 ‘백행지원(百行之源)’을 기리는 백원서원(百源書院)을 세우고 김덕숭을 배향하였다.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에 있는 고려 후기 강릉김씨 진천 입향조 김사혁을 기리는 비> 김사혁(金斯革)[1320~1385]은 강릉김씨 진천 입향조로, 호는 절정(節亭)이다. 1345년(충목왕 1) 음서로 대관서승(大官署丞)이 되어 관계에 입문한 이래 병부낭시중과 계금위 등을 거쳐 동북면행영절제부사로 홍건적을 물리쳤고, 이어서 전라도원수와 양광도병마대원수로 왜구를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말년에 석현리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아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건립경위>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31㎝, 너비 45.5㎝, 두께 21㎝의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가첨석을 올렸다.
비의 앞면에 ‘충절공김사혁선생절정유허비(忠節公金斯革先生節亭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김창경이 글을 짓고, 김응수가 글씨를 썼다.
근래에 세워진 비라 특별한 유물적 가치는 없으나, 진천 지역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강릉김씨 입향조라는 점과, 외세를 물리지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의 유허비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출처 : 하늘행복
글쓴이 : 하늘감사 원글보기
메모 :
'여행이야기(선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영덕 목은 문화재 (0) | 2013.04.16 |
|---|---|
| [스크랩] 牧隱 李穡先生의 生涯와 思想 (0) | 2013.04.16 |
| [스크랩] 이유당 휘 덕수德洙의 손자이시며 삼죽당 휘 홍연弘淵의 3자이신 휘 한림공 광직光稷 선조묘역 (0) | 2013.04.16 |
| [스크랩] 인재공 선조에 대하여 (0) | 2013.04.16 |
| [스크랩] 태조(太祖)이성계 사제문(賜祭文) (0) | 2013.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