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역대 강원도 관찰사 중 양경공 선조님의 약력

장안봉(微山) 2013. 4. 16. 11:58

강원도 관찰사 韓山(한산)이씨 선조님들 李種善(이종선)

 

中樞院使 이종선(李種善) 1368(공민왕 17)∼1438(세종 20)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부(慶夫). 증조할아버지는 자성(自成), 할아버지는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곡(穀)이고, 아버지는 색(穡)이며, 어머니는 명위장군(明威將軍)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사위이다.

1382년(우왕 8) 15세 때 문과에 급제해 좌랑·정랑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순창·배천·여흥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1)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일당으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떨어져 멀리 귀양갔다.

1396년 병조참의을 거쳐 1409년(태종 9) 좌우사간대부가 되었을 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해 시행되었다. 1411년 명나라의 진련(陳璉)에게 받은 아버지 색의 비명 문제로 동래 진으로 귀양갔다.

그 뒤 호조참의, 대언을 지내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 1418년(세종 즉위년) 10월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는데, 토지의 실지 검사가 맞지 않음을 아뢰어 감찰(監察)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다시 검사케 하였다. 1419(세종 1)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윤이 되었고, 1421년 우군 총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22년(세종4) 충청도관찰사, 1423년 진전사(進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4년 다시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진하사 도총제 권희달(權希達)의 문제로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었다.

1426년 함길도관찰사로 있다가 새 감사와 호부(虎符)를 인수인계 하는 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 해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다시 이듬 해 선위사J11963(宣慰使J11963)로 황주에 다녀왔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嘉禮色都監提調)로서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뽑는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승진되었고, 1438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여묘(廬墓) 살이를 해 효자로 일컬어졌으며,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浩亭集, 天海亭續稿, 燃藜室記述,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韻府群玉

   

《중추원 사 이종선의 졸기 》

 

세종 20/03/14(무술)

중추원 사 이종선(李種善)이 죽었다. 자는 경부(慶夫)이요, 한산이 본관이니, 이색(李穡)의 아들이다. 열다섯 살 되던 임술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벼슬이 여러 차례 옮겨져서 좌랑, 정랑을 지냈으며, 부친상을 당해서는 3년을 여묘(廬墓)하니 향당에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서 효자비(孝子碑)를 세우고 정문(旌門)까지 하였다. 외직은 순창(淳昌), 배천(白川), 여흥(驪興)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내직은 집의(執義), 사간(司諫), 참의(參議), 대언(代言)으로서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서 강원, 충청도 도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 윤이 되었고, 또 중군 총제로서 함길도 도관찰사로 있다가 판한성부사로 승진하여 다시 개성유후(開城留後)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한가하게 살면서 편케 지난 지가 거의 10년이었는데, 이 해에 중추원사로 제수되었으나 이때에 와서 죽었다. 나라에서 조상(弔喪)하고 부의와 제사를 내려 주고 시호를 양경(良景)이라 하였는데, 양아라는 뜻은 성품이 온량하여 화락하라는 것이고, 경이라는 뜻은 행실을 의리로서 행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다섯인데 이계치(李季田+寺), 이계린(李季疄), 이계전(李季甸), 이계원(李季畹), 이계정(李季町)이었다.

 

-------------------------------------------------------------------------------------------

이계린(1401~1455)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경(子耕)이고 본관은 한산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로, 지중추원사 종선(種善)의 아들이며 영중추부사 계전(季甸)의 형이다.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균(鈞)의 딸이다.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돈녕부판관, 동부승지,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 호조참판, 경상도관찰사,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력한 아우 계전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어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455년에는 좌찬성을 역임했다.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이계린(李季疄)에 대하여

이계린(李季疄)
1401(태종 1)∼1455(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경(子耕). 색(穡)의 손자로, 지중추원사 종선(種善)의 아들이며,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貞順公主)의 사위이다.
1416년(태종 16) 이로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을 제수받았다. 태종은 그가 젊어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마땅하지 않게 여겼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1436년(세종 18) 세종에 의하여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441년 형조참판이 되고, 다음해 경기도관찰사, 1444년 호조참판,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446년에는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다음해인 1447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어 각 지방의 사정을 살펴보고 계속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처참한 것을 보았다.
그는 백성 중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사람의 고기를 먹는 사례가 있다는 계문을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임금은 이와같은 해괴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동부승지였던 그의 아우 계전(季甸)에게 하명하였다.
이 조사가 시작되자 그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백강(李伯剛)의 하인 김간으로부터 들은 바를 계문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형조에서 김간을 문초하니 그는 조수명으로부터 들었고, 조수명은 다시 해주에 사는 복덕이가 자기집 울타리 밑에 어린이의 머리가 있었다는 말이 와전되어 계린에게 전달된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 황해도를 비롯한 각 지방에서는 굶어 죽은 자가 많아 인심이 흉흉하여 이러한 풍문이 났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는 풍문만을 믿고 사실여부를 확인하지 않아 많은 무리를 자아내어 파직되었다.
1449년 별시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 관직은 실직은 아니지만 이것을 계기로 다시 관직에 오르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같은해 개성유수, 1451년(문종 1) 지중추부사, 1453년(단종 1)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1454년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력한 아우 계전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졌다.
1455년 좌찬성이 되었다.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

 

  • 생몰년 : 1404-1459
  • 시대 : 조선
  • 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전기 > 문신
  • 이계전(李季甸)에 대하여

    이계전(李季甸)
    1404(태종 4)∼1459(세조 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병보(屛甫), 호는 존양재(存養齋). 색(穡)의 손자로, 종선(種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1427년(세종 9)에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학사가 되고, 1436년에 왕명으로 김문(金汶) 등과 《강목통감훈의 綱目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
    1445년 집현전직제학으로 있을 때에 세자(문종) 가 사창(社倉)과 의창(義倉) 등의 현황에 대하여 묻자, 그는 “근년의 계속된 가뭄 때문에 사창과 의창이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방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2, 3년만 계속된다면 국가에 비축곡이 고갈되니, 앞으로는 스스로 생계를 보존할 수 없는 백성에게만 지급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저화(楮貨)의 사용에 대하여 백성들의 불편이 많다는 점을 들고, 우리나라에서는 포목의 사용이 그 유래가 오래이고 불편이 없으니, 구태여 저화를 사용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시행중이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답험관의 정실에 의한 처리로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심해서 공법(貢法)을 제정하였던 것인데, 이를 계속 시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대간들이 한글의 제정·보급과 불교에 대한 종실·양반들의 호의적인 태도를 격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자, 세종의 진노를 사서 대간들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국문을 받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왕의 진노가 심하니 상소를 그만 단념하라고 만류하였으나, 그는 의금부에 하옥될 것을 각오하고 대간들의 언로를 막아서는 안된다고 계문(啓聞)하였다.
    1447년 동부승지를 제수받았고, 1450년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3개월 후에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1452년(문종 2)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인지(鄭麟趾) 등과 정난공신(靖難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같은해 호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조판서로 재임할 때 수양대군이 왕권강화를 위하여 육조직계체제(六曹直啓體制)를 부활하자 예조판서였던 하위지(河緯地) 등과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려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더욱 전제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출신의 학자가 중심이 되어 세조제거운동을 일으켰으나 이에 참여하지 않고 세조를 도왔다. 이 공로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녹훈되었다.
    1455년(세조 1) 이조판서를 제수받았고, 다음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7월에 그의 어머니가 죽자 조정에서는 미·두 30석과 종이 100권, 석회 40석과 관곽 등을 보내어 극진한 조의를 표하였다.
    1458년 세조가 그에게 특별히 교서를 내렸는데, 그 교서는 세조의 정권획득과정에서 보였던 협력과 사육신사건에 참여하지 않고 세조를 도운 공로에 대하여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이듬해인 1459년 7월에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9월에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宋正炫〉

    -------------------------------------------------------

    이계원[ 李季畹 ]
    왕/년도 : 세종(世宗) 16년. 과거시험연도 : 1434 갑인. 시험명 : 알성시(謁聖試). 등위 : 을과2(乙科2). 성명(姓名) : 이계원(李季畹). 본관(本貫) : 한산(韓山). 거주지(居住地) :...
    역사와 인물 >조선의 방목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세종(世宗) 16년
    과거시험연도 : 1434 갑인
    시험명 : 알성시(謁聖試)
    등위 : 을과2(乙科2)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계원(李季畹)
    본관(本貫) : 한산(韓山)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문소전직(文昭殿直)
    관직(官職) : 정언(正言)

    [가족사항]

    형(兄) : 이계전(李季甸)
    부(父) : 이종선(李種善)
    조부(祖父) : 이색(李穡)
    증조부(曾祖父) : 이곡(李穀)
    외조부(外祖父) : 권근(權近)
    처부(妻父) : 민소안(閔逍安)

    --------------------------

    이계정(李季町)에 대하여

     

    출처 : 하늘행복
    글쓴이 : 하늘감사(天感)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