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강원도 관찰사 약력

장안봉(微山) 2013. 4. 16. 11:58

 

2012 강원 감영문화제

일시 및 장소: 2012. 9. 22. 11:00 ~ 17:00 원주 따뚜 공연장

- 관찰사후손 만찬: 12:00 ~ 13:00 -관찰사 순력행차: 14:00~16:00

원주 시내 일원에서 2012년 9월22일에 강원감영문화제 행사의 하일라이트인 관찰사 순력행차 행사에 청주지역 한산 일가들께서 참석하시여 후손으로서 자랑스러운 우리 가문의 역대 관찰사 7분 (청주지역 목은 선조의 6대손 휘 언홍彦洪 선조님의 후손들이신 9대손 휘 덕수德洙, 10대손 홍연弘淵 11대손 만직萬稷선조님)의 깃발을 들고 관찰사 순력 행차에 참가 힐 예정입니다.

참고로 역대 관찰사중 한산이문 선조님들 8분의 강원도 관찰사 역임과 기타 자료는 아래 글 참조

 

강원도 관찰사 韓山(한산)이씨 선조님들

 

中樞院使 이종선(李種善) 1368(공민왕 17)∼1438(세종 20)

양경공 =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부(慶夫). 증조할아버지는 자성(自成), 할아버지는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곡(穀)이고, 아버지는 색(穡)이며, 어머니는 명위장군(明威將軍)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사위이다.

1382년(우왕 8) 15세 때 문과에 급제해 좌랑·정랑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순창·배천·여흥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1)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일당으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떨어져 멀리 귀양갔다.

1396년 병조참의을 거쳐 1409년(태종 9) 좌우사간대부가 되었을 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해 시행되었다. 1411년 명나라의 진련(陳璉)에게 받은 아버지 색의 비명 문제로 동래 진으로 귀양 갔다.

그 뒤 호조참의, 대언을 지내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 1418년(세종 즉위년) 10월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는데, 토지의 실지 검사가 맞지 않음을 아뢰어 감찰(監察)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다시 검사케 하였다. 1419(세종 1)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윤이 되었고, 1421년 우군 총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22년(세종4) 충청도관찰사, 1423년 진전사(進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4년 다시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진하사 도총제 권희달(權希達)의 문제로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었다.

1426년 함길도관찰사로 있다가 새 감사와 호부(虎符)를 인수인계 하는 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 해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다시 이듬 해 선위사(宣慰使J)로 황주에 다녀왔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嘉禮色都監提調)로서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뽑는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승진되었고, 1438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여묘(廬墓) 살이를 해 효자로 일컬어졌으며,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李 封(이 봉) 84代 성종05(1474) 1441~1493 강원도 관찰사

양경공 = 문열공 휘 “계전” 선조의 子로 호는 소은蘇隱, 우승지, 좌승지, 공조,이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황해도 관찰사, 호조판서, 영안도(함경도)관찰사, 한성판윤, 형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등을 두로 역임하셨다. 시호는 헌평憲平이시다. (부임연도가 성종6년으로도 기록도 보임)

 

(이 희) 195代 선조06(1573) 1522~1600 강원도 관찰사

양경공 = 문열공 휘 “계전”의 5대손으로 휘 “지란”의 子로 호는 송와松窩, 장령,수찬, 전한이 되시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 r,후 직제학, 좌승지, 우숭지, 강원감사, 양주목사, 장흥부사, 대사간, 부제학, 동지중추부사, 이조,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을 두루 역임, 청백리에 녹선 되시었고 영의정에 추증, 시호는 장정莊貞이시다.

 

李顯英(이현영) 266代 인조06(1628) 1573~1642 강원도 감사

父는 군수 대수大秀이시며 호는 창곡蒼谷, 쌍산雙山. 승문원, 평안도평사, 지평, 수찬, 교리, 지제교, 부수찬, 예빈시정, 병조참의, 대사간, 경기관찰사, 예.형조 참판 대사헌, 이조참판, 동지중추부사, 강원도 관찰사, 부제학, 도승지, 참찬관, 동지경연사, 대사헌, 예.형조 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 영의정에 추증되시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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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곡(蒼谷)·쌍산(雙山). 아버지는 군수 대수(大秀)이다. 1595년(선조 28)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평안도병마평사·정언·시강원사서·지평·함경도도사 등을 거쳐, 1609년(광해군 1) 수찬·헌납이 되었다. 이해 교동현감(喬桐縣監)으로 나가 있던 중, 이이첨(李爾瞻)이 그곳에 유배중이던 임해군(臨海君)을 암살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에 불응, 미움을 사 투옥되었다. 1611년 부수찬으로 기용되어 서흥부사(瑞興府使)를 거쳐 1619년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1621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대북파(大北派)의 전횡을 피해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에 등용되었으며 이후 예조와 형조의 참판, 부총관·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여 대사성이 되었으며, 화약(和約)이 성립되자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강원도관찰사·부제학·도승지·동지경연사 등을 역임했다. 1632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행호군(行護軍)으로 산릉도감도청(山陵都監道廳)을 겸했다. 이어 도총관·지의금부사·대사헌,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낸 후 사직하고 양주(楊州)에 우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용문산(龍門山)에 진을 치고 후금(後金)의 군사와 싸웠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조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사퇴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40년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대처했으며, 1642년 용골대가 다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선양(瀋陽)에 볼모로 잡아놓고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구하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선양의 봉황성(鳳凰城)에 갔다가 1개월간 감금되었다. 귀국 도중 평양에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李德洙(이덕수) 281代 인조20(1642) 1577~1645 강원도 감사 (실록에 있는 글을 인용)

인제공= 父는 휘 “도濤”이시며 일족인 현감 준浚에게 입양 되시고 호는 이유당怡愉堂,이시고 김장생의 문인이시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0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가 되었다가 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이 일어나자 장인인 조수륜(趙守倫)과 함께 연루되어 이산으로 유배되었으며 1618년에 창평으로 이배되었다가 1621년에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용(收用)되어 전적에 임명된 뒤 예조좌랑춘추관기주관지평을 지내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조정랑으로 체찰사이원익(李元翼)종사관이 되어 인조를 공주까지 호가하였다. 1632년 부수찬으로 왕세자 가례(嘉禮)에 공이 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634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강석기(姜碩期) 등과 인조의 사친(私親)인 원종(元宗)의 입묘(入廟) 논의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연산에 귀양 갔다가 1636년에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로 관서 지방에 무재(武才) 시험관으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득이 돌아오지 못하고 영북(嶺北)으로 향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고 격려하다가 이듬해 돌아와 승지가 되었다. 그뒤 이조·형조참의와 여러 차례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호란 후 청나라의 갖은 횡포가 심하자, 표면상으로 그들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641년 한때 강원감사로 나갔다 돌아와 이조참의로 있다가 죽었다.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청주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 되었다.

 

李弘淵(이홍연) 303代 현종02(1661) 1604~1683 강원도 감사 (실록에 있는 글을 인용함)

인제공 =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 1636년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퇴, 뒤에 세마(洗馬)를 거쳐 시직(侍直)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왕세자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이듬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이 되어 조의(朝議)를 뿌리치고 조석윤(趙錫胤)과 함께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여 갑자기 귀양보내게 하였다. 효종즉위 후 좌승지·황해감사·대사간·예조참의·병조참의·형조참의 등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도승지에 올랐다.

이해 김수항(金壽恒)을 변호하다가 삭직, 이듬해 다시 서용되었고, 1680년 의금부당상관으로 경신대출척의 옥사를 다스려 허목(許穆) 등을 숙청하였다.

그뒤 다시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내고 좌참찬으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재 산소는 이장하여 묵방리 선영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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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한산(韓山). 증조할아버지는 이소(李沼)이고, 할아버지는 이준(李浚)이며,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이덕수(李德洙)이다. 어머니는 조씨이다.

 

 

[활동사항]

이홍연(李弘淵)[1604~1683]은 조희일(趙希逸)과 정홍명(鄭弘溟), 기옹(畸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4)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를 거쳐 시직(侍直)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왕세자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이듬해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원사간이 되어 조의(朝議)를 뿌리치고 조석윤(趙錫胤)과 함께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여 간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54년(효종 5) 지금의 구로 지역을 포괄하던 부평부사로 재직하였을 때 백성의 송사를 잘못하여 유배당하였다가 풀려나 승정원좌승지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58년(효종 9) 사간원대사간과 예조·병조·형조의 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회양부사(淮陽府使)와 서천군수(舒川郡守)를 지냈다.

 

1670년(현종 11) 충청도관찰사에 이어 사간원대사간과 호조참의, 승정원의 승지를 거쳐 1673년(현종 14) 형조참판에 오르고 이어 사간원대사간과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75년(숙종 1) 사간원대사간으로 특진관(特進官)을 겸직한 후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서인(西人)이 실각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변호하다가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서용되었다.

 

1680년(숙종 6) 의금부당상관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옥사를 다스려 허목(許穆) 등을 숙청하였다. 다시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내고 의정부좌참찬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9년조 기사에 이홍연의 졸기(卒記)가 실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좌참찬(左參贊) 이홍연이 졸(卒)하였다. 이홍연은 세벌(世閥)에서 출생하였는데 사람됨이 매우 공평무사(公平無私)하지 못하였다. 젊어서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되었을 적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인질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병을 핑계대고 수가(隨駕)하지 아니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이 때문에 청직(淸職)의 선발에는 뽑히지 못하였다가 후에 사간원대사간과 방백(方伯)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해에 나이 80세가 찼으므로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관계(官階)에 초배(超拜)되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卒)하였다.”

 

 

 

李萬稷(이만직) 387代 영조01(1725) 1654~1727 강원도 감사

인제공 = 1654년(효종 5)∼1727년(영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장(子長).목은(牧隱)이색(李穡)의 11세손이다.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덕사(李德泗)이고, 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가선대부(嘉善大夫) 이태연(李泰淵)이다.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관찰사 유경집(柳敬輯)의 딸이다.

일찍이 충정공(忠正公)이세백(李世白)이 그를 일러 “이공은 나라의 그릇이다. 어찌 그로 음직(蔭職)에 묻혀 평범한 자들로 앞서게 하겠는가!”라는 말을 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다고 전하나, 관직에 나가게 된 것은 1699년(숙종 25)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면서부터이다.

처음 후릉참봉(厚陵參奉)에 보임되었다가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으로 전직되었다. 그 뒤 선친의 발탁으로 도감랑(都監郞)이 되었다.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감찰(監察),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역임했다.

외직으로는 임피현령(臨陂縣令), 영천군수(永川郡守),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재직했으며,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는 선혜랑(宣惠郞)이 되었는데, 곧 다시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선혜청의 사정으로 유임되었다. 후에 다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가, 원주목사(原州牧使)와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쳤다. 지방관으로 나가있을 때, 많은 선정을 베풀어 두터운 인망을 얻었다고 전한다.

말년에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판결사(判決事)형조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1727년(영조 3) 11월 28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주(公州) 줄동(茁洞)에 장사지냈는데, 부인 정씨와 합장하였다.

 

李謙在(이겸재) 482代 철종00(1849) 1800~1863 강원도 관찰사

부: 휘 희갑, 조부: 휘 태영, 증조부: 산중

 

[문과] 순조(純祖) 27년(1827) 정해(丁亥)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위

철종 5년(1854년)11월5일 이겸재를 이조참판으로 김병덕을 이조참의로 서대순을 한성부 우윤으로 삼았다.

 

[음관] 음관(蔭官)

[지방관] 충청도(忠淸道) 충청감사(忠淸監司) 관찰사(觀察使) 1855[을묘(乙卯)] 10월(十月)

[지방관] 평안도(平安道) 평안감사(平安監司) 관찰사(觀察使) 1863[계해(癸亥)] 1월(正月)

 

 

양경공, 감사공의 후손이며, 아버님은 참판(종2품) 태영이시고, 아드님은 형조판서 (정2품) 승순이시다 철종00(1849)년에 강원관찰사 역임하시고 63세의 수를 하셨다.

 

정헌공 (참판(종2품) 이태영의아들) 이겸재[李謙在]예조판서 정2품

이승순[李承純] 형조판서 정2품 (예조판서(정2품) 이겸재의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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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樞院使 이종선(李種善) 1368(공민왕 17)∼1438(세종 20)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부(慶夫). 증조할아버지는 자성(自成), 할아버지는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곡(穀)이고, 아버지는 색(穡)이며, 어머니는 명위장군(明威將軍)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사위이다.

1382년(우왕 8) 15세 때 문과에 급제해 좌랑·정랑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순창·배천·여흥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1)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일당으로 몰려 서인(庶人)으로 떨어져 멀리 귀양갔다.

1396년 병조참의을 거쳐 1409년(태종 9) 좌우사간대부가 되었을 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해 시행되었다. 1411년 명나라의 진련(陳璉)에게 받은 아버지 색의 비명 문제로 동래 진으로 귀양갔다.

그 뒤 호조참의, 대언을 지내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 1418년(세종 즉위년) 10월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는데, 토지의 실지 검사가 맞지 않음을 아뢰어 감찰(監察)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다시 검사케 하였다. 1419(세종 1)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윤이 되었고, 1421년 우군 총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22년(세종4) 충청도관찰사, 1423년 진전사(進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4년 다시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진하사 도총제 권희달(權希達)의 문제로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었다.

1426년 함길도관찰사로 있다가 새 감사와 호부(虎符)를 인수인계 하는 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 해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다시 이듬 해 선위사J11963(宣慰使J11963)로 황주에 다녀왔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嘉禮色都監提調)로서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뽑는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승진되었고, 1438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여묘(廬墓) 살이를 해 효자로 일컬어졌으며,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浩亭集, 天海亭續稿, 燃藜室記述,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韻府群玉 

 

《중추원 사 이종선의 졸기 》

 

세종 20/03/14(무술)

중추원 사 이종선(李種善)이 죽었다. 자는 경부(慶夫)이요, 한산이 본관이니, 이색(李穡)의 아들이다. 열다섯 살 되던 임술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벼슬이 여러 차례 옮겨져서 좌랑, 정랑을 지냈으며, 부친상을 당해서는 3년을 여묘(廬墓)하니 향당에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서 효자비(孝子碑)를 세우고 정문(旌門)까지 하였다. 외직은 순창(淳昌), 배천(白川), 여흥(驪興)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내직은 집의(執義), 사간(司諫), 참의(參議), 대언(代言)으로서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서 강원, 충청도 도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 윤이 되었고, 또 중군 총제로서 함길도 도관찰사로 있다가 판한성부사로 승진하여 다시 개성유후(開城留後)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한가하게 살면서 편케 지난 지가 거의 10년이었는데, 이 해에 중추원사로 제수되었으나 이때에 와서 죽었다. 나라에서 조상(弔喪)하고 부의와 제사를 내려 주고 시호를 양경(良景)이라 하였는데, 양아라는 뜻은 성품이 온량하여 화락하라는 것이고, 경이라는 뜻은 행실을 의리로서 행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다섯인데 이계치(李季田+寺), 이계린(李季疄), 이계전(李季甸), 이계원(李季畹), 이계정(李季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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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늘행복
글쓴이 : 하늘감사(天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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