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조의 멋과 풍류>
목은(牧隱)선생의 회고가(懷古歌)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난 어내 곳에 픠였난고.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시조가 ≪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있다.
잔설이 남아 있는 골자기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퇴계가 운명하면서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씀을 했다고 하듯이 매화를 그리워하는 선비가 있는 그림엽서나 한 폭 동양화가 연상 될 수도 있다.
▲ 여주 향토사료관의 목은 시비
쉬운 현대의 말로 옮겨도 다를 바가 없다
흰 눈이 많이 내린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기도 하구나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 있는 몸, 갈 곳 몰라 하노라
그러나 시대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2. 매듭을 풀면
시어(詩語) 가운데 ‘백설’은 ‘흰 눈’으로 고려에 남아 있는 신하를 비유하는 말이다. ‘자자진 골’은 ‘점점 녹아 없어지게 된 골짜기’를 이른다. ‘구루미’ 는 ‘구름이’ 이고, 신흥 세력을 비유하는 말이다.
‘머흐레라’는 ‘험악하구나’ 이며, ‘반가온’ 은 ‘반가운’ 이다. ‘매화’는 지조, 충성, 정열 등의 특성을 갖는 꽃으로 우국지사(憂國之士)를 비유하는 말이다. ‘어내’는 ‘어느’ 이고, ‘석양’은 해 질 무렵인데. 기울어진 고려의 국운(國運)을 비유한다. ‘셔 이셔’는 ‘서서’라고 푼다.
고려 멸망을 한탄하는 선비의 우국충정이 담긴 시조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가운데 일단의 신흥세력이 야망을 키우고 있을 때이다. 이런 때를 맞아 고려를 지킬 우국지사들은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움추려 들어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우의적으로 표현했다.
3. 려말 삼은(麗末 三隱)
이색(李穡 : 1328∼1396)은 고려 말의 문신이며 학자다.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찬성사 곡(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며 삼은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 억제 등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왕에게 올렸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했다.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원 제국의 과거시험인 제과에서 장원을 한 것은 어려서 한어를 배웠고 청년기에 원제국의 도읍인 대도에 유학을 하여 가능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 이곡(1298~1351)은 20대 초반에 고려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30세에 원나라의 제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6세인 1333년 다시 도전해 합격하였다. 순탄한 관리생활이 40세인 1337년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의 관리로 임명되어 귀국하였다. 1341년 원으로 다시가 6년간 대도에서 활동하고. 54세로 고려에서 사망할 때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이었다. 이곡은 ‘사나이는 모름지기 황제의 도읍에서 벼슬해야 한다’는 내용의 시를 보내 목은을 격려하는 등 고려와 원의 관직생활이 목은이 원나라 과거에도 장원을 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 지제교 겸예문응교 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고 이듬 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 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했다.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졌지만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타협하면서 성장해 갔다. 그런 예가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시행 등에서 들어난다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1365년 신돈의 개혁정치에서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되고 1375년(우왕l)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고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성리학자로 불교를 선호하고 긍정하였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켰고 1388년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급격한 전제개혁이러고 반대하였다. 그는 위화도회군은 왕명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하여 회군을 단행한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 함창(咸昌)에 안치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고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별세하였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 이색영정 - 보물 제1215호(출처: 문화재청)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는 묘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기린하전(麒麟下田)에 묻혔다고 하며 산소자리는 무학대사가 점지한 것이라 한다. 신도비는 하륜(河崙), 음기(陰記)는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김수항(金壽恒)이 전(篆)을 하여 1666년(현종 7)에 세웠다
4. 전해오는 영정(影幀)들
목은 영정은 현재 전국에 여러 폭이 전하고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한 목은영당(牧隱影堂)본 2점(대본 : 세로 150㎝, 가로 81.6㎝. 소본 : 세로 25.8㎝, 가로 25㎝), 누산영당(樓山影堂)본 1점(세로 143㎝, 가로 82.5㎝), 대전영당(大田影堂)본 1점(세로 150㎝, 가로 85㎝), 영모영당(永慕影堂)본 1점 등이다. 이색영정 5점은 모두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초상화가 드문 현 실정에 있어서, 당시의 초상화법과 양식을 여실히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보물 제1215호로 지정되었다.
△ 목은 영정 - 국가보물 1215호)
허목(許穆)의 ≪미수기언 眉嫂記言≫〈목은화상기 牧隱怜像記〉에 의하면 원래 이색의 초상화는 두 종류의 본이 있었는데, 하나는 정장 관복본(正裝官服本)이고 또 하나는 야복(野服)본인데 현재 전해 오는 영정은 모두 정장 관복본이다
목은영정 가운데 누산영당본이 가작에 속한다. 권근(權近)의 찬문이 있고 1655년(효종 6년)에 제작 됐다고 적혀 있다. 사대부 화가였던 허의(許懿)와 화원이었던 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 오는데 사모를 쓴 우안9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전체적인 형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공신도상 형식을 보여 준다. 이모본(移模本)이기는 하지만, 복제(服制)는 물론 안면 처리 역시 원본에 상당히 충실하였다.
목은영당의 영정은 우측 상단에 권근의 영상찬(怜像贊)에 의하면 1526년(중종 21년) 김희수(金希壽)가 제기(題記)를 썼던 본을 다시 1711년(숙종 37년) 개모(改模)하여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봉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5. 회고해 보면
목은은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온건파 지도자로 역사의 전환점에서 번민하는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백설, 구름, 매화, 석양 등의 시어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려는 선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신흥세력, 고려를 섬기려는 우국지사, 기울어져가는 고려 왕조의 현실 등을 상징하고 있다.
청초한 양심과 더럽혀 지지 않은 몸인 백설은 잦아들어 이잰 그림자도 희미한 세상에 뱃심이 검은 구름이 험악하고 서슬 마져 퍼렀다.
이러한 한탄스러운 세상일수록 그리워지는 매화의 고절, 그것이 피어 있는 매원은 어디에 있는지 그립기만 하다
기울어 가는 저녁놀 같은 고려조의 끝자락에 외로이 서서 어디로 갈까 생각해도 정말 갈 곳이 없어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지성인인 선비의 고독이 묻어난다.
'여행이야기(선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월남 이상재 선조님 동상 제막식 행사 장면들 (0) | 2013.04.16 |
|---|---|
| [스크랩] 한산이씨족보의 유래 (0) | 2013.04.16 |
| [스크랩] 청주의 신항성원 (0) | 2013.04.16 |
| [스크랩] 族譜로 推定한 우리 家門의 移住 歷史(漢陽 => 청주 酒城=> 미원 多樂洞) -1 (0) | 2013.04.16 |
| [스크랩] 牧隱 諱李穡의 통쾌한 對句 (0) | 2013.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