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서원으로 시작한 청주의 신항서원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조상의 얼이 깃든 이곳 신항서원은 신항서원지 莘巷書阮誌 서문 序文에 의하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삼남 三南의 가장 으뜸이 되는 서원으로 옛날
선조 宣祖3년 경오년 庚午年 1570년 단기 3904년에 청주의 사림(士林)이 유정곡(有定谷)에 서원을 창립하고 유정서원이라고 하였다. 현종顯宗 경자년庚子年 1660년에 사액 되었다. 현재 문정공 우암 송선생(송시열)
여기에서 아홉분의 배향 관계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 서원을 창립하고 징군 경연, , 강수, 박훈, 규암 송인수,를 배향하였고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재건축을 할 때 충암 김정을 추향
하고 임신년(壬申年 1632년)에 또 송재 한충을 배향하고 경인년(庚寅年 1650년)에 천곡 송상현, 서계 이득윤을 배향하고 또 목은 이색, 율곡 이이를 배향하였다.
그후 현종조에 신항莘巷이라 사액하였는 데 이는 이윤李尹과 안연顔淵의 출처出處한 뜻에서 취한 것으로 강수 박 선생의 유고에서 나온 것이다.
신항서원의 유래를 살펴 보면 모계 조강이 서계 이득윤, 진사 변경수 등과 함께 의논하여 선조 3년 (경오년 1570년)에 창립하였다.
규암 송 선생의 연보에 기록 되어 있다.
그후 상국相國인 단암 민진원 때에 중수하였는데 정확한 연대는 모르고 중간에도 여러번 바뀌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 고종 8년 (신미년 1871년)에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서 학자들의 폐단을 구제한다는 구실로 임금에게 아뢰어 중첩重疊된
서원을 훼철毁徹할 때 본서원도 훼철을 당하였다.
오랜시간이 흘러 온나라의 선비들이 종종 서원의 터에 단壇을 쌓고 또서원의 복구를 상소로 청하자 임금께서도 후회하시고 윤음(윤音 임금의 말이라는 뜻)을 발표하시니 임금께서 는 우선 기다리라고 비답批答을 내리셨다. 이는 오래지 않아 복구시켜 주겠다는 뜻으로 이 때가 고종 29년 (임진년 1893년) 가을이었다.
마침내 단을 없애고 위패를 세워 영령을 모시다가 갑진녀 1904년에 와서야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여러 신위를 봉안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이 때에 선비 유필영과 민영필 등 여러분이 여러 학자들을 거느리고 기금을 마련하여 모현계慕賢契를 만들어 이 사우에 단청을 올렸다. 성재 유필영의 행장에 보면 공이 사웅를 중수하고 비각을 다시 세우는 데 정성을 다 쏟아 몇년을 거치면서 일을 끝냈는 데 부족한 자금은 가재家財를 내어 보탰다고 한다.
그 뒤 50여년이 지난 정유년 1957년에 원우院宇가 낡아서 복구할 벙법이 없어 아홉선생의 후손인 박영순, 이규필, 송장용,등 여러분이 그 당시 원장인 이종선과 함께
충북도와 청원군, 청주시등의 협조를 얻어 원우를 중수하고 담을 쌓아 면모를 갖추었다.
우측 사진을 보면 칸막이를 볼 수 있다. 이는 배향하신 분들의 위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 된 방법이다.
무슨 이론들이 그리 많은지 출생년도로 하든지 하면 간단한 문제일진데 문묘에 배향 유무로 또는 관직의 지위 여하로 필자가 보면 억지이론을 갖다 붙이다보니 저러한 모양이 연출 되었다.
저 칸막이에 대한 사연을 알아 본 결과 현종14년 계축 1672년 4월의 송시열이 지은 서원기를 보면 을사 1665년에 사우를 새로지으며 목은 이색과 율곡 이이를 배향하며 위차 문제로 의견이 분분 할 때 퇴계선생의 유훈을 따라 근북近北의 동편을 막아서 그신위를
모시고 , 일곱선생의 신위를 세대별로 모셨다. 또 본고을의 유생들이 서계 李公이 역학에 매우 밝고 사문斯文에도 공이 있다하여 마침내 서벽에 모셔 동쪽을 향하게 하였다 하나 의문점이 간다.
봉암 채지홍의 증수기에는 처음 율곡선생을 추향 할 때에 사람들이 "선생의 세대가 가장 후세이기는 하지만 여섯선생의 아래에 놓을 수는 없다"고 하여 마침내 퇴계 선생이 정한 영봉서원의 읫기의식을 따라 목판으로 근북의 동쪽을 막아서 신위를 봉안하였다.
금상께서 즉위하신지 3년에 서원의 유생들이 중수하려고 하다가 동서를 목판으로 막는 제도는 유래가 오래 되었지만 선배들이 대부분 문제점으로 생각한다.
병신년 1656년에 추향 할 때에 우암 선생은 상중喪中에 계셔 의논하는 자리에 없었고 동춘의 목판으로 칸막이 하자는 의견은 회덕에 사는 유생이 전하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지금 본집에 실린 내용과는 큰 차이가 없지 않으니 애초에 두선생의 본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중수하며 고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들 승낙하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 장암에게 여쭈어 마침내 선생들의 세대순으로 동서로 나누어 차례로 제사 지내었다.
율곡 선생은 동벽 아래에 모시어 서쪽을 향하게 하고 머리는 북쪽으로 하였으며 천곡과 서계 두선생을 그 아래에 모셨다.
목은 선생은 서벽 아래에 모시어 동쪽을 향하게 하고 머리는 북쪽으로 하였으며 징군,강수,충암,송재,규암 다섯 선생을 그 다음에 모셨다.
이는 옛날에 동쪽을 높이던 뜻을 취한 것으로 율곡을 따로 높이자는 뜻에서 어긋 나지 않는다. 이에 선생들의 도덕과 연대에 따라 고하와 선후가 서로 방해 되지 않아 더 이상 문제의 소지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글에서 위차 문제로 여러번의 의견이 분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글을 보면 중간에 칸막이가 없어졌다가 언젠가 또다시 부활 한 것인 것같다.
목은을 제일 먼저 모시면 모든 것들이 다 해결 될터인 데 굳이 칸막이로 문제를 일으키는 옛 분들의 의도를 모르 겠다.
율곡 이이도 훌륭하지만 과연 목은 이색 선생과는 연대가 한참 후이고 학문의 연계성으로 보아도 목은으로 부터 연게 되어 발전 된 사실은 모든이들이 다 아는 것일 진데 과연 저모양이 오른 것인지 필자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아울러서 본서원의 한산이문과 관련 된 분들의 원장 역임을 하신 분들을 살펴보면 12대원장 이유당 이덕수, 13대 신촌 이지연, 16대 우암 송시열, 17대 농계 이수언 26대 수암 이사찬 등의 분들이 원장을 역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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