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행궁 2

장안봉(微山) 2013. 4. 11. 00:20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관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화령전(華寧殿) - 화령전은 1963년 사적 제115로 지정되었고 현재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어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나, 건립기록인 「영건등록(營建騰錄)」이 전해지지 않고, 일제시기인1933년에 한 차례 보수공사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사실 외에는 해방 이전의 기록도 거의 찾기 힘든 상황이다. 다만 화령전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령전은 순조 1년 4월 29일에 완성되었다. 화령전이 수원에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정조가 얼마나 수원을 사랑하고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조가 돌아가신 이후 정조의 신위는 종묘에 안장되었는데, 따로 수원에 영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순조 1년(1801)1월 6일에 당상관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화령전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그 달 29일에 좌의정 이시수"관상감 제조 이서구"화성 유수 이만수 등이 상지관을 데리고 화령전의 터를 살펴보았는데, 화성행 궁의 강무당에서 남쪽으로 77보, 낙남헌에서 북쪽으로 79보가 되는 유좌 묘향이 길지라 하여 도면을 그려서 바쳤다.

 화령전 외삼문.

 운한각 - 화령전을 완성하고 5월 2일에 정조대왕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크고 작은 영정 2본을 봉안하여 큰 것은 펴서 보관하고, 작은 것은 궤짝에 봉안하였다. 화령전의 이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시경」국풍 주남 <갈담(葛覃)>의 마지막 구절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에 서 '령'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정조의 영정은 1910년경에 일제의 강압으로 서울로 옮겼다가 잃어버리고, 1992년에 유네스코 경기도협의회의 건의로 새로운 영정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운한각 내부에는 영정을 옮길 때 사용하는 가마가 있다.

 정조는 왕으로서 살아있을 때 늘 베옷을 입고, 옷이 헤지면 기워 입는 등 검소함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와 같은 모습을 늘 눈으로 확인했던 당시 화성 유수 이만수는 화령전을 견고하면서도 검소하게 짓기를 원하였다. 이 뜻을 받아들인 순조의 하교에 따라 단정하면서도 장중하게 만들어져서 당대의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다.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팔작 지붕이며, 화강제 기단에 세워졌다. 건물 구조는 익공집으로, 이 시대의 사당 건물과 같이 간소한 수법으로 되었다.

 정전의 "운한각"이란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친필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현재는 고인인 대통령 박정희 친필로 운학각이라 쓰여 있다.

 

 

 경내에는 풍화당이란 건물이 있으며 이 곳은 순조가 풍악을 즐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오히려 순조가 선왕을 그리며 때를 보낸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구성은 외삼문과 내삼문, 운한각을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운한각 오른쪽에 전사청을 두었으며, 우측 담장 밖의 풍화당까지 아울러 조선 후기 기능적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정.

 

 재실.

정조의 사당인 이 곳에서는 역대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갈 때마다 제향을 올렸으며, 탄신일과 납향일에도 제사를 올렸다.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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