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동구릉 8 - 경릉(景陵)

장안봉(微山) 2013. 4. 11. 00:21

 

 경릉(景陵)은 조선 제 24대 왕인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왕릉 제도가 아니다. 우선 헌종 9년 1843년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고, 능호를 경릉으로 올렸다. 그로부터 6년 후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에 모셨다. 1904년에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효현왕후 김씨의 좌측에 안장하여,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이 경릉을 보면 왕이 가운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일 오른쪽(누워있는 시신 기준. 정자각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제일 왼쪽이 된다)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왼쪽이 계비 효정왕후 능이다. 이런 식으로 장사지낸 예는 경릉이 유일하다.

 본래 왕릉 장법에서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같이(이때의 경우 한 구역 안 두개의 능침을 따로 세워 동원 이강이라 한다. 봉분은 따로 떨어져 두개이지만 제사는 한 정자각에서 받는다) 안장되었을 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 해서 정릉으로 능호를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와 합장할 것을 것을 미리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이 경우는 봉분이 붙어있어서 쌍릉이라고 한다).

 

 경릉은 합장릉도 아닌 왕비릉에 왕릉과 계비릉이 덧붙여진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풍수지리적으로 정혈은 가운데의 효현왕후 릉이라고 함) 중종과 숙종은 같이 묻힐 것을 미리 전교했었고, 그럼에도 중종의 경우는 능호를 따로 올렸다. 왕이 따로 능호를 쓰지 못하고 왕비의 능호를 따라간 예는 경릉이 유일하다. 이는 왕을 안동김씨 왕비 옆에 부록처럼 묻어버린 것이니, 당시 정권을 주도하던 안동 김씨가 왕실을 얼마나 업수이 여겼는가 알 수 있다. 여기에 효정왕후 홍씨마저 옆에 장사지내게 되니 경릉은 실로 괴이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대개 사람들은 왕이 가운데에 묻혀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당시의 사상으로는 무덤에선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이 상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헌종은 효현왕후의 오른쪽에, 계비인 효정왕후는 정비인 효현왕후의 왼쪽에 묻힌 것이다. 이는 다른 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무덤에서는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다. 남편인 덕종은 죽을 때 세자 신분이었지만, 부인인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남존 여비보다 왕실의 서열이 우선된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이와 반대로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 된다. 요새 사극에서는 왕이 우측 왕비가 좌측에 앉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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