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208호인 정릉은 단릉으로 1409년(태종 9) 조성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다. 처음에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금천교.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능의 동편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지어 재궁으로 삼고 능침사찰로 하였다.
그러나 잘 조성된 정릉은 신덕왕후의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 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정릉이 있던 이 일대는 지금까지 정동(貞洞)으로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신덕왕후는 현종에 의해 복권되면서 그 능이 현재와 같이 재조성되었다.
지상으로 돌출된 소전대는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원래 정릉에서 가져온 것이다.
『태종실록』 1406년(태종 6) 4월 7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전한다. 정릉(貞陵)의 영역(塋域)을 정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계모인 신덕왕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신덕왕후(?년 ~ 1396년)는 상산부원군에 추증된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鄕妻)와 서울에서 얻는 새 부인인 경처(京妻)를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였는데, 향처인 한씨 부인이 태조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가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1396년(태조 5)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사랑하던 신덕왕후를 잃은 태조는 정릉을 조영하고, 능 동쪽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이 원찰에서 정릉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후에는 그녀의 소생 중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원망을 품은 방원을 비롯한 전처 소생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웅큼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뒷날의 신덕왕후가 된 그 처녀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1409년(태종 9)에는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전하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태종이 이를 허락하여 지금의 정릉 위치인 도성 밖 양주 땅 사을한록으로 천장하였다. 태종은 이때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아버리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1410년(태종 10) 여름에는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인해 무너지자 예전 정릉의 석물이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들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은 왕비의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밟고 다니게 되었다.
태종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종과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만을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의 신위는 모시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로써 태조가 사랑했던 신덕왕후는 죽은 후에도 새어머니를 미워한 아들에 의해 한참을 푸대접 받다가, 그로부터 260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다시 정릉의 상설을 복구하고 종묘에 배향을 결정하게 되어 그 한을 풀게 되었다. 이 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원지우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태종실록』 1409년(태종 9) 2월 23일조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장명등.
『태종실록』 1409년(태종 9) 4월 13일조.
태평관(太平館) 북루를 새로 지었다. 임금이 이귀령에게 일렀다.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서 누 3칸을 지으면, 재료를 아끼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정릉의 돌을 운반하여 쓰고, 그 봉분은 자취를 없애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좋겠으며, 석인(石人)은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좋겠다.”
하니, 임금이 이귀령에게 이르기를,
혼유석의 고석이 2개이다. 원래 5개일 것으로 추정한다. 주변 석물과 봉분의 비례가 맞지 않다.
-『태종실록』 1410년(태종 10) 8월 8일조.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광통교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예전 정릉 자리에 있던 돌로 돌다리를 만드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광통교를 만들면서 정릉의 석재를 옮겨 지은 까닭에 남은 석물만 이전했으므로 무덤의 규모가 석물과 맞지 않은 것이다.
후에 만들어진 문인석과 석마.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각각 1쌍만 배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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