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사적 199호)은 서울 강남 삼성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으로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렸다. 이 곳에는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 정릉이 있다.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 계비인 정현왕후(貞顯)의 능을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한 봉분씩 조성한 경우로 동원(同原) 이강(異岡) 형식이다. 그 후, 1544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 1562년에 문정왕후에 의해 경기도 고양 원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당리의 풍수 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이곳 또한 매년 여름이면 능이 침수되어 재실에 물이 들어가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 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현재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의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사적 제199호이다.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물길이 메말라 삭막해진 금천 -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파헤쳐져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에, 선릉과 정릉의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다. 정릉의 경우는 좀 더 특수한데,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아예 잿더미들만 나왔지만 중종의 능침에서는 시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원로 대신에서부터 궁중의 나인들까지 동원되어 살펴보았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 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고 남은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힘들었다.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중종이 승하할 당시가 더운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 때문에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 중종의 시신일지도 모르기에 사람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선조는 이 시신을 다른 곳에 잘 묻어주라고 명령한다. 이후 전해져오는 야담에는 능에서 밤마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은 옥체를 능에 모시지 않은 탓이라고 했었다는데, 어쨌든 선정릉의 세 능상은 모두 비어있으며(정확히는 보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올린 의복만 묻혀있다), 그 시신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홍살문과 참도.
참도의 신도와 어도.
정자각.
신도비 -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 / 정현왕후 부좌강.
능지기가 머물던 수복방.
둔중해보이지만 섬세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무인석.
선릉은 동원이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 이상의 능이 같은 능호를 사용하지만,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을 말한다. 선릉의 왼쪽 언덕에는 성종 계비 정현왕후의 능,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웠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 조영된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밖의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을 본떴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의 얼굴은 극히 사실적이나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왼쪽 언덕의 왕비 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고, 석주의 윗부분은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38세의 나이로 성종이 승하하였고, 1495년(연산군 1) 1월 14일 묘호를 성종, 능호를 선릉이라 하여 같은 해 4월 6일 지금의 선릉 자리인 광주부 서면 학당리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1530년(중종 25) 8월 22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 선릉에 예장되었다.
그 후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그 첫 수난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 일어났다. 『선조실록』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능에도 화재가 발생하는 등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었으나 정비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혼유석과 고석.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11월 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백운기라는 자가 왜적과 결탁하여 이 능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릉 능원 내의 커다란 나무 두 그루만 뽑아도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는 엄한 죄를 물었는데 하물며 봉분과 재궁을 훼손하였으니, 백운기라는 자의 죄가 얼마나 중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왕릉의 입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일이었다.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면서도 다양한 풍수지리상의 길지로서의 요건을 갖춘 곳이어야 했다. 만약 이렇게 어렵게 찾은 지역이 이미 민가의 묘 자리로 쓰이고 있는 경우에는,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이 민묘를 이장시키기도 하였다. 선릉을 조성하기 위해 물색한 지역에도 이미 민묘가 자리 잡고 있어 이를 이장토록 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년) 1월 26일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정형왕후 능침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허리굽은 소나무. 허리숙여 인사하는 신하의 모습처럼 보였는데,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 고사하고 말았다.
정현왕후(貞顯王后1462년 ~ 1530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1462년(세조 8) 6월 26일 태어났다. 1473년(성종 4) 6월 궁중에 뽑혀 들어와 숙의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 8일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윤호는 당시 정계에 떠오르는 소장파 샛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고,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여러 후궁 중 왕비에 책봉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으며, 이에 성종은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다행히 어진 왕비를 얻어 마음이 평안하다.”고 칭찬하였다.
정현왕후 윤씨는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올라 원자인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우게 되었다.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연산군일기』1495년(연산군 1) 3월 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1504년(연산군 10) 3월 20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쳐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횡포를 부린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를 앞장서 반대하는 시점에서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선릉에 잠든 성종은 그의 묘호가 말해주듯이 치세를 이룬 군주였다. 그 자신도 학문을 좋아하는 호학의 군주였으며,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세종 때의 집현전에 해당하는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문신 중에 뛰어난 사람을 골라 사가독서(賜暇讀書 :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집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것)하게 하는 호당(湖堂) 제도를 두어, 유학자와 문인들로 하여금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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