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위 김한신의 묘.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과 그의 부인 화순옹주의 합장묘다.
묘에는 돌담이 둘러있고,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쌍, 장명등 등의 묘석이 갖추어져 있다.
영조의 어필이 새겨진 비문. 조선 후기의 문신인 정효공 김한신(1720∼1758)의 묘소.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은 1720(숙종 46년) 영의정 김흥경(金興慶) 아들로 태어나 13세때에 영조의 장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로 봉해졌다. 추사선생 일문을 흔히 월성 김문(月城 金門)으로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 제용감제조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시호는 정효공(貞孝公)이다. 그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곧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묘역에는 그와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비례는 맞지않지만 단아하고 우아한 기품이 흐르는 문인석.
묘역 옆에 있는 화순옹주 정려문.
정려문은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 할머니이자 조선 영조(재위1724∼1776)의 둘째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옹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남편에 대한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의 열녀문은 훗날 정조(재위 1776∼1800)가 내린 것이다.
묘막터는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앞면 8칸·옆면 1칸 규모이며 근래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묘막은 원형을 알 수 없어 현재 복원을 하지 못하고 있다.
텅 빈 묘막 안은 늦여름의 적막만이 흐른다.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가계도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 ~ 1757] 소생 없음
제1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 ~ 1805] 소생 없음
서1남 왕세자(王世子) [1719 ~ 1728] (연우궁 이씨)
서2남 왕세자(王世子) [1735 ~ 1762] (선희궁 이씨)
서1녀 옹주(翁主) [생몰년 미상] (연우궁 이씨)
서2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 ~ 1758] (연우궁 이씨)
서3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 ~ 1748] (선희궁 이씨)
서4녀 옹주(翁主) [1728 ~ 1728] (선희궁 이씨)
서5녀 옹주(翁主) [1730 ~ 1730] (선희궁 이씨)
서6녀 옹주(翁主) [1731 ~ 1731] (귀인 조씨)
서7녀 화협옹주(和協翁主) [1731 ~ 1752] (선희궁 이씨)
서8녀 옹주(翁主) [생몰년 미상] (귀인 조씨)
서9녀 화완옹주(和緩翁主) [1737 ~ 1808] (서녀 강등) (선희궁 이씨)
서10녀 화유옹주(和柔翁主) [1741 ~ 1771] (귀인 조씨)
서11녀 화길옹주(和吉翁主) [1752 ~ 1821] (폐숙의 문씨)
서12녀 화령옹주(和寧翁主) [1754 ~ 1772] (폐숙의 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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