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충남홍성]최영장군 사당-기봉사(奇峰祠)

장안봉(微山) 2013. 4. 9. 05:27

무민공 최영장군(武愍公 崔瑩)

 

본관은 동주(東州), 시호는 무민(武愍)이며 홍주적동(지금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이다.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자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唯淸)의 5대손이다.

최영은 16세 때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부친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훈(遺訓)을 받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의 집안은 문신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걷는다. 양광도 수문사(都問使)의 휘하에서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워, 우달치(于達赤)에 임명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안우(安祐)ㆍ최원(崔源) 등과 함께 평정하고,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로부터 중국 산동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사성(張士誠) 및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군을 보내라는 요청을 받고, 대호군(大護軍) 대장군으로 병력 2,000명과 함께 출정하게 된다. 1355년에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은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잃었던 땅을 되찾고, 서로는 압록강을 넘어 요양에 이르는 실지 회복에 나선다.

이후 원나라는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고자, 기황후의 지원 아래 최유가 군사 1만을 이끌고 1364년에 고려로 쳐들어오나 섬멸시킨다. 1358년(공민왕 7)에는 양광ㆍ전라도 왜적 체복사(倭賊體覆使)가 되어 오예포(吾乂浦 : 장연)에 침입한 왜선 400여 척을 격파하고, 1365년(공민왕 14)에는 강화(江華)에 침입한 왜구와 싸우나 신돈의 참언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되고 유배당한다.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이 처형되자 소환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낸다.

그 후로도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1376년(우왕 2)에는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 박원계(朴元桂)가 참패당하자, 최영은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피봉되었다. 이 뒤부터 왜구가 최영을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 하여 몹시 무서워하게 되었다 한다. 1377년 서강(西江)에 쳐들어온 왜군을 격퇴하고, 1378년(우왕 4)에는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풍덕(豊德))에 쳐들어와서 개경까지 위태로웠으나 이성계ㆍ양백연(楊伯淵) 등과 힘을 합하여 적을 쳐서 섬멸시키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1380년 왜구의 침략으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최영은 왜구 때문에 천도할 수는 없다며 계획을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하였고 1388년에는 왜구 등을 물리친 공로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이른바 철령위 문제가 일어나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회군하여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高峰)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開京)에서 참형(斬刑)되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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