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남 함양]?개암 강익[介庵 姜翼]선생 묘역

장안봉(微山) 2012. 12. 15. 15:46

개암 강익[介庵 姜翼]

 

1523(중종 18)∼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 함양 효우촌(孝友村)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근우(謹友)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승사랑 응기(應麒)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9년(명종 4) 진사가 된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66년 영남유생 33인의 소두(疏頭)가 되어 정여창(鄭汝昌)의 신원을 청하였다,

1552년에 남계서원(藍溪書院)을 건립하여 정여창을 제향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후학을 지도함에 있어 극기와 신독(愼獨)을 권장하여 말보다는 실천위주의 학문을 하도록 하였다. 뒤에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개암집』 2권이 있다.

 

 

 

 재실-사성재

 

 묘소 오르는 길

 개암 강익선생 묘소 전경

 개암 강익선생 묘(하)와 금재 강한선생 묘(상)

 

 

 

 

 개암 강익선생 묘갈-朴世采가 지었다

 

 

 

 

금재 강한[琴齋 姜漢]

 

1454년(단종 2)∼미상. 조선 전기의 서예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종지(宗之)종우(宗于), 호는 금재(琴齋).

부친은
강이경(姜利敬)이다. 아버지 강이경(姜利敬)이 예종 때 남이(南怡)가 처형될 때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고 자손이 금고(禁錮)되었는데, 이 때 강한(姜漢)이 상언(上言)하여 원통함을 진정하매, 왕이 특별히 그의 벼슬길을 틔워 줄 것을 허락하였다.

 

학행이 뛰어나고 필법이 정묘(精妙)하여 성종 때 포의(布衣)로 명나라 사신 접대에 종사하였다. 1496년(연산군 2) 43세로 병진증광사마시(丙辰增廣司馬試) 진사(進士) 3등에 합격하고 현감(縣監)을 지냈다. 모친상을 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필봉(筆峰) 아래에 은거하며 서사(書史)로 낙을 삼았는데, 학덕(學德)이 추앙되어 숙종함양(咸陽)구천서원(龜川書院)에 배향 되었다.

나이 16∼17세 때 이웃사람의 상소문을 대서(代書)하였는데,
성종
이 그 필치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종이와 붓을 하사하여 다시 서진(書進)하게 해서 결과를 보고는 과연 기절(奇絶)한 필법이라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가 쓴 필적으로는 경남 안음(安陰: 지금의 안의(安義))에서 간행한 《동몽수지(童蒙須知)》 판본이 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정옥견(鄭玉堅)
권오복(權五福)정사룡(鄭士龍) 등이 배출되었다.

 금재 강한선생 묘소- 개암선생 묘후에 있다

 

 

 통훈대부행고산현감강선생지묘

 

 금재 강한선생 묘갈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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