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충주] 박팽년 사우와 배위 천안전씨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53

박팽년(朴彭年)

 

본관 순천, 자 인수(叟), 호 취금헌(), 시호 충정(), 형조판서 중림()의 아들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질(礩)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대년(), 아들 3형제도 사형당하였다. 그 뒤 과천의 민절서원(), 홍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숙종 때 복권되고 영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글씨에《취금헌천자문()》이 있다. 묘는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한번은 옥중에서 고문을 당할 때 세조가 사육신들에게 술을 따르며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하여가’를 읊어 시험하였다. 성삼문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박팽년의 충절을 느낄 수 있는 유명한 두 작품이 있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


『금이 아름다운 물에서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는 것은 아니며,
옥이 곤강(崑崗)에서 나온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여자가 사랑하는 지아비를 따른다고 하지만 임마다 좇을 수는 없는 것이다. 』

 

 

거사 실패로 사육신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처첩과 여식들은 역모를 막은 공신들의 노비나 첩 또는 관아의 노비로 보내졌다.

 박팽년의 둘째며느리(박순의 처)인 성주이씨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마침 친정의 여종도 딸을 낳으므로,

 여종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바꾸어 기르는 지혜를 발휘하여  박팽년의 손자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게되었다.

박팽년의 손자는 이씨부인의 친정집에서 노비라는 뜻의 이름인 '비(婢)'자를 붙여 '박비(朴婢)'로 불렸고,

박비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다가  성종이 즉위한 후 박비의 이모부 이극균(경상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17세 되던해 사면이 되고  박일산(朴一珊)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게된다.

그리하여 박일산은 노비 신분에서 풀려나 대구 달성군 하빈면에 정착하여 살게되고, 박일산의 손자인 박계창이 선조 박팽년의 제사와 함께 나머지 사육신 다섯분에 대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모시게 되니 대구의 육신사이다.

 

 

 

 

정려-충신증통훈대부사복시정박일산지문

정려-충신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행가선대부형조참판 증시충정공박팽년지문

정려-충신성균진사박순지문

 

 

 박팽년의 배위 천안전씨 묘소

 

 

 정부인천안전씨지묘

 

 통훈대부행천안현감순천박공휘경여지묘(通訓大夫行淸安縣監順天朴公諱慶餘之墓)

 

 순천박공휘기정황해도관찰사지가선대부병조참판/배정부인여흥민씨지묘

-제일 뒷쪽의 묘소가 박팽년의 부인 천안전씨묘소이고 중간이 박경여의 묘소이다

 

[박기정(朴基正)]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일여(一如). 사육신 팽년(彭年)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원(聖源)이고, 아버지는 광주(光胄)이며, 어머니는 정운채(鄭運采)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내다가, 1784년(정조 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부교리·영월부사(寧越府使)·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799년(정조 23)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같은 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태조가 말달리기를 하던 곡산(谷山)의 치마도(馳馬道) 옛터를 고증하여 많은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는 정조로부터 사육신의 후예라는 총애를 받아 영월부사와 참판 등에 특별히 제수받는 영광을 누렸다.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장릉영천비(莊陵靈泉碑)·관풍헌중수기(觀風軒重修記)·육신사기(六臣祠記) 등의 글씨가 전한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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