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충북 청원] 송세량 묘소와 송방조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52

송세량(宋世良)

1473(성종 4)∼1539(중종 34)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정부(貞夫).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순년(順年)이고, 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여해(汝諧)이며, 어머니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딸이다.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학문에 열중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음보(蔭補)로 선릉참봉(宣陵參奉)과 건원릉(健元陵)의 참봉을 지냈으나, 뒤에 물러나 구원(丘園)에 은거하였다.

규암 송인수의 아버지 이시다

 

 

 

 

 

송세량 묘소 전경

참봉증호조참판송공휘세량묘/배증정부인문화류씨부좌

송세량 묘 후경

정부인 문화류씨지묘(柳承陽의 따님)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행승의랑 건원릉참봉송공지묘

 

 

 

송시영(宋時榮)
1588년(선조 21)∼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공선(公先) 혹은 무선(茂先), 호는 야은(野隱).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종형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 되었다. 인조 초년에 향인들에 의해 그의 학행이 감사에게 천거되기도 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를 모아 근왕하였다.
이듬해
김장생에 의하여 천거되어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을 제수받고, 봉사직장(奉事直長)·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남에 왕명을 따라 강화도분사(分司)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정월 22일에 강화성이 적에 의하여 포위되고 남문이 함락되자 김상용(金尙容)·홍명형(洪命亨)·심현(沈誢)·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해 정려가 세워지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충현(忠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강화도의 사람들이 충렬서원(忠烈書院)을 세워 김상용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밖에 회덕별사(別祠), 영동초강서원(草江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송시영/배증정부인전의이씨 묘소-송세량 묘소 아래에 위치한다

 유명조선통훈대부행사복시주부증의정부우참찬시충현공야은송공시영지묘/배증정부인전의이씨부좌

 

삼현려(三賢閭)-우암 송시열이 짓고 김수증이 썼다.

 

삼현려기(三賢閭記)

우리 흑암 부군(黑巖府君)의 묘문(墓文)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김 선생이 지은 것으로 삼현(三賢)의 사적을 칭도(稱道)함이 비록 간략하나 그 기상과 규모를 대개 짐작할 수 있으며, 그 글이 김 선생의 문집(文集)에 실려 있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알고 있다. 당시에 그 마을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공경하면서, 여기는 세 어진 이가 살던 곳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있게 되었는데, 그 자리는 실로 한양(漢陽)의 반송방(盤松坊) 유점동(鍮店洞)에 있다. 이제 이곳 청주(淸州)의 마암리(馬巖里)는 부군이 돌아와 노년(老年)을 보내던 곳이고 무덤이 있는 곳이며, 문충공(文忠公 문충은 송인수(宋麟壽)의 시호)이 목숨을 마친 곳이다. 성동주(成東洲 성제원(成悌元))의 부인의 무덤이 부군의 무덤 곁에 있고 서부 부군(西阜府君)의 무덤도 5리 가까이에 있어, 삼현의 유적이 여기에 많이 남아 있으므로, 이 이름이 이곳에 일컬어진 지도 역시 오래다.
아, 삼현의 사적이 사람의 이목(耳目)에 빛남은 말할 것도 없고, 척암(惕菴) 김근공(金謹恭)도 부군의 측실(側室) 소생의 사위로서 유학(儒學)으로 야사(野史)에 매우 드러나게 칭도되었으니, 이 어찌 당시의 덕성(德星)이 편벽되게 부군의 집에만 비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삼현의 수(數)에 들지 못함은 연배(年輩)가 조금 뒤인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후에도 부군의 증손인 습정공(習靜公) 휘 방조(邦祚)가 청명(淸名)과 직도(直道)로 세상 사람에게 존중되었고, 우리 선부군(先府君)인 수옹공(睡翁公) 휘 갑조(甲祚)와 종씨(從氏)인 충현공(忠顯公) 휘 시영(時榮)이 절의가 뛰어나서 포장(褒奬)하는 은전이 빛났으므로, 그후로 이 마을이 더욱 먼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덕이 많은 자는 덕을 후세에 전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문충공이 후명(後命 귀양 간 사람이 사사(賜死)의 명을 받는 것)을 받을 때에 부군의 사판(祠版 위패(位牌))에 극히 영이(靈異)한 일이 있어 이 일이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실려 있고, 지난날 내가 처음 화를 받을 때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른바 ‘부자ㆍ조손이 유명(幽明)의 길을 달리한다.’는 말은 진실로 천리를 알지 못한 것이다.
흑암 부군의 휘는 세량(世良), 자는 정부(貞夫)요, 서부 부군의 휘는 귀수(龜壽), 자는 기수(耆叟)이며, 문충공의 휘는 인수(麟壽), 자는 미수(眉叟)이고, 성동주의 휘는 제원(悌元), 자는 자경(子敬)인데, 서부 이하가 이른바 삼현으로, 흑암 부군의 아들과 사위이다.

 

숭정 기원 후 62년 기사년(1689, 숙종15) 6월 일에 서부공의 증손 시열은 삼가 쓴다.


 

 

송방조(宋邦祚)

1567(명종 2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숙 (永叔), 호는 습정(習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세량(世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구수(龜壽)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응기(應期)이며, 어머니는 판서 이윤경(李潤慶-광주이씨)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영동에 피난하여 현감 한명윤(韓明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정자(權知正字)ㆍ박사를 지내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어 영남지방의 향시(鄕試)를 관장하였다.

뒤에 금교도역승(金郊道驛丞)ㆍ병조좌랑ㆍ고산도마승(高山道馬丞)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가 후금을 치려고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자 1617년 비변사에 의하여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어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로 임명되었다.

이 때 명나라에 들어가는 보빙사(報聘使)의 짐을 검색하려고 용천관(龍川館)에 갔다가 갑자기 죽었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1665년(현종 6)에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송방조 묘소 전경(제일 뒷쪽에 위치한다)

 송방조 묘소 전경

 

 

 송방조 묘소 후경

 유명조선통훈대부행병조좌랑 증통정대부이조참의송공방조영숙지묘/증숙부인진주정씨(高江 鄭谷의 따님)부좌

 

 

 

송방조 묘소에서 바라본 송세량 묘소

 마을 입구에 세워져있는 문충공규암송선생수명유허비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