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와 서원(Confucian Schools and Seowon)
송기호 서울대국사학과 교수
학교는 백성을 교화하는 장소로서 인륜을 밝히고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러기에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학교를 설치했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국정 현안에 대해서 전국의 신하들에게 유시하면서 학교 진흥을 그 하나로 들었다.
학교는 풍속 교화의 근원이니, 안으로는 성균관과 오부학당을 설치하고 밖으로는 향교를 설치하여 가르치는데 지극정성으로 힘을 쏟아왔다. 그런데도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자가 오히려 정원에 차지 않으니 가르치는 방법에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곳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인가? 이를 진작할 수 있는 방법을 의정부와 육조에서 강구하여 아뢸 것이다. 또 향교의 생도는 비록 학문에 뜻을 두고 있더라도, 풍흉을 조사하여 기록하게 하거나 손님을 접대하게 하는 등의 일을 그곳 수령이 아무 때나 시켜서 학업을 하지 못하게 하니, 지금부터는 일체 금지하라(세종실록 즉위년<1418> 11월 3일).
서울에는 성균관과 더불어 오부학당이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이렇게 지방에까지 교육기관을 설치한 것은 예기(禮記)의 이념을 따른 것이다. 이를 인용한 성종 때의 상소문이다.
신들이 가만히 듣건대, 옛날에는 교육기관으로 집에는 숙(塾)이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국(國)에는 학(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은 숙에서 배우고, 고을 사람은 서(序)에서 배우고, 서울 사람은 학에 입학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가르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사람마다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하은주 삼대에는 정치가 융성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었으니, 후세에서 능히 미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성종실록 8년<1477> 8월 20일).
『예기』에는“집에는 숙, 당에는 상, 주(州)에는 서, 국에는 학”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주나라 제도에 의하면 500집이 모여서 당이 되고, 2,500집이 모여서 주가 된다고 한다. 국은 천자가 사는 서울을 가리키니, 신라 때에 설치한 교육기관인 국학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서울에는 성균관 외에 고려와 조선에서는 학당을 추가로 설치했으니,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현상이다. 강화도에 피난하던 고려 원종 2년(1261)에 동서학당을 처음 설치하였고, 고려 멸망 직전에 유학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오부학당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초기에도 한성 5부에 각각 하나씩 두려고 하였지만, 학생이 없던 북부학당은 결국 폐지되어 사부학당 즉 사학(四學)으로 남았다.
서울의 사학과 지방의 향교는 중등학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사학이 우대를 받았다. 사학은 성균관에 부속된 예비학교로서 성균관의 감독 아래 있었다.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것으로서 흔히 둘을 합쳐서 관학(館學)이라 부른다. 사학에는 향교와 달리 공자 사당을 따로 설치하지 않고 성균관 문묘를 이용했다. 그러기에 사학은 성균관과 관계가 밀접하였고 성균관 입학에도 큰 혜택을 누렸다. 사학 유생은 성균관의 상소에 동참하기도 했다. 인조 때에 최명길이 징계 학생을 구제해달라고 건의한 말이다.
성균관과 학당 유생이 상소를 올린 뒤로 소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부학당에서 상소에 참여했다가 정거(停擧, 과거 응시자격 박탈)된 자가 6인인데, 동참한 50여 인은 모두 원점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성균관은 재임(齋任, 학생회 임원) 6인과 상소에 동참한 자 3인이 잇따라 정거를 당하자, 유생들이 이 때문에 불안하게 생각하여 점점 서로 이끌고 나가버려 몇 명의 재임만이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다시 원점을 받을 자가 없어서 며칠째 식당이 텅 비어 있습니다. 곧 치를 큰 과거시험이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인조실록 13년<1635> 5월 29일).
운영 방식도 성균관과 유사하였다. 도기라는 출석부 제도는 초기에 운영되다가 나중에는 유명무실해진 것 같다.
성운이 아뢰었다. “국가에서 사학에 원점제도를 두어 권장해도 오히려 학교에 거처하는 유생들이 없습니다.
비록 거처하는 자도 단지 원점을 따기 위한 것일 뿐이지 전혀 글을 읽지 않아 학업에 효험이 없습니다. ...”(중종실록 20년<1525> 10월 21일)
중종이 다음날 관리를 보내서 출석부를 점검했는데, 실제로 출석이 매우 저조하였다.
사관과 내시를 성균관과 사학에 나누어 보내 도기와 시도기(時到記)를 봉해 왔다. 성균관은 생원 27명, 기재생 78명이고, 남학은 7명, 서학은 10명, 중학은 8명이었으며, 동학은 한 명도 없었다(중종실록 20년<1525>10월 22일).
도기는 이전 출석부이고, 시도기는 지금의 출석부이다. 사학 정원이 400명인데 겨우 25명만 출석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영조 때에는 이 제도마저 운영되지 않았다.
고관(考官, 고시관) 김재로가 말했다. “사학은 태학과 달라서 식당의 도기제도가 없기 때문에, 서울의 부귀한 자제들이 입학을 꾀한 다음 시골 유생에게 대신 식사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강(殿講, 왕이 주재하는 강독시험)을 실시하게 되면 자기 이름으로 응시하고 있으니 선비로서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이제부터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현재 학당에 거처하는 사람이 전강에 응시하게 하고, 때에 닥쳐서 이름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영조실록 12년<1736> 9월 3일).
사부학당의 정원은 각각 100명씩이었다. 이들에게는 하루에 한 되의 쌀을 제공했지만 때로는 이를 줄여 지급하여 문제가 되었다. 성균관 대사성을 겸한 정인지가 문종에게 아뢴 말이다.
옛날부터 5부학당의 생도에게 한 사람당 쌀 한 되가 제공되어 집에서 먹지 않고서도 유숙하면서 독서하는 자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한 되의 쌀을 줄여서 주니, 먼 곳에서 와서 배우는 사람 가운데 혹 먹기가 어려워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습니다. 5부에서 항상 공급하는 수량을 계산해보면 하루 한 되를 준다 해도 한 해에 겨우 1천여 석이 될 뿐입니다. 청컨대 옛날대로 제공하게 하소서(문종실록 1년<1451> 7월 28일).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삭감하지 않았지만 중종 11년(1516)에 또 반으로 줄였다가 역시 건의를 받고 환원된 적이 있다. 사학의 학생은 서울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지만, 따로 서울로 제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방 학생도 입학할 수 있었다. 취학 연령은 10세였으나 문종 때에는 8세 이상으로 하였다. 이들은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15세가 되면 승보시란 시험을 거쳐서 성균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국왕이 성균관 문묘에 참배하고 치르는 알성시에 성균관 학생과 함께 참여할 수 있었으니, 진학에서 향교보다는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성균관에서는 사서오경을 주로 교육하였던 반면에 학당에서는 이보다 기초인『소학』부터 배웠다.
사학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로 점차 쇠퇴해갔다. 예조판서 이정귀가 광해군에게 경연에서 아뢴 말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평상시에는 사학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뒤로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중부학당과 서부학당 두 곳만 설치했고 동부학당과 남부학당은 아직 설치할 겨를이 없었으니,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사학 제도가 하루아침에 폐지되어 정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전국의 선비 자제들이 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받고 싶어도 갈 곳이 없으니, 점차 다시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광해군일기 2년<1610> 7월 25일).
서울의 사학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지방의 향교다. 지방을 다니다보면 교동이나 명륜동이란 지명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향교가 있는 동네를 의미한다. 그 주변을 둘러보면 향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한 번쯤 둘러볼 만하다. 향교의 건물 배치는 성균관과 동일하다. 대성전은 전돌바닥을 하고, 명륜당은 가운데 대청과 좌우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기숙사는 대체로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지형에 따라 공간 배치가 달라지는데, 평지일 경우에 대성전은 앞에 있고, 구릉일 경우에는 뒤에 있다. 선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공부하는 공간보다 높은 자리에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주향교는 평지에 세운 것으로 전묘후학(前廟後學)의 사례에 해당하고, 강릉향교(는 구릉에 세운 것으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서원에서는 향교와 달리 평지에서건 구릉에서건 가장 안쪽에 사당을 둔다. 사당은 따로 담장을 둘러 출입을 제한하였다. 서원은 선비 정신에 따라 화려하지 않게 건물을 짓되, 사당에만 단청을 칠했다.
지방에 학교를 설치한 것은 고려 때에 시작되었지만, 조선시대에 중앙행정력이 지방에 깊숙히 미치면서 활성화되었다. 향교에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토지와 노비가 제공되었고, 수령이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학생은 양반 뿐 아니라 평민도 있었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이 정원이었다. 이 정원은 국역에서 제외되는 인원으로 16세 이상만 대상으로 한 것이고, 16세 미만의 동몽(童蒙)은 정원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향교도 사학과 함께 병란을 겪은 뒤로 그 기능이 쇠퇴해갔고, 그 자리를 사립학교인 서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퇴락상은 광해군 때에 강원도관찰사 박정현이 전한다.
각 고을의 훈도(訓導)는 대부분 용렬하고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로 구차하게 충당하여 생계의 터전으로 삼게하고 있는데, 가르치는 효과는 조금도 없이 한갓 국가의 곡식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강릉·원주·춘천 등 고을의 교수와 훈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각 고을의 훈도들은 한 해 동안 쉬게 하여 비용을 축내는 폐단을 제거하소서
(광해군일기 8년<1616> 11월 21일).
향교의 선생에는 교수(종6품)와 훈도(종9품)가 있었다. 이들이 무식하여 녹봉만 타먹으면서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군사부일체'라고 하여 스승을 임금, 아버지와 동격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선생 자리는 한직으로 기피하는 자리였다. 명목과 실상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과거에 학교 선생은 월급은 적어도 존경을 받았던 장면도 떠올릴 수 있겠다.
실학자 유수원(1694~1755)도 향교의 쇠퇴를 이렇게 전했다.
서울의 태학은 다만 시골에서 경서를 조금 공부한 사람 약간을 모아 놓고 밥이나 먹여주고 있으며, 지방에서는 그나마 몇 공기의 밥마저 먹여주지도 않고 향교 학생 한 명으로 하여금 성스러운 사당을 지키게 할 뿐이다.
이른바 양반 유생은 재임이 되어 매월 1일과 15일에 분향이나 하고 춘추로 제사나 지낼 따름이다(『우서』 논학교 論學校).
공교육이 쇠퇴하면서 서원 중심의 사교육이 성장했다. 서원은 주세붕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처음 세웠으니, 풍기군수에 부임한 이듬해인 중종 37년(1542)에 세운 소수서원이 그것이다. 그가 풍기군수로 부임할 때에 사관이 평한 말이다.
사신은 논한다. 풍기는 안향의 고향인데, 주세붕이 안향의 집터에 사당을 세워 봄과 가을에 제사하고 백운동서원이라 불렀다.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다.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자를 받아서, 고을 백성 가운데 우수한 자가 모여서 먹고 배우게 하였다. 당초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서 서울에서 책을 사다가 두었는데, 경서뿐 아니라 정주(程朱, 송나라 유학자 정자와 주자)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공부 권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중종실록 36년<1541> 5월 22일).
송나라 때 주자가 1180년에 백록동(白鹿洞)서원을 중건했는데, 백운동서원은 이를 모방한 것이다. 1550년에 풍기군수 이황이 조정에 사액을 요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어필 현판과 함께 서적과 노비를 하사받았으니, 이것이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서원은 원래 사설기관이지만 국가에서 이를 인정하고 공적으로 지원하게 된 것으로, 사액받지 못한 서원과 격을 달리 했다. 처음에는 사당이 중심이었고 공부는 부차적인 것이었는데, 이황이 이렇게 사액서원으로 만들면서 공부도 중시되기 시작했다.
소수서원을 들어가다보면 오른쪽에 보물로 지정된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서 있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때에 세워 진 절로서 안향도 이 절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 절의 터전에 서원이 들어선 것이니, 유불 교체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오래전에 사진을 찍으러 서원 뒤쪽으로 올라갔더니 부서진 석실분이 드러나 있었다. 아마 고분이 있던 곳에 절이 들어서고, 그 자리에 다시 서원이 들어선 것일 터이니,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당간지주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개천가 바위에 '백운동', '경(敬)'이란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경’은 심성을 수양하던 유학자의 경구이다.
서원은 사림이 주자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곳이지만, 붕당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자기 붕당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장소로 변질되었다. 사림은 신라의 최치원과 설총, 고려의 안향을 공통의 학맥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 뒤로는 당파에 따라 숭상하는 인물이 달라졌다. 이에 따라 서인 계열에서는 이이, 김장생, 송시열
등을 배향했고, 남인 계열에서는 이황, 조식, 류성룡 등을 배향했다. 지역적으로도
달랐으니 이황은 경상도, 송시열은 충청도, 이이와 주자는 황해도에서 주로 모셨
다. 여러 서원에서 중복되어 배향된 대표적인 인물로 이황, 송시열, 이이, 조광조
등을 들 수 있는데, 송시열을 배향한 곳은 전국 44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원은 조용한 곳에서 공부한다는 점에서 향교와 달랐으니, 퇴계가 방백 심통원에게 보낸 편지글에 잘 드러나 있다.
대체로 왕궁과 국도에서 지방의 군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원에서 취하는 것은 무엇이며, 중국에서 저와 같이 숭상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는 선비나 도를 강하며 학업을 닦는 무리는, 대부분 세속의 시끄럽고 경쟁하는 것을 싫어하여 책을 안고 진 채 넓고 한가한 들판이나 조용한 물가로 달아나,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조용히 천하의 의리를 살핌으로써 그 덕(德)을 기르고 그 인(仁)을 익힐 것을 생각합니다. 이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기 때문에 서원에 즐겨 나아가는 것입니다. 국학과 향교가 조정과 시장 그리고 성곽의 안에 있어서 앞으로는 학교 규칙에 구애되고 뒤로는 잡된 것들이 침탈하는 것을 보게 되니, 그 효과를 어찌 함께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보건대, 선비가 배울 때만 서원에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어진 이를 얻는 것도 반드시 이곳에서 말미암으니, 저곳보다 우월한 셈입니다(『퇴계선생문집』서書, 상심방백上沈方伯).
지금 남아 있는 서원에 가보면 심신을 단련하기 좋은 조용한 산속이나 물가에 주로 자리잡고 있다. 하회마을 부근에는 지금도 비포장 길로 가야하는 병산서원이 있다. 과거에는 길이 좁아 버스가 가기 어려웠던 곳인데, 1990년에는 초입에서 버스가 빠져 답사를 망친 적이있었다. 하지만 이곳 누각인 만대루에 올라 저녁 노을에 물든 강가를 바라보길 한 번 권하고 싶다.
시간이 흐르면서 향교는 천시하고 서원을 중시하는 경향이 크게 늘어났다. 효종
때에 충청감사 서필원이 서원의 네 가지 폐단 가운데 하나로 이렇게 지적했다.
향교와 서원은 경중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사는 선비들은 사족이라 부르면서 조금만 재주와 식견이 있으면 서원에 적을 두고 원유(院儒)라고 합니다. 이들은 향교를 마치 주막처럼 보고 향교생을 노예처럼 대우하고 옛 성인에게 제사드리는 곳을 잡초가 무성하게 하여 국가에서 문(文)을 숭상하는 뜻을 헛되게 하고 마니, 이것이 첫째 폐단입니다(효종실록 8년<1657> 6월 21일).
서원이 크게 불어나 이제는 남설이 사회문제화 되었다. 선조 28년(1595) 7월에 긴요하지 않은 서원을 혁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를 두고 사관이 적은 것이다.
그 뒤에 곳곳에서 이를 본받아“우리 고을에도 제사지낼 만한 현인이 있다”고 강변하면서 연달아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폐단이 심하지 않았는데도 임금의 지시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은 서원이 없는 고을이 없고, 제사를 받는 자도 하찮은 사람이 많다(선조수정실록 28년<1595> 7월 1일).
숙종 때에도 김만중이 서원 남설에 대해 이렇게 상소했다.
서원을 설치한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으니, 한 읍에 7, 8군데에 이르고 한 도에 8, 90군데에 이릅니다. 서원의 성대함은 영남만한 곳이 없는데, 널리 토지를 점유하고 국역을 회피한 장정들을 많이 모아들였습니다. 매번 수령보다 센 권력을 휘두르며, 모여 놀면서 담소하되 서로 경박스런 논의만 합니
다. 아랫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선비의 습속이 아름답지 못하여 진실로 우려스럽습니다(숙종실록 7년<1681> 6월 2일).
영조 때는 전국에 서원이 1천 개가 넘었다고 한다. 서원은 향전(鄕戰)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향전이란 고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유력자간에 벌이는 싸움이니, 화담 서경덕을 배향한 개성의 화곡서원에서 벌어진 싸움이 그런 것이다.
이때에 송도의 화곡서원에서 위판(位版, 신주)을 훔쳐내어 깨뜨리는 변이 발생하여 큰 옥사가 일어났다.
송도에는 이전부터 향전이 있었는데, 송도 사람 임부양의 아들 임주상이 유적(儒籍, 유생 명단)에 올라 있는 데도 상중(喪中)에 아내를 얻자 진사 김영이 그의 이름을 유적에서 삭제했다. 그 뒤 성스러운 사당의 대문에 화재가 일어났고, 또 12년 뒤에는 누가 김영의 집 신주를 밤에 깨뜨렸다. 김영 등이“신주를 깨뜨리고 사당에 불을 지른 것은 모두 임부양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여기고, 도적을 물리친다면서 서로 모여 진정서를 올렸다. 유생 가운데 따르지 않은 조후빈 등 수십 명도 또한 도적들이라 지목하여 유생 명단에서 삭제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싸우다가 모두 서울에 있는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현종실록 1년<1660>9월 2일).
이 뒤로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이 사건은 개인 싸움이 아니라 향권을 둘러싼 집단 싸움이었다. 더구나 송도 안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중앙의 조정대신과도 연계가 되어 있었다. 서원은 당파 싸움의 본거지이기도 했으니, 성호 이익이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뿐만 아니다. 각기 색목(色目, 당파)을 정하여 나아가고 물러가는 데도 구별이 있으며, 자기 편을 모으고 다른 편을 공격하는 장소로 삼고 있다. 가장 아랫것들은 서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부역을 회피하는 소굴로 삼아 학문 강론은 도외시하고 있으니, 그 폐단은 붓으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 수십년 전에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한 사람을 위하여 서원을 중복으로 세우는 것을 금지했으나, 세력 있는 집은 금지하지 못했다. 또 금지령이 내린 뒤에도 함부로 세운 자는 훼철할 것을 명했으나 또한 훼철을 모면한 자가 아주 많았으니, 법질서가 문란한 것이 이와 같았다. (『성호사설』인사문人事門, 서원書院)
서원은 당쟁의 소굴이 되었고, 남설한 서원을 철폐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영조 때에 서원을 금지하자 편법으로 영당을 지어 이마저 금지시킨 일도 있었다.
우부승지 김조택이“서원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서원 설립을 금지한 뒤에는 영당(影堂, 영정 모시는 곳)이란 것을 곳곳에서 새로 세우고 있어 폐해가 똑같으니, 청컨대 일체 금지하소서”라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영조실록 2년<1726> 11월 10일).
서원 금지령을 내리면 편법으로 사우(祠宇)란 이름으로 세웠다. 사우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의 기능만 가진 것이지만, 서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였다. 매번 금지령이 내려졌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다가 결국은 고종 8년(1871) 3월에 이르러 된서리를 맞게 되었으니, 전국에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헐어버리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이때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대표적인 인물을 대상으로 한 사람에 한 서원만 철폐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서원 철폐령이다.
사립학교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구려 때까지 올라간다.
습속은 서적을 좋아한다. 가난하거나 천한 집까지도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 堂)이라 이름하고, 자제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밤낮으로 독서하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구당서』동이전 고려).
이 문장을 보면 경당은 개인적으로 설치한 교육기관이다. 형문(衡門) 즉 나무를 가로질러 문을 겨우 만든 누추한 집, 그리고 시양( 養{) 즉 하인이나 마소를 먹이는 천인의 집에서도 경당을 지은 것처럼 되어 있다. 이렇게 고대부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인재 교육을 시켰다. 이런 모습은 조선시대에 설치된 초등교육 시설인 서당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 때에도 민간에서 이와 비슷하게 교육을 시켰다.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거처하며 스승에게서 경서를 배운다. 조금 장성해서는 벗을 택하여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에서 공부한다.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고을의 선생에게서 글을 배운다(『고려도경』 동문同文, 유학).
개성에는 12개의 사학이 운영되어 흔히 12공도라 불렀다. 이 가운데 최충(984 1068)의 문헌공도가 가장 이름을 날렸으니, 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은 이러했다.
현종 이후에 전란이 겨우 멎었으나 아직 교육에 힘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때 최충이 후진을 모아서 힘써 가르쳤으므로 학도들이 모여들어 거리와 골목에 차고 넘쳤다. 드디어 9개의 반[齋]으로 나누어 낙성, 대중, 성명, 경업, 조도, 솔성, 진덕, 대화, 대빙이라 명명했다. 이들을 시중 최공의 학도라고 불렀으니, 과거를 보려는 자제는 먼저 그의 학도에 들어가 배우게 마련이었다.
매년 여름에는 귀법사의 승방을 빌어서 여름공부를 했는데, 학도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고 학력이 우수하면서도 아직 관직에 취임하지 않은 자를 선발하여 교도(敎導)로 삼아 9경(經)과 3사(史, 사기·한서·후한서)를 가르쳤다. 간혹 선배들이 들르게 되면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한 다음 시를 지어 성적 순서대로 방을 붙이
고 호명하여 들어가게 한다. 안에는 작은 술자리를 차려 그 좌우에 미혼자와 기혼자가 정렬하여 술잔을 받들게 하였는데, 나아가고 물러감에 예절이 있었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질서가 있었다.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읊다가 날이 저물면 모두 낙생영(洛生詠, 중국 낙양의 서생들이 즐기던 노래)을 하면서 끝을 내니, 보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며 감탄을 마지 않았다.
... 세상에서 12도라 하는데 최충의 학도가 가장 성대했다. 동방에서 학교가 일어난 것은 대체로 최충에서 시작되었으니, 당시에 그를 해동공자라 불렀다(『고려사』최충 전기).
공자와 맹자는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중시했다. 조선시대 수령이 해야 할 일곱 가지 중요한 임무가운데도 학교 진흥이 들어가 있다. 여항 시인이었던 천수경(?~1818)이 학생들을 모아서 60전만 받고 저렴하게 가르쳤더니 300명이나 몰려들었다고 하니, 지금도 우리 사회에 교육열이 대단한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다. 지혜로운 백성을 디딤돌로 삼아 국가를 운영하려 한 것이다. 멀리 고구려 때부터의 교육이 그러했다.
■ 참고 자료
1.『 고려도경』(서긍 저)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2.『 성호사설』(이익 저)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3.『 우서』(유수원 저)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4. 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5.『 퇴계선생문집』(이황 저)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6.『 희조질사』(이경문 편) ;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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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장희, [조선시대의 사학]『 조선시대 성균관과 사학』 성균관유도회, 2004
2. 정순우, [군사부일체 사회의 버팀목, 그러나 불우한 삶]『 조선 전문가의 일생』 글항아리, 2010
3. 최완기,『 한국의 서원』대원사, 1991
■ 사진 출처
1. 나주향교 ; 송기호 사진
2. 강릉향교 ; 강릉시청 홈페이지
3. 강학당의‘백운동’,‘ 소수서원’현판 ; 송기호 사진
4. 소수서원 입구의 글씨 ; 송기호 사진
5. 서원에서의 공부 ;『 국립대구박물관』도록, 1994, 83쪽
6. 병산서원 누각 ; 송기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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