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교,서원)

[스크랩] 하회마을 ... 겸암정사

장안봉(微山) 2013. 2. 19. 07:32

 

 

 

 

                                     겸암정사                    謙巖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애 류성룡의 맏형인 류운룡(柳雲龍)이 1564년(명종 19)에 지었다고 한다. 위치는 하회마을 북쪽 화천(花川)을 끼고 우뚝 솟아 있는 부용대의 서쪽, 옥연정사의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하회마을 류씨들의 2대 지주인 류운용, 류성룡 형제와 관련된 건축들은 항상 하나의 쌍(雙)으로 사이좋게 존재하고 있다. 양진당과 충효당, 빈연정사와 원지정사,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그리고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화천서원과 병산서원 ... 실상은 양쪽 후손(後孫)들이 치열하게 벌여왔던 내적 경쟁(競爭)인 동시에 외적 단합(團合)의 표상들이다.

 

 

 

 

 

 

 

 

 

 

 

 

                                   겸암  류운용                  謙巖  柳雲龍

 

 

 

 

 

겸암 류운용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6살 때 독서를 시작하여 15세에 사서와 경서(經書)의 대의(大義)를 관통하였고, 16세 때인 1554년에는 부친의 명에 의하여 도산(陶山)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이때는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을 본격적으로 열지 않았을 시기이었고, 수업하는 선비들도 그리 많지 않을 시절이었다.

 

 

그러나 류운용은 본래 과거시험 문장인 공령문(功令文 ... 과거시험의 문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향시(鄕試)에 몇 번이나 합격하였으나, 나이 30세를 넘기면서부터는 아예 과거를 단념하고 오직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겸암 류운용과 각별하였던 '송암 권호문'이 대표적인 산림처사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이러한 겸암의 현실 대응은 당연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는 34세에 이르러 음직(陰職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오르는 제도)으로 출사하는데, 중앙관직으로는 전함사별좌, 의금부도사, 사포서별좌, 한성부판관이었고, 지방관직으로는 진보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인동현감을 지냈다. 이러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애석하게도 사문(師門)에서 갈고 닦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풍기군수로 부임한다. 그는 부임 즉시 험준한 죽령 산세를 이용하여 왜군을 막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명나라의 일방적인 대일(對日)교섭에서 우리나라는 당파마저 편승하여 화전양론(和戰兩論)으로 정국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그의 동생 '서애 류성룡'은 이러한 혼란기에 국가를 책임질 영의정으로서의 위치에 있었으며, 나라를 위해 지공무사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나, 주화오국(主和誤國)이라는 터무니 없는 모함을 받게 된다.곤경에 처한 아우 류성룡을 겸암 류운용은 단순한 동기간의 우애로서가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관인이요, 지근 거리에서 줄곧 지켜본 동반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화의(和義)를 통한 자강(自强)이라는 류성룡의 고뇌를 강력하고도 명쾌하게 변호하였다. 

 

 

 

 

 

 

 

 

 

 

 

 

 

 

 

 

 

 

 

겸암정사는 겸암 류운용이 1567년(명종 22)에 세우고, 후에 학문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다. 부용대 기슭, 화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어서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마을 쪽에서는 낙엽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낮은 담장 안으로 둘러싸인 경내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홑집으로 'ㄱ'자형이며, 사랑채인 정사(精舍)는 곁집 형태의 '一'자형으로 앞 퇴를 다락집형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정사의 왼쪽에 부설한 온돌 아궁이는 당초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기능만을 살렸을 뿐 너무나 질박하여 깔끔을 떨 생각일랑 추호도 없어 보이고 있다.   

 

 

 

 

 

 

 

 

 

 

 

 

 

 

 

 

 

 

 

 

 

 

 

겸암 류운룡(謙巖 柳雲龍)은 그의 나이 15세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힘썼으며, 이황이 그의 향리(鄕里)인 도산(陶山)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서 배움을 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황 또한 류운용의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에 감복하여 총애하였다고 한다. 

 

 

후일 겸암 류운룡이 화천(花川) 건너 부용대의 서편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는데, 스승인 이황(李滉)은 주역(周易)의 겸괘(謙卦)에 형상하기를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君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이 담긴 ' 겸암정 (謙巖亭) '이라는 현판을 써 주며 '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 가서 같이 앉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해 아쉽네 ( 聞君構得新齋好 欲去同牀恨未如 ) 라는 편지글을 적어 주기도 하였다. 겸암 류운룡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겸암정(謙菴亭)이라는 당호는 퇴계 이황이 겸안 류운용의 학문적 자질과 성실하메 감복하여 지어준 것으로 류운용이 이를 귀하게 여기어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고 한다. 절벽 가장자리에 '일'자형 정사가 있고, 그 뒷편에 살림채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퇴계 이황은 이 현판을 써주면서 편지를 보내왔다.

 

  

 

 

문군구득신재호     聞君構得新齋好      듣건데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

욕거동장한미여     欲去同壯恨未如      가서 하룻밤 보내려 하나, 말미를 얻을 수 없어 아쉽네

 

 

 

 

 

 

 

 

 

 

 

 

 

 

 

 

 

 

 

 

 

 

 

 

 

 

 

 

 

 

                       아형유정관       我兄遺亭館         우리 형님 정자 지어

                       겸암유구명       謙巖有舊名         겸암이라 오랜 이름 붙였네

                       죽영정림계       竹影淨臨階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쓰러 내렸고

                       매화개만정       梅花開滿庭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유종방초합       遊從芳草合         발 끝에 향기로운 풀냄새 모이고

                       선로백운생       仙路白雲生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창억공수루       愴憶空垂淚         그리움 눈물되어 소리없이 내리고

                       강유야유성       江流夜有聲         강물도 소리 내며 밤새 흐르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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