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충남 보령]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 가족 묘역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37

 

토정 이지함 가족묘역 전경

 

 

 

 

 

한산이씨12세 찬성공 휘 치(贊成公 諱 穉)의 묘소

한산이씨12세 찬성공 휘 치(贊成公 諱 穉)의 묘비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行通政大夫水原判官李公之墓/贈貞敬夫人光州金氏祔葬于左同塋異室

 

 

토정 이지함의 장자 충의위(諱 山斗)(묘소 중간)와 초배 광주김씨(좌측) 계배 연일정씨(우측)의 묘소-품(品)자 형태이다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

1517(중종 12)∼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ㆍ기인(奇人), 『토정비결(土亭祕訣)』의 저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이며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이다.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ㆍ의학ㆍ복서(卜筮)ㆍ천문ㆍ지리ㆍ음양ㆍ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573년(선조 6)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고, 재직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굶주린 사람)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 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가 심해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1713년(숙종 39)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토정 이지함 묘소

토정선생이공지묘/공인완산이씨부좌

 

 

찬성공의 차자인 한창부원군(諱 之茂) 묘소

찬성공의 차자 한창부원군(諱 之茂)묘비-

증순충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령 경연관상감사한창부원군성균생원이공지묘/증정경부인능성구씨부장우좌동영이실

한창부원군의 장자 한흥군 이공산립 묘소

 

 

 

 

 

 

 

토정 이지함의 차자인 통덕랑공(휘 山輝)(좌측)와 배위 홍주이씨묘(중간). 우측은 도련님산소이다

성암공의 손자(아계상공의 계자로서 휘 慶愈) 묘소이며 일명 도련님 산소라 한다 

 

 

성암 이지번(省菴 李之蕃)

?∼1575(선조 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佰), 호는 성암(省菴)ㆍ사정(思亭)ㆍ구옹(龜翁). 아버지는 판관 치(穉)이고, 『토정비결』로 유명한 지함(之菡)의 형이며, 선조 때 영의정 산해(山海)의 아버지이다. 천문지리에 모두 정통하였다.

인종 때 문음으로 추천되어 장례원사평이 되었으나 당시 윤원형(尹元衡)이 국권을 잡아 횡포하므로 벼슬을 버리고 단양의 구담(龜潭)에 집을 짓고 정신을 수양하며 세월을 보냈다.

항상 푸른소[靑牛]를 타고 강가를 오르내리고 또 칡넝쿨로 큰 줄[索]을 만들어 구담의 양쪽 벽에 붙들어매고 날아가는 학을 만들어 매달아 타고 내왕하니 사람들이 보고 신선이라 불렀다. 선조 즉위 후에 청풍군수를 지냈다.

찬성공의 장자인 성암공(휘 之蕃) 묘소

찬성공의 장자 성암공(휘 之蕃)묘소

성암공(휘 지번) 묘비-

증순충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령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한주부원군행통정대부내자시정이공지묘/

증정경부인의령남씨부장우좌동영이실

 

 

 

 

명곡 이산보(鳴谷 李山甫,1539~1594)

 

 

본관 한산(). 자 중거(). 호 명곡(). 시호 충간(). 1567년(명종 22) 사마시를 거쳐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해미()현감 ·정언()을 지낸 뒤 이조정랑 ·사인() ·집의() ·대사헌을 거쳐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으로 난국을 수습, 이듬해 명나라에 하절사(使)로 다녀와서 대사헌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대사간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명나라 원군()이 당도하였으나 군량이 떨어지자 왕명으로 도검찰사(使)가 되어 삼남()지방에 내려가 군량을 수집하여 위기를 면하게 하였고 1594년 대기근을 수습하던 중 과로로 순직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한흥부원군()이 추봉,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보령의 화암서원, 서천의 건암서원에 제향되었다. 

 

한창부원군의 차자 명곡공(諱 山甫) 묘소

명곡공 묘비-

유명조선 증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령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한흥부원군

행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 경연세자좌빈객지춘추관사 증시충간공이공산보지묘/정경부인덕수이씨부좌

 

석루 이경전(石樓 李慶全)

 

1567(명종 22)∼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치(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번(之蕃)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산해(山海)이며, 어머니는 조언수(趙彦秀)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6년 예조좌랑ㆍ병조좌랑을 지내고, 1608년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을 꾀하는 소북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가 강계에 귀양갔다.

이 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충홍도(忠洪道)ㆍ전라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1618년(광해군 10) 한평군(韓平君)을 습봉(襲封)하고 좌참찬에 올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들에게 아첨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였다.

이어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고, 1637년에 장유(張維)ㆍ이경석(李景奭) 등과 함께 삼전도(三田渡)의 비문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고 거절하였으며,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문필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석루유고』가 있다.

성암공의 손자(아계상공의 아들)인 석루공(휘 慶全)묘소

석루공(휘 慶全)묘소

석루공(휘 慶全)묘비-

숭록대부행의정부좌참찬겸지경연춘추관사홍문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한평군이공지묘/정경부인안동김씨부장우후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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