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충남 예산]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35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본관 한산()이며 자는 여수(), 호 아계(종남수옹(), 시호 문충()이다. 1539년(중종 34)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현감을 지낸 이지번(), 어머니는 의령남씨(南脩), 배위는 양주조씨(趙彦秀의 따님)이며, 숙부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之涵)이다. 한음 이덕형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어려서 숙부(
작은 아버지)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부친이 산해관에서 그를 잉태하는 태몽을 꾸어 이름을 산해라 지었다고 한다.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그의 총명함이 명종까지 회자되었다고 전해진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의 집안이 화를 입게되자 고향인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였다. 

초시를 거쳐 성균관 유생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홍문관 수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동인()에 속했다. 1563년 이감()으로 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러 서인(西) 윤두수() ·윤근수()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80년 병조참판에 오르고 이어서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겸직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당시 조정은 정여립기축옥사와 신묘년의 세자책봉 사건을 두고 조선의 정가는 술렁였다. 정철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저문제()가 발생하자 아들 이경전()을 시켜 정철()이 인빈김씨신성군()을 해치려고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때문에 정철은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서인 세력의 영수 정철뿐만아니라 서인 모두를 문책해야 한다는 강경파적인 입장에 있었다. 이때문에 동인은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갈리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개성에 당도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 양사()로부터 국정()을 그르치고 왜적()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백의()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갔다가 1595년 돈령부영사()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때 북인은 다시 기성 북인들에 불만을 가진 소북과 기성 세력인 대북으로 갈라졌는데 이산해홍여순과 함께 대북세력에 속했으며 영수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00년(선조 33) 이산해는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때 이산해는 홍여순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육북과 골북으로 분열하였다. 1602년 관직에서 물러난 대북의 영수로 역할하였다. 하지만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세력과 대립하여 광해군을 옹립하는 대북의 입장에 있었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원상()으로 국정을 주도했고 소북파를 견제하여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는데 역할하였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09년 음력 8월 23일 사망하였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서화()에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 선조 때 문장 8가()라 일컬었다. 저서로 《아계유고(稿)》가 있고, 글씨에 《조정암광조묘비(》(용인)가 있다. 
[출처] 이산해 [李山海 ] | 네이버 백과사전

 

 

 

 

 

 

 

 

 

 

 

 

 

 

 

 

 

묘소에서 내려다 본 사당

아계 이산해 사당

 

 

신도비각

아계 이산해 신도비-번암 蔡濟恭이 撰하고 韓確의 글씨를 集字하였으며 篆額은 眉叟 許穆의 글씨를 集字하여 1810년에 세웠다 한다

 

 

연당(蓮塘)과 삼신도(三神島)-우측 끝에 신도비각이 보인다

연당(蓮塘)과 삼신도(三神島)

 

 

 

연당에서 바라본 아계 묘소 원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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