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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첫 답사는 ‘조선 왕릉’이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 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2009년 6월 동구릉·광릉·태릉 등 조선시대 왕릉(王陵)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 왕릉 40기 전체를 실사한 후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돼야 할 가치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선 왕릉을 실사한 유네스코 심사위원은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도 놀랍지만 재위한 모든 왕의 무덤이 남아있는 경우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고 경탄했다. 단 15분 만에 유네스코 문화유산 결정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1-2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느 정도로 파격적인지는 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 회의장에서도 나타났다. 유네스코 전문위원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40기 내역과 그 무덤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② 서오릉(사적198호) ③ 서삼릉(사적 200호) ④ 헌인릉(사적 194호) ⑤ 영녕릉(사적 195호) ⑥ 선정릉(사적 199호) : 삼성동 ⑦ 태강릉(사적 201호) : 태릉 ⑧ 홍유릉(사적 207호) ⑨ 광릉(사적 197호) 제7대 세조 및 정희왕후 윤씨. ⑬ 융건릉(사적 206호) ⑭ 정릉(사적 208호) :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정릉) ⑯ 파주삼릉(공순영릉, 사적 205호) ⑰온릉(사적 210호) : 제11대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 이 글에서 설명하는 방향은 간단하다. 조선왕 릉이란 커다란 산맥을 넘기 위해 기초적인 정보는 사전에 무장하자는 것이다. 왕릉 현장에 도착해 이들 정보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왕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 딱딱하게 여겨지는 왕릉을 조성하기 위한 제반 내역을 먼저 설명하려고 한다.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1-3 519년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가 만든 능·원·묘 등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른다. 이중 27대에 이르는 역대 왕·왕비와 추존 왕·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능을 일러 왕릉이라고 한다. 119기 중 능이 42기, 원이 13기 그리고 묘가 64기로 분류된다. 능원은 왕족의 무덤을 말하는 것이며, 능·원·묘로 묻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이에 따르면 동쪽에 청룡(靑龍), 서쪽에 백호(白虎)라 부르는 산줄기가 서로 감싸고 안산(案山)이 능의 전방으로 우회해야 한다. 또 안수(案水)는 능의 좌우측에서 발원해서 연못과 도랑물이 능 앞의 명당(明堂)을 지나 안산으로 흘러 냇물에 임하는 형세를 최고로 본다. 순조왕후 빈전도감의궤. 이종호 제공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훙서(薨逝) 또는 승하(昇遐)라고 하며, 군자나 대부는 졸(卒·수명을 다해서 늙어 죽는 것) 또는 종(終), 소인은 사(死)라 한다. 국상이 벌어지면 이조판서는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하여 임시기구인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이 국장을 분담했다. 순조인릉 산릉도감의궤. 이종호 제공 또한 승하한 왕이나 왕비에게 시호(諡號), 능호(陵號), 묘호(廟號·왕후에게는 없다), 존중해서 부르는 존호(尊號)를 내려준다. 일반적으로 ‘조’는 왕조를 처음 열거나 그에 준하는 공로가 있을 경우에만 붙였고, ‘종’은 그 뒤를 이은 왕에게 붙였다. 철종 때 순종을 순조로 꾸면서 묘호를 높이는 풍조가 생겼고 대한제국이 되자 묘호를 대대적으로 격상했다. 산릉도감은 금정(金井·광중(壙中)을 파는 일), 현궁(玄宮), 석인(石人), 석수(石獸), 비각, 정자각, 재방(齋房, 제관이 목욕재계하는 처소로 지은 재실(齋室)과 제기고(祭器庫), 제수·제복 등 제사일체를 관장하는 전사청(典祀廳),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香大廳) 그리고 수릉군(守陵軍) 70명이 능을 지키기 위해 지은 수복방(守僕房·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가 있던 방), 부엌인 수라간(水刺間) 등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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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자리는 왕궁에서 백리 거리 안쪽으로 정한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은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가 수도권 일대에 모여 있는 이유다. 궁궐 가까이 왕릉을 조성한 것은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오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기도 하다. ●세조 이후 왕릉 간소화…저렴하고 견고 회격으로 만들면 무덤 자체가 견고하고, 공사기간과 공사인원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예상외로 좋은 결과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문정왕후 태릉을 도굴하려고 100명이나 동원했지만, 회격으로 만든 무덤이 워낙 견고해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왕비나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의 형태를 ‘단릉’이라고 한다.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건원릉(태조)과 정릉(중종)뿐이다. ‘쌍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형태로 태종의 헌릉이 가장 돋보인다.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형태로 조선 왕실의 기본 능제다. 그리고 순종의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으로 유일한 동봉삼실의 ‘삼합장릉’이다. 필자는 많은 사람에게 조선 왕릉을 가능한 한 자주 방문하라고 추천한다. 건강한 삶을 위해 시간 날 때마다 등산복을 입고 조그마한 산등성이라도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또 숲이 우거진 곳에서 삼림욕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왕릉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좀더 발품을 팔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전체를 다뤄달라는 의견이다. 이들 의견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사항이므로 이들을 제4구역으로 나눠 설명한다. 틀이 있는 제례 공간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1-6 품격 있게, 철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왕릉을 답사하려면 왕릉의 기본인 상설제도의 기본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왕릉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다리인 ‘금천교’다. 이 다리는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속세와 구분해주는 구실을 한다.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커다란 문이 있다. 붉은 석간주칠을 한 신문(神門)인 ‘홍살문(혼전문)’이다.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웠는데, 중앙에 삼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제례 시작을 알리는 가로 세로 6자(1.8m) 정도의 네모난 ‘배위(拜位·판위 또는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함)’가 있다. 혼백을 부를 때 여기에서 4번 절을 한다.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도(향도)’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도(御道)’로 구분된다. 좌측 신도는 우측 어도보다 약 10cm 정도 높고 넓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차이가 있다. 참도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 정자각 계단은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 만든다.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이는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의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이다.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문으로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다. 그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끝낸다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隸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 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자 형태로 나무뚜껑을 올린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세종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이 능침의 강(사초지 경사면)이 끝나는 정자각 뒤 동북쪽에 세웠는데 규모는 혼유석의 4분의 1 정도다. 정자각 앞쪽 양옆에는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고 진설하는 ‘수라청’과, 능원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수직방)’이 있다. 수라청과 수복방은 참도를 향해 서로 마주하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며, 맞배지붕이다. 수라청 근처에는 제례 준비를 위한 ‘어정’이 있다. 어정 위치에 따라 수라청은 아래위로 자리를 이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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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까지 올라가는 능역은 기본적으로 잔디로 조성한다. 왕릉의 잔디는 특별히 사초(莎草)라고 부른다. 정자각 뒤로 작은 동산 모양의 사초지가 이어지는데, 이는 조선 왕릉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사초지 위에 오르면 장대석이라 부르는 긴 돌들이 단을 지어 놓여 있고 가장 높은 상계에 능의 주인이 영면한 봉분이 자리한다. 봉분 주변 3면에 곡장이라는 낮은 돌담이 조성됐다. 궁궐에서 담장(높이 21자1치)을 치는 것과 같다. 북면에 일직선으로 낮게 담을 쌓은 곳은 담장(垣墻)이라 하는데 이곳을 능침이라 한다. 난간석 앞에 석양(石羊) 2좌(二座)와 석양 사이에 석호(石虎)를 동서쪽에 각각 1좌와 북쪽에 2좌씩 담장을 향하여 배치한다. 석호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니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하고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특히 석호는 중국과 베트남의 능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수호 조각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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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단(上階段) 장대석 위 제1단 능상 정면에는 장방형의 석상(石床)을 둔다. 이 석상은 혼유석(魂遊石) 또는 상석이라고도 한다. 석상 좌우에는 석망주(石望柱) 또는 망주석(望柱石)이라 불리는 석상을 세운다. 석인을 설치하는 습속은 전한(前漢·기원전206〜기원24)때부터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초기부터 시작됐고, 고려초기부터는 더욱 활발하게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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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내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와 무덤 안 벽화도 큰 관심사다. 석체(石砌)에는 같은 크기의 황장목판(黃腸木板)을 놓고, 그 위에 돗자리(地衣)와 요를 깔고 그 위에 재궁을 안치하고, 마지막으로 문 안에다 발을 드리운다.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가 석실을 만든 공인(作工)을 거느리고 현궁(玄宮)의 문짝돌을 닫고, 끝으로 문의석(門倚石)을 더 놓는다.’ 참고문헌 :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조선 왕릉은 무려 42기나 된다. 태조 이래 공식적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은 27명에 불과하지만 왕후와 사후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까지 인정되기 때문에 숫자가 더 많아졌다. 여기에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포함되지 않는다.
문화재청은 총 42기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齊陵·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厚陵·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를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이 건은 단 1년 만에 유네스코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다.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조선시대(1392〜1910) 519년의 역사를 포함해 당대의 건축 양식과 미의식,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의 결정체기 때문이다.
① 유교사상과 토착신앙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장묘(葬墓) 문화 공간이다.
② 자연경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공간 배치와 빼어난 석물(石物) 등 조형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③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④ 왕릉 조성이나 관리, 의례 방법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의궤(儀軌)’, ‘능지(陵誌)’ 등 고문서가 풍부하다.
⑤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3세기 이래 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능침이 조성되긴 했다. 하지만 이후 눈에 띄게 규모가 작아지고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왕릉 대신 석탑이 조성됐다. 베트남 경우엔 중국 왕릉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조선 왕릉에 비하면 독자성이 떨어진다. 중국 명·청 시대의 황릉(皇陵)은 자연미를 엿볼 수 없는데다 더 이상 제례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서울시의 팽창과 개발을 견디고 녹지가 잘 남아 있는 것만으로 세계유산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수도권 일대 조선 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무려 1935만3067㎡에 이른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조선 왕릉에 최고 등급인 ‘등재 권고’ 평가를 내린 이유에 대해 5분간 설명했다. 이후 호주 등 4개국 위원의 지지 발언이 이어지자 마리아 세군도 위원장은 “모두 조선 왕릉의 가치를 인정하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심의를 끝내겠다”고 말했다. 등재 결정에 걸린 시간은 단 15분. 논란이 되는 유산의 경우 3시간 이상 심의가 이어질 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 왕릉의 등재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① 동구릉(사적 193호)
1) 건원릉 : 제1대 태조.
2) 현릉 : 제5대 문종 및 현덕왕후 권씨.
3) 목릉 :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4) 휘릉 : 제16대 인조계비 장열왕후 조씨.
5) 숭릉 : 제18대 현종 및 명성왕후 김씨.
6) 혜릉 : 제20대 경종비단의왕후 심씨.
7) 원릉 : 제21대 영조 및 계비 정순왕후 김씨.
8) 수릉 :추존문조 및 왕후 신정왕후 조씨.
9) 경릉 : 제24대 헌종 및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1) 경릉 : 제9대 성종 부친 덕종 및 소혜왕후 한씨.
2) 창릉 : 제8대 예종 및 계비 안순왕후 한씨.
3) 명릉 : 제19대 숙종 및 계비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4) 익릉 : 제19대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
5) 홍릉 : 제21대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
1) 효릉 : 제12대 인종 및 비 인성왕후 박씨.
2) 예릉 : 제25대 철종 및 비 철인왕후 김씨.
3) 희릉 : 제11대 중종계비 장경왕후 윤씨.
1) 헌릉 : 제3대 태종 및 원경왕후 민씨.
2) 인릉 : 제23대 순조 및 순원왕후 김씨.
1) 영릉 : 제4대 세종 및 소헌왕후 심씨.
2) 영릉 : 제17대 효종 및 인선왕후 장씨.
1) 선릉 : 제9대 성종 및 계비 정현왕후 윤씨.
2) 정릉 : 제11대 중종.
1) 태릉 : 제11대 중종계비 문정왕후 윤씨.
2) 강릉 : 제13대 명종 및 인순왕후 심씨.
1) 홍릉 : 제26대 고종 및 명성황후 민씨.
2) 유릉 : 제27대 순종 및 순명황후민씨, 순정황후 윤씨.
⑩ 장릉(사적 203호, 파주) 제16대 인조 및 인열왕후 한씨.
⑪ 장릉(사적 196호, 영월) 제6대 단종.
⑫ 의릉(사적 204호) : 제20대 경종 및 계비 선의왕후 어씨
1) 융릉 :추존 장조(사도세자) 및 헌경왕후 홍씨.
2) 건릉 : 제22대 정조 및 효의왕후 김씨.
⑮ 사릉(사적 209호) : 제6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1) 공릉 : 제8대 예종비장순왕후 한씨.
2) 순릉 : 제9대 성종비공혜왕후 한씨.
3) 영릉 : 제21대 영조 맏아들 추존진종 및 효순왕후 조씨.
⑱장릉(사적 202호, 김포) : 제16대 추존 원종(인조부친) 및 인헌왕후 구씨.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조선 왕릉의 세계유산 등재가 민간 차원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점이다. 동구릉이 소재한 경기도 구리시에서 일부 역사문화학계 인사 등이 왕릉관광지 개발을 위해 동구릉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자 2004년에 문화재청이 이를 발전시켜 각지에 분산된 조선왕릉 40기를 일괄 신청한 것이다.
세계유산에 지정된 조선 왕릉을 답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정된 조선 왕릉 자체가 40기나 되는데다 여러 곳에 산재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릉 하나하나의 면적이 넓어 웬만한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더구나 조선 왕릉에 대한 정보로 무장하지 않으면 한두 개 왕릉만 본 후 지치기 마련이다. 모든 왕릉이 똑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왕릉에 대한 전문학자나 유산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문용어와 한자가 빈번히 사용되는 왕릉에 대한 설명을 읽는 것조차 간단하지 않다.
다행히도 왕릉이 조선왕조 519년 동안 42기나 만들어졌다는 건 이들 왕릉이 어떤 규범과 절차를 기초로 축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덕분에 왕릉에 대한 기본을 이해한다면 어렵게 느껴지는 왕릉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왕릉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고 해도 딱딱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500년 동안 견지된 남다른 노하우를 단숨에 이해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전문적인 부분은 여타 전문 자료로부터 차용된 부분이 많아 심히 우려된다. 인용된 자료에 대해 색인을 했다고는 하지만 누락되거나 불비한 부분에 대해 각별한 양해를 바란다.
왕릉은 왕으로 등극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왕이 즉위하는 해에 재궁(梓宮·시신을 넣을 관)을 만들고, 1년에 한 번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재궁 바닥에는 쌀을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칠성판(북두칠성의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나무판)을 놓는다. 그 위에 붉은 비단 요를 깔고 시신을 모신다. 이후 재궁을 찬궁(欑宮)에 모시게 되는데, 이 안에는 사방신이 각 방위에 따라 위치하고 있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시신을 모신 후 도끼 모양이 그려진 붉은 비단으로 덮는다. 이후 병풍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린다.
이어서 왕이 묻힐 곳인 택지(擇地)를 정한다. 이 작업은 대부분 지관이나 대신이 했지만 왕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왕릉은 풍수지리설을 기본으로 한다.
중국 후한 때 중장통(仲長統·179〜219)이 지은 ‘낙지론(樂志論)’에 의하면 명당이란 ‘산을 등지고 냇물에 임해 도랑과 연못이 이어있고 대나무가 둘러졌으며, 앞에는 마당과 채소밭 뒤에는 과수원이 있다’고 적었다. 신라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시대까지 우리 선조들은 이런 지형을 길상지(吉祥地)라 했다.
●장례를 담당하는 기관…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
빈전도감은 겉과 안이 흰 비단옷을 9겹으로 입히는 습(襲), 염(殮), 성빈(成殯), 빈전(殯殿)을 설치한다(세자나 왕세자빈은 빈궁(殯宮), 그 외 일반인은 빈소(殯所)라 한다). 재궁 설치와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 장례 후에 3년간 신위(神位)를 안치하는 혼전(魂殿)에 들어갈 물건 준비도 빈전도감의 몫이다. 참고로 염은 소렴과 대렴으로 구분하며, 소렴은 겹옷과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대렴 때는 겹옷과 겹이불 90겹을 입힌다.
국장도감은 재궁, 견여(肩輿·가마), 반우거(返虞車·수레), 보여(寶輿·금으로 만든 도장을 싣는 가마), 명기(明器·생전에 쓰던 물건을 상징하지만 규모가 매우 작으며 왕후 능에는 넣지 않음), 책보(冊寶·옥책(玉冊)·금보(金寶)·금인(金印)을 말함), 복완(服玩), 청석으로 만드는 지석(誌石), 제기(祭器) 등을 만든다. 옥책이란 왕이나 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드리는 글로 재질은 옥이다.
현재 알려진 왕의 명칭은 후대에 고친 것이다. 조선조의 왕 중 묘호가 조(祖)인 경우는 추존된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문조(文祖)를 제외하고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다. 참고로 정2품 이상의 재상이 죽어도 시호를 내려줬다.
능호는 왕이나 왕후 또는 추존된 왕이나 왕후에게 내려줬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웠으므로 건원(健元)이란 두 글자를 사용하고 그 외는 모두 외자이다. 왕세자나 왕세자빈 그리고 후궁 소생으로서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생모에게 원호(園號)를 내려주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는 대군(大君)이나 군(君)은 모두 묘(墓)라 한다. 묘호(廟號)는 왕이 승하한 뒤에 이름을 피해 종묘에 봉안하는 호칭으로 태조, 세조, 태종, 세종 등이다.
장례기간은 죽은 뒤 5개월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중국 황제가 7개월인데 비해 짧은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후국이기 때문이다.
능 관리는 영 1명과 참봉 1명을 두고 진행했다.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봉사손(奉祀孫·제사를 받들 수 있는 후손)을 자유롭게 임용하도록 했다.
조선 초기에 분묘는 석실과 석곽으로 만들고, 상부에 봉분을 만들었다. ‘국조오례의’에는 두 명을 안장하는 합장릉 형식의 석실 구조가 기록돼 있다. 석실을 조립하고 안에 재궁을 넣은 다음, 석실을 삼물(석회·세사·황토를 섞은 것)과 숯으로 감싸서 땅에 묻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했다.
15세기 전반까지 대부분의 왕릉 내부는 석실로 조성됐는데 이 같은 왕릉 조성에 엄청난 인원과 예산이 필요하다. 왕릉을 만드는 일에 각종 부작용이 일어나자 세조가 이를 우려해 왕릉을 간소화하라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쓰지 말라.”
석실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돌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므로, 그 대안으로 회격(灰隔·관을 봉분 속 광중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회로 메워서 다지는 일)을 채택했다. 세조의 유언으로 광릉이 조선왕릉 중 최초로 회격을 이용한 방식으로 조성됐다. 이 방식은 석실을 만드는 대신 재궁 위에 덮을 외재궁을 따로 만들고, 그 위에 삼물을 채우고 남쪽으로 퇴광을 만들어 그 밑으로 재궁을 넣는 방식이다.
●봉분에 따라 나뉘는 ‘릉’
조선 왕릉은 기본적으로 봉분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마련한 형태를 말한다. 경릉(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이 유일하다. ‘동원이강형’은 하나의 정자각을 뒤에 두고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로 세조의 광릉이 효시를 이룬다. ‘동원상하봉’은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의 위아래에 걸쳐 각각 조성된 형태를 말한다.
더불어 왕릉은 천하의 명당, 즉 길지를 엄선해 조성한다. 기(氣)가 충만한 곳에 조상을 모시기 위해서다. 조선 왕릉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천장(遷葬·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을 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 붕당 간의 정쟁과 풍수적 논리로 옮겨진 조선 왕릉은 15개소에 이를 정도다.
풍수지리에 나쁘다고 해서 천장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더라도 왕릉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그 자리가 왜 그렇게 좋은 자리인지, 즉 기가 높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유산을 답사하면서 덤으로 기를 한껏 받을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왕의 무덤을 기준으로 4구역으로 답사
‘과학유산답사기’에서 설명하는 왕릉을 선정하는 데도 약간의 기준이 있다. 처음에는 40기에 달하는 모든 왕릉을 답사하는 게 아니라 왕릉 중에서 정식 왕으로 등극한 경우를 기본으로 했다. 추존된 왕이나 왕비, 계비는 기본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의도다.
그러나 동구릉이나 서오릉 등 많은 왕릉이 한 명씩 독자적인 능으로 조성되지 않다는 게 발목을 잡았다. 사실상 조선 왕릉 중에서 단릉이 오히려 거의 없으므로 동일한 구역에 있는 추존 및 왕비, 계비의 왕릉을 함께 다루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왕조 27왕 중 24왕(정종, 연산군과 대원군 제외)의 왕릉에 대한 답사를 기본으로 했음에도 앞에 설명한 기준에 따르면 세계유산에 지정된 40개 왕릉 중에서 33개소나 답사에 포함된다.
앞에서 열거한 ①번 동구릉(사적 193호)부터 ⑬번 융건릉까지, 이들 33개소를 답사하는 게 만만치 않다. 왕릉 자체가 한 곳에 있지 않고 각지에 산재해 있는데다 왕릉 구역이 매우 넓기 때문이다. 웬만한 체력으로 한두 개의 능을 보고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각 왕릉마다 갖고 있는 특이성이 있으므로 이들을 주마간산으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필자가 왕릉 40개소 중에서 33개소를 설명한다고 하자 나머지 7개소인 정릉(사적 208호), 사릉(사적 209호), 파주삼릉(사적 205호), 온릉(사적 210호), 장릉(사적 202호)도 함께 설명해달라는 주문이 여럿 있었다.
① 제1구역 : 동구릉, 홍유릉, 사릉, 광릉
② 제2구역 : 서오릉, 서삼릉, 온릉, 파주삼릉(공순영릉), 파주장릉, 김포장릉
③ 제3구역 : 태강릉, 의릉, 헌인릉, 선정릉, 정릉
④ 제4구역 : 영영릉, 장릉, 융건릉
이 일정은 지역과 거리를 감안했지만 기본적으로 설명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타 답사처럼 일사분란하게 틀에 맞춰 답사하기는 어렵다. 각자 편의에 따라 답사할 일정과 장소를 정하기 바란다. 특히 많은 왕릉이 서울시내 또는 인근에 위치하는데다 세계유산에 지정된 만큼 찾기 쉬우므로 이곳에서 별도로 설명하지 않는다.
●왕릉에 얽힌 짧은 역사 읽는 재미도 솔솔
큰 기대를 걸고 왕릉에 도착해 안내도에 따라 홍살문을 거쳐 정자각, 비각 등을 보고 침전으로 올라가면 봉분과 석물이 여러 개 보이며 낮은 담장이 있는 정도로만 느껴진다. 몇 개의 능을 보고 나면 ‘그것이 그것 같이’ 느껴져 지루하게 마련이다. 이는 40개나 되는 왕릉에서 별다른 차별성을 찾기 어려워서 생기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각 왕릉의 건축적인 특성 등 전문적인 정보와 함께 왕릉에 얽힌 소사를 간략하게 설명해 이해를 높이도록 했다. 왕릉을 답사하면서 왕릉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기초 역사를 이해한다면 왕릉 답사가 한결 흥미로울 것이다.
상설(象設)이란 좁게는 능(陵)·원(園)·묘(墓) 등 각급의 무덤에 설치한 여러 석물(石物)을 가리키며, 넓게는 산릉도감에서 능역에 설치하는 모든 시설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상설에는 병풍석, 난간석, 석수(석호, 석양, 석마), 석상(상석 또는 혼유석으로 불림), 망주석, 장명등, 석인(문석인, 무석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깐, 재실 등이 모 두 포함된다.
왕릉에 상설을 설치한 목적은 후세인들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아보도록 하는 데 있다. 물론 피장자의 일대기를 적은 지문(誌文)이 있으나, 땅 속 깊이 묻기 때문에 겉에서는 쉽게 알아볼 수 없다. 그에 비해 상설은 쉽게 피장자의 신분 위상을 분별할 수 있다.
상설이란 단어는 넓은 의미에서 능침(陵寢)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다. ‘마음이 상설에 매달려 있다’, ‘멀리 상설을 바라본다’는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때 상설이란 능침 자체는 물론 능침에 묻혀 있는 선대의 왕을 가리키는 뜻이다.
조선 왕릉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크게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외금천교, 재실, 연지 등 진입 공간을 지나 홍살문, 정자각과 참배도(향도+어도), 수복방, 수라청이 배치된 곳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이다. 다음으로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곳은 죽은 자를 위한 성역인 능침 공간이다.
홍살문 앞에서 정면 정자각까지 얇은 돌(박석)을 깔아 만든 긴 길이 이어지는데, 이를 ‘참도’라고 한다.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뜻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북)가 있는데 석고는 진행을 가리킨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동쪽으로 오른 월대는 정전와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배전형이 많다. 월대 높이도 기본적으로 3단 장대석을 쌓았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배위청은 앞면 1칸, 측면 2칸이며 배위청에 맞닿은 정청은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배위청보다 단을 10cm 정도 높게 조성한다. 두 건물이 결합해 정(丁)자 형태를 갖추므로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은 일반적으로 맞배지붕이다.
정자각 좌측(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우측)에는 비갈(碑碣), 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데 개석(蓋石) 양쪽에 쌍룡을 새긴다. 석비(石碑)는 이수(螭首)와 귀부(龜趺)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데 비신 앞면은 표석(表石), 뒷면은 음기(陰記)라 한다. 비각의 위치는 능원의 왼쪽 상단부로 학생 시절 달던 명찰의 위치와 비슷하다.
능 높이는 10〜15자, 광중(壙中) 깊이 10자, 너비 29자, 길이 25자 5치이고 지름 20〜30자이며 능상 모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룬다. 반구형은 살림집 지붕을, 광중은 살림방을 모방했다. 광중을 지하궁전을 의미한 현궁(玄宮)라고도 부른다.
반면 일반인의 묘소는 음택(陰宅) 또는 유택(幽宅)이라 한다. 지석(誌石)은 사대석 남쪽에서 석상(石床) 북쪽 사이에 깊이 5자를 파서 3물(三物, 모래·황토·생석회)로써 사방과 윗면에 굳게 다져 쌓은 다음 흙으로 메워 묻는다.
일반인은 분상, 봉분, 무덤, 산소라 하지만 왕릉은 능상(陵上) 또는 산릉(山陵)이라 한다. 산릉이란 고대 중국에서 제왕을 장사지낼 때 산을 근거로 왕릉을 만들었으므로 산릉이라 부르게 됐다. 진시황 때는 천자의 무덤을 산(山)이라 했고, 한(漢)나라에서는 능이라 했다.
곡장 안에는 석호와 석양들이 봉분을 호위하고, 능침 중 가장 중요한 봉분을 병풍석(호석)이 둘러싸며, 병풍석 외곽을 난간석이 둘러싼다. 이들 난간석과 병풍석이 초기 조선왕릉 양식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제7대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두른 왕릉들이 전통 왕릉의 기본 양식이 된다. 한편 추존된 능은 대부분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는다.
난간석은 12각형을, 석주는 사각기둥을, 죽석은 원주형을 이룬다. 능원 석물에 연꽃 조각이 많이 등장하는데, 불교의 상징적 의미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왕실의 번영과 영원성을 강조한다. 연꽃이 물을 정화하는 생태적 특성과 군자를 상징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 호랑이는 지상 동물 가운데 가장 용맹하므로 지상의 모든 미물을 수호해달라는 의미도 가진다. 양은 지하의 미물을 지켜주는 영물로 지하세계 미물의 수호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중계단(中階段) 장대석 위 제2단 정면 중앙에는 장명등(長明燈) 또는 명등석(明燈石)을 세웠다. 장명등은 능침의 능침 공간의 중심시설로 일반적으로 멀리 조산 또는 안산에 축을 맞춘다. 장명등에는 대부분 모란, 연꽃 문양인데 영지, 국화 등이 새겨지기도 한다.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왕릉과 일품(一品) 이상 사대부 묘에만 사용한다. 화사석(火舍石·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에는 사각의 창을 뚫고, 옥개석을 올린 뒤 그 위에 보주가 달린 상륜을 얹었다. 태조에서 순조까지는 사각창으로 만들었으나 사도세자의 융릉(隆陵)과 정조의 건릉(健陵)은 원형(圓形)이다.
장명등(長明燈) 좌우에 관복을 입은 문인석(文人石) 또는 문관석인(文官石人)이라고 부르는 석상을 한두 쌍 대립시킨다. 문인석 뒤나 옆에는 각각 석마(石馬) 1좌를 세운다.
하계단(下階段)인 제3단 좌우 문인석 앞에는 무인석 한두 쌍과 석마를 각각 1좌씩 세운다. 조선 왕조가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만큼 문인석을 무인석보다 한 단 더 높은 중계에 설치했다.
문인석은 관대를 착용하고 홀(笏·길이1尺, 폭2寸)을 쥐고 있는 형상이다. 홀은 관원들이 조복·제복·공복을 입고 두 손에 쥐는 작은 판이다. 보통 옥이나 상아(象牙), 괴목으로 만들며, 원래는 왕의 교명(敎命)이나 전할 말을 써서 잊지 않게 하려는 기구였다. 그러나 후세에는 단순한 의례용 장식으로 제도화됐다.
무인석은 대체로 사람 키보다 훨씬 커서 무인이라는 것을 한 눈에도 알 수 있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는데 3m 이상이다. 비교적 조선 후기에 왕릉에 올릴 석물이 크게 만들어진 이유는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석상 좌우에 각각 1좌씩 설치하는 망주석은 상단에 둥근 머리를 만들고 운두(雲頭)를 새기고 아래에는 염의(簾衣)를 새긴다. 그 아래는 8각형으로 만들고 상하층을 두며, 중간에 허리를 만든다.
망주석의 생김새는 남성의 상징을 모방했는데, 이는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추정된다. 일반인의 묘소에도 망주석을 세우는데, 대체로 멀리서 봐도 쉽게 알 수 있게 만들기 위한 용도로 생각한다.
왕릉의 좌향(坐向)을 동·서·남·북으로 구분해서 볼 때 북향으로 쓴 능은 전혀 없다. 동향 10기, 서향 10기, 남향 33기 등 모두 53기이다.
중국 황릉의 경우 능원의 문에서 정전까지 이르는 신도 양측에 석수를 마주보게 일렬로 세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능침 공간에 수호 형식으로 외향시켜 놓았다. 이는 중국의 묘제 중 제후의 제도를 따르면서 독특한 능제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과 순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칭했으므로 중국 황제의 능제처럼 석수들이 능침이 아니라 신도 양측에 배치됐다.
‘내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가운데에는 현궁이 있는데 북쪽을 머리 방향으로 하고 있다. 죽음을 애도해서 쓴 글인 애책(哀冊)은 서쪽에 있고,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묻던 옥돌인 증옥(贈玉)과 비단 선물함인 증백함(贈帛函)은 남쪽에 뒀다.
증옥과 증백함 옆에 그릇 등의 도기(명기·明器)와 일상 집기와 애장품인 복완(服玩)을 나열했다. 이외의 것은 남문 문짝인 문비석(門扉石) 밖의 편방(便方)에 넣었다. 지석(誌石)은 남쪽 봉분과 석상 사이 북쪽에 묻었다고 한다.
무덤 안에 벽화도 그린다.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석실 내부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벽화 및 내부 축조에 대해서 홍순민 교수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석실을 덮는 개석(蓋石)의 내면, 곧 아랫면에 먹-유연묵(油烟墨)을 써서 하늘의 형상(天形)과 해와 달, 별들과 은하수 등을 그 운행의 순서에 따라서 그린다. 해는 붉은 색, 달과 별들과 은하수 등은 흰색 분(粉)으로 그린다. 개석의 그 천상(天象) 바깥 부분과 네 면의 벽을 이루는 방석(旁石)은 모두 분으로 바탕을 칠한다. 그 위에 동편에는 청룡(靑龍), 서편에는 백호(白虎)를 그리되 이들은 모두 머리를 남쪽으로 바라보게 하고, 북쪽 벽에는 현무(玄武)를 그리되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남편은 문짝(門扉石)이 되는 두 돌이 서로 합쳐지는 곳에 주작(朱雀)을 그린다. 두 문짝돌에 나눠 그리되 합쳐지면 하나의 형상을 이루게 하고, 머리는 서쪽을 향하게 한다. 네 동물 그림의 상단이 두 석실의 사이 벽에 뚫린 창 아래부터 시작되도록 그린다.
이 설명만 읽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왕릉을 직접 답사하면서 되새겨 보면 서서히 이해될 것이다. 한 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 왕릉을 차례로 답사하면 왕릉의 기초를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왕릉 조성에는 20만~30만 명 가까이 동원
조선 왕릉의 규모가 만만치 않은 만큼 이를 짓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됐는지에 대한 질문도 많다. 자료에 따르면 왕릉을 건설하는데 많은 전문 장인들과 잡역부들이 동원됐는데, 대략 연인원이 20만 명에서 30만 명 가까이 동원됐다고 한다. 연인원은 어떤 일에 동원된 인원수와 날짜를 계산해 그 일이 하루에 완성됐다고 가정하고 일수를 사람 수로 환산한 총인원수를 말한다. 또 장례가 나가는 발인 절차에 필요한 인원도 6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었다고 한다.
거대한 역사를 거쳐 왕릉이 만들어지므로 왕릉 축조가 조선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동원되는 인원과 경비가 많아 조선왕조 내내 큰 고민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세조가 능역을 간소하게 만들라고 명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조의 왕릉문화 이해」, 목을수, www.boso.kr
「조선왕릉엔 ‘다빈치코드’ 뺨치는 ‘컬처코드’가…」, 윤완준, 동아일보, 2009.06.29
「5개월의 국장(國葬) 기간 정성과 기술 총결집」, 이창환, 주간동아, 2010.03.30
「4대 걸친 왕실 어른 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이창환, 주간동아, 2010.10.04
「국태민안 기원하는 조선왕릉의 석물」, 이창환, 월간문화재, 2009.07월
「왕실 피바람 지켜본 인수대비 우비좌왕의 특이한 형태」, 이창환, 주간동아, 2010.05.24
「동구릉의 주인과 그 시대」, 연갑수, 2007
『문화유산 왕릉』, 한국문원편집실, (주)한국문원, 1997
『우리역사 우리문화』, 한용근, 서경문화사, 2000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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