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 善德王
성은 김(金)이고, 이름(諱)은 덕만(德曼 또는 德萬)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 선덕여대왕 (善德女大王) '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이모이다. 632년 진평왕(眞平王)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신라 최초(最初)의 여왕(女王)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이 때 백성들이 ' 성조황고 (聖祖皇姑) '라는 칭호로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하는 기틀을 다진 여왕(女王)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정(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救恤)사업에도 힘썼다. 유학생을 파견하고,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보내 불법(佛法)을 들여오는 등 당(唐)나라 문화의 수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첨성대(瞻星臺)를 건리하고,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데려와 황룡사 구층탑(皇龍寺 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다.
최초의 여왕
신라 제27대 덕만(德曼)은 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법흥왕(法興王) 무렵부터 성골(聖骨)만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법흥왕 이후 직계후손으로 불리는 진흥(眞興), 진지(眞智), 진평(眞平)으로 이어졌지만, 진평왕(眞平王)에게는 아들이 없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선덕여왕은 '삼국사기'에는 진평왕(眞平王)의 장녀(長女)로, '삼국유사'에는 순서 없이 딸로,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차녀(次女)로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는 그녀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 의하면, ' 김씨성골남진고여왕입앙 (金氏聖骨男盡故女王立王) '이라고 하여 즉, ' 성골 남자가 다하여, 까닭에 여자가 왕이 되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장(章)을 여는 기회였는지 모른다. 성골(聖骨) 계승의 틀이 강력히 잡힌 상황인데다, 비록 아들이 아니었지만, 선덕(善德)은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그런 그에ㅔ 첫 여왕(女王)의 영예가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여왕으로서 받는 정치적 위험성은 컸고, '화랑세기(花郞世記)'에 따르면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1989년에 출현한 ' 필사본 화랑세기 (筆寫本 花郞世記) '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진평왕(眞平王)의둘째 딸이고 언니는 천명공주(天明公主)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이 후사(後嗣)를 화랑(花郞)의 수장인 풍월주(風月主) 용춘(龍春 .. 25대 진지왕의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려 하자 왕위를 양보한 천명공주(天明公主)와는 달리 이에 강력 반발하였고, 왕통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오히려 용춘(龍春)을 남편이자 신하로 받아들이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흠반(欽飯)과 을제(乙祭)라는 두 명의 남편을 더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위서(僞書)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 의견이다.
골품제(骨品制)는 골품(骨品), 즉 개인의 혈통(血統)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할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에 가해졌다.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印度)의 ' 카스트제도 '와 비교되고 있다.
골품제 骨品制 이 제도는 신라(新羅)의 국가성장과정에서 생긴 역사적 산물이었다. 즉, 신라(新羅)는 연맹왕국(聯盟王國)에서 귀족국가로 바뀌어가고 있던 시기에 정복, 병합된 각지의 크고 작은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연맹왕국의 지배층을 왕경(王京)인 경주(慶州)에 이주시키고 이들을 중앙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시켰다. 이때 이들 세력의 등급(等級), 서열(序列)을 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골품제도가 제정되었다. 다시 말하면, 신라국가가 다양한 귀족세력을 재편성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었다. 신라는 이렇게 함으로써 지배체제를 구성하는 한편, 지방세력도 통제할 수 있었다. 신라가 이처럼 병합된 각 지방 족장(族長) 세력의 혈연적, 족적(族的) 유대를 토대로 하여 흡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 족장층(族長層)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시킬 만큼 왕권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골(骨)과 품(品)으로 나뉘고, 귀족인 골(骨)과 중간관리 계급 이하인 품(品)은 건널 수 없는 신분(身分)의 벽(壁)으로 막혀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려져있다. 골(骨)은 다시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나뉘며, 품(品)은 1에서 6까지 있는데, 육두품(六頭品)이 그 중 위이다. 이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基準)이다.
성골과 진골 聖骨과 眞骨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에는 아직 학계에 정설(定說)이 없다. 지금까지는 흔히 성골(聖骨)은 부계(父系)와 모계(母系)가 모두 순수한 왕족이고, 진골(眞骨)은 한쪽만이 왕족인 것으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는 양계(兩系)가 모두 왕족인데도 진골(眞骨)이라 부른다. 진골(眞骨)로서 최초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진골(眞骨)일까 ? 가야(伽倻) 출신인 김유신(金庾信)의 동생 문희(文姬)와 혼인하여 성골(聖骨)의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양계(兩系) 혈통만으로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성골(聖骨)은 진평왕(眞平王) 때에 와서야 성립된 개념이라는 주장이다.
진지왕(眞智王)은 형이 죽자 형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 올랐다. 그러나 4년만에 폐위되었다. 그러자 형의 아들이 비로소 적자(嫡子) 자격으로 왕에 오른다. 바로 진평왕(眞平王)이다. 진평왕은 이후 왕위 계승에서 자신의 직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직계를 중심으로 하는 울타리를 성골(聖骨)이라는 개념으로 큰큰히 쳤다는 것이다. 이는 장자(長子) 세습이라는 제도가 서 있지 않은 상황에서 왕위 계승의 안정화를 꾀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평왕 대에 시작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같은 개념이기는 하나 그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곧 신라 왕실이 안정화되는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왕과 함께 왕궁에 사는 지근간(至近間)의 왕족만 성골(聖骨)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를 중심으로 3~4촌 이내의 왕족만을 성골(聖骨)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강등되어 진골(眞骨)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왕궁 밖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것이다. 이를 족강(族降)이라 부른다.
성골(聖骨)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이든 간에 ' 성골(聖骨)로만 왕위를 이어야 한다 '라는 강력한 분위기가 신라 왕실의 첫 여왕(女王)을 탄생시켰음은 분명하다. 누가 성골인지 왕실 안의 그들만은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선덕(善德)은 '화랑세기'가 표현한 대로 ' 용봉(龍鳳)의 자태와 천일(天日)의 위의 '를 지녔고, '삼국사기'에서는 '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한 이였다. 나라 사람들은 ' 성조황고(聖祖皇姑) '라고 까지 했다. 시대의 분위기와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을 두루 갖춰 기회를 잡은 셈이다.
여성으로서 왕이 된 다음 선덕(善德)의 앞길이 평탄하지만 않았다. 왕이 된지 11년 곧 642년에 백제와 벌인 대야성(大倻城) 싸움은 위기 중의 위기이었다. 이 전쟁에서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품석(品釋)이 죽는다. 상대가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었다.
급기야 선덕왕은 다음 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 바, 당 태종(唐 太宗)은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에는 ' 여왕(女王)이 재위하고 있으므로 이웃나라가 깔본다. 내 종친(宗親) 한 사람을 보내 국왕을 삼고 군대를 파견하겠다 '라는 말까지 나온다. 사신은 신라 국정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이므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비담(毗潭)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한 것이 즉위 15년, 하지만 이듬해 믿었던 상대등(上大登)이 도리어 모반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선덕왕은 최후(最後)를 맞는다.
지기삼사 知幾三事
그러나 선덕(善德)은 지혜(智慧)의 여왕이었다. 선덕왕의 그 같은 장점(長點)을 가장 부각시킨 인물이 일연(一然)이다. 일연(一然)은 그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 선덕왕 지기삼사 (善德王 知幾三事) '라는 제목을 달아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제목은 ' 선덕왕이 기미를 알아차린 세 가지 일 '이라는 의미이다.
제27대 덕만(德曼)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요 성은 김씨(金氏), 부(父)는 진평왕이었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즉위하여 치국(治國)한 지 16년 동안에 예지(豫知)한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唐太宗)이 홍(紅), 자(紫), 백(白) 삼색으로 그린 목단(牧丹)과 그 씨 삼승(三升)을 보내왔다. 왕이 그 그린 꽃을 보고 이르되, ' 이 꽃은 필시 향기(香氣)가 없을 것이라 '하고, 이어서 그 씨를 뜰에 심었더니 그 꽃이 피어 떨어질 때 과연 그의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에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삼,사일 동안 우는 고로 국이(國人)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더니 왕이 갑자기 각간(角干) 알천(閼川), 필탄(弼呑) 등을 시켜 정병(精兵) 2천명을 조련하여 속히 서교(西郊)에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거기에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터이니 곧 잡아 죽이라 하였다. 두 각간(角干)이 명령을받들어 각각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병(百濟兵) 500명이 거기 와서 있으므로 모두 잡아 죽이었다. 백제 장구 오소(晤召)란 자는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었으므로 이를 에워싸 사살(射殺)하고 또 후속부대 1,300명이 오는 것을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셋째는 왕이 무병(無病)할 때에 군신(群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모년(某年) 모월일(某月日)에 죽을 터이니 나를 도리천중(도利天中)에 묻으라 하였다. 그달 그날에 이르러 과연 왕이 돌아가자 낭사남(浪山南)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후 십여년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릉(王陵)아래에 세웠다. 불경(佛經)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비로소 대왕(大王)의 영성(靈聖)한 것을 알게 되었다.
살아 있을 그 당시에 신하들이 왕에게 어찌하여 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아셨읍니까 ? 하였더니 왕이 가로되 ' 꽃을 그리고 나비가 없으니 그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거은 당주(唐主)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희롱함이다. 또 개구리의 노(怒)한 형상은 병사(兵士)의 형상이며, 옥문(玉門)은 즉 여근(女根)이니 여자는 음(陰)이요 그 빛이 희고 또 흰 것은 서(西)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 그러므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고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몯 그 성지(聖智)에 경복(敬服)하였다. 삼색화(三色花)를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서 여왕(女王)이 있음을 알고 그리한 것인가.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 즉 그것이니, 당주(唐主)도 선견(先見)의 명(明)이 있는 까닭이다. 선덕(善德)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것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지기삼사(知幾三事) ... 선덕왕은 이런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모란(牧丹)'의 경우,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각기 다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 대개 여자가 지극히 어여쁘면 남자가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나비와 벌이 따르는 까닭'이라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香氣)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당(唐)나라 황제께서 내개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향기(香氣)가 없다는 결과는 같지만, 그 까닭을 자연(自然)의 이치에 맞추어 일반화시킨 '삼국사기'에 비하여, '삼국유사'에서 선덕(善德)은 자신을 희롱하는 것으로 더욱 개인화(個人化)해서 해석했다. 후자가 왠지 더 극적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비롯 세부적인 점에서는 차이가 날지언정, 선덕(善덕)을 지혜로운 왕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다르지 않다. 그 지혜(智慧)로 그나마 16년간 왕위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두 기록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지혜로운 일을 소개하였다. 왕이 아직 병이 없을 때였는데 여러 신하에게, ' 내가 어느 해 어느 날짜에 죽으리니, 나를 도리천 가운데 묻어주시오 '라고 말한다.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며 장소를 묻자, 낭산(浪山)의 남쪽이라고 하였다. 신하들은 선덕이 죽은 뒤 그 유언(遺言)대로 하였는데, 그 뒤 문무왕(文武王)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그때가 정확히 문무왕 19년인 679년이므로 선덕(善德)이 죽은 646년으로부터 33년 뒤의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사천왕사'가 왜 나오는가 ? 불교에서는 '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 '라고 말한다. 사천왕천을 상징하는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므로, 그 바로 위인 선덕(善德)의 무덤은 '도리천'이 되는 것이다.
다분히 불교적인 이 이야기 끝에 일연(一然)은 선덕(善德)을 영험하고 성스러운 왕이라고까지 치켜세운다. 사실 그가 선덕(善德)의 일생을 세 가지 지혜로운 일로 정리하고 있는 것 또한 의도(意圖)된 바이다. 비록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왕위를 이었지만, 다른 모든 일을 제외하고 이 세 가지 사건만 기술하여, 일연(一然)은 선덕(善德)의 특징을 한마디로 ' 지혜의 왕'이라 규정지은 것이다. 마지막에 선덕(善德)이 첨성대(瞻星臺)를 건립하였음을 부기(附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즈음 선덕(善德)의 '모란(牧丹)'을 가지고 여왕의 과민반응이라 말하는 연구자가 있다. 본래 ' 모란 '에는 꽃과 나비를 그려 넣지 않는 법, 더욱이 당나라 황제쯤 되는 이가 어찌 작은 나라 여성 한나를 놀려먹으려 그런 짓을 했겠는가. 그래서 이것은 혼자 사는 여자 '선덕'의 제 발 저리기 아니면 그림 그리는 법을 모르는 일연(一然)의 실수(失手)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해석에 그림그리는 법을 끼워 넣어서 안되고 , 당나라와 신라라는 나라의 크기를 말해서는 안된다. 급박한 외교전(外交戰)이 펼쳐지노라면 하찮은 글자 하나라도 예리하게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이 작은 나라의 비운(悲運) 일지 모르지만, 큰 적을 대항하여 이기는 지혜이다. 일연(一然)은 선덕에게서 그 점을 높이 샀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던 김부식(金富軾)은 선덕(善德)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어찌 늙은 할미로 하여금 규방(閨防)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政事)를 재단하게 하였는가. 신라(新羅)는 여자를 붙들어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서도 나라가 망(亡)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말엽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난(亂)을 일으켰다. 선덕여왕 16년인 647년 1월, 상대등(上對等) 비담(毗曇)이 염종(廉宗) 등과 더불어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의 왕위 계승에 반감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삼국사기'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비담의 난 毗曇의 亂
비담(毗曇)은 그 출신을 잘 알 수 없으나 선덕여왕 14년인 645년 11월에 귀족회의(貴族會議)의 의장(議長)인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던 것을 보면 본래 진골(眞骨)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담'이 상대등으로 오른지 약 1년 남짓 지난 뒤에 염종(廉宗) 등과 함께 '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 ... 女王不能善理 '는 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 여몽 등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군(王軍 .. 선덕여왕 옹위 군사로서 김유신, 김춘추 의 군사)은 월성(月城)에 진을 치고 10일간이나 서로 공수(攻守)하였는데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月城)에 떨어졌다. 이에 비담(毗曇)은 반란군에게 ' 별이 떨어지는 곳에 반드시 피를 흘린다 했으니 이것은 여왕이 패할 징조이다 '라고 독려하였다. 기세가 오른 반란군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땅을 진동할 정도이었다.
한편 김유신(金庾信)은 오히려 ' 길흉(吉凶)은 정해져 있지 않고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른 것입니다 '라며 선덕여왕을 안심시키고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연(鳶)에 실어날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에 ' 어젯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라고 선전하였다.
또한 백마(白馬)를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드리며 ' 하늘의 도(道)는 양(陽)이 강하고 음(陰)이 약하지만, 사람의 도(道)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그것이 바뀌면 난(亂)이 되는 것입니다. 비담(毗曇)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여 아래서 위를 범하니 이것은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축원(祝願)한 뒤, 장졸(將卒)을 독려해 반란군을 공격하였다.
마침내 비담(毗曇) 등이 패배하여 달아나자 추격해 진압하고 주모자의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善德女王)에서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 이어지는 성골(聖骨)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후퇴하고 김유신(金庾信), 김춘추(金春秋) 등 율령국가(律令國家)을 지향하는 세력이 승리하여 장차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전제왕조(專制王朝)가 성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비담(毗曇)이 난(亂)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비담'이 표방한 ' 여주(女主)는 잘 다스리지 못한다 '의 대상(對像)을 선덕여왕으로 보고 '비담'을 의장(議長)으로 하는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선덕여왕을 폐위하려고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선덕여왕 11년에 백제로부터 서쪽 변경 40여 성(城)을 빼앗기고 대야성(大耶城)마저 함락되자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는데, 당시 당(唐) 태종(太宗)은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 여자가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업신여기고 쳐들어 오는 것이므로 여왕을 바꾸어야 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당 태종의 발언이 신라에 파장을 미쳐 화백회의에서 선덕여왕의 폐위를 결정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비담(毗曇)이 난(亂)을 칠으킨 시기가 당(唐) 태종(太宗)의 발언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것과,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하는 와중에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한 점 등을 들어, 선덕여왕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음 후계자로 진덕여왕이 선정되자 화백회의에서 반발한 대상(對像)을 진덕여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비담의 난'이 일어난 와중에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한 것을 두고, 선덕여왕의 사망 원인을 반란세력에게 피살(被殺)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 선덕여왕이 자신의 죽음과 함께 장지(葬地)를 미리 언급한 점을 들어 위중한 상황에서 자연사(自然死)했던것으로 보는 견해가 나뉘어 있다. 그 해 8월 선덕여왕은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낭산(浪山)에 장사지냈다. 진평왕의 동복(同腹) 아우인 갈문왕(葛文王) 국반(國飯)의 딸인 승만(勝曼)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녀가 바로 진덕여왕(眞德女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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