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1607(선조 40)∼1684(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아버지는 유학 서(曙)이다.
김집(金集)의 천거로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대군사부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복제시비 때 호군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뒤 이어 효종 말년 이래 적어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고 구민(救民)·구국(救國)의 대책을 제시, 왕이 비변사로 하여금 검토하게 했으나 제대로 채택되지 않자 실망해 사직, 귀향하였다. 그 뒤에도 이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이조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복제를 잘못 정했다는 남인 윤휴(尹鑴) 등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 영변에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죽었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 喪禮備要≫·≪의례문해 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했으며, 특히 치국경제(治國經濟)의 문제에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즉, 우선 당시 민폐와 국정 동요의 근본 요인이 농민의 유리와 토지의 황폐에 있다고 보고 안정책으로 향약에 의한 향촌조직과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의 실시, 양전(量田) 시행과 사창(社倉) 설치를 주장하고, 양인(良人) 이상 자제의 취학과 15세 이후 능력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선택을 역설하였다.
구체적인 변통책으로서는 어염세(魚鹽稅)의 국고 전환과 면세전의 폐지, 내수사의 혁파, 부세(賦稅) 및 인역제(人役制)의 개혁, 공안(貢案)의 조정과 감축, 양전제의 개선, 관제의 개편과 합리적 운영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김집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송준길·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론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했다가 1713년 노론 때문에 일시 훼철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초려집≫ 26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초려 이유태 선생의 신도비- 세종시 건설에 따라 신도비가 매몰직전이다 좌측 뒷편의 천막이 있는 곳이 선생의 묘소이다
수장되어 버리고 만 초려선생 신도비
신도비 뒷편으로 성남고등학교가 보인다
초려 선생 묘소(후)와 손자(이단몽)의 묘소(전) 전경-상복을 입으신 분은 역사유적을 지키고자 애쓰시는 이성우 교수님이시다
초려선생의 손자되시는 이단몽(李端蒙) 묘소
초려 이유태선생 묘소
초려이선생지묘/정부인평산신씨부좌
초려선생의 장자되시는 이옹(李顒) 묘소-초려선생 묘후에 있다
선현의 유적을 지키고자 홀로 애쓰시는 이성우교수님-초려선생의 묘소앞에 천막을 치고 문화재를 지켜내고자 고군분투 하시는 모습에 존경을 보내드리고 싶다. 좋은 말씀과 좋은 글을 받고서 왔다
아당 이성우(峨堂 李性雨) 교수님-선생님의 선비정신과 높은 기개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항상 건강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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