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김덕숭(孝子 金德崇)
1373년(공민왕 22)∼1448년(세종 3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수(子修), 호는 모암(慕庵).
송도(松都)에서 출생한 그는 판윤(判尹) 김천익(金天益)의 아들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고려가 멸망하자, 아버지 김천익은 송도판윤(松都判尹)의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백곡면(栢谷面) 석현리(石峴里) 추자(楸子) 마을로 낙향하였다.
김덕숭은 21세에 추천되어 진선(進善)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비롯하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온양군수(溫陽郡守)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귀향하여 부모 봉양에 힘썼다. 1426년(세종 8)에 한산군수(韓山郡守)에 제수되었지만 부모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소홀해짐을 염려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더욱더 효성을 다하였다.
그의 나이 62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조석으로 부친께 드리는 문안인사에 소홀함이 없었다. 이에 1444년(세종 26), 세종은 그의 지극한 효성을 가상히 여겨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며, 충청감사(忠淸監司)에게 명하여 쌀 10섬을 주라고 하였다.
죽은 후, 그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또한 세종은 그에게 어제시(御製詩) 3수를 내렸고 그의 효행을 《삼강행실(三綱行實)》에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 정려는 지금 이월면(梨月面) 사곡미(沙谷里) 사지(沙池) 마을에 있다.
1449년(세종 31) 6월에는 그의 두 아들 김귀식(金貴識)과 김귀시(金貴試)에게 벼슬을 내렸다. 1597년(선조 30)에 그는 이종학(李鍾學)‧이여(李畬)‧이부(李阜)와 함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배향되었고, 1669년(현종 10)에는 진천 유생이 올린 소(疏)에 따라 사액되었다.
도로에서 바라본 묘소 젼경-묘소 오르는 길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효자 김덕숭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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