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공 남지(忠簡公 南智)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지숙(智叔). 할아버지는 영의정 재(在)이고, 아버지는 병조의랑 경문(景文)이다.
음보로 감찰이 되어 부정ㆍ지평을 거쳐 의성군(宜城君)에 책봉되었다. 1428년(세종 10) 집의, 이듬해 동부대언이 되었다.
1435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鑑)』 1질을 받아왔다. 1439년 대사헌ㆍ호조참판을 거쳐 경상도도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형조판서ㆍ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446년 소헌왕후 심씨가 폐비로 승하하자 자청하여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49년 판원사로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문종이 즉위하자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451년(문종 1)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ㆍ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1452년 풍질(風疾)로 사직을 청하였다.
1453년(단종 1) 영중추원사로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계유정난 때 사돈인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사위 우직(友直) 부자가 죽음을 당하였으나 병으로 화를 면하였다. 죽은 뒤 1489년(성종 20) 손자 승지 흔(炘)의 상소로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간공 남지 신도비
신도비명은 남구만이 찬하였다
재실-충간재
충간공 남지 묘소 전경
충간공 배위 전의이씨 묘소 전경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부정(副正) 이문간(李文幹)의 딸인데, 태어나고 졸한 연월(年月)은 역시 상고할 수 없으며, 공의 묘 뒤 20여 걸음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5남 3녀를 낳으니, 아들 맏이는 관찰사(觀察使) 남윤(南倫)이요 다음은 부정(副正) 남칭(南偁)이며, 다음은 군수(郡守) 남구(南俅)요 다음은 별좌(別坐) 남휴(南休)이며 다음은 참판(參判) 남의(南儀)이다. 딸 맏이는 임영 대군(臨瀛大君) 구(璆)에게, 다음은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에게, 다음은 조무영(趙武英)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남구만이 찬한 신도비명 내용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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