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령 남지읍에는 고려말 좌시중을 지낸 조우희와 그의 둘째 아들로서 조선초 경상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익수 장군의 묘가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의 묘제의 특징인 장방형으로 이루어졌으며, 마을사람들은 묘가 크고 오랜 된 탓에 曺陵이라 부른다. 그런데 두 분 모두 상당한 벼슬을 하였음에도 생몰년과 후손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다. 잠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조민수 조익수 형제의 기록을 살펴보자.
태조3년(1394) 10월 15일 사헌부에서 상서하여 이인임과 조민수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조7년(1398) 4월 23일 도당(都堂)에 명하여 고(故) 시중(侍中) 조민수(曹敏修)에게 재물과 곡식을 주어 돌려보내었다. 태종12년(1412)12월 10일 헌사에서 아뢰었다.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조익수(曹益修)등은 관직이 2품인데, 과전(科田)을 받고도 경성에 살지 않고 물러가 외방에 거처하니, 청컨대 죄를 가하게 하소서.” 단지 과전만 거두게 하였다.


조민수는 고려말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을 주도해서 목은 이색과 함께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한 막강한 실력자였으나, 후일 이성계와의 마찰로 庶人으로 강등되고 창령으로 유배되어 죽게 된다. 따라서 조민수 일족은 이성계에게는 껄끄러운 세력이 되는 셈이다. 창령조씨 족보에도 조민수 조익수 형제의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는데, 아마도 조민수의 몰락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각설하고 이곳 묘를 볼 것 같으면 당당한 주산과 현무정을 만들고 안정적인 자리를 펼쳐 놓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전순을 형성하여 끝맺음 하였으니, 주산 이하 용의 진행이 고전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어긋남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결정적 단점은 묘 앞으로 물이 곧고 길게(약 800m) 직거수가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우를 水賤龍貴라 하였으며, 先凶後吉이라 하였다.
水賤龍貴不爲全 禍福兩相兼
(물은 천하고 용이 귀한 즉 온전함이 아니니, 화복이 서로 상반된다.)
水之禍福立見, 山之應驗稍遲 (물의 화복은 즉시 나타나고 산의 응험은 늦다.)
그러자 실제로 조우희 묘를 쓰고 난 후 장자 조민수는 권력서열 3위의 좌시중에서 밀려나 죽임을 당하고, 차자 조익수도 탄핵을 받아 토지가 몰수되는 시련을 겪는다. 그러나 3子 조경수의 후손은 어느 정도 세월이 경과 후 조부 묘의 역량에 걸맞게 많은 벼슬과 높은 학문으로 가문을 이끌게 되니, 선흉후길의 이치가 어긋남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이곳을 좀 더 자세하게 평가한다면 正坐는 아래 조익수 묘가 된다. 왜냐하면 조우희 묘 지점은 현무정에서 급하게 흘러내린 용맥을 다시 한 번 완충시키는 역할이며, 조익수 묘 뒤에서 최종 머물기 때문이다. 극히 미세한 변화지만 정확한 혈처를 정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한편 인근에 있는 조민수 묘 또한 묘 앞으로 물이 길게 빠지고 있다. 조우희 조민수 父子의 묘가 모두 허허롭게 물이 빠지고 있는데, 나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다.

<조우희, 조민수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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