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지리 1
740년대 대무예 황제시대 발해는 5경 15부 62주 37현이었다.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엉터리로 알려진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주현의 위치가 보이는데, 이는 820년대 대인수황제시대에 바뀐 것이 많다.
명나라 초기 지도.
위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가 보이는데 이는 [신당서지리지]<도리기>에 나오는 압록강앞의 섬들이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 鴨綠江唐恩浦口
章潢(1527一1608年),圖書編 권 57.
沙門島爲解宋寨界 單山爲黃縣界 桑島爲馬停寨界 龜島爲昌邑縣界 歆末島爲壽光界
都里鎭爲蒲臺界 靑島爲利津界 黃島爲賓州界 直沽口爲寶低縣界 塔山爲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爲中前所界 牛車島爲中後所界 孤山爲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爲金州衛界
石灘島爲左所界東雲島 黃駝島爲蓋州衛界 屛風山爲復州衛界 鳳凰山爲中左所界 女兒河爲中屯衛右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爲鎭遼所界
臨江爲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爲鴨綠朝鮮界
여아하는 중둔위와 우둔위의 경계이고
요하도와 고사도는 우둔위와 광녕위 경계이고
(우둔위는 대릉하와 고릉하 사이에 있었다. 고릉하는 대릉하와 압록강이 만나던 곳이다. 즉 요동군 방현의 위치)
즉 요하도는 대릉하에 있는 것이다. 수양제의 도요진도 그러했다.
마전도는 광녕위와 해주위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당서지리지]의 압록강이 요하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요하구로부터 600리에 고구려 구도현성 발해 환주가 있었고 200리 위에 발해 신주가 있었고 거기서 400리에, 즉 장춘에 발해 중경 현덕부가 있었다. 거기서 정북 여동으로 600리에 발해 상경홀한성이 있었으니 아래와 같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泝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
又東北泝流二百里,至神州.又陸行四百里,至顯州,天寶中王所都.又正北如東六百里,至渤海王城.
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
740년대 대무예 황제시대 발해는 5경 15부 62주 37현이었다.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엉터리로 알려진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주현의 위치가 보이는데, 이는 820년대 대인수황제시대에 바뀐 것이 많다.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용주龍州
먼저 <신당서>에서 숙신고지 상경 용천부는 용주, 호주, 발주가 있었다. 以肅慎故地為上京,曰龍泉府,領龍、湖、渤三州。
또한 중경현덕부가 그 남쪽에 있으므로 이 상경용천부는 흑룡강성 하얼빈의 아성이다. 자세한 것은 앞에 있다. 호성하로 둘러 싸였고 남북이 1500m, 동서가 2200m이고 서쪽에 황궁이 들어있다. 한편 서남쪽에는 숙신고성이 있다. 신채호선생이 말한 완달산으로 고려된다.
다시 대인수황제 때에 장춘시로 옮겼다. 동서가 3500m. 남북이 2000m 이다.
호주湖州
호주는 뒤에 대흠무가 천도했던 영안현 동경성이며 겨울 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동경성에서는 “물한주도독勿汗州都督”이라는 관인 도장이 나왔는데
물길, 말갈의 물한강, 지금의 모란강木丹江에 세워진 것이다.
반면에 발해 홀한강忽汗江은 같은 말뜻의 혼동강混同江으로 바뀌고 훗날 송화강으로 바뀐다.
발주渤州
발주渤州는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대파고성이다.
발주에는 공진현貢珍縣이 있었는데 이곳 주변에서 발굴되는 숙신肅愼의 금속 예술품들은 과연 공진현이라고 생각되게 한다.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현주顯州
중경현덕부는 본래 상경의 남쪽이었다. 其南為中京,曰顯德府,領 廬、顯、鐵、湯、榮、興六州
현덕부라 하였고 그 위치는 농안현 서남쪽의 대조양보와 연화산진의 사이다.
현주 주위로 주요 고성들은 흥성성지(흥주). 진가둔고성, 오가자고성, 쌍성보 황화성, 양대성자(탕주?) 등이 있다.
2-1. 중경 현덕부2
820년경 대인수황제 때에 2차 현주는 안시성터인 북진시에 옮겨서 설치되었다. 안시성 안에 현주가 들어있다.
요사지리지 동경도에서 노주, 철주, 흥주, 탕주 등의 설명을 보면 확실하다.
노주盧州
노주는 동경의 동쪽 130리라고 했는데 안시성의 제2 중경 현주를 기준으로 보면 유리왕의 여달성이 있던 노하토(老河土)의 위치이고, 본래 대인수황제 전에는 발해 삼로군이었는데 훗날 발해 노주가 옮겨들어온 것이고, 그 서쪽에 백암성(백암성도를 보면 가까이 있다.)이 있다. 이 노주를 요나라는 요동반도 개주시로 옮겼으며 요나라 동경 동쪽 130리는 아무 관계 없다. 盧州,玄德軍,刺史。本渤海杉盧郡,故縣五:山陽、杉盧、漢陽、白巖、霜巖,皆廢。戶三百。在東京一百三十里。兵事屬南女直湯河司。統縣一: 熊岳縣。西至海一十五里,傍海有熊岳山。
보라색이 발해 후기 현덕부 6주
철주鐵州
둘째 철주는 한나라 안시현이라고 했으며, 동경의 남쪽 60리라고 했는데, 요나라가 옮긴 곳은 대석교시 동쪽 탕지현이며 이는 요나라 동경 남쪽 60리가 아니다. 대신 북진시 제2현주 중경성으로부터 남쪽 60리로 보면 구방자진이 있다.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 湯池縣。
흥주興州
셋째 흥주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지금도 흥성현으로 남아있는데 역시 발해 제2 현주인 북진시에서 서남으로 300리다. 興州,中興軍,節度。本漢海冥縣地。渤海置州,故縣三: 盛吉、蒜山、鐵山,皆廢。戶二百。在京西南三百里。
발해 중경 6주가 요서로 이주했다는 또다른 증거는 바로 이 흥주와 관련하여 <요사지리지> 중경도 엄주에 나온다.
엄주는 중경도에 속하였고 바로 지금의 흥성시에 있었는데, 요나라 태조가 918년에 발해를 공격하여 요서 해안의 발해 흥주와 요동반도를 차지할 때에는, 중국인들을 흥주경에 옮겨다가 대신 살게 하였는데, 요나라 성종(재위; 982~1031)이 중국인들을 위해 엄주를 만들었고 발해 흥주터를 흥성현으로 바꾸어 다스리게 하였던 것이다. 발해 흥주인들은 안시성의 현주인들과 함께 요양고성, 즉 요양시 평양성 아래에 동평군을 건설하도록 쫓겨났다. 물론 발해 철주, 탕주, 숭주도 똑같이 강제로 이주 당했다. 이때 남소성은 요동반도 남쪽 복주진으로 이주당했다.
즉 요나라 태조가 발해를 칠 때, 918년에는 발해 중경의 흥주가 지금의 흥성시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엄주 흥성현으로 전락하였고 지금까지 흥성시로 전해오고 있다. 巖州,保肅軍,下,刺史。本漢海陽縣地。太祖平渤海,遷漢戶雜居興州境,聖宗於此建城焉。隸弘義宮,來屬。統縣一: 興城縣。
탕주湯州
넷째 탕주는 서북 100리인데 이는 북진시 서북이며 청하문시의 요동신성 고성터로서 한나라 양평현 관내다. 탕두하가 후른다. 湯州。本漢襄平縣地。渤海置州,故縣五:靈峰、常豐、白石、均谷、嘉利,皆廢。戶五百。在京西北一百里。
숭주崇州
숙신고지의 현덕부 영주榮州는 대조영大祚榮의 영주榮州로서 개국지이니 발해가 옮기지 않고, 그대로 장춘시 서북 대조양자보에 둔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숭주를 만들어 중경 6주를 채웠는데 북진시 동북 150리에 한나라 장잠현(長岑縣)으로 보면, 신민시 대홍기진(大洪旗鎭)이 된다. 대홍기진 동북에 고성이 있고, 대홍기진 동남쪽 장강자, 금오대자 지역이 한나라 장잠의 흔적으로 고려된다.
숭주는 앞뒤로 압록수와 위수가 흘러서 위수현과 녹성현이 있었을 것이며 숭산현은 양산진으로 고려된다. 崇州,隆安軍,刺史。本漢長岑縣地。渤海置州,故縣三: 崇山、溈水、綠城,皆廢。戶五百。在京東北一百五十里。統縣一崇信縣:
중경의 6주에 대한 <요사/지리지> 설명은 현재 전해지는 요나라 여러 고성 위치와 전혀 맞지 않은데, 이는 안시성으로 옮겨온 발해 후기 현주 중경성을 기준으로 설명한 기록을 그대로 요나라 동경 6주의 설명으로 잘못 옮겼기 때문이다.
또한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 서문의 홀한주의 설명에서, 홀한주 즉 평양성, 중경현덕부라고 쓴 기록은 요나라 태종이 장춘시의 홀한주를 고구려 평양성(요양시)으로 옮긴 사실과, 홀한주를 옮기기 수년 전에 요나라 태조가 요양고성(평양성)에 동평군을 만들기 위해 서쪽에서 옮겨온 발해인들이 본래 안시성의 현덕부인들이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여러 기록이 혼재되어 버린 것으로 이해된다.
위에 기록된 숭주 장잠현 기록에서 우리는 마침내 한사군 중 처음 대방군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장잠현이 바로 대방군의 현이기 때문이다.
대방군은 최초의 낙랑군 대방현과는 상관 없고 요동국 공손탁이 만든 대방군은 바로 요동군 망평현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고지 백제 구이왕이 있던 곳, 또 고이왕이 침탈한 낙랑서현, 개마대령의 동남에 있던 한예의 영동 7현이 모두 의무려산 동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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