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봉정리약사여래좌상및관세음보살입상 (聞慶鳳亭里藥師如來坐像및觀世音菩薩立像)
유형문화재 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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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산양면 봉정리 산56
1999.03.11
문경시 산양면 봉서사(鳳棲寺)의 절터에 3층 석탑과 함께 서 있는 불상이다. 2구의 불상은 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약사여래좌상은 큰 바위의 한면에 조각되어 있고, 관세음보살입상은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10m 정도 아래쪽에 위치한 작은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입상은 원래 약사여래좌상의 협시보살로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2차에 걸친 도난이 미수에 그쳐 현 위치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사여래좌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싼 형태이다. 관세음보살입상은 머리 위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다. 본존불인 약사여래좌상보다 크게 조각되었으며, 왼쪽 윗부분의 광배에 총탄에 의한 흔적이 있다. 약사여래좌상의 오른쪽에 다른 협시보살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들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형태·문양 등의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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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주삼공신회맹록판본 (金承주三功臣會盟錄板本)
유형문화재 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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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가은읍 작천리 213-5
1999.03.11
회맹록은 태종 4년(1404) 11월에 당시에 생존하고 있던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인 3공신 66명이 하늘에 맹세한 후 작성한 글을 목판에 새겨 인쇄한 것이다.
이것은 김승주(1354∼1424)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승주의 회맹록이다. 김승주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무반으로 입신하여 박포의 난이라고 불려지는 정쟁에 참여하여 좌명공신 4등에 책봉되었다. 이후 공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평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그가 죽은 후 나라에서 ‘양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판본은 태종 4년(1404)부터 태종 7년(1407)에 인쇄하여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많고, 보존상태는 왼쪽 아래부분의 일부가 약간 훼손되었을 뿐 원래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후대에 관리를 위해 암적색 베로 배접하여 관리하고 있다.
17세기 이전의 고문서를 인쇄하여 유포한 예가 많지 않은 점으로 보아 1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판본은 희귀성으로 인해 역사적 자료로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
문경모산굴 (聞慶茅山窟)
기념물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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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가은읍 성지리 산61
1979.12.18
문경 모산굴은 성지리마을에서 400m쯤 떨어진 북쪽 뒷산인 모산에 위치하고 있는 동굴로써,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길이는 약 200m이며 수백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동굴 안에는 10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에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이 천장과 벽에 커튼처럼 쳐져있고, 동굴 바닥에는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있다. 바닥 중간 지점에서부터 지하수가 흐르고 있으며, 36종에 달하는 생물들이 살고 있다.
옛날부터 신성하게 생각하여 소원을 비는 장소로 알려져 왔고, 임진왜란(1592) 때는 마을 사람들이 난을 피해 숨었는데 굴 밖에서 아기 기저귀를 말리던 것을 보고 왜병이 굴 속의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고추를 태워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들의 원한을 위로하기 위해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흥겨운 농악과 함께 별신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없어졌다.
문경 모산굴은 많은 동굴생물의 서식지로 학술적 가치가 있는 동굴이다 |
이강년생가지 (李康秊生家址)
기념물 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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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129-6외 1필
1993.02.25
한말의 의병장 이강년(1858∼1908) 선생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선생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으로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조선의 군대가 해산되자 영춘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주로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운강문집』과 『운강선생창의일록』이 있다 |
박열의사생가지(朴烈義士生家址)
시도기념물 제14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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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
2004.06.28 |
문경향교대성전 (聞慶鄕校大成殿)
문화재자료 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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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문경읍 교촌리 322
1985.08.05
문경향교는 조선 태조 1년(1392)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이고,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후 다시 세운 것이다.
뒤로 높아지는 지형에 대지를 3단으로 마련하고 앞쪽에는 교육 공간을, 뒤쪽에는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정문격인 외삼문을 통과하여 교육 장소인 명륜당을 지나면 앞면 3칸·옆면 2칸의 대성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소박한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환적당지경탑 (幻寂堂智鏡塔)
문화재자료 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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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1-1
1985.08.05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봉암사 뒤쪽 기슭에는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 하나로, 조선시대 중기의 승려인 환적당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환적당(1603∼1690)은 ‘지경’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16세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고 팔공산 동화사에 들어가 성현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는 청량산에 들어가, 그 곳에서 31년간 곡식대신 솔잎·밤·대추 등을 먹으며 지내었다. 88세에 해인사의 백련암이라는 암자에서 생을 마치었다.
부도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 중에서 아래받침돌은 8각에 맞추어 연꽃을 하나씩 새기고 그 사이마다 잎을 새겨두었다. 가운데받침돌과 윗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 놓았다. 탑신의 몸돌 한 면에는 ‘환적당지경지탑(幻寂堂智鏡之塔:환적당 지경의 탑)’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에 여덟 모서리 선이 표현되어 있고, 처마의 여덟 귀퉁이는 위로 들려 있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2단의 8각받침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둥근 머리장식이 놓여있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세운 것으로, 전체적인 균형이 불안해 보인다 |
함허당득통탑 (涵虛堂得通塔)
문화재자료 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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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1-1
1985.08.05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봉암사 뒤쪽 기슭에는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의 승려인 함허당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함허당(1376∼1433)의 호는 득통으로, 21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세종의 부름을 받아 4년동안 대차어찰에 머무르며 교화를 하였고, 봉암사를 새로이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 절에서『금강설의』를 지었으며, 세종 15년(1443)에 입적하였다.
부도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 하였는데,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탑신의 몸돌에는 ‘함허당득통지탑(涵虛堂得通之塔:함허당 득통의 탑) ’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액자 모양의 윤곽을 두른 후 그 위아래에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지붕돌 윗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는 양끝이 위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일부 없어진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조선시대 전기인 15세기 중엽에 세운 것으로, 당시의 8각 부도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문경관음리석불입상 (聞慶觀音里石佛立像)
문화재자료 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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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186
1985.08.05
문경시 문경읍의 관음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있는 높이 3.33m의 거대한 돌로 만든 약사여래상이다.
전설이 의하면 충청북도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에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아내와 남매를 거느리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씨가 큰 병에 걸려 아들이 문경읍으로 약을 사러 갔으나 기다려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가 아들을 마중 나갔으나 아내마저 돌아오지 않게 되자 딸이 다시 마중을 나갔는데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 딸이 모두 죽자 이를 가엽게 여긴 부처님이 박씨의 꿈에 나타나 병을 고쳐주었다. 그 뒤 박씨는 아내가 죽은 문막에 미륵불을 세워 평생 죽은 아내와 자식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때 몽고족의 침입으로 인해 불상의 머리 부분과 몸체가 떨어져 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붙혀놓았다고 한다. 부분적으로 웅건한 기운이 깃들고 있으나 돌이 많이 닳고, 크게 손상되어 형체가 분명하지 못하다. |
관산지관 (冠山之館)
문화재자료 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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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문경읍 상리 351
1987.12.29
이곳은 출장간 관리, 외국 사신 등이 숙소로 쓰거나 임금께 예를 올리던 조선시대 객사 건물로 전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인조 26년(1648)과 영조 11년(1735)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군청사와 문경서중학교 건물로 이용하였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
조령산불됴심표석 (鳥嶺산불됴심標石)
문화재자료 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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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42-8
1990.08.07
산불조심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비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서쪽면에 ‘산불됴심’이라는 순 한글 글자를 세로로 큼지막하게 새겨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국경수호와 산성 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고 산불을 조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이를 서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 한글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이 표석은 ‘조심’을 ‘됴심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영·정조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
황장산봉산표석 (黃腸山封山標石)
문화재자료 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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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188-1
1990.08.07
황장산 근처 마을 입구의 하천변에 놓여 있는 봉산표석이다. 봉산(封山)이란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는 산이란 의미로, 이렇듯 표석을 세움으로써 그 구역의 산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표석의 형태는 각 면을 잘 다듬은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앞면에 봉산(封山)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황장산은 예로부터 황장목(공공건물에 사용하는 양질의 소나무)이 나기로 유명하여 조선 숙종 6년(1680) 봉산으로 지정되었다. 표석을 세운 시기는 황장산이 봉산으로 지정된 조선 숙종 때일 것으로 추측된다 |
충절사·상의재 (忠節祠·尙義齋)
문화재자료 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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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산양면 위만리 109, 474
1995.01.14
엄흥도의 충성심을 기리는 건물들이다.
엄흥도는 조선의 지조있는 선비로 조선 6대 임금이었던 단종이 영월에서 시해 당하자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고 한다. 17세기 중반 이후 충신과 사육신에게 표창을 하는 정책이 생기게 되고, 엄흥도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해 그의 후손을 관리로 등용하였고 엄흥도를 육신사에 모시게 되었다.
영조 26년(1750)에는 엄흥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로 묘를 마련했는데 영조 31년(1755)에 상절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순조 33년(1833) 상절사는 의산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900년에 의산서원 강당에 해당하는 상의재를 세웠고 위패를 별도로 모셔 충절사라 하였다 |
옥소권섭영정 (玉所權燮影幀)
문화재자료 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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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문경읍 당포리 184
1998.04.13
조선 후기의 문신인 옥소 권섭(1671∼1759) 선생의 초상화이다.
권섭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서 학문연구에 힘쓴 인물로, 시와 그림에 열중하였으며, 훗날 통덕낭·가선대부 등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이 초상화는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슴위 까지만 그려 놓은 흉상이다. 조선 경종 4년(1724)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태가 그렸으며, 그림을 보고 선생이 직접 글을 짓고, 동생 권영이 글씨를 써 놓았다.
전체적으로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음영이 분명하지만, 1992년 경 일부분을 고쳐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영정을 보관하는 영각은 1985년에 건립한 것이다 |
관음리석조반가사유상 (觀音里石造半跏思惟像)
문화재자료 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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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산 60
1998.04.13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계립령 아래 밭 언저리에 있는 반가사유상이다. 계립령 아래 관음원이 있었다는 기록과 불상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들, 동쪽 20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5층석탑 등으로 보아 이 주변을 관음사 옛 절터로 추정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작은 바위면에 양각되어 있는 사유상은 머리에 삼면화관을 썼으며, 얼굴은 원만하며 미소가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구부러져 턱을 받치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오른발을 잡고 있다. 몸에 비해 오른팔이 너무 짧고 무릎 이하는 불분명하며, 왼쪽다리는 생략되어 있다.
사유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선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광배(光背)는 일부 떨어져 나간 것 같으며, 5개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지만 세부묘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풍화가 심해 세부 표현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조각수법도 뒤떨어진다 |
문경녹문리고병숙가옥 (汶慶鹿門里高柄璹家屋)
문화재자료 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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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산양면 녹문리 246-3
1999.08.09
녹문들판 한쪽에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녹문리에 있는 개성 고씨의 집 중 하나이다. 자료에 따르면 순조 28년(1828)에 지었다고 전한다.
一자형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一자형 사랑채가 놓여 있고 그 뒤쪽에 안채가 있다. 원래는 사랑채 오른쪽 뒤에 중문간을 둔 一자형 아래채가 있었으나 아래채는 1980년대 후반에 철거하고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채는 특이하게 지붕을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를 이루는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 5칸·옆면 1칸 규모로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있고 왼쪽에 방·부엌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1칸씩 광을 두었다.
사랑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반으로 오른쪽부터 사랑대청·사랑방·부엌·사랑머릿방이 있고 맨 끝의 1칸은 앞뒤로 나뉘어 작은마루와 글방으로 꾸몄다. 사랑대청은 정면을 개방했으며 대청과 사랑방 사이에 문을 달아 공간을 터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안채는 정면을 개방한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 뒤에서부터 머릿방·안방·부엌이 앞으로 나와 날개를 이루고 있고 오른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19세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건물로 아래채가 없어지고 일부분이 변했지만 상류주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