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옳은 죽음을 하다! 조선의사(朝鮮義士) 김일(金鎰)
백두대간 여남지맥의 백원산(百元山:523.7m)과 식산(息山:503m)을 뒤로하고, 화산의 세 마을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동향(東向)으로 앉은 큰 석물은 「내가 오늘 패하여 죽으리라는 것을 진실로 알지만,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는 단지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의리를 바쳐서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고서 도망한 자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려는 것뿐이다」라고 하고서는 1592년 5월 17일 왜적과 격렬하게 싸우다가 순직한 조선의사 김일(朝鮮義士 金鎰)의 사적비(事蹟碑)로 낙동면 화산리(화산양지마길115-14)이지요.
공(公)의 휘(諱)는 일(鎰)이고 호(號)는 계촌(溪村)이며, 관향은 상산(商山)이시다. 시조 고려보윤 휘 수(需)의 후손으로, 파조 전서공 휘 원리(元理)의 7대손이며, 아버지는 장사랑(將士郞) 휘 희경(希慶)이다. 공은 독자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고인(古人)의 글을 독파하여, 일찍이 의리(義理)를 이해하였다고 한다. 불의에 강개하고 기절이 있었는데, 급기야 1592년 국난을 당함에 변방에 있는 성(城)들이 차례로 무너지자 공은 이 일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낙애공 김안절을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대대로 충효의 가문으로 국가대란에 어찌 암혈에서 처자만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낙애공 김안절과 향리의 사우들이 서로 좋은 계책을 내어 창의하니 이에 따른 의사들이 수1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무기를 손질하고 장차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는데, 급박하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만수천여 명의 왜병이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4월25일 상주북천에서 순변사 이일 장군이 지휘하는 중앙군과 최초로 결전을 하였으나 왜적이 예상보다 너무 강성하여 쉽게 무너진 것이다. 이때 종사(從事) 윤섬(尹暹)과 박호(朴箎), 이경류(李慶流)와 판관 권길(權吉), 호장 박걸(朴傑)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에 공은 분개하여 처자는 처가의 은척으로 피난하라고 이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500여명으로 북계(北溪)에 진을 치고, 5월 17일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하고 말았다.
당시 17세의 딸은 가노(家奴) 영환과 북천전지의 시체더미에서 낮이면 적을 피해 숨으며 찾기를 3일 만에, 공의 시신을 찾았는데 공의 안색이 변하지 않고 기상 또한 늠름하였다고 전한다.
시신을 업고 돌아와 백원 옥산에 고장 하고는 백비(白碑)를 세워 “백세 뒤에 반드시 여기에 명문을 지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후대에 참판(參判) 윤행임(尹行恁)이 비문을 지었고, 도정(都正) 이운영(李運永)이 묘비 앞면에 "朝鮮義士金鎰之墓"라 새겼다. 1793년 충의단에 배향되고,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는 몽은(蒙恩)을 입었으며, 딸은 효녀정려(孝女旌閭)가 내려지니 당시 사람들이 ‘한 가문에 삼강(三綱)이 모두 갖추었다’고 하였다 한다. 실로 호국의 고장 상주의 자랑이고, 의병이 3군(창의, 충보, 상의)이나 조직된 계기가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상산지에는「김일 임진란 때 향리의 의사를 모아 북천에서 왜적을 토멸하다가 전사하였으며, 1793년 윤섬, 이경류, 박호, 김준신 네 분과 함께 충의단에 봉향하였고 사제 때 임금께서 義士라고 하였다」라 적고 있으며, 1978년에 세운 사적비의 비명은「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朝鮮義士金鎰戰亡事蹟碑」라 새기고, 비문은 낙애 김안절이 지었으며, 金演權 譯書이고, 상주군수 石鎭厚가 건립하였으며, 그 후 사정으로 길 왼편 현재의 자리로 2012.10 이건하였으며, 묘소는 사적비에서 3시 방향 옥산 끝자락에 소재하고, 효녀각은 상주낙동(친정)과 문경산양(시집)의 두 곳에 서 있다. (참고: 상산지, 낙애집.뉴스상주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