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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의 풍수사상과 풍수담론
민병삼*
차례
1. 서 론
2. 도선국사 이전의 풍수전문가
3. 도선국사 풍수사상의 실재
4. 도선의 풍수담론
5. 결 론
요약
본 논문은 도선의 풍수사상과 풍수담론을 살펴본 연구이다.
도선은 지리산 신령님의 예지몽을 받고 산신령이 꿈속에서 알려준 사도촌 강변에 가서 풍수를 처음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도선국사는 산신령이 꿈속에서 알려준 사도촌 강변에 가서 풍수를 처음 배웠다. 도선은 사도촌에서 산천의 순역과 형세론 풍수를 배운 후, 홀로 음양오행의 이치를 더욱 연구하여 풍수의 이치를 깨달았다. 도선의 전통풍수사상은 당시 라말여초의 풍수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도선의 전통풍수사상은 땅을 형상에 맞게 물형物形을 정하고, 내룡을 답사하여 음양오행을 정하고, 대수大數에 부합되도록 집을 짓고, 대수에 해당하는 명궁의 인물이 그 땅에 주인이 되고, 그 땅에서 태어날 인물의 출생은 대수를 통하여 알아내고, 그 땅의 태어난 인물은 물형에 부합되도록 이름을 짓는다. 이는 땅을 살아있는 생물로 인식하여 풍수적인 물형을 정하고, 음양오행을 적용하는 방법이다.
도선의 풍수 담론은『고려사』 에서 숙종이 개경과 서경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남경으로 천도하는데 활용되었다.『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도선의 풍수담론을 근거로 하여 고려의 송도를 475년 만에 망할 땅이라고 고려패망의 당위성을 부각시키었다.
?조선사찰사료?와 일제강점기 기록에서는 구름이 머무는 ‘운주사雲住寺’의 지명 한자를 교묘하게 돛단배가 운행하는 절 ‘운주사運舟寺’로 바꾸는 등 민족의 문화와 정기를 말살하려는 식민사관이 담겨 있다.
주제어: 도선국사, 도선풍수, 물형론, 풍수, 풍수지리
* 閔丙三,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1. 서론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모든 사원은 도선道詵(827~898)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니,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을 훼손시켜 국운이 장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1] 도선은 태조 왕건 이래 존숭되었고 풍수를 정치에 접목한 신안의 경지에 이른 한국전통풍수의 종조이고 선승이다.
『고려사』 에서는 도선이 왕륭의 집터를 풍수적인 길지에 선정하고 삼한을 통일할 인물의 탄생을 예측하였다고 기록한다. 즉, 태조 왕건은 왕륭이 도선국사가 선정한 집터에 집을 짓고 태어났고,2] 도선은 삼한을 통일할 역사적 천명을 받고 태어날 성자의 이름을 세조 왕륭에게 미리 지어 주고, 그후 왕건이 17세 되는 해 도선은 삼한을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의 천지와 감통하는 방법과 병법 등을 전수하여 주었다. 그래서 왕건은 도선의 풍수적 정치사상을 「훈요십조」에 고스란히 담아놓고 후대의 왕이나 귀족들이 지켜서 왕권의 수명을 훼손하지 않기를 경계하였다.
태조 왕건王建(877~943)은 「훈요십조」에서 전국의 사찰은 산수의 순역을 살펴서 지덕이 안정 되도록 균형 잡기 위하여 세운 것이므로 후대의 임금들이나 조정신료들이 함부로 원당을 지어서 균형 잡은 지덕을 손상시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이 “두번 째 말하기를, 여러 사원들은 모두 도선이 풍수적으로 산수의 순역을 판단하여 지은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소점하여 정한 것 외에 망령되이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을 손상시켜 고려의 왕조가 장구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 뒤를 잇는 국왕‧공후‧후비‧조정 신료들이 각자 원당을 세워 소원을 빈다고 하면서 혹 사찰을 더 창건할까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의 말기에도 부도를 경쟁적으로 짓다가 지덕을 쇠하고 손상시켜 망하게 되었으니 이를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3] 도선의 풍수적 국가설계를 유훈으로 남겨 놓았다.
도선은 최유청의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 병서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幷序」에 의하면, 전남영암출신이고 속성은 김金씨이고, 모친은 강姜씨이며, 혹 태종무열왕의 서손이라고도 한다.
도선은 문성왕 3년(841년) 월유산 화엄사로 출가하였다. 월유산은 전남 구례에 있는 화엄10찰의 화엄사라고 전하는데 지금은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 도선은 화엄종의 해탈의 한계를 인식하고 문자나 언어를 거부하는 선종으로 개종하고, 문성왕 8년 20세 때 동리산파桐裏山派 개조인 태안사의 혜철惠哲 4]의 문하로 들어가 선을 수업하였다. 이후 23살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15년간 전국의 방방곡곡 산천을 돌아보고 산천자연 이치를 깨달았다.
도선은 전국의 산하를 주유하고 지리산 암자에 거쳐하다가 옥룡사 터를 둘러보고 그 곳에 옥룡사를 개창하였다. 도선이 지리산 암자에 있다가 옥룡사 터에 들어온 것은 그의 나이 37세 때이다. 그 후 도선은 35년간 계속해서 옥룡사에 주석駐錫하다가,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옥룡사에서 입적하였다. 장례는 그의 유언에 따라서 옥룡사 뒤편 북쪽에 지냈다.
도선국사의 풍수에 관련한 선행연구는 다양하지만 ‘도선의 풍수담론’ 5]과 ‘도선의 전통풍수’ 6]를 구분하지 못하고 비보풍수라는 미명아래 대부분 도선의 풍수라고 전개하고 있다. 다행히 도선이 누구에게서 풍수를 전수 받았는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결과에는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7] 최병헌은 도선의 풍수사상은 당나라에서
유학하였던 스승 혜철로부터 배웠거나 그 계통의 사람에게 전수배웠다고 주장하였다.8]
도선의 풍수는 중국에서 유입된 풍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혜철이 당唐에 머물던 강서지방에는 형세풍수가
유행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9] 도선이 풍수를 ‘이인異人’에게서 전수 받았다는 도선국사 탑비의 문장에 대한 해석은 국사 혜철, 신라사람, 지리산 산신령 등 다양하다.
특히, 이능화는 도선이 지리산의 ‘이인’에게 풍수를 전해 받았다고 주장하였다.10] 그는 ‘이인’을 지리산 산신령이라 하였다.11]
서윤길은 도선의 풍수를 밀교의 『태일경太日經』에 의거한 밀교적 풍수라고 주장하였다.12]
최창조는 도선의 풍수를 도선의 풍수설화나 신화를 통하여 해석하고 지모地母사상에서 병든 땅을 치유할 수 있는 자생풍수설이라고 주장하였다.13]
최원석은 도선이 지리산에서 풍수법을 전수받아 그의 풍수사상을 체계화하고 정립하였다고 주장한다.14]
이진삼은 도선의 비보사상은 나말여초에 만들어진 음양오행의 풍수지리사상과 사탑이라는 불교적인 요소가 융합된 시대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하였다.15]
박헌영은 도선의 풍수사상은 기존에 다른 명칭과 범주로 존재해 오던 풍수사상이 당과 교류를 통하여 전면에 부각되어서 한국의 기존의 지리사상과 결합한 도선의 ‘비보사탑설’16]을 계기로 밀교계통의 풍수사상이 전개되어진 것이라고 하였다.17] 이것은 ‘도선의 풍수담론’과 ‘도선의 전통풍수’ 사상을 구분하지 못하여 혼동하고, 또한 옥룡사 도선국사의 탑 비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결과에서 드러난 혼선이다.
반면에 도선은 가공된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수동‧장기웅은 도선의 풍수사상을 도참설과 결부시켜 비보사탑설을 주장하였지만, 도선이 실존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였다.18]
이덕진은 당시의 혜철, 경보 등의 탑비문塔碑文을 비교하면서 12가지 이상의 논거를 제시하면서 도선은 그 실재가 의심스러운 인물이고, 설령 실존인물이라 할지라도 풍수지리설에 천착한 신라말의 별개 인물이지 동리산문 계열의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19] 이와 같이 도선의 실재와 도선의 풍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선행연구자의 주장은 다양하다.
본 논문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저작물인『조선왕조실록』‧『고려사』‧『고려사절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조선사찰사』의 문헌과 전남광양의 옥룡사 도선국사 탑비의 「백계산옥룡사증호선각국사비명병서」에 기록된 도선의 관련자료를 근거로 하여 ‘도선의 전통풍수’ 가 무엇인지 밝히고, 도선의 이름을 가탁한 도선의 풍수관련 내용을 ‘도선의 풍수담론’이라고 정의하고, 도선의 풍수와 허구적이고 부정확한 도선의 풍수담론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위 문헌을 1차 자료로 삼아서 연구한다.
이로써 이 연구의 목적은 첫째, 도선의 자료를 근거로 ‘도선의 전통풍수’가 무엇인가? 도선의 전통풍수사상의
실제와 실체를 밝혀낸다.
둘째, 도선의 이름을 가탁한 허구적이고 신비적인 내용의 ‘도선의 풍수담론’을 구분하고, 셋째 이를 통하여 도선의 이름으로 대표하는 한국의 전통풍수사상과 도선의 풍수담론을 구분함으로써 도선국사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풍수사상의 연원과 실체를 밝혀보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1]『고려사』권2, 「世家」2, 태조26년 4월.
2] 도선국사가 왕륭의 집터를 풍수에 부합되도록 지으면 훌륭한 성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을 왕륭이 수용하여 도선의 풍수적 설계에 따라서 집을 지으니 과연 이듬해 왕건이 태어났다. 이것은 도선과 왕륭의 합작으로 태조 왕건의 탄생을 있게 한 것이니, 도선국사의 계획을 왕륭이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高麗史節要』第1卷 太祖神聖大王, 癸卯26年. “其二曰, 諸寺院皆是道詵推占山水順逆, 而開創者也, 道詵云, 吾所占定外妄有創造, 則損薄地德祚業不永, 朕念後世國王, 公侯, 后妃, 朝臣, 各稱願堂, 或增創造則大可憂也.新羅之末, 競造浮屠,衰損地德 以底於亡可不戒哉.”
4] 惠哲(785~861)은 憲德王6년(814) 入唐하여 西當智藏의 心印을 받고 神武王 원년(839)에 귀국한다. 혜철은 처음 雙峰蘭若에 있다가 谷城의 동리산의 泰安寺 駐錫하여 동리산파를 재창하였다. 이에 도선(817~898) 文聖王8년(846) 동리산에 찾아가 혜철의 제자가 되어 20세부터 23세 때까지 4년 동안 禪을 修業하였다.
5] 본 논문에서 ‘도선의 풍수담론’이란 실재사실과 다른 여러 가지 풍수적 이야기를 도선의 이름으로 가탁하여 도선의 명성과 신빙성을 갖고 전개하는 풍수사상을 통칭한다. ‘도선의 풍수담론’의 특징은 일부 풍수적 사실에 부합되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一行과의 관계성을 연계한다든지, 入唐하였다든지, 전체적으로는 실제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허구적‧신비적인 내용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생산된 도선의 이름을 가탁한 풍수내용이다.
6] 본 논문에서 ‘도선의 전통풍수’란 도선이 풍수를 펼치던 라말여초의 도선의 풍수사상의 본류를 의미한다. 이것은 한국의 전통풍수라고 정의하고 밝혀서 계승‧발전시켜야 하는 한국인의 전통풍수사상이다.
7] 박헌영, 「도선국사 풍수사상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徐閏吉, 「道詵 裨補思象의 淵源」, 『불교학보』, 1976 ;
성동환‧조성구, 「신라말 구산선문의 사찰입지의 입지선정 연구」, 『한국지역지리지학회지』6], 한국지역지리지학회, 2000 ;
이진삼, 「道詵의 裨補思想연구」, 『한국사상과 문화』55, 2010 ;
조수동‧장기응, 「도선의 풍수지리사상 연구」, 『철학논총』23, 새한철학회, 2001 ;
최병헌, 「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 『韓國史硏究』11, 1975 ;
최원석, 「지리산권의 도선과 풍수 담론 ―풍수지리설의 사회적 재구성」, 『남도문화연구』18, 2010;
최원석, 「道詵風水의 본질에 관한 몇 가지 論究」, 『응용지리』 17, 1994;
최창조,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사상 해석」, 『도선국사 도선 신연구』,영암군, 1987;
梁銀容, 「高麗太祖親製 開泰寺 華嚴法會疏의 硏究」, 10回 韓國佛敎學硏究發表, 한국불교학회, 1984.
8] 최병헌, 上揭書, 120쪽.
9]『朱子集』, 「山陵議狀」. “地理之學, 出於江西福建者爲尤盛.” 지리학은 강서‧복건지방에서 나온 것이 성행하였다.
10] 이능화, 『朝鮮佛敎通史』(卷下), 韓國學硏究所, 1977, 252쪽.
11] 이능화, 위의 책, 252쪽; 朴全之(1250~1325)은 「龍岩寺重創記」에서 異人을 지리산 산신이라 하였다.
12] 徐閏吉, 「道詵 裨補思象의 淵源」, 『불교학보』, 1976, 174쪽.
13] 최창조,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사상 해석」, 1987; 최창조, 「한국 풍수사상의 자생적 특징」, 『정신과학』 12, 공주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7.
14] 최원석, 「지리산권의 도선과 풍수 담론 ― 풍수지리설의 사회적 재구성」, 『남도문화연구』18, 2010, 240쪽.
15] 이진삼, 「道詵의 裨補思想 연구」, 『한국사상과 문화』 55, 2010.
16] 비보사탑설이란 산천의 기운이 病通이 있어서 조화롭지 못한 곳에는 사찰이나 탑을 세우고 불법의 공력으로써 순화시킨다는 논리이다. 지기가 악한 곳에는 불상이나 탑을 세워 압승하고, 허한 곳은 사찰을 세워서 산천자연을 조화롭게 하기 위한 불교적 풍수논리이다.
17] 박헌영, 「도선국사 풍수사상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18] 조수동‧장기응, 「도선의 풍수지리사상 연구」, 『철학논총』23, 새한철학회,2001, 272쪽.
19] 이덕진, 「新羅末 桐裏山門에 대한 연구」, 『韓國仙學』, 2001, 242쪽.
2. 도선국사 이전의 풍수전문가
도선국사는 한국의 전통풍수를 대표하는 인물로 조명 받고 있지만, 도선국사 이전 송악의 지명을 개명한 선풍수가善風水家가 있었다. 이는 한국의 전통풍수사상이 도선의 이름으로 대표하고 있지만, 도선이외의 당시의 전통풍수사상이 폭넓게 전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선국사 이전에 풍수관련 문헌을 통하여, 도선국사가 한국풍수의 비조鼻祖로서 대표하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있어 왔던 전통풍수문화라는 것을 집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래서 전적을 통하여, 도선이전의 전통풍수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전통풍수사상이 도선 한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라말선초부터 하나의 전통문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중요한 의미이다.
1) 송악을 비보 처리한 선풍수가善風水家
도선국사 이전 부소군을 송악으로 지명변경 하도록 한 선풍수가 있었다. 송악의 옛 지명은 부소군이다. 도선의 방문 이전에 부소군을 방문한 풍수가는 마을을 남쪽으로 옮기고 지명을 송악이라 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송악산의 악한 기운을 막는 풍수적 처방을 하였다.
『고려사』에는 풍수를 잘 보는 훌륭한 풍수가가 부소군에 이르러 강충에게 풍수적 처방을 알려주었다.20] 선풍수가는 그렇게 하면 송악에서 삼한을 통일하고 대업을 이룰 인물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강충’21]은 선풍수가 있어서 고을을 부소산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주하고 지명도 송악군으로 개명하였다.
“신라때 감우監于팔원八元이란 훌륭한 풍수전문가가 부소군扶蘇郡에 이르렀다. 군郡은 부소산(송악산)의 북쪽에 있었는데 산형세가 빼어나지만 민둥산인 것을 보고서 강충에게 고하기를, 만약 군郡을 부소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악석惡石들이 보이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사람이 나옵니다. 이에 강충은 군
민들에게 산의 남쪽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악석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고, 군의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22]
민속학의 관점으로 살피면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암석을 숭배하는 대상으로 여길 때 소나무를 심어 암석을 가리는 사례가 있다.23] 이것은 흉한 것을 가려서 불견처리 하는 풍수적 비보방법중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송악松嶽이란 지명의 유래는 소나무를 심어서 악석이 보이지 않게 가렸다는 의미이지만, 소나무와 악석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지명에서도 악한 기운을 소나무의 기운이 순화시키는 지명 비보의 측면으로도 볼 수 있다.
태조왕건의 5대 할아버지 강충이 풍수가의 조언을 수용하여 마을사람들을 따뜻한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올바른 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도록 마을을 풍수적 측면에서 선택하고, 부소산의 흉한 악석을 보이지 않도록 불견처리를 하고 또한 지명까지 변경한 것은 지명과 비보에 관한 전통풍수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도선이 왕건의 집터를 다녀가기 전에 이미 태조의 5대 할아버지 때에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나올 것을 예건하는 풍수가가 있었다는 것은 한국의 전통풍수사상이 도선 이전에 이미 전통풍수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고려사』世系 「편년통록」에 인용된 이 내용은 金寬毅, 『編年通錄』에서 인용하였다.
21] 「고려국조신화」에 의하면 강충은 태조 왕건의 5대조로 나온다. 6대조 虎景大王, 5대 康忠, 4대 寶育, 2대 作帝建, 1대 왕륭이다.
22]『高麗史』高麗世系. “時新羅監干八元, 善風水到扶蘇郡, 郡在蘇扶山北, 見山形勝而童, 告康忠曰, 若移郡山南, 植松使不露嶽石, 則統合三韓者出矣, 於是康忠與郡人, 從居山南, 栽松遍嶽, 因改名松嶽郡.”
23] 李準坤, 「道詵傳說의 變異와 形成」,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314 쪽.
2.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터를 선정한 심충
도선국사 이전 한국의 전통풍수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또 있는 데, 바로 봉암사鳳巖寺의 사찰 터를 정한 심충이란 풍수가이다.
봉암사는 희양산문羲陽山門의 사찰이고, 경북 문경군 가은읍 원북리에 위치한다.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824~882)선사가 881년에 봉암사 터를 선정할 때 일화를 기록한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의 내용에는 풍수에 밝은 심충沈忠이란 사람이 봉암사 터를 풍수물형으로 설명하면서 사찰을 짓도록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터를 제공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는 “건혜乾慧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충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사의 이치를 분별하는 칼날이 선정과 지혜에 넉넉하고, 사물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천문과 지리를 환히 들여다보며, 의지가 담란曇蘭처럼 확고하고 학술이 안름安廩과 같이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나 뵙고 예의를 표현한 뒤 아뢰기를, “제자에게 남아도는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봉암鳳巖‧용곡龍谷으로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바라건대 선사禪寺를 지으십시오.” 제안하였다.
대사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내가 분신分身하지 못하거늘 어찌 이를 사용하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심충의 요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전추前騶로 삼은 듯 기이한 형상이 있었는지라, 곧 석장을 짚고 나무꾼이 다니는 좁은 길로 빨리 가서 두루 살피었다.
산이 사방에 병풍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처럼 두른 것을 보니,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도헌선사 말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봉암사를 열었다.
도헌선사는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에 대한 방비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기와로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세워서 지세地勢를 진압하도록 하였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중화中和 신축년辛丑年(881)에 전안윤사 승통인 준공俊恭과 숙정대의 사인 배율문裵聿文을 보내 절의 경계를 표정케 하고, 이어 ‘봉암鳳巖’이라고 명명하였다.”24]
이는 비록 도헌선사가 풍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하더라도 심충으로부터 길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곳에 절을 짓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을 우려하여 심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봉암사는 조령鳥嶺에 있는데, 조령은 문경의 높은 산세가 마치 새가 날아다니는 듯 형상을 한 고개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풍수적인 길지에 위치한 봉암사는 풍수물형에 정통한 심충에 의하여 사찰터가 희사되어 도헌선사가 희양산문을 개창하였다.25]
신라하대 대부분의 선종사찰의 개산조가 중국에 유학한 선승들이라면, 봉암사와 옥룡사는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풍수적인 식견에 의하여 봉황형상의 주산아래에 사찰 터를 선정한 선종사찰이라는 점이 다르다.
24] 崔致遠 撰,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有居乾慧地者曰, 沈忠聞大師刃餘定慧鑑透乾坤志確曇蘭術精安廩禮足已白言弟子, 有剩地在曦陽山, 腹鳳巖龍谷境駭橫目幸構禪宮徐, 答曰吾未能分身, 惡用是忠請膠固加以山靈」有甲騎爲前騶之異, 乃錫挺樵溪, 而歷相焉. 且見山屛四迾, 則獄鳥翅掀, 雲水帶百圍, 則虬腰偃石, 旣愕且唶曰獲是地也. 庸非天乎不爲靑衲之居, 其作黃巾之窟, 遂率先於衆防後爲基起瓦▨, 四注以壓之鑄鐵像二軀, 以衛之至 中和辛丑年, 敎遣前安輪寺僧統. 俊恭肅正, 史裵聿文, 標定疆域, 芸賜片帝, 爲鳳巖焉.”(출처: 한국금석문통합뷰
어).
25] 봉암사는 현재 선승들이 참선으로 수행‧정진하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일반 신도들은 1년에 한번 부처님 오신 초파일날에만 출입할 수 있는 선승들의 요람이다.
봉암사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137호인 도헌선사의 사리부도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가 있다.
3. 도선국사 풍수사상의 실재
도선의 전통풍수사상은 『고려사高麗史』와 선각국사탑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26]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27]에는 도선이 태조 왕건의 생가 터를 선정하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이다. 이것을 통하여 도선의 풍수가 실제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살펴본다.
1)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도선의 풍수
①『고려사』에서 도선은 왕건의 생가 터가 말 머리에 떨어진 마두명당馬頭明堂이라고 하였다. 물형론에서 마두명당은 뒷산 현무가 말의 머리처럼 우뚝 솟아서 길게 아래로 내려온 형상이고 혈처는 말의 코(馬鼻)에 해당한다. 이는 태조의 집터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물형인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는 의미이다.
갈마음수형의 명당에서 혈처는 말의 코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왕건의 생가 터는 뒷산에서 조금 내려와 물이 감싸는 곳에 위치하였을 것을 연상할 수 있다.
도선이 왕륭 집터의 주산을 함께 올라가 산의 내룡來龍을 설명하기를,
" “이 집터의 지맥은 임방의 백두산에서 수모목간룡으로 들어와서, 마두에 해당하는 명당을 만들었습니다. 군께서는 명궁이 수水이니, 마땅히 수의 대수大數에 따라서 집을 육육삼십육六六三十六 간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응하여 내년에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28] 라고 풍수적인 설명을 하였다. "
도선의 설명을 부연하면 왕건의 생가 터로 들어오는 용맥은 임壬방에서부터 내려왔으니, 임은 오행이 수에 해당하므로 그 터는 수에 해당하는 터라는 의미이다. 주인 왕륭의 명궁이 수이므로 땅의 오행과 부합된다. 또한, 수의 생수生數는 1이고 성수成數는 6이니 66六六을 세우면 36三十六이 대수大數이다. 그래서 도선은 왕륭에게 대수에 부합되도록 36간의 집을 지으면 천지의 이치에 부합된다고 하였다. 이에 왕륭은 도선이 집터를 정한 곳에 새로이 대수에 맞게 집을 짓고 이듦 해 왕건을 낳았다.
도선은 그 땅에 태어난 인물에도 땅의 물형에 부합되는 이름을 지었다. 도선이 왕건의 생가 터를 물형으로 마두명당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어나는 아들을 건建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다.
도선은 태어나는 인물의 이름에도 풍수적 물형을 연관하여 이름을 지었다. 왕건의 생가 터는 풍수적 물형으로 말의 형상이다. 말은 강건康健함을 상징하므로 태어나는 인물의 이름에도 풍수적 물형에 부합되는 말의 상징인 강건함의 의미를 담아서 건建이름을 취하였다. 삼한을 통일할 대업을 이루려면 강건한 인물이 필요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은 땅의 신령한 기운의 의미를 풍수적 물형에서 도출하여 그에 맞는 걸출한 인물의 탄생
을 예견하는 지령인걸地靈人傑의 사상이다. 지령이 인걸이라는 땅의 신령한 기운을 풍수적 물형에서 도출하여 그에 맞는 걸출한 인물의 탄생을 예견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그 땅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는 인물에도 그에 부합되는 이름을 짓는 것이 도선의 전통풍수사상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도선은 왕건이 장성하여 17세(만 16년)가 되자 도선이 다시 개경을 방문하여 왕건에 삼한을 통일하고 장차 새로운 왕조를 열기위하여 지리와 천시의 감통의 원리를 전수하여 주었다. 도선의 풍수운영에서는 땅의 성정을 오행으로 판단하여, 주인의 명궁에 부합되고, 주인이 사는 집을 대수에 맞도록 칸수도 정하고, 태어나는 인물에도 땅의 물형적 성정을 담아서 이름을 짓는 도선의 전통풍수사상을 엿볼 수 있다.
26]『고려사』는 1451년(조선, 문종 1) 鄭麟趾, 『고려사절요』는 그 이듬해 金宗瑞(1390 ~1453)에 의해 각각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편찬 책임자에 불과하다. 두 역사서는 왕의 명령에 의해 편찬되었다. 『고려사』는 편찬 책임자 정인지를 포함하여 32명의 역사가, 『고려사절요』는 편찬 책임자 김종서를 포함하여 27명의 역사가들이 참여하여 편찬된 이른바 官撰史書이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27]『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 編年體 역사서로서 35권 35책의 활자본이다.
1452년(문종 2) 金宗瑞 등이 왕명을 받고『고려사』를 저본으로 纂修하여 春秋館의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당시의 편년체 사서로 세종 때 尹淮가 편찬한 『讎 校高麗史』와 權踶의 『高麗史全文』을 참조하고, 1451년 완성된『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하여 5개월 만에 편찬한 것이다. 비록『고려사』만큼 내용이 풍부하지는 못하나 거기에 없는 사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또『고려사』에 누락된 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도 있어 고려시대의 역사서로 상호‧보완적인 사료적 가치가 있다(출처 : 두산백과, 네이버).
28]『高麗史』高麗世系. “此地脈, 自壬方白頭山, 水母木幹來, 落馬頭明堂. 君又水命, 宜從水之大數, 作宇六六爲三十六區, 則符應天地之大數, 明年必聖子, 宜名曰王建.”
②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위와 같은『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이 담겨 있지만 조금 더 상세하게 도선과 왕륭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그 후 도선이 개경을 다시 찾아가 왕건을 만나서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법과 지리‧천시의 법을 전수하여 장차 삼한을 통일하고 새로운 왕조를 창업할 지도자를 교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고려사절요』에서 태조 왕건이 즉위하고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는데, 태조가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데 있어서 도선의 예언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왕륭의 집터를 잡아주었다. 그 집터는 풍수물형으로 마두명당馬頭明堂에 해당하는 길지였는데, 이후 나라를 개국할 역량이 있는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이름을 미리 지어 주었다. 그 후 도선은 다시 송악을 방문하여 왕건을 만나서 천문지리와 군사학을 지도하였다.
"여름 6월 병진일에 태조가 포정전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고쳤다.
과거에 세조世祖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중 도선이 문 밖 나무 아래에 와 쉬면서 탄식하기를, “이 땅에 마땅히 성인이 날 것이다.”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신도 거꾸로 신은 채 따라 나가 맞이하여 그와 함께 송악산에 올랐다. 도선이 굽어 살피고 우러러 보더니 글 한 통을 지어 세조에게 주면서, “공이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자라거든 이것을 주십시오.” 하였는데, 글은 비밀에 부쳐져 세상에서 알지 못하였다. 태조의 나이 17세 때에 도선이 다시 와서 보기를 청하고서, “족하足下는 일백수[一百六]의 운수를 만났으니 말세의 창생은 공이 널리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오.” 하고, 곧이어 군사를 내고 진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지리‧천시의 법과 산천에 제사지내는 데 관한 감통과 보우保佑의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29]"
29]『高麗史節要』 卷之一, 「太祖神聖大王‧戊寅元年」. “夏六月丙辰, 太祖卽位于布政殿, 國號高麗, 改元天授, 初世祖築室松嶽之南, 僧道詵, 來憩門外樹下, 嘆曰, 此地當出聖人, 世祖聞之, 倒屣出迎, 相與登松嶽, 道詵俯察仰觀, 就爲書一封, 授世祖曰, 公明年, 必得貴子, 旣長, 可以與之, 書秘, 世莫知也, 太祖年十七, 道詵, 復至, 請見
曰, 足下値百六之會, 三季蒼生, 待公弘濟, 因告以出師置陣, 地利天時之法, 望秩山川, 感通保佑之理.”
태조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이미 지었는데, 어느 날 도선이 문밖에 앉아서 이 집에서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니,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황급하게 도선을 모셔와 송악산에 함께 올라서 자세한 풍수적인 얘기를 듣는다. 도선이 왕건의 태어날 터를 선정해주고, 왕건에게 장차 삼한을 통일 할 지도자를 위한 천시와 지리를 전수해 주는 장면을 ① 『고려사』와 ②『고려사절요』에서 종합할 수 있다.
③『고려사절요』에서는 태조의 아버지 왕륭은 송악군을 궁예에게 바치고 금성태수를 부여 받았고, 왕륭은 도선의 예언을 상기하고 삼한을 통일하기 위하여 아들 왕건을 성주로 삼아 줄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태조가 20살이던 해였다.
"이때는 신라의 정치가 문란하여 뭇 도적들이 다투어 일어나던 때로 견훤은 반역하여 남쪽 고을을 점거하여 후백제라 일컫고, 궁예는 고구려의 옛 땅을 점거하여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였다. 세조는 송악군의 사찬[沙飡]이었는데, 그 고을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歸附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즉시 그를 금성태수로 삼았다. 세조가 곧이어 궁예를 설득하여 아뢰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시고자하면, 먼저 송악군에 성을 쌓고 저의 맏아들을 그 성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궁예가 그 말에 따라 태조에게 발어참성勃禦槧城을 쌓게 하고, 이어 성주로 삼으니 이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30]
30] 위의 책 卷之一, 「太祖神聖大王」. “時新羅政衰, 群賊競起, 甄萱, 叛據南州, 稱後百濟, 弓裔據有高句麗之地, 都鐵圓, 國號泰封, 世祖, 爲松嶽郡沙粲, 以郡歸于裔, 裔喜, 卽以爲金城太守, 世祖因說裔曰, 大王, 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 爲其主, 裔從之, 使太祖, 築勃禦槧城, 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 後伐廣州忠州唐城靑州槐壤等郡縣, 平之, 以功授阿粲, 又率舟師, 攻錦城郡拔之, 擊取十餘郡縣, 仍改錦城, 爲羅州, 良州告急, 裔令太祖往救之, 及還, 陳安邊拓境之策.”
왕건의 아버지 세조는 궁예를 설득하여 아들 왕건을 송악군의 성주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태조가 도선의 예언을 상기하면서 장차 왕건을 삼한을 통일하고 대업을 이루기 위한 임무를 맡기 위한 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한 것은 세조 왕륭이 도선의 풍수적인 처방의 도움을 받아서 이미 계획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의 개국은 왕륭이 도선의 풍수적 지혜를 활용하여 계획하고 왕건이 실행한 결과이다.
2) 도선국사 탑비문에 담겨 있는 도선의 풍수
도선이 풍수를 접하게 되는 과정을 도선국사 비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선이 지리산의 암자에 기거할 때, 지리산 신령이 꿈속에서 도선에게 풍수를 전수해 주려고 한다는 계시한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꿈속의 이야기이다. 도선이 기이하게 여겨서 다음날 남해의 바닷가에 이르자 그곳에 과연 꿈속에서 만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도선이 옥룡사에 있지 않고 지리산에 암자를 짓고 휴식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낮선 사람이 찾아와 계단아래에서 도선에게 이르기를, “제자弟子는 세상을 떠나 그윽한 곳에서 살아온지가 벌써 수 백년에 가깝습니다. 제에게는 조그만 비기秘技가 있어서 스님에게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비록 미천한 술수로 여기지 않으시면 다음 날 남해의 바닷가에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것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입니
다.”라 하며,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스님이 볼 수 없었다. 후에 그곳에 가니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31] "
31] 崔惟淸 撰, 「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 幷序」. “始師之未卜玉龍也, 於智異山甌嶺置庵止息, 有異人來, 謁座下啓師云, 弟子幽棲物外近數百歲矣, 緣有小技可奉尊師, 儻不以賤術見鄙, 他日於南海汀邊當有所授, 此亦大菩薩救世度人之法也.”
이 문장은 도선이 지리산에서 암자를 짓고 있을 때, 잠시 쉬고있는 꿈속에서 계시를 받는 장면이다. 도선이 지리산 신령에게 계시를 받아서 풍수를 전수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인지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도선은 약속 장소인 남해 바닷가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풍수를 처음 접하게 된다. 그곳에는 과연 꿈속에서 만났던 사람이라고 만났다고 하는 신비성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도선이 꿈속에서 지리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풍수를 공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신비한 측면도 담고 있지만, 도선이 풍수를 배운 것은 일반인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 다음은 도선이 꿈속에서 계시를 받고 현재 구례현의 경계지점인 약속장소를 나가서 풍수를 공부하는 장면을 설명한다. 지금은 풍수를 배울 때 도로가 있고 차량이 있어서 편리하게 전국산천의 좋은 땅을 답사하면서 풍수를 공부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도보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풍수를 공부하기에 가장 편리한 것은 강가에서 모래로 풍수현장의 형상을 쌓아서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풍수지리를 강의 하는 장소가 모래가 있는 강변이 적합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모래로 산의 형상을 쌓아서 명당주변에 산을 지금도 사격砂格이라고 한다.
도선국사가 사도촌의 강변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풍수를 배우고, 가르치는 선생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선도 그곳에서 처음 형세풍수를 접하게 되었다. 그곳은 구례현의 경계지점으로서 강변의 모래를 쌓아서 도선에게 풍수를 전수하였다는 장소이다.
도선은 사도촌에서 산수의 순역을 공부하고, 형세론 풍수를 배운 후 음양과 오행의 풍수관련 서적을 구하여 홀로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사도촌에서 배운 형세풍수를 접목하여 산수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도선의 전통풍수는 형세와 음양오행을 근본으로 하는 풍수라는 의미이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장소를 찾아갔다.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모래를 끌어 모아 산천의 순역과 형세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돌아다보니 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곳은 현재 구례현의 경계인 땅인데,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사도촌沙圖村이라고 부른다.32]"
32] 崔惟淸 撰, 「上揭書」. “囙忽不見師, 奇之尋, 往所期之處, 果遇其人, 聚沙爲山川順逆之勢, 示之, 顧視則其人已無矣, 其地在今求禮縣界土, 人稱爲沙圖村云.”
사도촌에 산수의 순역을 공부하고, 형세론 풍수를 배우고, 풍수관련 서적도 구했을 것이다. 그 후 도선는 홀로 음양과 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사도촌에서 배운 형세풍수를 접목하여 산수의 이치를 깨달았다. 도선의 풍수는 형세와 음양오행을 근본으로 하는 풍수라는 의미이다.
“이로 말미암아 도선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 더욱 더 음양오행의 술법을 궁구하여 비록 금단과 옥급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그윽하고 비밀스런 비결들을 이치를 마음속에 담았다.”33]
33] 崔惟淸 撰, 「上揭書」. “師自是豁, 然益硏陰陽五行之術, 雖金壇玉笈, 幽邃之訣, 皆印在胷.”
도선은 풍수를 접하게 되는 계기는 예지몽에서 출발한다. 꿈속에서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가서 형세풍수관련 지식을 모래성을 쌓아서 교육을 받고, 음양오행의 이치를 풍수에 접목하였다.
<표 1> 고려사의 개경관련 풍수
출 처 | 풍수처방 및 제안 | 비 고 |
『고려사』 | 1. 扶蘇山을 松嶽으로 이름변경 제안. | 강충 작제건 때 善풍수가 개경을 방문하여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탄생할 것을 예견하였다. |
1. 六六 三十六칸 집조성제안 | 道詵이 왕륭의 집터를 방문하여 새로운 집터를 선정하고 왕건의 탄생을 예고하였다. | |
『고려사』 『고려사절요』 | 도선의 태조 탄생 예언 | 왕건의 말씀 |
김위제의 三京論 제안 | 「道詵記」에 의거하여 |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도선의 풍수관련 사항을 도표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도선의 풍수사상을 거론할 때 항상 풍수 물형과 함께하고 있다. 이는 도선의 풍수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풍수 사상에서 중요한 점이다. 도선의 전통풍수 사상은 땅의 형상에 맞도록 물형物形을 정하고, 주산을 답사하여 혈처로 들어오는 내룡맥來龍脈의 오행을 살펴서 대수大數에 부합되도록 집을 짓고, 그에 해당하는 명궁의 사람이 그 땅에 주인이 되고, 그 땅에서 태어날 인물의 출생과 명궁을 미리 알고, 그 땅의 물형에 부합되는 성정에 맞도록 인물의 이름을 지었다. 이는 땅을 살아있는 생물로 인식하여 풍수적인 물형을 정하고, 그 땅의 성정은 래룡을 통하여 알아내고, 이것에 부합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인간과 땅을 조화롭게 설계하는 풍수사상이다.
4. 도선의 풍수담론
도선의 풍수담론은 도선의 이름을 가탁한 풍수관련 내용들을 의미한다. 도선의 풍수담론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는 않지만 그럴 듯한 내용을 담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지리산권 문화에서 한국의 전통풍수를 보존‧발전되도록 하는 원동력이된 문화적 순기능도 있다.
본 장에서는 도선의 풍수담론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공신력을 가진 기관에서 저술한『고려사』, 『조선왕조실록』그리고 조선총독부 발행의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등에서 그 내용을 찾아보고자 한다.
1) 『고려사』의 도선의 풍수담론
『고려사』 에서 김위제는 숙종원년(1095) 「도선비기道詵秘記」를 근거로 남경에 성도를 세워 삼경三京을 갖추어 왕이 순회할 것을 「남경건도의南京建都議」에 상소문 하였다.
삼경은 송악이 중경이되고, 평양이 서경이 되며, 목멱양은 남경이다. 상소문은『고려사절요』에도 동일한 내용이 같이 간략하게 실려 있다.34]
34]『高麗史節要』 卷6, 肅宗明孝大王一. “○衛尉丞, 同正金謂磾, 上書, 請遷都南京, 略曰道詵記, 云, 高麗之地, 有三京, 松嶽爲中京, 木覓壤爲南京, 平壤爲西京, 十一十二正二月住中京, 三四五六月住南京, 七八九十月住西京, 則三十六國, 朝天, 又云, 開國後百六十餘年, 都木覓壤, 臣, 謂今時, 正是巡駐新京之期, 今, 國家, 有中京, 西京, 而南京, 闕焉, 伏望於三角山南, 木覓北平, 建立都城, 以時巡駐, 於是日者文象, 從而和之.”
김위제는 숙종원년(1096)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이 되었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라는 승려가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전한 일이 있다.’35]
김위제가 도선의 술법을 공부한 다음, 남경南京으로 천도遷都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도선기道詵記」에는 ‘고려 땅에 3경三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은 중경中京이고 목멱양木覓壤은 남경南京이며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다. 11‧12‧1‧2월은 중경에, 3‧4‧5‧6월은 남경에, 7‧8‧9‧10월은 서경에 각각 머무르면 서른여섯 나라가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또 ‘개국한 지 160여 년 후에 목멱양에 도읍을 정할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 새 수도를 돌아보시고 거기에 머무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도선이 지은 「답산가踏山歌」를 보니 이러했습니다.
‘송성松城이 쇠락한 뒤에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삼동三冬의 해 뜨는 곳에 넓은 들판이 있도다. 후대의 어진 이가 대정大井을 여니 한강漢江의 어룡魚龍이 사해四海에 통하도다.’
여기서 삼동에 해 뜬다는 것은 음력 11월에 해가 동남쪽에서 뜬다는 말로, 목멱산이 송경의 동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적었습니다.
‘송악산은 진한과 마한의 주산이지만 오호라! 그 시작과 끝이 언제인지 뉘 알리오? 꽃 뿌리가 가늘고 약하면 가
지와 잎사귀도 그러하리니 겨우 백년 기한에 어찌 시들지 않으리요? 뒤에야 새로운 꽃 피울 지세를 찾고자 양강陽江을 건넜다가 헛되이 돌아왔다네. 사해의 신어神魚가 한강에 조회하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태평성태를 이루리라.’36]
이러하므로 한강의 북쪽에 도읍하면 왕업이 장구할 것이며 온 천하가 조회하러 모여들어 왕족이 창성할 것이니 실로 큰 명당의 땅이라 할 것입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후대의 어진 이가 사람의 수명을 깨달아 한강을 넘지 않으면 만세의 위풍 이루리라. 만약 그 강을 건너 도읍을 정하면 한 나라가 찢어져 한강을 경계로 삼으리라.’
또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을 들고 머리를 돌려 산 형상을 살펴보니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했으니 이곳이 삼신산이로다. 산 남쪽과 북쪽에 꽃들은 서너겹으로 피었으매 몸소 옷을 걷어 부치고 뒤로 산을 의지해 수호守護에 나섰도다.
맞은편에서 대여섯 산이 조회하고 고모산‧ 숙부산‧부친산‧모친산이 높이 높이 솟았구나. 안팎의 대문에 세마리씩 개가 있어 항상 충성 다해 임금을 모신다네. 청룡과 백호가 다투지 않고 같이 오르니 안팎의 장사치들이 저마다 보배를 바치리. 이웃의 객이 자기 이름 알리러 아들같이 달려와 모두 한마음으로 나라를 돕고 임금을 바르게 한다네.
임자壬子년에 도읍의 기초를 닦기 시작하면 정사丁巳년에 성스러운 왕자를 얻으리라. 삼각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정하면 아홉해 만에 천하가 경배하러 오리라.’
그러므로 그 곳이 바로 현명한 임금께서 성대한 덕정을 펼칠 땅입니다.
또『신지비사神誌秘詞』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울에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扶踈요,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며 극기極器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위 세 곳에 도읍하면 70국이 항복해서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地德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히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가르쳐 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
이는 저울로써 3경三京을 비유한 것으로 극기는 머리, 저울추는 꼬리, 저울대는 저울의 균형을 잡는 곳입니다. 송악은 부소扶踈로서 저울대에 비유했으며, 서경은 백아강으로 저울머리에 비유했으며, 삼각산의 남쪽은 오덕을 갖춘 곳으로 저울추에 비유했습니다.
오덕五德이란, 가운데 있는 면악面嶽이 둥근 형태로 토덕土德, 북쪽에 있는 감악紺嶽은 굽은 형태로 수덕水德, 남쪽에 있는 관악冠嶽은 뾰족뾰족한 형태로 화덕火德, 동쪽에 있는 양주楊州 남행산南行山은 곧은 형태로 목덕木德, 서쪽에 있는 수주樹州 북악北嶽은 네모진 형태로 금덕金德을 나타내니, 이 역시 도선이 말한 3경三京의 뜻에 부합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빠져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의 편편한 땅에 도성을 건립하여 수시로 순행하고 머물도록 하소서. 이는 실로 사직의 흥망성쇠에 관련되는 것으로 신은 감히 배척받을 것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아뢰나이다.”
당시 일자日者 문상文象이 그 말에 찬성했으며, 예종睿宗 때에 은원중殷元中도 역시 도선의 설을 인용해 글을 올려 같은 주장을 폈다.37]
35] 도선이 입당한 적이 없다. 다만 도선이 일행의 풍수술에 관한 저술을 접할 수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6]『고려사』는 고려시대에 관한 내용이지만, 현재 전하는 고려사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에 김종서 등에게 자료를 모아서 편찬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왕조입장에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측면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사해의 신어가 한강에 조회하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태평성태를 이루리라.” 바로 이러한 찬양조 문장이다.
즉, 태조 이성계가 삼각산을 등지고 한강물이 회포하는 목멱양(지금의 서울)에 도읍지를 정하면 천하가 경배하러 오는 명당이라는 의미이다.
37]『高麗史』卷122, 「列傳」35 方技, 金謂磾(출처 : 국역고려사).
『고려사』 에서 김위제가 숙종에게 올린 「남경건도의南京建都議」 상소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한마디로 한강의 북쪽 삼각산 남쪽은 오덕을 갖춘 땅으로서 태평성대를 보장 받을 수 있는 땅이고, 목멱양에 도읍지를 정하면 천하가 조회하러 모여들어 왕업이 장구하고 왕족이 창성할 것이라고 남경을 길지로 찬양하는 요지이다.
① 「도선기道詵記」에는 도선이 고려가 개국 후 160여 년이 지나면 목멱양(한양 땅)에 도읍정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는 의미이다.
② 「답산가踏山歌」에서 ‘송성松城이 쇠락한 뒤에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한강의 북쪽에 도읍하면 왕업이 장구할 것이며 온 천하가 조회하러 모여들어 왕족이 창성할 것이니 남경은 실로 큰 명당의 땅이라 극찬하였다.
과연 도선이 이미 고려의 멸망을 예언하였다는 말인가?
③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에서는 ‘눈을 들고 머리를 돌려 산 형상을 살펴보니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했으니 이곳이 삼신산이로다. … 삼각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정하면 아홉 해 만에 천하가 경배하러 오리라.’ 찬양하였다.
④『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는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히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가르쳐 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 이는 저울로써 3경三京을 비유한 것으로 극기는 머리, 저울추는 꼬리, 저울대는 저울의 균형을 잡는 곳입니다.
… 이 역시 도선이 말한 3경三京의 뜻에 부합한다고 저울에 비유하여 남경건설을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고려시대에 서경은 북방의 오랑케들을 막고자 군사적인 요충지에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성도를 건설하였다면, 숙종의 남경천도는 서경과 다르게 정치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숙종이 남경을 재건한 이유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기득권세력의 견제이다. 숙종은 헌종獻宗과 한산후漢山侯 그리고 이자의를 비롯한 개경 귀족들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서는 당시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38]
고려시대 숙종의 즉위과정은 마치 조선시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임금에 오른 것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는 왕위를 형제계승하고 있어서 헌종의 아우 한산후가 왕위계승 1순위였다. 그러나, 헌종의 숙부 중에서 최고 연장자인 계림공은 한산후의 측근 이자의를 제거하고 선양禪讓을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계림공은 바로 숙종인데, 숙종의 이러한 왕위찬탈은 개경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어서 내심 수도를 옮기고자 하는 의중이 있었다.39] 이것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 김위제이다.
김위제는 숙종이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김위제는 숙종의 수도를 옮기려는 의지를 읽고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도선의 풍수담론을 이용하여 숙종 2년(1097) 도선의 풍수 지리설을 이용하여 삼경三京론을 완성할 「남경건도의南京建都議」을 상소하였다.
숙종 4년(1099)에 9월에 재신 일관 등으로 하여금 양주에 남경을 재건설할 것을 의논하도록 하였다.40] 남경은 이때 시작되어 숙종 9년(1104)에 완성되었다. 심지어, 김위제의 상소문에는 ‘도선道詵이라는 승려가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전한 일이 있다.’라며 도선과 일행이 동시대의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실과 다른 도선의 풍수담론으로 시작된다.41]
도선의 풍수담론은 도선에 가탁하여 권위와 명분을 내세워 무조건 믿게 하는 신빙성을 바탕으로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활용된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숙종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김위제가 남경을 찬양한『고려사』의 「김위제」편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도선의 풍수담론으로 정리하는 이유이다.
38] 김철웅, 「고려시대 兩京 건설의 정치적 배경」,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2004 ;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0, 142~144쪽.
39] 최혜숙, 「高麗時代 南京巡幸」, 『鄕土서울』58, 1998.
40]『高麗史』권11, 「세가」11 숙종 4년 9월.
41] 도선의 생몰년대는 당 말기에 해당하므로 연대에 모순이 있고 당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2)『조선왕조실록』의 도선의 풍수담론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 이상계가 즉위하자, 서운관에서 지력이 다한 송도의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청하였다.42] 도선이 고려의 도읍지 송도의 터를 잘못 선정하여 고려가 망했다는 요지이고, 개경 땅은 이미 기운이 쇠한 터라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의미이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지력이 쇠한 개경은 더 이상 수도의 가치가 없다고 다음과 같이 상언上言하였다.
도선이 말하되, “ ‘송도松都는 5백 년 터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480년 터이며, 더구나 왕씨의 제사가 끊어진 땅이라.’ 하는데, 지금 바야흐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있으니, 새 도읍을 조성하기 전에 좋은 방위로 이행하십시요.”43 태조 이성계가 도평의사사에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도선의 풍수담론은 「도선답사가」에서 볼 수 있는데, “처음에 도선이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할 때에 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곳이 앞으로 팔백년 동안 이 나라 운수를 지탱할 곳이니 축하할 일이로다.’ 했더니, 조금 있다가 동남쪽에 안개가 걷히면서 한양의 삼각산이 우뚝하게 넘어다 보이는 것이 아니던가! 도선은 이것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탄식한다.
‘저 삼각산 봉우리가 진방에 있어서 마치 도둑놈의 깃발처럼 되었으니 400년이 지나면 이 나라의 큰 운수는 장차 저 산 밑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도선은 일흔 다섯 마리의 석견石犬을 만들어 진방을 향해 세워서 마치 도둑놈을 지키는 형용을 만들어 놓았다. 그 뒤 고려는 과연 475년만에 망해 버렸다.”44] 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고려의 수도는 500년 터라고 도선이 이미 언급하였다고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당연히 망할 때가 되어서 망한 것이고, 새로이 개국하는 조선은 도읍을 개경에서 옮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기하는 근거로 삼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도선답사가」는 도선이 개경의 터를 선정할 때, 개경에서 날씨가 맑으면 서울의 삼각산이 개경의 담장을 넘겨보는 규봉窺峰처럼 보이는데 날씨가 흐려서 보이지 않아서 오판했다는 것이다.
즉, 『조선왕조실록』에서 고려의 망국을 송도의 땅의 지기가 다하여 망하였다는 당위성을 도선의 이름을 빌어서 부각시켰다. 고려의 쇠망을 날씨가 흐려서 삼각산의 모양을 간과하여 개경의 도읍지의 수명을 실재는 475년 정도인데 800년 터로 오인했다는 도선의 풍수담론이다.
도선의 풍수담론의 특징은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사실이 다르다.
삼각산 봉우리가 도둑놈의 깃발 ‘적기賊旗’45]를 닮았다는 물형적 설명은 그럴 듯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한 도둑놈의 깃발은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삼각산이 기울어져 보여야 적기가 된다.46]
<도 1> 賊旗 <도 2> 壯元旗 <도 3> 得勝旗
(出處: 『人子須知』) (出處: 『人子須知』) (出處:『人子須知』)
42]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도읍으로 정한 남경은 고려시대 김위제가 풍수 담론 명당으로 찬양한 곳이다.
43]『조선왕조실록』太祖4卷, 2年(1393, 癸酉/ 명 洪武 26年) 9月 6日(戊申)1번째 기사, 戊申/書雲觀上言. “ ‘道詵云: 「松都五百年.」 又曰: 「四百八十年基.」 且王氏絶祀之地, 而今方興土工. 請新都造成之前, 移幸吉方.’ 下都評議使司議之.”(출처: 조선왕조실록. http:// sillok.history.go.kr/)
44] 최창조,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도서출판 서해문집, 1993,99~100쪽.
45] 賊旗는 산봉우리가 기울어져 패격을 이룬다. 반면에 장원기나 득승기는 산의 모양이 바르게 서 있는 형상.
46] 만약 삼각산이 기울지 않으면 장원기나 득승기로서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산은 어느 지점에서 보는 가에 따라서 모양이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개경에서 삼각산이 적기처럼 보이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기에 가부를 단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삼각산은 사방에서 보아도 똑바로 솟아오른 모양이기 때문에 개성에서도 적기처럼 보일 수는 없을 것이라 유추한다.
이것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도선의 풍수담론인 것이다. 이 내용은 조선을 개국한 승자의 입장에서 고려가 망한 것은 개경 땅은 삼각산이 넘겨보는 규봉 때문에 땅의 지기가 다되어서 당연한 것이고, 삼각산 아래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조선의 개국은 지기가 남경으로 이동하여 왕조가 자연스럽게 조선으로 이동하였다는 정당성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정치적 목적을 담고있는 도선의 풍수담론의 형식이다. 이와 같이, 도선의 풍수담론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허구성과 신비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목적의 특징이 있다.
3) 조선총독부 편집의 도선의 풍수담론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는 조선총독부가 한국의 전통문화를 수탈‧훼손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1년에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이 한국의 각 지방 사찰 중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아 정리‧간행한 책이다. 동국대학교에서 해방 후 누락된 것을 추가하여 출판하였다.47]
『조선사찰사료』에는 “우리나라 지형이 행주와 같다. 태백산 금강산이 그 뱃머리이고 월출산과 영주는 배의 선미에 해당한다. 부안의 변산은 배의 방향키이고, 영남의 지리산은 배의 노에 해당하며 능주와 운주는 배의 복부에 해당한다. 배가 물에 뜨는 것은 물건이 있어서 배의 머리와 꼬리 그리고 등과 배를 눌러주기 때문이다. 배의 방향키와 노가 있어서 배가 운행하는 것을 제어한 후에 배가 표류하여 가라앉는 것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다. 이에 사탑을 세워서 누르고 불상을 세워 눌러야 한다. 특히 운주의 아래는 땅의 지세가 꿈틀거리듯이 일어나는 곳이므로 천불천탑을 설치하여 배를 튼실하게 해야 한다.”48]라고 하였다.
이것은 화순 능주의 운주사에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149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49] 에서는 운주사를 ‘雲住寺’로 한자로 표기하였고, 조선시대 현종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지』50] 에서도 운주사를 ‘雲住寺’로 기록하여 천불산에 좌우 산등성이에 각각 천재의 탑과 불상이 있으면 석실 안에 두 부처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고 설명하였다.
운주사는 1495년(연산군 1)에 4차 중창을 거친 후 조선시대 현종대(1659~1674)폐사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51] 운주사는 19세기 후반까지 모든 자료에서 ‘雲住寺’ 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사찰사료』 포함 일제시대에 간행된 운주사의 사찰 이름을 살펴보면, 교묘하게 운주사 한자를 ‘運舟寺’로 변경해 놓았다. 일제강점기 1923~1925년대의 『능주읍지』에는 ‘運舟塔’, 1929년 「불교65- 66 천불천탑참배」에는 ‘運舟寺’, 1930년의 「운주사대적광전 상량문」에는 ‘運舟寺’, 1933년의『동아일보』 「운주사곡의 천불천탑」에는 ‘運舟寺’ 등 일제시대에는 대부분 운주사를 ‘運舟寺’로 기록하고 있다.52]
운주사에서 발견된 막새기와에 의하면 운주사의 정확한 한자는 ‘運舟寺’가 아니라 ‘雲柱寺’이다.53]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운주사의 한자는 교모하게 변경하여 ‘돛단배가 바다에 운행하는 형국의 사찰’이라고 한자를 표기하였다.
『조선사찰사료』는 일제 강점기 때 편집되고 정리된 문헌이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지사관과 도선의 풍수담론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지도를 호랑이에서 토끼의 형상으로 비유하여 나약한 식민사관을 인식시키기 위한 일제 강점기의 민족정기를 훼손하려는 일환과 상통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시대 김위제가 숙종에게 올린 「남경건도의南京建都議」상소문은 도선의 풍수담론을 이용하여 개경, 서경, 남경의 삼경론을 제시하는 동시에 남경의 천하명당설을 제기하면서 숙종의 정치적인 목적의 남경천도를 이루는데 도선의 풍수담론을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역성혁명에 의하여 고려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개경 땅의 지기가 쇠하여 자연히 망하였다는 논리로서, 왕조가 천하 대명당이 있는 남경으로 이동했을 뿐이라는 승자의 우월의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의 지명의 한자를 변경하여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등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측면에서 도선의 풍수담론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47]『朝鮮寺刹史料』는 일제가 식민통치 및 한국문화재를 수탈하기 위하여 편찬한 불교‧공예‧미술‧금석학‧건축사 등을 연구한 자료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에서 누락된 전라북도‧충청남도편을 조사‧보충하여 해방 후 증보‧간행했다. 여기에는 「道詵國師實錄」이 328쪽부터 실려 있다.
48]『朝鮮寺刹史料』(上), p.211, <道詵國師實錄>. “我國地形如行舟, 太白金剛基秀也, 月出瀛州其尾也, 扶安之邊山其拕也, 嶺南之智異其楫也, 綾州之雲柱其腹也, 舟之浮于水也, 有物焉, 以鎭其首尾背腹, 有拕楫焉, 以制其行然後免乎欹危漂流歸之矣, 於是乎建寺塔以鎭之, 立佛像以壓之, 特於雲柱之下蜿蜒赴起處, 則別設千佛千塔, 以實其背腹.”
49]『東國輿地勝覽』권40. “雲住寺在千佛山, 在之左右山脊, 石佛石塔各一千,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
50]『東國輿地志』卷5. “雲住寺在千佛西, 寺舊廢, 其左右崖壑, 石佛石塔, 大小甚衆謂之千佛千塔.”
51] 황호균, 「雲住寺의 新硏究 ― 寺刹 創建과 千不千塔의 造成背景論」, 한국대학박물관협회 학술대회, 2009, 47쪽.
52] 황호균, 위의 논문, 같은 곳.
53] 전남대 박물관, 『운주사』(1984)‧『운주사 Ⅱ』(1988)‧『운주사 Ⅲ』(1990); 김창현, 「고려시대 능성 운주사에 대한 탐색」, 46쪽.
5. 결론
본 논문은 도선의 풍수사상과 풍수담론을 살펴본 연구이다. 도선은 지리산 신령의 예지몽에서 풍수를 접하게 된다. 도선국사가 꿈속에서 산신령이 알려준 강변에 가서 산천의 순역을 처음 배웠다. 도선은 사도촌에서 형세론 풍수를 배운 후 홀로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음양오행의 이치를 형세풍수를 접목하여 풍수의 이치를 깨달았다. 이것은 당시의 풍수사상을 대표하는 도선의 전통풍수사상이다.
도선은 개경을 방문하여 왕건의 생가 터를 선정하여 주었다. 왕건의 생가 터는 마두명당이다. 도선은 땅의 신령한 기운이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다는 지령인걸의 인식체계에 부합되도록, 그 땅에서 태어나는 인물의 이름도 땅의 신령한 기운에 부합되도록 지었다.
도선은 음양오행을 풍수에 접목하였다. 왕건의 생가 터는 오행으로 수水에 해당하므로, 그에 부합되는 인물이 주인이 되고, 오행의 대수를 활용하였다.
수水의 생수生數는 일이고 성수成數는 육이니 육육을 세우면 삼십육三十六의 대수大數가 나온다. 왕륭은 도선이 선정한 터에 대수에 맞게 집을 짓고, 도선의 예견처럼 이듬해 아들을 낳으니, 도선이 지어준 이름 건建이라 하였다.
도선의 전통풍수 사상은 땅의 형상에 맞는 물형物形을 정하고, 오행을 정하여 대수에 부합되도록 집을 짓고, 대수에 해당하는 명궁을 가진 인물이이 그 땅에 주인이 되고, 그 땅에서 태어날 인물의 출생과 명궁을 대수를 통하여 알아내고, 그 땅의 물형에 부합되는 성정에 맞도록 이름을 짓는다. 이는 땅을 살아있는 생물로 인식하여 풍수적인 물형을 정하고, 그 땅의 성정은 내룡을 통하여 인식한다는 것이다.
도선의 풍수 담론은『고려사』 에서 숙종이 개경과 서경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남경천도에 도선의 풍수담론을 활용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의 송도를 475년 만에 망할 땅이라고 도선의 풍수담론을 근거로 고려패망의 당위성을 부각시키었다. 조선시대 고려의 패망에 대한 인식은 개경
땅의 지기가 다한 것이고, 도선의 풍수담론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남경에는 새로운 명당의 지기가 있는 곳에 왕조가 세워졌다는 생각이다. 『조선사찰사료』와 일제강점기에서는 구름이 머무는 ‘운주사雲住寺’의 지명 한자를 교묘하게 돛단배가 운행하는 절 ‘운주사運舟寺’로 바꾸는 등 한민족의 문화와 정기를 말살하려는 식민
사관이 담겨 있다.
도선의 풍수담론은 한 눈에 전체적인 형세를 볼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서 「물형도物形圖」‧「결록도訣錄圖」‧「명당도明堂圖」‧「비결도秘訣圖」 등 다양하게 풍수물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풍수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호남일대의 옥룡자유산록이라고 전해오는 문헌이 많은 것은 대부분 후대에 가탁한 도선의 풍수담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도선의 풍수담론은 허구성과 신비성을 가지고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생산된 특징이 있지만, 한국의 전통풍수를 발전시킨 순기능의 측면도 있다.
∙ 2015. 06. 30 : 논문투고
∙ 2015. 07. 10 ~07. 31 : 심사
∙ 2015. 08. 03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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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고려사,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한국금석문 통합뷰어(http://gsm.nricp.go.kr/)
Dosun visited Gaegyeong to select the place of house visiting where Wanghun(王建) was born. That's called similar to the shape of the head of horse in the theory of Fengshui. The name of Wanghun(王建) is derived from the shape of the mountain similar to the head of horse. The Dosun's Fengshui is in the importance of the shape of mountain, the principles of the Yin-Yang and the Five Elements with regards to the incoming line of dragon, and the personal passions from heaven.
Kyoryo Sukjong(高麗肅宗) were utilizing Fengshui political discourse leads to Nanjing nectarines for the purpose of restraining the powers vested in the gaegyeong and west longitude. Joseon Dynasty(朝鮮王朝) awareness of the destruction of the considerations will become exhausted is the gaegyeong land(開京), the basis of Feng Shui, the new Nanjing discourse of the Dosun was set up where every dynasty that has become a new thought. Colonial period has cleverly packed intended to obliterate the ethnic and cultural periodical, such as changing the nomination or temples.
The discourse of the Dosun's Fengshui has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Korea's traditional Fengshui. However, Dosun's Feng Shui discourse, but this feature has been produced with the political objective fallacy and mystery, there were aspects of traditional Feng shui positively development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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