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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설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예비 고찰
윤홍기(오클랜드 대학교 지리 및 환경학부)
들어가는 말
나는 이번 글에서 먼저 나의 ‘풍수지리설의 기원’에 관한 공부 과정을 회고함으로써 어떻게 하 여 ‘풍수지리설이 중국 황하 중류의 황토 고원지대의 굴집[窯洞]터 잡기와 굴집 만들기에서 기원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게 되었는지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그 풍수지리설이 어떻게 동아시아 각국에서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주 단편적이고 원시적이긴 하지만 예비고찰을 해 보고자 한다.
풍수지리설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도시 위치 선정에 많이 쓰여 왔고, 현재에도 쓰이고 있는 풍수지리설의 택지 원리가 언제 어디에서 기원되었을 것인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풍수지리의 신비적 발복(發福) 신앙이나 형이상학적인 측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따져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풍수에서는 어떤 장소가 다른 장소보다 복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러한 장소를 지관들이 택지 원리, 즉 어떤 곳이 길지(吉地)인지를 찾는 원칙을 적용하여 땅을 고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 풍수 택지 원리의 기원을 찾아보는 것이 풍수지리설의 기원을 밝히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먼저 풍수 택지술의 중요한 면을 살펴 규정하고 이러한 원칙이 어디에서 어떻게 기원되었을 것인가를 토론하겠다.
(1) 풍수의 택지 원리
1) 지형
현재 풍수지리에서 시골 마을이나 도시를 들어앉히거나 무덤을 쓰기에 좋은 땅을 찾을 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주위의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관들이 지형을 따질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산 두렁[山勢, 山脈]이다. 산의 모양이 어떠하며 어디서부터 어느 쪽으로 산맥이 왔는지 등을 본다. 산은 대체로 흙으로 되어 있고 수목이 우거지고 아름다워야 한다. 명당 또는 좋은 땅[吉地]이란 산이 삼면에서 감싸 안고 있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친다. 이러한 땅은 산 두렁이 시골 농가에서 흔히 쓰던 삼태기 모양, 또는 말발굽 모양으로 명당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명당의 뒷산을 주산이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명당을 감싸는 산 두렁을 백호라고 하고 왼쪽으로 감싸는 것을 청룡이라고 한다. 길지에 있어 가장 좋은 곳, 즉 생기가 고여 있는 곳을 혈(穴)이라고 하는데, 이 혈은 주산의 끝자락 즉 산비탈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주로 위치한다.
그리고 혈의 흙은 콩가루를 빻아 다져놓은 것과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누렇고 잘 다져진 자연 생성토가 가장 좋다고 한다.
2) 물(水脈, 물줄기)
풍수혈(예를 들면 묘지나 집터)은 일반적으로 명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러한 곳은 마른 곳이어야 하며 물이 고여 있거나 흘러가는 곳은 안 될 뿐 아니라 습기가 많아 항상 축축하게 젖어 있는 땅도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명당에서 얼마 멀지 않은 앞쪽으로 물이 있어야 하는데 냇물이나 강처럼 흘러가거나 호수나 연못과 같이 고여 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렇게 물이 명당 앞에 있으면 주산을 통해 혈에 전달된 생기(生氣)가 물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혈에 계속 고여 있어 길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때 흐르는 물은 직선으로 빨리 쭉 빠져나가는 유속이 빠른 것은 좋지 않고, 마치 명당을 사랑하여 흘러가고 싶지 않은 듯 천천히 굽이굽이 돌아서 메안다 형[蛇行形]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 물의 조건이라고 한다.
3) 방향
풍수에서 명당자리가 향하는 방향을 정하는 것을 좌향(坐向)을 잡는다고 하는데, 이는 패철(佩鐵 : 나침반)을 이용하여 잡는다. 패철은 음양오행설과 팔괘 등 천지의 조화를 설명하는 중국 역학 이론의 용어들을 이용하여 복잡 난해하게 동서남북의 네방향을 8방, 12방, 24방 등으로 나누며, 묘지 분금을 할 때는 72방, 내지는 120개
방위까지 세분하기도 한다. 좌향의 미묘한 차이는 발복에 큰 영향이 있다고 지관들은 말하며 방향의 신비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풍수 이론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좋은 방향은 명당의 지형과 그곳에 설치될 구조물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동남쪽과 서남쪽을 포함한 남쪽 방향이다. 이러한 좌향을 갖춘 곳은 대체로 양지바른 곳이다.
뒤로 산을 병풍 같이 두르고 좌우에 언덕이 있어 겨울에 추운 서북풍을 막아주는 곳이 넓고 평평하며 남쪽을 향한 곳을 이상적인 명당이라 하는데, 이러한 곳은 겨울에도 햇빛을 잘 받고 바람이 자서 살기 좋은 곳이다. 이것이 풍수택지의 기본 원리인 바 이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알아보자.
(2) 풍수지리설의 기원을 추적하는 첫 발걸음
내가 처음으로 풍수의 기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1971년 미국 버클리에서 문화지리 공부를 시작했을 때, 글랙켄(Clarence J. Glacken)이 나에게 풍수로 학위논문 쓸 것을 제안하고, 그의 문화지리 강의를 통해서 카알 사우어(Carl O. Sauer)의 농업의 기원설에 관한 강의를 듣고 난 다음이다. 그 뒤에 나는 기존의 동양이나 서양학자들이 제시한 풍수의 기원에 관한 학설들을 읽고 다음과 같은 면을 알게 되었다.
먼저 서양이나 동양 학자들이 내놓은 풍수의 기원설은 풍수 택지 이론의 기본이 되는 조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주지를 찾는 데 필요한 조건을 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죽은 사람을 위한 무덤을 만드는데 필요한 조건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추상적으로 택지 신앙적인 면에서 풍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주거지나
죽은 사람을 매장할 무덤 터를 찾았을 때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잘 알려진 풍수기원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에 있어서 풍수의 기원에 관한 최초의 설을 제안 한 사람은 서양학자 드 그루트(J.J.M. De Groot)일 것이다. 그는 말하길 :
“우리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요한 풍수 원리들은 먼 옛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풍수 원리의) 태아(胎兒)는 이미 아득한 옛날 중국인의 정통 종교가 된 죽은 자를 숭배하는 신앙에서부터 자라나왔다. 당시 죽은 조상들이란 (살아있는) 자손들의 운명과 복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수호신이었다.”1)
1) J.J.M. De Groot, “The Religious System of China”, Leiden:Librairie et Imprimerie, vol.3, 1874, p.982.
위와 같이 드 그루트는 풍수의 원리가 죽은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중국 사람들의 신앙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하기 전 자신의 책 앞부분에서 풍수의 택지 원리는 묘지 선정에서부터 나와서 나중에서야 양택, 즉 살아있는 사람의 집짓기와 주택지 선정에도 쓰이게 되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영혼은 무덤에만 기거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집안에 모셔놓은 신주나 그들을 위해 지어 놓은 신당(절 : temple)에도 거주한다. 그러한 곳도 (무덤과) 똑같은 이유로 (조상의) 영혼들이 자연의 축복을 받으며 거주하도록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풍수는 집짓는 것이나 조상신을 위한 사당을 건립하는 일에 뗄 수 없게 결합되었다.”2)
2) J.J.M. De Groot, 앞의 책, p.937.
네델란드 학자 드 그루트의 이러한 풍수 원리의 기원설은 19세기 말에 발표된 최초의 풍수 기원설로서,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드 그루트 설의 결정적인 결점은 그의 학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드 그루트는 풍수택지의 기본 원칙이 옛날 중국 사람들이 거주지를 선택할 때 필요한 조건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죽은 사람을 위한 무덤 선정의 조건을 반영하는지 따져서 밝히지 않았다.
중국인 학자 첸 후아이 챈(陳懷楨)도 드 그루트의 학설을 받아들여 풍수설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무덤 속에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하여 좋은 땅을 골라 무덤을 만들던 중국인의 조상숭배신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러한 풍수사상은 오랜 중국 역사 속에 있어왔는데 조상을 숭배하는 제도에서 생겨 나왔다. 중국인은 효도를 중요시해 왔는데 부모가 살아계실 때엔 자식 된 예로서 부모를 모심으로써 그 효심을 표시하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묘지와 제사를 모심으로써 자식된 예를 표시한다. 효도사상 외에 중국인은 또한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들의 영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손들은) 여러 방법을 써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평안하도록 해야 했다. 부모의 영혼이 평안하지 못하면 자손이 번영할 수 없다고 믿었다. 간단히 말해 중국인들은 돌아가신 부모가 자손들의 복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이 중고시대부터 대단히 보편화 되었다. 장매(葬埋)사상(길지를 찾아 매장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運]에 응답하여 생겨났다.”3)
첸 후아이 챈은 또 결론지어 말하길 장매풍습[葬埋的道]이 이미 성립된 후에야 비로소 풍수설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말하여 드 그루트의 학설을 뒷받침하였다.4)
3) 陳懷楨, 『“風水與葬埋”』, 國立中山大學 社會硏究所 社會硏究, vol.1 no.3, 1937, p.3.
4) 陳懷楨, 앞의 책, p.3.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당시 구한말의 궁중지관 등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조사보고서인 『조선의 풍수(朝鮮の風水)』를 저술했는데, 풍수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그 (주민들의) 생활 상 바람(風)과 물(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추운 북풍은 북부 중국 일대를 크게 위협하였고, 비를 머금고 불어오는 남풍은 남중국의 하천을 범람시켰다. 북풍을 막고 흐르는 물을 관리하는 일은 옛날부터 (그곳 주민들의) 생활에서 중대한 일이었다. 주거지를 안전하게 하고, 삶을 즐기려면 우선 첫째로 바람과 물의 재해[禍]를 입지 않을 만한 땅을 골라서 집을 지어야 했다. 그래서 땅을 고르는 필수 요건으로 바람과 물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토지를 점쳐 고르는 것을 풍수관(風水觀)이라 하고, 땅의 모양[地相]을 보는 것을 풍수를 본다고 했다. 따라서 주택이든 묘지이든 땅의 기세나 모양을 보는 모든 행위를 풍수라 불렀다. 이후 땅을 보아 터를 고르는 술법[相地法]이 묘지나 주택에 한정됨에 따라 풍수라는 말도 이 양자에 한정되게 되었다.”5)
5)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朝鮮の風水』, 서울:朝鮮總督府, 1931, p.5. 여기 실린 한국어 번역 인용문은 최길성역(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서울:민음사, 1990), 24~25쪽의 번역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밝혀둔다.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은 자연재해 즉 풍재(風災)나 수재(水災)를 피한다는 것은 고대 중국에 있어서 거주지 선정의 첫째 조건이었고, 이로부터 길지를 선정한다는 것을 풍수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풍수가 양택에서 시작한 것 같다는 점은 동의하나, 오로지 자연의 재해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가 출발했다는 점은 비판되어야 한다고 본다 (풍수 발생기원에 관한 5개항의 전제 조건 토론 참조). 어쨌든 무라야마의 설은 풍수가 양택에서 시작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한, 토의가 없는 학적인 상상이었다.
이병도는 근대 한국인으로서 풍수지리를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한 최초의 학자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의 풍수지리 도참사상의 흥행에 관한 연구결과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연구를 뛰어 넘는 후학이 없는 것 같고, 아직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고려시대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풍수지리설의 기원에 대한 견해를 발표했다.
“나의 견해로는 都邑宮宅의 形法的인 地理에 陰陽五行의 形而上學的 理論의 근거를 부여하고 그 밖에 天文・方位 등의 사상을 첨가하여, 또 특히 儒家의 倫理思想(孝・祭祀 等)과 결합하여 일층의 발달을 보게 된 것이 風水地理라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風水學的 체계를 이룬 것이 陰陽葬法(陰宅地理)인 까닭에 風水의 명칭은 당초에
는 陰宅地理에 專用되었던 것이다. 風水學上의 陽宅地理는 도리어 陰宅地理의 영향으로 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러나 擇地觀念의 기원을 참고하여 보면, 처음 生人의 居住聚落을 정하는 데서 발생하였을 것이다. 居住에 있어 제일 고려되는 것은 생활조건임으로, 그곳의 생활조건이 경제․군사 및 교통에 있어 적합하냐 아니냐를 관찰하여 擇定하는, 자못 人文的인 思想과 方法에서 실시되었을 것이니.”6)
6)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서울:아세아 문화사, 1980, 26쪽.
이병도가 말한 좋은 터를 찾는 아이디어가 좋은 거주지를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옳다고 보겠다. 그러나 풍수의 기본원리가 오히려 음택에서 나와서 양택에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한 것은 풍수의 기본 택지원리가 음택과 양택 중 어느 것에 가까운 것인지를 따져 보지 않은 데서 나온 오류라고 생각된다.
내가 처음 풍수의 기원에 대해 공부를 할 때 당시까지 나와 있던 중요한 학설들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격적으로 풍수원리의 기원을 따져본 글이었다기보다는 풍수신앙의 일면을 토의하는 논문이나 단행본에서, 풍수의 기원을 주로 서론 부분에서 그저 한 두 단락 정도를 할애하여 가볍게 다룬 것들이었다. 그리고 기존 학설들은 풍수에서 길지를 찾기 위한 택지 원리는 어떤 것인데 그들이 무덤터[墓地]를 찾는데 더 적합한 것인지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 집터[住宅地] 또는 마을 터를 찾는데 더 적합한 것인지를 따져서 보여주지 않았다. 기존 학설들은 고대 중국에서 풍수설의 기원을 합리적이지만 추상적인 추리에 의지하여 풍수신앙이 주거지나 무덤 터를 찾는 기술로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제창하였다.
그래서 나는 첫째 풍수지리의 기원은 풍수 신앙이 어떻게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리하는 것보다는 현재 쓰이고 있는 풍수의 기본 택지 원리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이상적인 거주지 선정에 더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죽은 사람을 위한 이상적인 무덤 터를 찾는데 더 가까운 것인지를 따져 보는 것이 ‘현재 세간에서 쓰이
고 있는 풍수 택지술’의 기원을 밝히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둘째, 풍수의 기원을 추정하기 전에 풍수의 택지원리들이 어떠한 환경과 역사적 상황에서 생성되었을 것인지 풍수지리설 기원의 전제 조건을 고려하여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다. 내가 풍수 기원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카알 사우어(Carl O. Sauer)가 쓴 『농업의 기원과 전파』에서 농업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전제조건을 설정한 것을 읽은 뒤였다.7)
사우어가 농업의 기원을 6항의 전제 조건을 설정하여 농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그 기원지를 추리해서 농업
의 기원을 추정해 들어간 것과 같이, 막연하게 풍수가 언제 어디서 왜 시작되었을까를 바로 추정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풍수지리의 택지 원리들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중요한지를 생각하고, 풍수의 택지 원리를 생성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을 설정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1976년에 출판된 책에 풍수의 발생기원에 관한 5개항의 전제조건을 제안했었다.8) 이것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7) Carl O. Sauer, “Agricultural Origin and Dispersal”, New York:The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1952, p.20~22. Second edition ; “Seeds, Spades, Hearths, and Herds:The Domestication of Animals
and Foodstuffs”, Cambridge, Mass.:The MIT Press, 1972.
8) 윤홍기, “Geomantic Relationships between Culture and Nature in Korea”, Taipei:Orient Cultural
Service, 1976, pp. 245~264.
1) 풍수는 여러 가지 지형이 상존하는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에 의하여 개발되었을 것이라는 점
풍수에서 높낮이가 없는 평야보다는 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물이 흐르는 곳을 좋은 지형으로 보기 때문에, 옛날부터 풍수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지형을 관찰하기 위하여 지형을 세분하여 관찰하는 기준(방법)이 개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지형을 다루는 풍수 원리는 평야지대보다는 여러 형태의 지형이 상존하는 산야지대에서 생성,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2) 풍수는 기후조건이 다양한 지역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점
풍수라는 말 자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풍수설에서는 바람이 자는 곳을 중요시 하고 택지나 묘지에 바람이 있고 없음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어느 쪽에서 어떤 바람이 부는 것이 발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나, 무덤이나 건물을 앉힐 때 좌향(坐向)을 중요시한다는 것에서 풍수지리의 원리는 다양한 기후(바람) 조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 풍수의 발생은 주위 자연환경조건에 대한 인류의 생존본능적인 반응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점
무라야마 지준이 말한 자연의 재해를 피하는 방편으로 풍수가 발생했다는 설은 황하의 범람을 비롯하여 북부 중국의 많은 자연 재해를 생각 할 때 논리가 타당한 말 같으나 풍수의 기본 원리를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풍수의 기본 원리는, 길지는 남쪽을 향하고, 북쪽으로는 뒷산이 막아서 있고 좌우로 산줄기가 뻗어 내려 명당을 에워싸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북부 중국의 강한 대륙성기후를 고려할 때 겨울의 추운 서북풍이 산으로 막히고 남향을 해서 햇살을 많이 받는 곳을 찾겠다는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풍수원리에는 주위 환경을 잘 이용하겠다는 옛날사람들의 적극적인 환경 계획론의 일면이 보인다. 그래서 물론 자연재해[天災]를 피하겠다는 소극적인 태도도 풍수에서는 고려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풍수설의 모든 원리는 사람이 자연환경 중에서 보다 살기 좋은 곳을 고르겠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이 지배적이다. 풍수적으로 땅을 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리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장풍득수(藏風得水)라는 말은 모두 살기 좋은 땅을 찾기 위한 옛날 사람의 지혜가 정화된 것이다. 그래서 풍수는 주위 자연환경을 잘 이용하겠다는 적극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풍수라는 낱말의 첫 글자인 한자의 바람 풍(風)자의 어원을 보면 옛날 중국 북부에서도 모든 바람을 다 나쁘게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추운 겨울에 모질게 불어오는 서북풍은 피하고 싶었지만 봄에 남쪽에서 불어오는 온화한 바람은 긍정적으로 고려되었던 것 같다. 후한(後漢)시대인 서기 100년에서 121년 사이에 지은 『설문
해자(說文解字)』에서는 충(虫)자와 범(凡)자가 합쳐서 된 글자인 풍(風)자를 설명할 때 팔풍(八風)의 이름을 열거한 뒤 풍동충생(風動蟲生)이라고 했다.9)
이 말은 곧 바람이 일면 땅에 기어 다니는 작은 동물들이 생긴다는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충(蟲)자는 벌레를 뜻하지만 원래는 발이 있어 기어 다니는 작은 동물들까지 모두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바람(예를 들어 동남풍)이 불면 옛날 사람들에게 유용한 작은 동물들이 나온다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옛날 중국 북부의 사람들은 바람이 자신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특히 관심을 가졌고, 어떤 바람은 피해야 하고 어떤 바람은 반길 수 있는 것인지를 관찰했다. 풍수설의 시작은 이렇게 기후 변화가 있는 환경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적극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인다.
9) 許愼,『“說文解字”』, 北京:中華書局, 1987, p.284.
4)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음택이 양택보다 더 중요시되어 왔다. 그러나 원시풍수술은 먼저 살아있는 사람의 좋은 거주지를 찾는 양택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이 죽은 사람의 거주지인 무덤을 만드는 음택에도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알려진 풍수 기원에 관한 여러 학설은 풍수의 기본 택지 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려하지 않고 음택이 먼저인지 양택이 먼저인지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이다.
음택이나 양택이나 기본 원리는 모두 같다는 점과 풍수의 기본개념들은 모두 무덤보다는 생존하는 사람의 거주지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고려해 볼 때 풍수지리설에서 길지를 찾는데 쓰이는 기본 원리는 양택 풍수에서 먼저 쓰인 다음에 음택에도 그대로 적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검토해 볼 수 있다.
◆양택에서나 음택에서 모두 혈 자체에는 물이 없어야 하지만 혈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
서양인 학자 드 그루트가 풍수지리설에서 길지 선정에는 바람의 조건을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으나, 이는 풍수의 원리를 따져 보지 않은 채 풍수라는 말의 첫 글자나 장풍득수라는 말의 첫 글자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10) 사실 풍수의 기본 원리서인 곽박(郭璞)의 『장서(藏書)』에는 풍수를 볼 때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즉 득수(得水)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이 바람이 자는 곳 즉 장풍(藏風)이 라고 했다.11)
그래서 옛날부터 풍수에서는 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흐르는지(급류인지 아니면 천천히 흘러가는 물인지)를 보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왜 풍수에서는 물이 양택이나 음택에서 모두 그렇게 중요한가? 지상에서 사람이 생활하는데 있어 물이 절실히 필요하며 사람은 물을 마시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살아 있는 사람의 거주지 선정에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거주지인 무덤에 왜 물이 필요하다고 풍수설은 주장하게 되었는가?
음택풍수에 있어서도 득수가 아주 절대적이라서 드 그루트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복건성에서는 무덤 앞에 흐르는 물이나 웅덩이가 없는 경우 물탱크를 하나씩 파 놓는다고 한다.12)
그 물탱크는 꼭 물을 담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냥 무덤 앞에 물이 있는 웅덩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죽은 사람의 거처(居處)에 왜 이렇게 물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 이런 생각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그리고 물에 관한 음택과 양택의 기본 원리는 왜 똑같은가?
이러한 의문은 바로 음택은 양택을 기본으로 해서 생겼고 풍수 원리는 양택에서 먼저 형성됐다고 볼 때에만 풀린다. 죽은 사람의 무덤에도 살아있는 사람의 거주지에서와 같이 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죽은 사람의 땅속에서의 생활을 살아있는 사람의 생활에 비추어서 상상한 것일 것이다. 아마도 죽은 사람도 살아 있는 사람 같이 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연유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마치 죽은 조상도 지상에 살아 있는 사람 같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제사지내는 것으로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10) De Groot, 앞의 책, p.946 ; 윤홍기, 앞의 책, 1976, p.254.
11) 郭璞, 藏書, p.1.
12) De Groot, 앞의 책, p.946.
물은 혈(穴), 즉 집터나 묘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꼭 있어야 하지만 혈 자체에는 물기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무덤이나 집터 모두가 다 물기가 없이 말라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의문도 풍수의 기본 원리가 살아있는 사람의 집터 찾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등산을 가서 천막을 치고 며칠 밤을 잘 때에도 아무도 천막 치는 장소를 질퍽하게 젖어 습한 곳에 잡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은 야영 장소는 바람이 자서 따뜻하며 천막 치는 장소자체에는 물기 없이 마른 곳이어야 하지만 개울물 같은 것이 가까이 있어 먹고 씻을 수 있는 곳일 것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길지를 찾는 원리는 바로 이러한 이상적인 야영장소를 찾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집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이 땅속에 있는 무덤에도 바람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
풍수에서는 바람이 자는 곳을 명당으로 치는데 왜 그럴까? 서북풍이 몰아치는 중국 북부나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지내는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할 것이다. 거주지는 서북풍을 막아주는 산을 뒤에 등지고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는 남쪽을 향해 앉은 곳이 바로 이상적인 장소일 것이다. 그럼 왜 지상에서 부는 바람과 별로 상관이 없는 죽은 사람의 땅속 거주처(居住處), 즉 무덤도 산사람의 집과 같이 바람이 자고 따뜻한 곳이 이상적인 곳이라고하게 되었을까? 이것도 무덤의 조건은 집터의 조건에서 유추해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바위산[岳山]을 산의 뼈가 노출된 산이라고 하여 좋지 않은 산이라고 하고, 흙이 두껍게 덮인 산은 살찐 산이라 하여 좋은 산이라고 하는 점
좋은 산[吉山], 즉 생기가 충만한 산의 징조는 수목이 우거지고 산 짐승들이 노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이러한 좋은 산이 살아 있는 사람의 거주지로 적합한 것은 옛날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음식이나 다른 생필품을 이러한 수목이 우거진 곳에서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쉽게 가는 일이다. 이런 곳을 무덤이나 집터로 모두 살기 좋은 곳[吉地] 이라고 보는 것은 풍수의 원리가 살아 있는 사람의 집터를 찾는 양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풍수에서는 길지에서 무덤이나 집터 그 자체가 되는 지점을 혈(穴)이라고 하는 점
혈(穴)이라는 글자는 토굴 또는 토실(土室 : 굴집), 즉 흙으로 된 동굴 거주 공간이라는 뜻이다. 왜 길지를 동굴 또는 굴집이라고 했을까? 이는 단적으로 길지의 개념이 양택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북부 황토지대의 사람들이 선사시대부터 굴집에서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옛
날 황토지대 굴집거주자에게는 길지를 찾는다는 말은 바로 이상적인 굴집터를 찾는 것이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풍수에서 길지를 찾는다는 말로 굳어졌으며 똑같은 개념이 죽은 사람의 사는 곳인 무덤의 위치를 선정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음택과 양택은 기본 개념과 그 혈을 찾는 원리가 똑같은 것이고, 지금도 무덤이나 집터가 될 길지를 찾는 것을 혈을 찾는다고 하는 것으로 굳어졌다고 본다.
◆풍수 비보사상은 풍수 원리가 생성된 뒤에 나중에 개발된 이론일 것이라는 점
풍수에서는 지나친 조건(주로 지형)은 인공적으로 진압하고, 모자라는 조건(주로 지형)은 인공적으로 보충하여 자연환경을 조정하는 비보(裨補)가 있다. 이러한 사상과 기술은 풍수의 지형관찰법과 좌향을 잡는 방법 등이 상당히 개발된 뒤, 풍수이론의 연장으로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풍수 고전에서 비보 이론은 보이지 않는다.
(3) 풍수의 기원은 황토고원의 굴집[窯洞]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내가 원래 발표한 풍수설의 발생에 대한 나의 소박한 견해를 요약하면, 풍수 택지 원리의 길지를 가늠하는 지형의 생김새와 방향을 따져 봤을 때 풍수는 평지가 아니고 산이 가까이 있고 흐르는 물이 멀지 않은 북부 중국, 특히 황토지대를 풍수 발상지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풍수 택지 이론은 양택, 즉 집터를 찾는 방법에서 먼저
성립된 뒤 음택, 즉 묘터를 찾는데 그대로 적용된 것 같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러한 나의 소박한 견해가 한걸음 앞으로 나가게 된 것은 1988년에 행한 중국 섬서성 일대의 굴집 연구를 위한 황토 고원 답사와 그 결과를 중국 과학원 자연과학사 연구소에서 발표한 것이었다. 나는 황토지대의 굴집 답사를 통해 풍수에서 말하는 토산(土山)의 모양이나 굴집을 마련하는 방법 및 굴집의 생활 조건 등에 대하여 좀더 터득하게 되었다. 이 답사에서 배운 지식은 내가 종전에 가졌던 풍수설의 기원에 대한 가설을 보완하고 보다 구체화시켜서, 중국 풍수의 택지술은 황토 고원에 산재해 있는 굴집을 파기에 적당한 땅을 찾는 기술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풍수의 기본 택지 원리는 땅 위에 세우는 단독 주택보다는 굴을 파서 거처를 만드는 굴집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반 가옥은 평지에도 세울 수 있지만 굴집은 굴을 파 덜어갈 수 있는 산(언덕, 급경사의 산등성이)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형 요건은 바로 풍수에서 말하는 주산이 명당 바로 뒤에 있어야 한다는 중요한 원칙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수 택지술이 황토지대의 이상적인 굴집터를 찾는데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음양오행설에서 중앙을 색깔로는 누른색, 즉 황(黃)이고, 오행으로는 흙, 즉 토(土)라는 것과 풍수에서 오산(五山)의 산형 중 토산(土山) 방향에 있어서는 중앙을 상징하지만, 산모양이 산의 상체를 잘라버린 모양, 즉 산의 꼭대기는 넓은 평지로 되어있고 그 평지로 올라가는 산기슭은 가파르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토산은 황토고원 이외의 다른 중국지방이나 한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황토 고원에는 이러한 산 모양이 널리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누런 황토색은 중앙을 상징하고, 황토지대는 중국문화의 기원(중심)지였고, 그 곳에 많이 있는 꼭대기가 잘려나간 평지 같은 산꼭대기를 가진 산을 토산이라 하고, 토산에는 혈, 즉 굴집에 사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 등이 서로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황토지대와 굴집이 바로 풍수의 원래 고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황토지대와 토산에 대한 토론은 다음과 같다.
(4) 황토(黃土)와 토산(土山)
중국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있어서 누런색은 중앙, 푸른색은 동쪽, 검은색은 북쪽, 흰색은 서쪽, 빨간색은 남쪽을 가리킨다. 동서남북의 색깔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추리하기는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동쪽에서 해가 뜨며 햇빛을 잘 받는 초목은 푸르게 자란다. 그리고 겨울 동안 못자라던 초목이 봄이 되면 푸르게 자라기 때문에 동쪽은 푸른색으로 표현되고, 계절로는 봄, 오행(五行)으로는 나무[木]가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서쪽은 오행으로는 쇠[金]인데 해가 지는 동쪽의 반대 방향이며 봄의 반대인 가을을 지칭한다. 그래서 생기에 넘치는 동쪽의 반대 색깔을 갖게되어 생기가 없는 창백한 흰색이 된 것 같다. 또는 중국 서방의 사막이나 만년설에 비유한 것에서도 그 기원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남향집들이 겨울에 다른 좌향(座向)을 한 집보다 얼마나 더 따뜻한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남쪽이 오행으로는 불[火]인데 더운 계절인 여름을 뜻하고, 불을 상징하는 빨간색이 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북쪽은 오행으로 물[水]이고 겨울을 뜻하는데 검정색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남쪽의 반대 방향으로서 물은 불을 끄고, 추운 겨울에는 햇빛을 받는 남쪽의 반대인 그늘진 방향이니 검정색으로 북쪽을 상징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13)
문제는 중앙의 방향을 뜻하는 누런색[黃]이다. 왜 누런색이 중앙을 가리키게 되었고 왜 중앙을 지칭하는 오행의 성격은 흙[土]이 되었는지는 동서남북과 같은 식으로 추리하기가 여의치 않고, 일반적인 자연현상의 변화와 비교해서도 설명하기가 용이치 않다. 중앙이 색으로는 누런색이고 오행으로는 흙[土]라는 것은 황토고원이라는 독특한 자연환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곳은 중국 고대 문명의 중심지로서 누런 흙, 즉 황토(黃土)로 온통 뒤덮여 있는 곳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바람에 날려 온 퇴적된 황토층이 평균 100m나 되는 두께로 쌓여있고, 어떤 곳은 200m도 넘는다고 한다. 황토고원지대는 이러한 황토로 뒤덮여 있는 곳이어서 미세한 황토는 먼지로 변해 이 지방 어디나 날아다니고 쌓이게 된다.
내가 답사 중 경험한 바에 의하면 여관에서 잘 때 창문을 모두 꼭 닫아 놓아도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틀에도 누
런 먼지가 한 켜 쌓여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황토지대 자연환경의 특징을 음미해 보면, 이 중국 사람들이 왜 그들의 오행론에서 오행의 성격으로는 흙[土]을, 색깔에 있어서는 누런색을 중앙의 방향에 붙이게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고대 중국인들이 황토지대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여행했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살게[移住] 됐을 때, 자기들이 살던 고향 즉 중심(누구나 자기가 자라온 고향이 자신의 지리적 공간 구성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하곤 한다)은 황토, 즉 누런 흙의 세상이었다는 것은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행의 토(土)와 그 색깔인 황(黃)은 바로 황토지방의 황토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14)
13) 尹弘基, “論中國古代風水的起源和發展(Lun Zhongguo Gudai Fengshui de Qiyuan he Fazhan)”『 [in
Chinese with English abstracts], 』『自然科學史硏究(Ziran Kexueshi Yanjiu)』, Beijing, China, Vol.8 (1),1989, pp.85~87.
11) Hong-key Yoon, “The Nature and Origin of Chinese Geomancy”, Eratosthene-Sphragide, Vol.1, p.96.
풍수론에 있어서는 명당 특히 혈(집터나 묘터)이 콩가루를 빻아 놓은 것과 같은 누런 흙으로 되어 있으면 최상의 길지로 친다. 이러한 풍수 원리는 바로 풍수가 고대 중국인이 황토 고원에서 좋은 거주지, 특히 차가운 서북풍을 막아주는 양지바른 곳에 따뜻하게 자리 잡은 황토 굴집을 만드는 기술에서 출발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짐작된다. 황토 굴집을 팔 때 자갈이나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고른 황토색의 순수한 황토가 필수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는 물이 스며들지 않은 순수하고 천연적으로 잘 다져져 있는 양질의 황토를 의미하며, 이러한 황토를 파서 굴집을 지으면 굴이 무너질 염려가 적다는 것이다. 반면에 굴을 파고 들어 갈 때 황토에서 검은색의 흙이 한 줄로 있는 것이 보이거나 검은 흙이 한군데 모여 있는 것이 보이면 비가 왔을 때 물이 스며들어 부패된 흙을 의미한다.15) 그래서 이러한 흙에 굴을 파서 만든 굴집은 무너질 위험이 큰 것으로 그 곳 주민들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굴집에 사는 사람들은 누런 황토 이외의 흙색에 아주 민감하며 특히 물이 세어 들어 썩은 흔적이 있는 검은색은 불길한 흙색으로 취급하고 피한다. 지금도 중국 황토지대에는 약 4,000만의 인구가 황토를 파내고 만든 굴을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15) Yoon, Hong-key, “Loess Cave-dwelling in Shaanxi Province, China”, GeoJournal, vol.21, no.1/2,
1990, p.97. : 윤홍기, 「한국 풍수지리 연구의 회고와 전망」, 『한국사상사학』 제17집, 2001, 21쪽.
<그림 1> 황토벽을 파고들어가 만든 굴집들
황토지대에서 굴집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황토가 쌓여 있는 황토 절벽 또는 가파른 언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한 곳의 남쪽방향에서 굴을 파 들어가는 것이 이상적인 굴집을 만드는 조건이다. 굴집을 파서 만든다는 것은 오직 이러한 언덕이 있는 지형이어야 가능하다.
풍수에서는 명당(마을이나 도시 또는 묘지)에 뒷산, 즉 주산이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풍수의 지형 조건은 바로 황토 고원의 굴집(요동) 주거지 조건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산이 없는 명당은 생각하기 어렵고, 그래서 평지에 건립된 중국 북경의 자금성 궁전 뒤에는 인공으로 만든 산인 징샨(景山)이 마련되어 주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산의 끝부분에 명당이 있다는 풍수지리의 택지 원리는 바로 이러한 굴집의 입지 조건을 반영한다고 보인다.
<그림 2> ㄷ자형으로 절토한 곳에 마련된 굴집
황토고원에서 굴집을 만들 때 굴을 파고 들어갈 황토벽이 마땅하지 않으면 경사가 급한 언덕을 찾아 황토를 파내서 인공으로 황토벽을 만든 후에 굴집을 파고 들어간다. 황토벽을 만드는 것은 우기에 토양 침식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때 황토벽을 만들기 위해 그림과 같이 절토를 한 것이 마치 케이크를 ㄷ자 모양으로 잘라 낸 자리와도 흡사하다. 이때 ㄷ자의 막힌 부분의 벽이 바로 굴을 파고 들어가 굴집을 만드는 벽인데, 이곳이 풍수에서 말하는 주산에 해당하고 벽 밑에 굴을 파는 곳이 혈이 되고 왼쪽 벽이 청룡, 오른쪽 벽이 백호에 해당되어 자동적으로 이상적인 풍수형국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절토지에 위치한 굴집은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앞이 평지로 탁 트여있는 풍수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명당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그러면 황토지대 주민들은 왜 땅 위에 세우는 독립주택이 아닌 흙을 파내고 만드는 굴집에 이렇게나 집착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있어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땅속에 만든 굴집이 땅 위에 세워진 단독주택보다 겨울에 더 따뜻하고 여름에 더 시원하다는 잇점 때문일 것이다.
이 황토고원지대는 겨울에는 혹독하게 춥고 여름에는 몹시 더운 대륙성 기후지대로서 주민들은 매년 닥치는 큰 추위와 더위에 대비하여야 한다. 황토흙은 돌[岩石]보다도 더 좋은 단열제(insulator)로서 내부 공간의 온도를 보호해 줄 수 있다. 어떤 공간이 12미터 두께의 돌로 둘러쌓여 있다면 외부온도가 섭씨 30도 변할 때 내부온도는 섭씨 3도 밖에 안 변한다고 한다.16)
황토에는 흙입자 사이에 갇혀진 공기가 돌보다도 많아서 단열이 더욱 잘 되어 훨씬 얇은 두께로 황토 굴속의 온도를 굴 바깥 온도로부터 효율적으로 보호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굴안의 공기가 굴벽의 온도에 따라 따뜻해지고, 여름에는 굴안의 공기가 시원해지는 열 효과(the storage heater effect of cave-dwellings)가 있다.17) 그래서 지상에 나무로 지은 집보다 냉난방에 훨씬 유리하다고 한다. 그래서 숲도 거의 없어 집을 짓기 위한 목재를 구하기도 힘들고, 땔감도 부족하며 추운 황토지대에서 굴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곳 옛날 주민들에게는 자연환경에 적극적으로 순응하여 잘 이용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토굴집을 만드는데는 아주 간단한 도구, 즉 흙을 파기 위한 곡갱이와 삽만 있으면 한 사람이 일하여 만들 수 있다. 흙 이외의 다른 건축 재료로는 출입문과 창문 하나를 만들 나무만 있으면 된다. 이곳 황토지대에서는 황토 굴집은 이렇게 비교적 저렴하고 쉽게 지을 수 있고, 관리비(냉난방비)가 적게 드는 거주처인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이곳 황토지대에서 굴집을 짓고 살았다.
『시경』의 『면(緜)』에 나오는 시구에도 이곳에서 일반 가옥을 짓고 살기 이전부터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굴집에서 살았다고 했다.18) 지금까지도 이러한 굴집은 이곳 고장에서는 가장 보편화된 가옥형태이며 수천만의 주민이 굴집에서 살고 있다. 굴을 파고들어갈 황토 언덕이 없는 평지에는 황토를 다저서 인공적인 황토굴을 만들어 살 정도로 황토고원지대 사람들에게는 황토굴집이 중요하다.
16) Yoon, Hong-key 앞의 책 p.100
17) 같은 책
18) “주렁주렁 이어진 작고 큰 오이
주나라 겨레들이 처음 생긴덴
저칠 강물이 흐르는 고장
위대한 고공단보 받들어 모셔
[옹기 굽는] 가마같이 생긴 굴을 파서 만든 그러한 굴집에서 살았었다네.
그 당시엔 [땅 위에다 지은] 집[독립가옥]이 없었다네”
위 시경 구절의 번역출전: 李家源 監修,『新譯 詩經』, (서울:홍신문화사, 1977) 『대아(大雅)』, 『문왕지습(文王之什)』, 『면(緜)』 p.451. (밑줄 진 부분은 출전의 번역을 수정한 것임)
<그림 3> 풍수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산 모양
<그림 4> 전형적인 토산의 항공사진 - 출처: George B. Cressy, “Land of the 500 Million”(McGraw-Hill, 1955), p.51
이 황토지대가 중국 풍수의 기원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는 풍수의 기본 산형인 오산(五山)의 산 모양[山形] 중 토산(土山)의 모양이다.
풍수에서 화산(火山), 목산(木山), 수산(水山), 금산(金山), 토산(土山) 다섯 가지 산 모양 중 토산을 제외 하고 각각 불꽃 모양, 나무모양, 물결모양, 엎어놓은 쇠 종(鐘) 모양으로 쉽게 그 형상을 설명할 수 있고, 자주 그러한 산을 실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토산의 경우 다른 네 가지 모양의 산과 같은 식으로 그 형상을 설명하기가 힘들고 실제 그 예를 우리나라 산야에서 찾아보기가 용이치 않다.
<그림 5> 가까이에서 본 황토 고원의 토산
왜 토산의 산 모양이 산기슭은 높지 않지만 급경사로 되었다가 산꼭대기 부분은 아주 평평하고 넓은 평지여야만 하는가? 왜 이런 형이 토산으로 불리게 되었는가?
사실 이런 모양의 산이 정말로 있는가? 이런 의문은 중국 황토고원을 답사해 보면 풀린다. 사실 우리나라나 중국의 다른 지방을 가 보아도 산의 정상이 넓고 평평한 평지인 전형적인 토산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미세한 황토가 쌓여서 만들어진 황토고원에는 이런 곳들이 수없이 많다. 황토는 비에 쉽게 씻겨 내려가 토양 침식이 심해서 어떤 곳의 골짜기는 수십미터나 되도록 급경사인데, 그 골짜기를 올라가면 아주 평평한 평지이다. 이런 곳을 답사하고 나서 생각하게 된 것이 과연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토산의 전형적인 모형은 그냥 상징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바로 침식된 중국의 황토 고원지대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풍수에 있어서 토산이 중심 방향을 의미한다는 것과 토산의 형태가 급경사인 산록과 아주 평평한 평지인 산꼭대기[山頂]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중국의 황토 고원지대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이 모든 조건으로 미루어봐서 나는 풍수설이 바로 이 황토고원지대에서 출발했고, 특히 그 곳에서 굴을 파내어서 굴집을 만들어 살던 사람들이 이상적인 굴집의 위치를 정하는 데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리하는 것이다. 풍수의 중요한 택지 원리는 이러한 나의 가설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물이 귀하고 춥고 바람이 심한 황토지대에서는 북쪽으로 산이 막혀 추운 서북풍으로부터 보호되고, 남쪽은 트여있어 햇볕을 받아 따뜻하며 가까이 먹을 물을 길러 올 곳은 있으나 굴집의 바닥 자체는 뽀송뽀송하게 말라 습하지 않은 곳이 바로 이상적인 황토지대의 거주지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곳이 후에 체계화된 풍수지리설에서도 이상적인 길지로 굳어졌고 황토고원지대의 이상적인 굴집을 찾는 기준이 되어 황토지대와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지방에서도 좋은 집터나 묘터의 기준으로 적용되었고 실제로는 굴집을 마련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집터나 무덤터를 혈(穴 : 굴집)이라고 계속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이상은 내가 황토고원을 돌아보고 황토를 파내서 만든 굴집에 들어가서 그것을 만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이러한 굴집터를 찾았는지 또 어떻게 황토를 파내고 굴을 만들었는지를 배우고 난 뒤, 풍수는 황토지대에 살던 옛날 중국 사람들이 자신들이 거주할 굴집터를 찾고 굴집을 만들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제안하게 된 과정을 훑어본 것이다.
(5) 풍수의 한국 전파
옛날부터 전해 내려 왔고 지금 현재도 쓰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풍수 택지 원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自生]이 아니고 중국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서 토의한 바와 같이 풍수의 택지 원리가 이 황토고원의 자연환경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흙굴집을 마련하는 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풍수는 고대 중국 문화의 중요한 일부로 생성되었고 성장해 왔다. 나는 이러한 중국의 풍수사상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중국 문화가 한국에 전래된 초기이었다고 생각한다. 유교 또는 도교 사상이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에 풍수사상도 전래되었다고 보이고, 이 시기는 삼국시대 초기 또는 그 성립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 갈 수도 있다고 보인다.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했다는 것이나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태백산이 가히 홍익인간 할만하여 태백산 꼭대기에 3천인을 데리고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것을 들어 어떤 사람들은 단군신화가 풍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풍수라고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고 본다. 누가 장소를 선정했다고 하여 모두 풍수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해(脫解)가 신라 제4대 왕이 되기 전에 숯을 묻어 호공(瓠公)을 속여서 초승달 같이 생긴 명당을 차지해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더 구체적인 풍수 전설로 볼 수 있다.19) 왜냐하면 초승달같이 생긴 땅이란 바로 풍수에서 말하는 주산 청룡백호가 혈을 삼면에서 에워싸고 있는 명당이기 때문이다.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로 와서 조선왕이 됐다는 전설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 확률이 아주 크다. 그러나 비록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전설이 갖는 문화사적인 의의는 자못 크다고 생각한다. 기자동래설은 기자가 실제로 있었다, 없었다든가, 실제로 한국에 왔다, 안 왔다 하는 것에 관계없이 고대 중국 문화가 한국에 전래되어 고대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고, 고대 중국 문화의 한국 전래 시기는 바로 풍수설의 전래시기로 봐도 좋다고 보인다.
어떤 이들은 풍수는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전래됐다고 하며 경주에 있는 평지의 왕릉은 풍수설이 아직 적용되지 않은 증거라고도 하는 것 같으나 이는 잘못된 견해인 것 같다. 중국의 관중분지에 지금도 남아 있는 옛 한나라 또는 당나라 때의 왕릉들은 평지에 흩어져 있다. 평지에 왕릉을 만든 한나라나 당나라 도읍지에 풍수가 있었다고 인정한다면 경주에 있는 평지의 왕릉이 그때까지 한국에 풍수가 전래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중국의 당나라나 한나라에 풍수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에 이미 풍수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과 중국은 고대부터 빈번한 접촉이 있어서 문화 교류가 있었는데, 특히 한나라 때는 중국 식민
지인 한사군이 한반도 서북부에 설립되어 중국인이 이주해 와서 살았고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침범하여 정복한 뒤 군대가 상당한 기간 동안 한반도에 주둔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한나라나 당나라 때 한국과 중국과 관계는 중국 문화가 한반도에 대량으로 보급된 기회가 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문화의 중요한 부분인 풍수도 이러한 고대의 중국 문물과 함께 한반도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 일연,『삼국유사』, 1921년판, vol.1, p.15~16. : 일연저, 이병도 역주, 「제4 탈해왕」, 『삼국유사』, 명문당, 1992, 200쪽.
<그림 6> 저자가 찍은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 한 것
고구려 환도성지를 둘러싼 산 모양을 보면 이는 풍수적으로 이상적인 말발굽 모양이다. 그야말로 초승달 모양의 명당지이다. 서기 244년에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환도성을 함락한 사실로 볼 때 만약 환도성이 풍수를 고려하여 선정된 것이라면, 당시 이미 고구려에 풍수가 들어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오래도록 잘 아는 바와 같이 고구려 무덤에는 풍수에서 중요시 여기는 사신사를 상징하는 현무, 주작, 청룡, 백호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고구려 시대에 풍수가 이미 도입됐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풍수지리설의 적용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798년에 신라 원성왕(元聖王)이 돌아간 다음 왕릉자리를 논하는 구절이 나오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숭복사(崇福寺) 비문(碑文)이라고 한다.
이 비문은 무덤은 지맥을 가려서 씀으로서 후손에게 복이 간다고도 했고, 풍수지리설의 조종으로 꼽히는 청오자(靑烏子)도 거론된 풍수사상이 반영된 글이다.20)
이 비문에 의하면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성왕의 능(陵)은 곡사(鵠寺)라는 절터에 모셔졌다. 이는 물론 그 절터가 풍수적으로 봐서 좋은 터이었기 때문이 틀림없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이기백 교수는 “8세기 말, 하대(下代)의 초에는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풍수지리설의 시초라고 할 수 만은 없으므로 이미 8세기에 들어서면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었다고 봐서 잘못이 없겠다”고 주장했다.21)
그래서 이 교수는 현존하는 풍수지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최치원의 숭복사 비문을 풍수지리설 도입시기의 중요한 근거로 삼아서, 8세기를 풍수지리의 한반도 전래시기의 상한선으로 그으신 것 같다. 그러나 숭복사 비문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풍수지리설 시행의 하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아무리 늦어도 풍수지리가 우리나라에 798년 이전에 이미 전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798년에는 왕의 무덤을 명당에 쓰기위해 그 곳에 위치한 절을 헐어 내고 그 터에 능을 쓸 정도로 풍수를 심각하게 신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의 존재에 대한 상한선을 긋는 데는 숭복사 비문이 아무 의미가 없다. 풍수지리설은 이 비문에서 말하는 원성왕릉을 모시는 사건보다 몇 백 년 전에 왔는가에 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하지 않고 있다.
풍수지리설이 고대 일본의 불교 및 정원(庭園)등 다른 문물과 같이 일본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고대 한국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다음에 토론하는 바와 같이 일본에는 서기 700년대 초기, 더 거슬러 올라가면 600년대에도 풍수가 이미 사용된 것 같이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일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풍수지리설이 전파되어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아무리 늦어도 600년대 이전 삼국시대 중이나 그 이전에 이미 풍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서기 200년대의 고구려 환도성의 위치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이렇게 들어온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옥룡자 도선(玉龍子 道詵)이 크게 붐을 일으켰고, 고려 대에 극성하여 정치를 어지럽히고 국가 재정을 말리는 결과까지 낳게 한 것이었고 지금까지 한국 민족의 뼈 속에 깊게 뿌리박힌 사상이 되어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20) 이기백, 「한국 풍수지리설의 기원」, 『한국사 시민강좌』제14집, 1994, 7쪽.
21) 이기백, 앞의 책, 7쪽.
(6) 풍수의 일본 전파
일본으로 풍수설이 전파된 것도 중국이나 한국에서 문물이 전파되던 옛날에 이미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풍수가 언제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몇 가지 퍼즐로 맞추어 볼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는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고대 일본에서의 정원 및 도시 건설에 있다.
1) 일본 고대 정원
『니혼기(日本記)』에 의하면 일본정원의 시초는 612년(수이꼬 천황 때)에 백제사람 노자공(路子工 : 미찌꼬노 다꾸미)이 일본 왕궁의 남쪽 마당에 (연)못을 파고 다리를 놓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22)
이 사건은 상당히 풍수적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풍수에서는 생기(生氣)는 물을 건너서 도망하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에 집에 딸린 정원의 연못을 팔 때는 생기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는 집 뒤가 아니라 받은 생기가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앞마당(주로 남쪽임)에 파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원 원리는 풍수적인 바가 크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서로 알려진 일본의 『사쿠데이기(作庭記)』에 나타난 정원 만드는 법은 풍수지리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23)
특히 지형의 기복 조성, 나무의 종류를 골라 길한 곳에 심기, 물이 흐르는 모양과 방향의 결정 등에서 수 사상의 영향이 현저히 보인다. 일본에서 정원 문화의 발달은 풍수지리설의 전파와 깊은 관계가 있다.
22) Nihongi, “ Chronicles o f Japan from t he E arliest times to AD 697”, Trans. b y W.G. A ston, London:
George Allen & Unwin L td., 1956, p.144.
23) Sakutei-ki, “The book of Garden(Being a full translation of the Japanese eleventh century
manuscript: Memorand on garden Making Attributed dto the writing of Tachibana-no-toshitsuna)”,
trans. by Shigemaru Shumoyama, (Tokyo:Town & City Planners, Inc., 1976), p.45.
2) 일본고대의 도읍 건설
필자는 헤이조교(平成京 : 奈良) 헤이안교(平安京 : 京都) 구니교(恭仁京) 등 일본의 고대 도읍터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러한 지역의 주위 지형과 도시 유적을 보면 일본에서는 기원 후 700년대 초에 이미 풍수가 왕궁과 도시 건설에 쓰였다는 확증이 남아 있다.
고대 일본 왕실이 도읍을 나라로 옮겨 헤이조교(平城京)를 건설하기 전에 풍수를 본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쇼쿠니혼기(續日本紀)』708년 2월 15일 조에는 나라의 땅[平城之地]은 사신사(현무, 청룡, 백호, 주작)가 법도에 맞고, 삼산(三山)이 막혀있는 좋은 곳으로 평가한 구절이 보인다.24) 이 구절은 헤이조교를 건설할 나라 분지는 삼면이 주산, 청룡, 백호로 둘러싸인 길지로서 도읍을 건설하기에 적합한 명당이라는 말로 풀이된다.
서기 794년 일본은 수도를 헤이안교(교토)로 옮겼다. 이때 일본 조정의 대신이었던 충직한 조영대부(造營大夫 : The Minister for Home Affairs) 와게노 기요마로(和氣淸麻呂)는 교토 분지의 사신사(현무, 청룡, 백호, 주작)가 풍수 조건에 맞는지를 확인하고 수도를 건설했다고 한다.25) 내가 답사한 바에 의하면 교토의 히가시야마는 청룡이고, 니시야마는 백호이며, 히에이 산이 주산이 되는 지형으로서 이러한 산줄기는 시가지를 말발굽 같이 또는 우리 시골에서 쓰던 삼태기 같이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풍수의 택지원리를 적용해 봤을 때 도읍지로 적당한 명당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풍수가 한국이나 중국에서와 같이 민간인들 사이에 널리 신봉되지 않았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통도시들 특히 조카마치(城下町)의 위치는 풍수적으로 명당에 위치한 것이 많고, 그 시가지에서 높은 곳, 즉 주산 밑에는 대체로 다이묘(大名)의 궁성이 있다. 그리고 내가 방문한 오가먀마겐에 있는 상당수의 불교 또는 신도사원은 풍수적으로 명당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24) 古橋信孝, 『“平安京の都市生活と郊外”』, 東京:吉川弘文館, 1998, p.19.
25) George Sansom,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dford, Calif:Stanford Univeristy Press, 1958, p.100.
나오는 말
동아시아에서 쓰이고 있는 풍수의 택지 원리는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한국이나 일본에서 자생된 것은 아니다. 풍수의 택지 원리를 분석해 볼 때 그 원리는 음택이나 양택이나 대체로 동일한데, 죽은 사람을 위한 무덤터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집터를 고르는데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택풍수가 음택풍수보다 먼저 시행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풍수의 기본 택지 원리는 풍수가 황토고원지대에서 발생했으며 특히 이상적인 황토굴집터를 찾는 기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성된 풍수설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옛날 중국 문화가 도입되던 초기에 도입되어 각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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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글
윤홍기 교수님의 논문 「풍수지리설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예비고찰」에 대한 토론 자료
박시익(명당건축사 사무소)
발표자 윤홍기 교수님은 논문의 결론(나오는 말)에서
1. “풍수지리의 기본 택지 원리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자생된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 시작 된 풍수설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도입되어 각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황토 고원지대에서 풍수설이 발생 하였으며 이곳에서 이상적인 황토 굴집터를 찾는 기술이 풍수설의 기원이 된다.”라고 하였다.
위의 결론 내용은 한국에서 풍수지리이론이 자연 발생 되었다는 기존의 이론들과는 정반대의 이론이다. 또한 그 동안의 연구 결과 풍수지리 이론은 한국이나 중국 그리고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와 미국에서의 풍수지리
풍수지리란 사람의 생활에 필요한 이상적인 택지로서 따뜻한 바람과 좋은 물이 겸비된 지역을 찾는 이론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발표자의 이론에 공감한다. 그러나 따뜻한 바람과 좋은 물을 찾는 생활 이론은 고대인들에게 세계의 각 지역에서 있었던 공통적인 내용이며 중국에서만 먼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BC 30년 그리스 사람 비트르비우스(Vitruvius)는 좋은 집터를 찾기 위해서는 바람과 물을 반드시 살펴야 한다고 그의 책에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건축십서』, M.H. Morgan 편역, 기문당, 1999).
비트르비우스는 이 책에 바람의 종류에 의하여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달라진다는 내용, 바람의 종류로 8방위
바람이 있으며 그 중 남풍이 불어 올 때면 사람들이 병에 걸려 고생하고, 북서풍이 불면 기침을 하고, 북풍이 불면 건강을 되찾으며, 그리고 강한 바람은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가며 온화하며 조용한 바람이 환자들의 건강을 회복시켜준다고 하였다.
물의 종류에 따라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질병이나 또는 개인적 특성이 달라진다는 내용도 설명하고 있다.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 수사(Susa)에 있는 한 샘물은 목욕하기는 좋으나 이 물을 먹으면 바로 그날 이빨이 턱에서 다 빠져 합죽이가 된다,
또 다른 한 지역의 샘물은 좋은 목소리를 주고 또한 노래를 잘 하게 만들어 주어 이 물을 해외로 계속 보내는 한편 미남 미녀들을 데려와 이곳에서 결혼 시키니 목소리뿐만 아니라 용모도 빼어나게 이름다웠다는 등 그 이외 여러 종류의 물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그리스 사람들도 오래전부터 인간 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여 바람과 물, 즉 풍수를 연구하여 생활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 세도나는 기를 받는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이곳은 기가 많아 명상이나 수련 그리고 건강 회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본래 이곳은 아메리칸 인디안들이 살던 곳이다. 오래전부터 아메리칸 인디안 들이 이곳에 좋은 기운이 있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스에서의 바람과 물에 대한 이론은 그리스 사람들이 스스로 연구해 낸 자연 발생적인 풍수지리 이론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오래전에 풍수를 살피고 아메리칸 인디안이 역시 오래전에 좋은 기운의 마을을 찾은 것은 그들의 본능에 의한 자연발생적인 생활이며 지혜이다. 고대인들의 풍수관련 지혜는 각 지역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한 것이며 결코 한국이나 중국으로부터 건너간 풍수지리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
3. 한국에서 풍수지리 이론이 자연 발생했다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한국 전 지역에 고루 퍼져있는 고인돌의 위치는 산의 봉우리로부터 연결된 용맥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고인돌 시대에도 이미 산의 주봉으로부터 연결된 용맥을 길지로 보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고인돌의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강화도 마니산 일대의 고인돌군을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고인돌의 건립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3000년~4000년 경으로 본다.
(2) 신라의 석탈해가 반월성터를 잡은 시기는 신라 초기이며 이때, 석탈해는 어린 총각이었다. 석달해는 이곳에 집터를 정하고 거주한 후 발복하여 신라 2대왕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후에는 4대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은 AD57년~AD80년 이다(생년미상).
일설에 중국의 풍수지리이론이 신라 말기 도선국사(AD827년~ AD898년)에 의하여 도입되었다고 하는데 도선국사는 석탈해왕보다 810년 후의 인물임을 감안한다면 신라 초기에 이미 풍수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탈해 시대와 도선국사의 시대적 차이 810년이라는 세월은 신라의 풍수가 중국에 전파되어 그 이론이 다시 역수입 될 수 있는 시간이다.
중국의 풍수학자로 지리신법(地理新法)의 저자인 호순신(胡舜申)은 AD1131년 출생하여 AD1162년 사망하였다. 『금낭경(錦囊經)』의 저자인 주자(朱子)는 AD1130년에 출생하여 AD1200년에 사망하였다.(참조 : 김두규 역해, 『호순신의 지리신법』 2001,장락). 이들 중국 학자들이 활동한 시기는 석탈해 사후 1100년이다.
(3) 한국은 오래전부터 산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숭배하여 왔다. 산신은 한 지역의 수호신이며, 한 지역을 보호해 주는 산을 진산(鎭山)이라고 하여 신성한 공간으로 믿어 왔다. 진산에 대한 기념에 의하여 오늘날에도 산소 옆에는 산신단이 자리 잡는다. 산소에 성묘가는 사람들은 조상에 앞서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다.
한국의 산신 숭배 사상은 삼신 오제와 연관 된다. 한국에서는 삼신 오제사상이 중국의 음양오행이론보다 앞서 있었으며, 고구려 초기의 고분에 나타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등 4신사의 벽화는 삼신 오제 사상이 한국의 사상임을 나타내고 있다. 산신 숭배나 하느님 숭배사상은 조상 숭배 즉 효도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효도사상은 조상의 영혼을 편안하게 모시는 영혼사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중국의 풍수지리 이론은 기(氣) 이론을 중심으로 한다. 한국의 풍수지리 이론은 조상 영혼을 중심으로 한다. 기를 중심 철학으로 하는 중국의 풍수이론과 조상의 영혼을 위주로 하는 한국 풍수와는 철학적인 차이가 있다. 영혼을 위주로 하는 한국의 풍수사상이 기를 위주로 하는 중국의 풍수사상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4. “중국에서는 황토 고원지대에서 풍수설이 발생 하였으며 이곳에서 이상적인 황토 굴집 터를 찾는 기술이 풍수설의 기원이 된다.”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오래전에 세계 여러지역에서 고대인들은 수혈 주거를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아려진 내용이다. 그러나 이때 좋은 바람과 물이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은 각 지역의 고대인
들이 갖고 있던 본능적인 생활방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나 미국의 인디안들도 풍수와 기를 가리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토 굴집터에서 고대인들이 풍수를 살필 때 세계의 다른 지역에 살던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풍수지리를 가린 것으로 보아야 되겠다. 중국의 황토 굴집터에서부터 풍수지리가 발생하였다는 이론은 세계의 다른 나라 조건에서는 맞지 않는다고 분석된다.
5. 이상과 같은 이유로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풍수지리의 이론은 그리스나 아메리카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자연 발생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고인돌과 석탈해의 기록으로 보아 석기시대부터 풍수지리 이론이 있었으며, 한국의 풍수지리 이론은 중국으로 건너가 이곳에서 자생한 풍수지리 이론과 결합한 후 다시 역수입
된 것이 도선국사 때라고 분석된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연구내용을 경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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