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스크랩]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에 대한 고찰(考察)

장안봉(微山) 2016. 10. 27. 00:15

.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에 대한 고찰(考察)


신 종 일

미술공예연구실


제1장 서 론


한국전통 건축은 1960-7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무비판적 근대건축의 수용으로 인하여 맥을 잇지 못하고, 전통성이 결여된 무국적(無國籍)의 건축으로 변하고 말았다. 건축에 있어서 전통에 대한 논의는 근대건축이 지향한 국제주의양식의 획일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범세계적인 조류이다. 한국에 있어서도 ‘한국성’의 건축을 찾고자 하는 연구와 노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통표현에 있어서 전통건축(고건축)의 단순한 모방과 외부형태의 변형은 전통에 대한 회의감을 더해 준다. 그러므로 올바른 건축문화전통을 위해서는 전통건축의 보편성은 물론 건축의 특수성을 파악해야 한다.


마을이란 ‘오늘날 민중에 속하는 서민들의 정신이 깃든 역사의 장’이다. 마을에는 서민들의 꿈이 담겨 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온 마을은 하나의 전형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전형에 대해 신영훈씨는 『한국의 살림집』에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을은 산기슭에 자리잡는다. 남쪽과 동쪽이 탁 틔어 들이 전개되고, 서쪽과북쪽이 산등으로 가리워져 겨울의 매운 바람을 막아주면 좋은 자리를 차지한 마을이 라고들 상찬한다.“

이것이 전통마을의 모든 것을 내포한다. 바로 한국의 이상향인 것이다.


인간은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새로운 보다 좋은 세계를 꿈꾼다. 이러한 꿈이 동양의 무릉도원과 서구의 유토피아를 만들었다.


이 글은 십승지지 마을에 대한 고찰이다. 십승지지는 억압받던 사람들의 유토피아였다.

이 글의 내용은 첫째 한국 전통마을의 내용과 민간사상, 둘째, 이상향과 유토피아 사상, 셋째 십승지지와 마을 분석이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2장 한국전통마을과 민간사상


2-1 한국전통마을의 내용


건축의 발생이나 목적을 이해한다는 것은 건축하는 방법이나 건축사의 인식에 매우 중요하다. 건축 역사는 “인간의 삶의 터를 장만하기 위한 은신처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알맞는 기후와 음식을 찾아 떠돌아 다녔지만, 차차 농경을 알게되자 집단생활이 필요했고 비로소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통마을의 형태는 장소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왔다. 그러나 그 변화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전형이 있다. 한국전통마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전형이 무엇이며 그 원인을 밝히는데 뜻을 두고 있다.


전통마을의 구성요소는 자연환경 요소와 인문사회적 요소로 나누어 진다. 마을의 입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연환경이다. 이중환은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복거지지(卜居總論)는 지리(地理)가 위상(爲上)이요. 생리(生利)가 차지(次之)하며, 차(次)즉(則) 인심(人心)이요, 차(次)즉(則) 산수(山水)니 사자(四者)에 결일(決一)하면 비약토지(非藥土地)”라고 하여 자연환경인 지리(地理)를 사람이 살기위한 첫째의 조건으로 삼았다.


지리(地理)를 밝히는데 이용한 것이 풍수지리사상이다. 풍수지리사상은 고대인들의 토지관이 여러 사상들과 합쳐져 체계화된 것이다. 풍수사상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한국에 전래되어 독특한 사상적 체계로 발전하였다.


유형적 산물인 인문사회적 여건은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측면에 의하여 결정된다. 사회 체제가 어떠하며, 그들의 경제 생활 상태에 따라 마을의 성격이 나타난다.


한국전통마을은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자연인이 정착해 이룬 전형적인 농촌부락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를 떠난 사인(士人)이 중심이 된 양반촌이다.

자연부락의 농촌의 여러 조건에 따라 변화가 많지만, 양반촌은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2-2 한국의 민간사상


민간사상 중 전통마을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풍수지리사상과 민간신앙인 샤머니즘, 그리고 유교사상이다. 이들 사상들은 마을의 구성체계를 결정하는 요소로서 풍수지리상은 마을의 입지와 공간구조를 밝히는데 이용되었고, 민간신앙은 마을의 영조물(營造物) 배치와 마을의 공동의식을 갖게하는 근본이 되었다. 유교사상은 조선시대에 와서 마을의 구조와 주거유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2-1 풍수지리사상


풍수설의 근본은 토지속에 만물을 생육하는 생명력, 즉 일종의 신비한 기(氣)가 있어 이것이 인간의 복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기(氣)란 ‘현상계에 있는 모든 존재 또는 기능의 근원’으로서, 모든 존재물을 구성하는 구극극미(究極極微)의 원자적인 요소이다.


풍수사상은 기(氣)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동양의 자연관이며, 기(氣)의 감응(感應)을 위해서 선을 행해야만 한다는 도덕관(道德觀)이 내포되어 있다.


풍수 관념은 음양오행설을 수용하면서 기본 사상이 갖쳐진다. 풍수사상은 후한시대(後漢時代) 청오선생(靑烏先生)이 지었다는 『청오경(靑烏經)』에서 구체화 되며, 東晋(東晋)의 곽박(郭璞)의 『장서(藏書)』에서 이론이 정립되었다.

풍수지리사상은 천문사상이나 방위사상, 음양오행사상, 도참사상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태동, 발전 변화해 왔다. 풍수에서 자연관인 형세는 도교적인 성격이고, 현실적 복원은 유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풍수지리사상을 이해 하려면 먼저 음양오행설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음양오행설은 음양이론과 오행이론이 합쳐서 이룬 사상이다.
음양설에서는 우주 일체의 현상은 태극(太極)으로부터 음(陰), 양(陽) 양원기(兩院氣)의 동정에 의해 현감(現減)하고 소장(消長0한다고 말한다.

역(易)은 우주의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태극에서 시작된다.

태극(太極)을 무극(無極)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상에 대한 본체, 음양이라는 대립적 활동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본원의 상태, 또는 음양이 대립을 총칭하며, 이제부터 우주의 활동이 개시된다.

이 양의(兩儀) 사상-태양(四象-太陽),소양(小陽), 소음(小陰), 태음(太陰)-이란 활동의 2단계로 된다.

그리고 팔괘(八卦)는 사상(四象)의 각 형식에 재차 음양을 조합시킨 팔괘의 대립 형식을 이룬 것이며, 이것이
역서의 기본이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 간(艮) 곤(坤)이다.


오행설의 근거는 『서경(書經)』에서 나오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인 오행이라고 전해진다. 오행이란 우주만유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를 목(木), 화(火), 토(土), 금(金)수(水)의 다섯 가지로 간주하고, 삼라만상 즉, 자연과 인생은 모두 이 다섯 가지의 활동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이 오행의 소장(상생, 상극)활동의 법칙에 따라서 인생의 성쇠화복이 좌우된다.


음양오행론에 의하면, 음과 양,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각각의 특유한 기(氣)는 우주만물의 존개와 작용의 원칙을 이루게 되므로, 자연이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근본은 기(氣)에 있다는 것이다.


음양오행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이는 송나라의 주돈이가 지은 것으로 후세의 음양․오행에 관련된 각종 도설의 으뜸이 되었다.
풍수지리설의 이론적 구조는 산(山), 수(水), 방위(方位), 사람 등 四者의 조합을 바탕으로 하는 착용법(着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穴法), 형국법(形局法), 좌향론(坐向論) 등을 해설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착용법(着龍法) 에서 형국론(形局論)까지를 형세법(形勢法)이라 한다. 이것은 지형과 지세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끝나는 지점까지를 총괄하여 위치와 방향을 정하는데, 용(龍), 혈(穴), 사(砂), 수(水) 들의 상호 적절함을 살피는 것이다. 이는 음택보다는 양기(陽基)로서의 도성, 궁실 등의 건축에 이용되었다.

좌향론(坐向論)을 중심으로 하는 방위법(方位法)은, 음․양의 리(理)(법칙(法則))가 기(氣)(본질(本質))를 규정한다는 주자의 우주관을 풍수기술에 받아들인 것이다. 음양의 이(理)가 방위(方位)인데, 방위(方位)가 풍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설은 결국 음양오행론과 주역적 사고를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방술로서, 그 기본 구성요소는 산, 수, 방위이며 실체로서는 용혈사수(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추(思推) 체계(體系)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 의해 한정되는 마을공간의 형태를 장풍국(藏風局), 득수국(得水局) 이라 말하고 ‘공간감이 패쇄적이냐, 개방적이냐’하는 것을 ‘영역(국(局))이 잠겼다, 열렸다’고 하여 사상(四象)의 소응관계를 표현한다.


국(局)이란 마을의 자리로 명당(明堂)이라 한다. 이 명당은 경제를 생산하는 곳으로 농촌마을에 있어서는 경작지가 된다. 이러한 경작지에다 주거지를 정한다는 것은 경제적 손실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주거지는 자연히 농사가 어려운 산록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마을공간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형을 갖게 되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의 국면(局面)이 갖는 영역을 조산(祖山)-진산(鎭山)(주산(主山))-안산(安山)-조산(朝山)이란 종축의 위계를 갖는다. 이것을 세분화하면 진산을 뒤로한 혈(穴)과 명당이 자라잡고, 명당 앞엔는 수구(水口)와 마을의 입구가 길과 접해 있다.


2-2-2 민간신앙(샤머니즘)


원시시대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천둥이나 벼락,홍수와 가뭄 등 천지지변은 인간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자연 숭배의 신앙이 일어났다. 또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어 죽은 후에 신체는 비록 부패하여도 영혼은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사상이 있었다. 이 밖에도 토테미즘과 터부(Taboo:금기)등이 각 씨족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한 원시신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원시신앙의 형식은 제사(祭祀)로 나타났고, 제사는 무격으로 행해져 무당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제사장인 무당을 ‘샤만(Shaman)'이라 하여 원시종교 현상을 가리켜 샤머니즘(Shamanism)이라 한다.
샤머니즘이란 삼극(三極)(천(天), 지(地), 인(人))을 음양오행적 세계관으로 신봉하는 종교로서, 그 기능을 보면 영매(靈媒), 주술적 치료, 예언, 점곡, 강신술(降神術), 노래와 춤 등 다양하다.


무속신앙을 종교현상으로서, 그것을 잠재적으로 전인류(全人類)에게 가능한 보편적 현상으로 본 사람은 종교사학자인 엘리아데(Mircea Eliade)이다. 그는 세계의 중심이 수직적인 세계축(Axis mundi)을 상징하는 수목이나 기둥으로 구체화 되었다고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에서 밝혔다.

또한 그는 「The Sacred and the profane」에서 건축적 공간을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하였고, 그 구분은 어디까지나 성현(聖賢)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무속과 건축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먼저 불교건축에서 나타난다. 불교사찰에서는 산신당자리에 대웅전이, 밝뫼자리에 금당이나 탑이, 궁전자리에 사천왕문이 자리를 잡고 있다.


주거에서 샤머니즘의 영향은 건축의례와 집지킴의 의식으로 나타난다. 건축의례는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날받이․텃고사를 시작으로 개공(開工)고사․모탕곳, 성주운보기, 상량고사, 그리고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가기 위한 집들이․성주고사가 있다.
집지킴은 가택식을 총괄하는 성주신, 집터를 관장하는 터신(토지신(土地神))․조상신, 삼신․조왕신, 집의 재운(財運)을 관장하는 업, 대문신․외양신․뒷간신 등의 가택신을 나타낸다.


마을의 구성에 대한 샤머니즘의 영향은 영조물(營造物)의 배치에 나타난다. 마을의 공간 구조는 향천성(向天性)에 대한 세계신(世界神)의 상징, 그리고 성(聖)과 속(俗)의 건축공간에 따른 영조물의 배치에 따라 위계성을 갖는다. 영조물(營造物)의 전개형식은 서낭당․돌무더기․돌미륵-장승․솟대․당나무-종가-묘․신도비-산신당-수호산이 된다.



제3장 이상향(理想鄕)과 십승지지


3-1. 이상향과 유토피아사상


모든 사람은 그가 속한 현재에 대하여 항상 불만을 가지며, 어떤 결핍된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간구한다. 이러한 갈망은 인간에게 부단한 노력을 하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사회는 진보와 개혁이 이뤄져왔다.
이상향은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로 볼 수 있지만 장소와 시간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양과 서양의 이상향은 양방의 우주관(宇宙觀) 차이에 따라 확연하게 구별된다.

동양의 우주관은 일원론이며, 일원론은 자연과 인간, 정신과 육체, 주체와 객체는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항상성과 절대성이 없다.
서양의 우주관은 이원론이다. 존재의 주체는 인간이다. 자연은 하나의 개체로서 인간에게 예속된다. 이러한 인본주의사상을 바탕으로 한 서구의 유토피아사상은 우주론적 관념에서 벗어나 실현가능한 이상도시 계획안으로 역사발전적 변천을 하였다.


3-1-1.한국적 이상향


동양적 이상향을 대표하는 것이 중국의 무릉도원사상이다. 무릉도원은 전형적인 유토피아적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사상적 배경은 노자사상이 반영된 도교적인 현실도피사상이다. 이 사상은 동양의 자연관과 유교의 은둔사상과 결합되어 동양인의 이상향으로 이어져 왔다.


한국의 이상향에 대한 원류는 종교와 무속적 세계로 나타나고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 사상으로 전개된다. 한국인의 사상체계는 동양적 우주관인 향천사상(向天思想)인데, 이것은 단순한 하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천인일체사상(天人一體思想)인 것이다.
풍수지리의 자연과학적 성격과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도참적 사고가 결합되어 길지사상(吉地思想)으로 전개된다. 길지란 풍수적 측면에서 보면 형국을 이루어서 자연 조건상 살말한 곳이 되지만 도참적 측면에서는 현실사회에서의 피난․보신의 장소를 나타낸다.


한국의 이상향의 대표적인 것이 청학동(靑鶴洞)과 만수동(萬壽洞), 그리고 오복동(五福洞)이 있다. 이는 민중속에 오랫동안 전수되어 온 길지(吉地)사상이다. 길지사상과는 다른 도참적 이상향에 대한 것이 정감록(鄭鑑錄)이다.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구전(口傳)된 소위 십승지지(十承之地)라는 것이 나와있다.


주거에 대한 이상향은 소설과 노래, 그리고 각종 문헌을 통해 나타난다. 소설에 나온 대표적인 이상향은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나오는 율도국, 연암(燕岩)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나오는 무인공조(無人空鳥)가 있다. 그리고 노래로서는 제주도에 이어도라는 이상향이 있다. 이어도의 확실한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해녀들의 노동요(勞動謠)로서 불려졌다 한다. 그 밖에 조선시대의 ‘명당가’와 판소리인‘흥부가’가 있다. 문헌으
로는 조선 효종때의 학자 이유태의 『초려집』이 있는데 초가삼간이란 말이 나온다.


3-1-2. 서구의 유토피아


Utopia라는 말은 Thomas More의 『UTOPIA』에서 유래되었다. Utopia를 라틴어 어원으로 분석해 보면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하나는 ‘U'는 ‘없다’이며, ‘topos'는 ‘장소’란 뜻의 합성어로 즉 ‘아무데도 없는 장소’란 말이다. 또 한가지는 ‘good-place' 즉 ‘더 좋은 장소(세계)’로 풀이된다.


유토피아가 현실세계와는 다른 또다른 세계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서 독자적이고 자기완결적이며, 떨어져 있어야 하는 희미하고 머나먼 중립적 공간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독립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Utopia(이상도시를 포함)를 정리해 보면 다음의 6가지로 요약된다.


1) 유토피아는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를 묘사한다.
2) 유토피아는 전체성(全體性)(holistic)을 나타낸다.
3) 유토피아는 기능적 모델이다.
4) 유토피아(utopian)들은 이상주의자이다.
5) 유토피아는 기존의 사회질서구조를 초월한다.
6) 과거의 유토피아가 현재 혹은 미래에 실현될 수도 있다.


서구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Utopia 사상은 그리이스의 도시에서 시작된다. 이상도시나 Utopia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진 것이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대한 제시이다.
이상도시의 형태는 고적적 Utopia와 계몽기 이후의 개혁적 Utopia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플라톤에서, 후자는 모어의 영향을 받았다. 개혁적 Utopia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의 형성에 의한 사회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코자한 오웬(Robert Owen)의 “이상촌(Ideal Village)”에서 출발한다.


문학과 연관된 낭만주의적 Utopia는 퓨긴(Agustus W.N Pugin)과 지테(Camilo Sitte)에 의해 주장되었다.

낭만주의적 Utopia는 1898년 하워드(Ebenez Howard)의 『미래의 전원도시(Garden Cities of Tomorrow)』로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이룩한다.
20세기에 들어와 Utopia사상은 미국에서 실행되기 시작하였다. Frank Lloyd Wright 는 도시에 대해 불신감과 혐오감을 갖고서 1935년 뉴욕의 공업예술 전람회에서 “브로드 에이커(Broadacres)"를 발표했다.


르 꼬르뷔제는 1922년 300만 주민을 위한 “현대도시(Vile Comtemporaine)"와 1925년 파리 중심부를 개조하는 “아잔 계획(Plan Voisin)"을 발표했고, 10년 뒤 현실적이고 세련된 “빛나는 도시(Bile Radieuse)"를 발표하게 되었다.


3-2. 십승지지


십승지지는 가시적 신앙의 표현일뿐 아니라 믿음과 환경의 결부관계를 갖는 것으로 피난, 보신이라는 도참적 민속신앙을 사고의 기저로 나타난 토지관인 것이다.


3-2-1. 십승지지의 유래


십승지지(十承之地)란 ‘국내의 열 군데에 명승지로서 술가가 일컫는 기근(饑饉), 병화(兵火)의 염려가 없는 열 군데의 땅’이다.


십승지지(十承之地)는 정감록(鄭鑑錄)에서 나오는 말이다. 정감록의 정확한 저작연도에 대해서는 여러설이 있지만, 삼국시대 이래 전파된 풍수도참설 중 조선조 중기 임진(壬辰), 병자(丙子) 양란 후의 흐트러진 민심을 바탕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수산씨는 정감록의 특질로 6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수산,『정감록』 p.87)


1) 정감록은 일종의 예언서로 이씨 조선의 흥망을 예언하고 있다.
2) 모든 도참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3) 정감록은 음양오행설을 근거로 한 풍수지리설에 뿌리박은 독자적 논리를 갖는다.
4) 정감록은 예언서인 동시에 일종의 유토피아서다.
5) 정감록은 우리나라의 왕조와 국도에 관한 국가적인 예언서다.


3-2-2. 십승지지의 위치


정감록에서 나오는 십승지지는 다음과 같다.


1) 풍기거암금계동협소백산양수지간(豊基車岩金鷄東峽小白山兩水之間) 『 풍기 금계촌
2) 화산소영고기재청양현월입봉화동촌(花山召嶺古基在靑陽縣越入奉化東村0 『 봉화 춘양면 소라리
3) 보은속리산사증항연지(報恩俗離山四甑項延地) 『 보은 마로연 적암리
4) 운봉행촌(雲峰杏村)『 지리산 불쪽 운봉면
5) 예천금당실(醴泉金塘室)『 예천 금당실
6) 공주계룡산유구마곡양수지간(公州鷄龍山維鳩麻谷兩水之間) 『 공주 마곡산
7) 영월정동상류(寧越正東上流)『 영월읍 연하리
8) 무주무봉산동방상동(茂朱舞鳳山銅傍相洞)『 무주 설천면 벌한
9) 부안호암하(扶安壺岩下) 『 부안 내변산 청림리
10) 협천가야산만수동(狹川伽耶山萬壽洞) 『 합천 가천리


3-2-3. 십승지지의 특성


가. 위치적 특성
십승지지는 백두대간의 흐름에 따라 전재되어 있는데, 백두대간이라 함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원산, 낭림산, 금강산을 거쳐 태백산까지 내려와 속리산 등 지금의 소백산맥을 포함하면서 지리산까지 뻗은 제일 큰 산줄기로서 한반도를 세로 지르며 큰 획을 긋고 있다.


십승지지 중 제일 북쪽에 위치한 것이 영월 연하리다. 그리고 제일 남쪽은 합천의 가야면 일대다. 확실히 한반도의 중부 내륙에 위치한다. 이러한 위치 설정은 십승지지의 첫째 선결조건이 난(亂)을 피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북부와 남부지역은 오랜 동안 외국의 침약을 받아왔다. 그래서 자연히 한반도의 중부가 피란지지가 되었다.
한국의 도별 분류는 산맥과 강에 의하여 구획된다. 그런데 십승지지는 각 도경계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지방 행정력의 범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이다. 신분의 제약과 지방관료들의 착취는 십승지지의 이상향을 낳게한 또다른 원인이었다.


나. 지형적 특성
한국인의 이상적인 정주지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마을은 산기슭에 자리잡는다. 남쪽과 동쪽이 탁 틔어 들이 전재되고, 서쪽과 북쪽이 산등으로 가리워져 겨울의 매운 바람을 막아주면 좋은 자리를 차지한 마을이다.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지리」에는 “무릇 사람은 양명한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는 바... 들이 넓을수록 터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해와 달과 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바람과 비와 차고 더운 기후가 고르게 알맞은 곳이면 인재가 많이 나고 또 병도 적다”고 했다.

마을은 또한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십리 안팎에 장이 선다. 관아가 있는 고을도 거기에 있다. 문물이 융성하게 유통하는 과정이 마을 앞을 지난다. 학문의 교류와 세상의 소식이 적당한 곳이어야 한다.


십승지지의 지형적 조건은 위의 전형적인 마을과는 상이하다.

<감결>에 십승지지의 지형적 조건에 대해서, 정공이 가로되 “대개 인세에서 몸을 피하는데 산도 이롭지 못하고 물도 이롭지 못하고 가장 좋은 건 두 궁이니...(개인세피신 불리어산 불리어수 최호양궁(蓋人世避身 不利於山 不利於水 最好兩弓))”라 하여 양궁(兩弓)을 강조하고 있다.
양궁(兩弓)은 궁궁(弓弓)으로서 활을 두 개 펼쳐 놓은 상태, 곧 분지나 산곡을 의미한다.


십승지지의 지세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피란을 위해서 산 중에 위치며, 커다란 산맥을 등지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을 이룬다. 그러므로 전략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십승지지 안에는 하천이 존재하는데 두 개 이상의 하천이 겹쳐지고 있다. 이러한 지세는 풍수의 형국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명당(들)이 협소한 것이 단점이다.


다. 사상적 특징
십승지지는 단순한 피란지지가 아니다. 십승지지사상에 담겨진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적인명 : 메시야사상-진도령의 출현
정치적인명 : 역성혁명사상-도참사상(왕조의 흥망)
사회적인명 : 남조선사상-한반도 남쪽의 길지설


십승지지사상은 한국적 유토피아사상이다. 십승지지는 현실도피적 유토피아로서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고 있다.



제4장 십승지지 마을 분석


십승지지 마을 분석에 앞서 먼저 십승지지를 협의의 십승지지와 광의의 십승지지로 나누었다.

협의의 십승지지란 <감결>에서 범위가 뚜렷하게 제시한 곳을 말하는데, 풍기 금계촌, 보은 증항연지, 운봉 행촌, 예천 금당실, 무주 동방상동이 여기에 속한다.

광의의 십승지지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봉화군 춘양면, 공주 유규․마곡 두 강사이, 영월정동상류, 부안 호암하, 합천 만수동이 여기에 속한다.


4-1. 협의의 십승지지


4-1-1. 풍기 금계촌 금계리(金溪里)


첫 번째 십승지지인 금계촌(金溪村)은 ‘옥룡자 금계도’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는데, ‘옥룡자 금계도’는 도선이 풍기의 형국을 그림으로 보이고 해설을 붙인 것이다.


금계촌의 지세는 다음과 같다. 소백산 무릎에 안겨 풍기바닥을 굽어보는 금계봉은 연화봉에서 떨어져 동남으로 십여리를 뻗어내려 수려하게 일으켰고, 거기서 서남으로 다시 어어져 읍 서편에 이르러 예쁘게 도사린 봉우리인 보평대에 이른다. 여기에는 한때 풍기 공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경북지명유래총람』에서 금계동(金溪洞)이란 쇠발(우족(牛足)로서, 이는 금계동 뒷산의 모양이 소의 발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금계리는 본래 풍기군 서부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교동과 장선동을 병합하여 금계천의 이름을 따라 금계동이라 하여 영주군 풍기읍에 편입되었다.


금계리는 풍기읍 사무소에서 북방으로 굴다리를 지나 3㎞ 정도에 성주 들을 지나는 국도에서 샛길로 진입하게 된다. 진입한 후 바로 갈림길이 있는데 부계밭과 임실로 가는 길과 쇳바리로 가는 길이다.
현재 금계리는 금계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는데, 십승지지와 관련이 많은 곳은 금계1리로서 마을로는 부계밭, 부개발 혹은 부거전(浮渠田)이라고도 하는데 쇠바리(모랭이), 임실, 용천동이 있다.


부계밭은 쇠바리 남쪽에 있는 마을에 십승지지의 금계촌이 이곳이라고도 하지만, 오히려 임실 마을에 정감록을 믿고 들어온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금은 금계 1리 마을회관이 있으며, 20여 가구가 있다. 이 마을은 들 한복판에 위치하는 것이 풍수의 입지보다는 경작지의 거리에 의하여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임실(荏實)마을은 부계밭을 지나 용천(龍川) 다리를 지나 자리잡고 있다. 용천은 용천골에서 용천동못을 지나 설매기들과 임실 마을의 앞을 거쳐 금계천에 합류한다. 용천다리를 건너면 마을 어귀에 정자목이 있다. 이 정자목에서는 정월 보름에 동오사가 행해진다고 하며 평소에는 마을의 놀이터가 된다.


임실 마을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을 띠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명당이라고 하는 들에 인삼밭과 논이 펼쳐져 있다. 마을로 들어가면 집들의 배치는 마을의 골목길에 접하게 되어 자유롭고 안채는 주로 남향을 하고 있다. 집들은 앞에 마당을 가지며, 뒤에는 감나무등 과실수가 심어져 있다.


쇠바리 마을은 장선 남서쪽에 위치한다. 마을의 지형이 소의 발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 마을의 주민들은 쇠바리를 십승지지 마을로 생각하고 있다. 이 마을은 인촌 김성수의 여름 별장으로 유명한데, 지금은 안채만이 남고 양옥으로 새로이 단장을 하였다.
풍기가 돌이 많다고 하지만, 이 마을터에는 돌이 나오지 않는 토질이라 한다. 지세를 보면 작은 매봉이 왼쪽으로 뻗어 나온 곳의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산세가 다른 곳에 비하여 부드러워 서로 돕고 살며, 순풍(흉년)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쇠바리 뒷편의 언덕을 넘으면 용천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용천동은 용천동못을 지나 언덕에 위치하는데 집촌의 형태를 띠지 못한다. 마을 앞에는 들이 없어 언덕을개간하여 사과 과수원이 많이 있다.
일제 말기에 살기가 더욱 어렵게 되자 평안도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정감록 십승지지첫째의 길지가 풍기라고 믿고 들어 온 사람들로 인하여, 한 때 풍기를 “작은 서울”또는 “작은 평안도”라고 하였다 한다.


4-1-2. 예천군 금당실


금당실의 지형을 살펴보면, 마을 뒤에 높이 200m의 오미봉이 있다. 그 뒤에 무쇠장등성이가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오미봉의 산세가 빼어나 금당실에 인재가 많이 나서 중국에 폐가 된다”고 하여 이 등성이에 무쇠말뚝을 박아서 산의 영기를 끊어다 하여 유래되었다. 이 등성이 뒤에는 다시 산세가 높아진다.


동쪽에는 육녀봉이 있고, 동북쪽에는 망월봉이 자리잡고 맛질과 경계를 짓고 있다. 옛부터 금당실에는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있는데 위의 두 산을 없애고 금당실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의 지형과 유사한 형세를 이룬다고 했다. 그러나 한가지 단점은 한강과 같은 큰 강이 없다는 것이다.


오미봉을 뒤하여 좌․우 양쪽에 금곡천이 감싸며 흐르고 있는데, 동쪽에는 돈두들이 펼쳐지고 남쪽에는 상금들이 펼쳐져 있어서 마을이 동남쪽으로 항해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상금곡동은 본래 제곡면의 지역으로서, 웃금당실, 또는 상금곡이라 하였는데, 본류동 일부를 병합하여 상금곡동이라 한다.금당실은 상금곡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현재 470호 가량이 되는 커다란 마을이다. 금당실은 원래 함양 박씨의 고장이었지만 현재는 예천 권씨가 많이 살고 있다.


금당실의 지형으로 보아도 금당실을 십승지지의 피난처로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마을 주민들도 이곳을 십승지지로 믿지를 않는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는 용문면사무소와 지서, 우체국, 국민학교와 중학교, 농업협동조합이 있는 용문면의 중심지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는 피해가 없었으며, 고종 때 금곡 43번지에는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피난처로 들어와 아흔 아홉 칸의 집을 지었다는 집터가 십승지지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4-1-3. 보은군 마로면(馬老面) 적암리


마로면(馬老面)은 보은군과 상주군의 경계에 있다. 이곳은 조선 때 역마(驛馬)를 먹이던 곳이므로 마로면이라 했다. 마노면의 지세는 북은 구병산이 펼쳐져 있고, 동쪽에는 구병산 줄기가 이어진 시루봉이 있다. 서쪽에는 삼승산이 있으며, 남쪽에는 먹산이 위치하고 있는 산지이다.


마로면 적암리는 적바위가 있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적바위는 구병산 동쪽 충북 상주와 경북 보은 경계에 두 개가 있는데, 상주바위와 보은바위라고 한다. 원래 보은 바위는 저(적(笛))대 같이 생겨서 적암리(笛岩里)라 했는데 일제때 적암리(赤岩里)라 고쳤다고 한다. 그리고 보은바위에서는 보은군의 기우제가 행해졌다고 한다.


적암리는 마로면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뒤에는 구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동쪽에 시루봉이 우뚯 솟아 있다. 구병산은 ‘작은 속리산’이라고 부르는데, 높이가 877m인 웅장 수려한 산으로 기암절벽이 마치 아홉폭의 병풍을 두른 듯 하다고 불리워졌다. 이 산 중턱에는 유명한 약수가 있으며, 옛날 달밝은 밤에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3평 정도의 신선대가 있다.


시루봉은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증항(甑項)이라 한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적암천이 흐르고 있다. 시루봉 남쪽에 먹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데, 옛날 비란(飛鸞)이라는 새가 날아와 먹을 먹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이곳의 산세를 임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보고 산세가 좋아서 인재가 난다고하여 시루봉 뒤의 새목을 칼로 쳐서 맥을 끊었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적암리는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에 있다. 상주를 지나 경북의 도계를 넘으면, 검문소와 적암 휴게소가 나온다. 이 곳은 예전에 주막이 있어 주막뜸이라고 하였다.
마을은 검문소 옆에 길로 진입을 하며, 관기 초등 학교 적암 분교를 지나면, 우측에 소나무 숲이 있고 좌측으로 마을의 공터가 나온다. 마을은 약간의 기복이 이어져 있고, 마을 가운데에 천(川)이 흘러 마을을 둘로 나누고 있다.


이 마을의 역사는 약 800년이 되었는데, 십승지지를 믿고 들어온 이북 출신의 사람이 많이 살았고, 적암리 주위를 ‘피난고지’라고 했다. 1970년대에는 독가촌 정리 전에는 구병산 기슭 도처에 정감록은 믿는 비결파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논 42.4ha, 밭 47.7ha, 그리고 임야 582.5ha로 임야를 개간한 배나무골이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1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90여 가구만이 남았다.


4-1-4. 무주군 설천면 벌한(伐寒) 부락


벌한 부락의 진입은 나제통물을 지나 3㎞오르면 구산리가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 1.5km지점에 방재마을이 아노고, 여기서 2.5㎞를 가면 벌한이 나온다. 벌한을 방상동이라 하는 것은 구산리와 중간에 방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400년 전부터 배씨에 의해 생겨난 마을로서 지금도 대다수의 주민이 배씨라고 한다. 일제말기에는 비결파에 의해서 60호 이상이 살았지만 현재는 13가구만이 남아 있다.


마을의 앞(서쪽)에는 거칠봉(1127m)이 구천동과 경계를 짓고 있으며, 마을 뒤(북쪽)에는 사선암이라는 바위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마을 동쪽은 다래목골이 이어져서 무풍면과 경계를 이룬다. 예전에는 다래목골로 무풍면 은산리의 장을 보았다고 한다. 마을의 입구에는 소나무 숲과 한천제(寒泉齊)가 있고, 마을은 다리를 건너 언덕위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형태는 북서쪽이 열린 관계로 인해서 남쪽에서 북으로 항해를 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특히 벌한골에서 내려오는 물은 마을의 좌측에서 흐르고, 다래목골에서 내려오는 물은 마을의 오른쪽에서 흘러 마을의 앞에 이르러 합류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배터라 하여 마을에 우물을 파지않는다고 한다


4-2. 광의의 십승지지

4-2-1. 봉화군 춘양면 소라리(召羅里)


봉화군 춘양면은 본래 안동군 춘양현인데, 고종 광무 10년(1906)에 봉화군에 편입되었다. 춘양면 동쪽은 소천면, 남쪽은 법전면, 서쪽은 봉성면과 물야면,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상동면과 닿고 있다.
춘양면의 산세를 보면, 동쪽에 각화산(1177m)과 형제봉(833m), 서쪽은 문주산(1207m), 북에는 구운산(1344m)으로 둘러쌓여 있다.
춘양면 중심부에는 춘양천이 흐르고 있는데, 춘양면 서벽리 구운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춘양면을 지나 법전면, 명호면을 거쳐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소사리는 상장암(옷장바우)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춘양읍내에서 북쪽으로 8㎞정도에 각화사가 있고, 서북쪽으로 6㎞ 정도에 소라리가 위치한다.
마을 앞에는 운곡천이 흐르는데 마을의 진입은 두 개의 다리를 통해서 들어 간다. 다리를 건너면 농토가 있고, 마을은 산을 등지고 있다. 이 마을은 풍수의 전형적인 형국속에 감싸져 있다.


4-2-2. 공주 마곡사와 서양동


공주의 대표적 십승지지로 마곡사를 들 수 있다. 마곡사는 공주군 운암리 태화산 남록(南麓)에 위치한다. 이 사찰의 배치는 마곡천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세필고-해탈무-천왕문-연화고(洗必稿-解脫門-天王門-蓮華稿)를 건너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 다보탑인 석조 5층 석탑이 있다.

이 탑의 특색은 상수부(相輸部)에 나마식 금동제(金銅製)원탑이 설치된 것이다. 석탑 뒤에는 1층의 대광보전과 2층의 대웅보전이 있는데 배치상으로 엇갈려있다.


마곡산 영산전을 시계방향으로 돌아서 약 1㎞를 가면 생골에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을 생동(生洞0이라 하며, 또한 마곡산 서쪽에 있으므로 서양동이라고도 한다. 마을 입구에 거북바위가 하나 있다.

본래 암 수 두 개가 있었는데 마곡사 상수도관 공사 당시 암컷이 깨져서 옆 개울에 옮겨 넣었다고 한다. 이 바위는 동리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보병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40여 가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16호가 있다. 마을의 형태도 집촌이 아니고 독가촌으로 남아 있다.


4-2-3. 영월 정동상류 연하리


연하리는 영월읍에서 동쪽으로 의림천을 따라 10㎞정도 가면 두둘(두평)마을이 나오는데, 이곳부터 연하리가 시작된다. 연하리의 지세를 보면, 북으로는 완택산(916m)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남쪽은 계족산(899m)과 응봉산(1013m)이 있다. 그리고 정선군 신동면에서 오는 의림천이 동에서 서로 굽이쳐 흐로고 있다.


연하리의 마을을 살펴보면, 서쪽부터 두평, 탄부동(숯가마골), 새마을, 반생이, 화전(꽃밭머리)등의 마을들이 의림천을 따라 산만하게 위치하고 있다.
지금 영월에는 십승지지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상동에 증석 광산이 일인(日人)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4-2-4.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부안의 십승지지는 내변산 전체가 해당된다. 그 중에도 청림리가 대표적이다. 청림리는 뿔바우 밑에 청림사(靑林寺)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 청림사는 절터만이 남아있다.


청림리의 지세를 보면, 마을 뒤로는 동쪽에 뿔바우가 있고, 뿔바우에서 서남 방향으로 새재능선이 둘러져 있다. 마을 남쪽에는 노적봉(134m)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마을 앞에는 백천이 흐르고 있고, 농지가 비교적 넓게 있다.


한편, 호암(壺岩)을 ‘울금바우’라고 하여 개암사 일대를 십승지지라고도 한다. 개암사는 백제무왕 때 묘련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개암사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패잔병들이 부여풍을 왕(풍장왕)으로 모시고 주류산성(우금산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4-2-5. 합천군 가야면 덕방동


합천 만수동(萬壽洞)은 숭산골 일대를 말한다. 이곳은 일제말기때 피난지지라 하여 창령, 대구 등지에서 숭산골 각 부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숭산골의 지형을 보면, 북쪽에는 가야산의 지맥을 이은 단지붕(1028m)과 매화산(954m)이 있고 서쪽에는 비계산(1126m), 남쪽은 두무산(1038m), 동쪽은 남산봉(321m)과 자경산(503m)으로 둘러 쌓여있다.


숭산골에는 가야면 죽전리의 석계동에서 발원한 숭산천(崇山川)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현재는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도로변에서 숭산골 전체를 관망할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의 ‘경남편’에 덕방동(德坊洞)의 유래가 나오는데 임진왜란 당시 피난민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매화산이 있는데 이것을 만수동이라고 한다. 마을 앞에는 덕방들이 약간의 경사로 펼쳐져 있고, 서편에는 덕방못이 있다.


4-2-6. 운봉(雲峰) 행촌


운봉은 해발 500m가 되는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고원을 오르면 기름진 들과 동천과 서천이 흐르고 있다.
운봉은 고려 말 황산대첩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조선 전까지 전략적 요충지 였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임진왜란과 각종의 민란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운봉에는 주변 지방에서 난리를 피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운봉이 <감결>의 십승지지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운봉면 마을들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피난지로서 생긴 마을은 임진왜란 때 마을중시조인 장덕복에 의하여 생겨난 신기리(新基里)가 있다. 또 하나의 피난처로 회덕 마을을 들 수 있다.



제5장 결론


한국 전통건축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마을에 대한 연구보고가 건축계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마을은 단위 주거들이 모인 총체적인 건축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 마을은 ‘생활의 장’ 이며 조상들의 전통사상이 담긴 전통건축자료의 보고이다.


본 연구는 십승지지 마을은 갖는 이상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마을의 특성을 분석하므로써 오늘날의 이상향에 맞는 마을 건축계획에 참고하고자는 목적으로 시도하였다.
십승지지는 피란지지다. 외세의 침략과 사회적 불안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국의 이상향이다. 십승지지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닌 하나의 신앙이었다


십승지지의 위치를 확인한 결과 다음과 같은 지형적 특성을 발견하였다.


1) 십승지지의 위치는 한반도 중부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위치하는데, 도별 경계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큰길(국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2) 십승지지의 지세는 커다란 산맥을 등지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략상 안전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지형적 특색으로 인하여 십승지지 마을은 보편적인 전통마을의 전형과는 다른 마을 구성을 하고 있는데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마을의 입지에 있어서는 풍수지리상이 큰 영향을 끼쳤다.
2) 십승지지의 입지 조건에 따라 마을들은 규모가 작다.
3) 전통마을은 종가를 중심으로 위계성을 갖지만 십승지지 마을은 공간구성에 위계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4) 십승지지를 믿고 타지에서 온 정착촌의 성격을 갖고 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