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金剛經』에서 제시한 마음 다스림 고찰

장안봉(微山) 2016. 6. 4.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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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經』에서 제시한 마음 다스림 고찰

 

김말환|육군 교육사 군종실장

 

 

Ⅰ. 序論

 

오늘날 서구에서는 선수행을 통해서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건강 향상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증명하고 있다.

 

최근 위스콘신대 연구소가 밝힌 바에 의하면 “오랜 수행자들은 우리가 본적이 없는 수준의 뇌 활동을 보여줬다. 이는 또한 뇌는 훈련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물리적으로도 변형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명상 관련 뇌 활동이 특히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곳은 왼쪽 이마 바로 뒤편의 전두엽 피질인 것으로 확인했다. 고승들의 감마파는 실험에 참여한 학생들에 비해 훨씬 빠르며 강력한 활동을 보이며, 상이한 뇌 회로를 결합시킴으로써 한층 높은 수준의 정신활동 및 깨달음과도 연결 된다”(‘05.1.3 : 워싱턴포스트)고 했다

 

이러한 실증적 검증토대는 물질만능의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심각하게 다가오는 마음의 황폐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고자 여러 가지 방안을 찾고 있으며, 그 대안으로써 선수행의 가르침은 크게 환영받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행복은 제3의 무엇으로부터 자신들의 결핍을 충족 받아 질 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신의 본래의 면목을 등지고 外的경계의 대상에 집착함으로 인하여 자신과 더불어 함께하는 실다운 세계를 바라보고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는 고통속에 살아간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끝이 없는 생사의 윤회 고통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밝혀냄으로써 동시에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깨달음의 길을 밝혀내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여러 형태의 경전과 수행의 방법이 전해지며, 부처님께서 입멸한 이후부터는 대소승을 막론하고 각기 독특한 수행 체제를 확립하고 있다.

 

특히 중국 선종은 본류인 달마(?~495)에서로부터 慧能(683~713)에게로 祖師禪이 이어졌다. 혜능의 제자인 荷澤神會(684~758)는 달마로부터 전해졌던『楞伽經』을 다시『金剛經』으로 수행의 所依經典을 삼고서 이 경을 크게 유통시켰다. 그 영향을 받은 한국불교의 선종에도『金剛經』을 선수행의 기본 지침서로 삼고 있다.

 

이 『金剛經』은 이름에서 보듯이 가장 단단하고 완벽한 지혜의 가르침의 경이며, 또한 모든 집착과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절대적인 경이다.

 

이 경의 중요과제는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1)이다. 즉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고 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 중생의 마음에서 보살의 마음, 나아가 여래의 마음, 부처님의 마음으로 나아가도록 수행 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수행 지침은 이 경에서 반복하여 질의와 답변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지침서로서 이 경을 살펴봄과 동시에 본래면목(마음)을 등지고서 갈길 잃어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 다스림 내지 心理治療的 텍스트로써 접근해보고자 한다.

 

1)『金剛經』(대정장8 , p. 7 4 8中)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 .

원문은 “bodhisattva-yāna-samprasthitena”으로 구마라섭의 번역이며, 현장은 “諸有發趣菩薩乘者”이라했다. 여기서 yāna는 √yā(to go)에서 파생된 명사로 ‘탈것”, samprasthitena는 sam(함께)+pra(앞으로)+√sthā(서다의 과거분사)의 합성어로 ’함께 나아가다‘로써,’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란뜻으로 ’보리심을 발 한자‘로 볼 수 있다. 〈각묵스님의 『金剛經역해』(서울 : 불광출판부,2003).pp.58~59.〉

이글에서는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로 번역 한다. 이 경 원문에 “bodhisattva-yāna-samprasthitena”가
12회가 나타난다. 또 “anuttarā-samyak-sambodhi”를 그대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로 번역한다.

구마라섭은 두 가지 모두를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로 통일하게 29회나 사용했다. 그러나 현장은 “bodhisattva-yāna-samprasthitena”를 ’發趣菩薩乘者‘로, “anuttarā-samyak-sambodhi”는 ’無上正等覺‘(大正藏7. p.980)로 번역하고있다.

 

 

Ⅱ. 本論

 

1.『金剛經』의 구성과 마음 다스림의 배열로서 등장인물

 

가. 경의 구성과 심리치료적 형식

 

이 『金剛經』은 범어 본과 한역본이 여려 개가 있으며, 그에 대한 주석서도 많은 형태로 남아 있다.

 

梵語本은 Vajracchedikā Prajñpāramitā Sutra 이며, 한역으로는 鳩摩羅什(343~413)역 『金剛般若波羅蜜經』1권과 菩堤流支(509년), 眞諦(562년), 芨多(690년) 역 각1권과 玄奘 譯『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1권(660~663)과 義淨등의 6人이 있다.

 

특히 이경은 六百部『大般若經』중 第五七七部大般若 十六會에 해당된다. 이 논문에서 주로 인용되는 경은 구마라집이 번역하고, 양나라 昭明太子(~531)가 분석한 32分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경은 총 5,149자의 짧은 한문경전(鳩摩羅什譯)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님에게 수보리가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의 답변을 통해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여 가고 있다. 특히 이 경은 부처님께서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와 ‘아니 非자와 아니 不자, 없을 無’ 등등을 활용하여 현실에 꼬여진 마음의 무명을 지혜와 자비로써 풀어가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 문답 내용은 상호 이해와 배려 속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문제 해결을 끝까지 추적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 실례로서 이 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문답 회수에 있어 총 89회나 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완전한 이해와 깨달음을 위한 부처님의 자비심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한 문답의 예로서 “그 때 수보리 이 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 법력에 감응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 이제 제게는 지혜가 생겼습니다.”2)고 자신 있게 본인의 깨달은 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답 형식은 오늘날 심리 치료적 상담 방법에서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해 가는 좋은 상담치료기법의 사례로 응용 될 수 있다.

 

2) 『金剛經』(대정장 8, p.754.中) “爾時須菩堤聞說是經 深解義趣涕漏悲泣… 我從昔來所得慧眼”

 

 

나. 경의 흐름에 대한 고찰

 

이 경의 흐름은 昭明태자께서 이해하기 쉽게 32분의 단락으로 나누어진 주요부분을 가지고 살펴본다.

 

(1). 序分法會因由分은 부처님께서 걸식을 마치시고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시고 앉으신 모습에 대한 이야기로서, 부처님의 일상 수행 모습을 볼 수 있다.

 

(2). 本分第二分善現起請分에서부터는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말세의 선남선녀들이 마음 머무는 법과 마음 항복 시키는 법을 질문한 것이 발단이 되어” 그에 대한 대답으로 경의 내용이 전개 되며, 특히 제 3 ~ 4分에서 나누어 주요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3). 第三分大乘正宗分은 마음 항복시키는 법으로써, 선남 선녀를 보살로 표현하여 “보살마하살이 그들의 생각을 어떻게 항복시켜야 되는지를 직설로 표현 한다.”

 

즉 “어떤 이가 있어 일체중생을 남김없이 무여열반에 들도록 인도하였다 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진실된 보살이 아니다.”3)라 하였다.

 

왜 이렇게 엄청난 좋은 일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보살이 못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반대의 입장에서 분명히 설명하신다. 질문자로 하여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不正의 방향으로 답변을 던져서 충격 요법으로 깨달아 가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경에서 풀어야할 과제인 “降伏其心하여 菩薩로서 一切衆生無餘涅槃樂”을 얻도록 하고 있다.

 

(4). 또한 제4분 妙行無住分에서는 마음 머무는 법으로써, “보살이 보시를 행하되 상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4)고 한다. 다시 말해 相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면 그 복덕이 한량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 ‘마음에 머물음이 없는 청정심’에 대한 실체에 대해 3가지 단계의 논리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3) 『金剛經』(대정장8, p.749上)
4) 上揭書(대정장8, p.749上)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 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堤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첫째 단계는 初分에서 第六正信希有分까지는 視覺的으로 보여 지는 有에 관련한 相, 즉 我相․身相․福德相등의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둘째 단계는 無我와 無爲에 관련하여 第七分에서 第十七分까지 철저히 相의 존재가 없다고 설명한다.

셋째 단계는 第十八分부터 끝까지 相에 관련하여 有我․無我․有爲․無爲마저도 이름일 뿐이며 말로 할 수 없는 것 인데도 다만 凡夫는 탐착하여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의 집착에서 만들어진 見解를 세우지 말도록 인도하고 있다.

또한 착한 마음을 일으킨 자가 지혜로움을 향하되 끝내 그 마음을 항복 받지 못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대해서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내가 모든 중생을 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를 다 마쳤다 하더라도 나로 인하여 열반을 증득한 이가 있다는 생각에 나아가면, 그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갖고 있음으로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마음에 머물러 있다면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한다.

 

둘째 보살이 보시를 행하되 無住相보시바라밀의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를 갖고서 항하사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찰 정도의 보시를 행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무주상의 마음을 내어야 한다.

 

셋째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욕행을 행할 때 가리왕에게 몸이 베이고 찍기 움을 당할 때에도 무아상무인상을 갖고 있음으로서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 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마음을 항복 받았을 때 그 공덕은 끝이 없다’고 했다.

 

넷째 부처님께서 ‘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이기 때문에 ‘是名 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기 때문에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일체법이 이와 같음을 믿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서 마땅히 法相도 내지 말도록 하고 있다.

 

 

다. 경에서 나타나는 등장 인물

 

이 경은 보살승으로 나아가는 등장인물과 실천 수행 과정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주요 登場人物은 衆生, 菩薩, 如來, 佛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중생이란 마음에 상을 取하고 있는 者이다.5) 어리석은 범부들은 집착할 뿐인 것이다6).

5) 上揭書(대정장8, p.749中)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6) 上揭書(대정장8, p.756下)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둘째 보살이란 일체 상을 여이고 보리심을 발하되 색에 머무름이 없이 그 마음을 내는 자이며, 보살심이란 색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하는 마음을 지닌 자 이다. 그러므로 통달무아법자는 진시보살 “7)이다 고 한다.

7) 上揭書(대정장8, p.755下) “通達無我法者 如來說明眞是菩薩”

 

셋째 佛이란 “離一切諸相卽名諸佛”8) 일체 상을 멀리 벗어난 자를 이름하여 부처님 이라 한다.

8) 上揭書(대정장8, p.754中)

 

넷째 “如來란 온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 한다.9) 고 한다.

9) 上揭書(대정장8, p.756下)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이 경속에 차례로 설명한 인물을 보면 제10 莊嚴淨土分까지는 衆生과 菩薩에 관련된 내용을 주로 설명하고 있으나, 제13 如法受持分에서부터는 如來에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金剛經』은 전체의 흐름과 구성 면에서 논리적 체계를 유지하면서 有爲의 단계에서 점차 無爲의 단계로 깨달음을 이끌고 올바른 견해를 세우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我와 더불어 法도 집착의 대상이 아님을 깨달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 항복해야 할 마음과 밝혀야 할 마음

 

이 경의 제목에서 보듯이 ‘金剛般若로써 波羅蜜’을 행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 ‘금강반야 바라밀을 행하고자 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 경의 키 워드가 된다. 그렇다면 이 경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 하고 있는가?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第十莊嚴淨土分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須菩堤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10) 라고

하였다. 제4분에서는 보살이 머무르지 않고 보시 하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머무르지 않는 마음 즉 청정심을 내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相에 머물면서 집착하여 마음을 낸다면 보살의 청정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색에 머무는 집착이 있다면 혼탁한 중생의 마음이며,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일으키면 보살의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는 혼탁한 마음에서 청정한 마음에 이르기까지 상존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10) 上揭書(대정장8.p.749下)

 

이에 대하여 현각스님은

 

 

" 마음속에 악한 일을 생각하면 또는 마음속에 착한 일을 생각하면 이라 할 때 그 마음의 본 바탕이 어떤 상태이냐 하는 것이다. 『아함경』에는 없으나 『增支部』1.10에는 마음은 본래 청정하나 客塵이라는 隨煩惱에 오염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수행자들이여 이 마음은 光淨하지만 객진이라는 수번뇌에 오염되어 있느니라. 無聞한 사람은 이를 여실히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나는 말하노라.

이 경구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心性本淨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마음의 바탕은 본래 깨끗한데 우리가 번뇌하는 까닭은 객진이라는 수번뇌의 탓이라는 것이다. 곧 선천적인 本淨性과 후천적인 客塵性이다.11)" 

고 하였다.

11) 최현각 지음 『선학의 이해』(서울 : 불교시대사.2003)pp.352~353.

 

 

그러나 이 경 第十八分一體同觀分에서는 여래의 五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그 心眼마저도 이름뿐이기 때문에 수행에 척도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나타난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래는 肉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각스님은 “이것은 肉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에로의 마음의 重層構造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마음이 다섯 가지로 중층 되어 있다는 사실은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불교의 修道論上근거와 목적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근본적 선정관을 이해하는데도 일고의 볼 가치가 있다.”12)고 하였다. 이처럼 이 五眼설은 결국 心眼의 상태를 제시하여 수행의 근거를 마련하여주고 있지만 第二十三淨心行善分에 보면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堤”라고 하였다.

 

이처럼 항복해야 할 마음은 마치 어떤 대상이 있는 것처럼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그 머무름이 없는 본래 깨끗한 그 淸淨心을 밝혀내는 것이 이 경의 핵심이라 하겠다.

 

12) 上揭書p.341

 

 

2. 마음에 머물 바 없는 상의 실체 분석

 

가. 相의 어원 분석

 

우리가 여기에서 지금 최소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 갈 수 없는 것은 자신에게 처한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데서 온다. 그러한 이유는 스스로 만든 어리석은 생각과 잘못된 견해로 말미암아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인 Mark Epstein은 “부처님은 자기애착으로 인해 발생된 모든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만 있다면 진정한 행복은 가능하다”13)고 말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모든 고통은 자기 애착으로부터 발생되었으며,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만 있다면(如實知見) 최소한의 고통은 사라질 수가 있음을 확인 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논하고 있는 이『金剛經』의 핵심은 부처님께서 수보리를 통하여 참다운 법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실천하도록 설하고 계신다.

 

이경 序頭인 제3分에서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열반에 들게 한 자는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 이라는 相에 나아간다면(若菩薩有14)我相人相…) 그는 보살이라 말 할 수가 없다.”15)라고 했다.

 

13) Mark Epstein 지음, 최현각 옮김, 『생각은 있으나 생각하는 자는 없다』(서울 : 불일출판사, 2000), pp.65~66.
14) 여기서 有에 대한 산스끄리트는 “pravarteta”로서, pra(앞으로)+√ vac(to turn)의 동사 가정 형으로 ‘시작하다. 진행하다. 발생하다’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아간다면’으로 번역함이 옳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은 여기서 轉으로 옮겼다. “만약 보살이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 있으며 라기보다, 그렇게 장차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는 즉시 보살이 아니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15) 『金剛經』(대정장8, p.748中)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다시 말해 우리가 분명히 선하고 착한 일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큰 공덕을 지닌 보살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공덕을 지었다 하더라도 그 공덕을 지은 보살이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에 나아간다면 그는 청정한 마음을 가진 진정한 보살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좋은 공덕을 짓고서도 마음에 상이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보살이라 할 수 없을까? 이 相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구절이 이 경에서 풀어야 할 주요 과제로 등장한다.

 

일찍이 구마라집(343~413)은 이 경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원문 ‘saṃjñā'를 相16)으로 번역하였으며, 산스크리트 원전 직역에 충실하고자 했던 玄藏(600~664)은 모두 想17)으로 번역했다.

 

법산 스님은 相에 대하여

“相이란 범어「saṃjñā」의 번역으로 想이라해도 된다. 名號, 名想, 理解, 知識, 槪念등의 의미이므로 마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생각이 相으로 표기된 것이다. 이 相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한 無相․無念이어야한다. 어떤 상이라도 있으면 「卽非」, 즉 아니다. 佛․如來․菩薩․法․福德․般若波羅蜜등은 어떠한 相이 아니라 다만 방편 상 붙여진 이름일 따름이므로 「是名」이라 했다.”18)
라고 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16) 구마라집은 ‘saṃjñā와 nimitta-saṃjñāyām와 lakṣaṇa-sampadā를 각각 相으로 번역하고 있다
17) 현장은 ‘saṃjñā'를 想으로(如是命者想士夫想…),
18) 이법산, 「金剛經의 禪思想」, 『印度哲學』(인도철학회, 2002) p.37.

 

 

또 각묵스님은 산스끄리트 원전을 분석하면서

 

“본경에서 ‘saṃjñā’(相)를 단순히 인식의 차원 정도에서 이해하면 본경의 키워드인 산냐의 심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마라집이 산냐의 일반적인 한문 영역인 想으로 옮기지 않고 相으로 옮긴 것은 아주 고심한 끝에 내린 결단이라 본다. 본 경에서 그냥 想정도의 의미로만 산냐를 보기에는 더 심오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 단순히 인식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마음을 궁글리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마음에 어떤 모양(相)을 굳게 그리고 만들어 가지고 있는 상태를 산냐로 파악한 것이다. 그 마음에 굳게 그리거나 만들어 가지
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다름 아닌 이념, 이상, 관념, 고정관념, 경계 등으로 부를 수 있다.”19)

고 하였다.

 

이처럼 相은 단순한 어떤 형태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속에 그리거나 만들어진 생각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영어로 saṃjñā(相)의 번역은 notion, perception,apperception20) 으로 옮기고 있으며, 法相이란 것도 ‘any
object’ 즉 어떤 대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경에서 되풀이해서 설명하고 있는 相에 ‘我,人,衆生,壽者 + 相’21)을 각각 붙여 四相을 만들며,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의 문제인 ‘我相(ātma-saṃǰñā)’를 영어의 번역으로 ‘the notion of a self’로, 또한 다른 영어 번역자도 我相에 대하여 “an ego entity”22)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논하고 있는 我相은 自我를 소중히 여기거나 간직하고자하는 욕망의 我, 생사를 초월해 영원히 존재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我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有我相人相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즉 相에 머물러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19) 각묵, 『금강경 역해』(서울 : 불광출판사,2003).p.77.
20) The Diamond Sutra, Translated by Adword Conze, 2001.P.18.
“Notlon of a sign : ”Notion is saṃjñā, also “perception”
21) 四相의 相은 산스끄리트로 saṃǰñā 이다. saṃ의 함께와√ǰñā의 알다가 합한 명사이다. 어원으로 보면 ‘함께 인식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음에 어떤 모양을 만들어가지고 있는 상태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22) The Diamond Sutra, Translated by A. F. Price & Wong Mou-lam, Boston : Shambhala, 1990. p.19

 

 

나. 相의 실체 확인

 

이 경에서 강조 되고 있는 상의 실체를 어떻게 확인 할 것인가?

 

부처님은 이러한 고정관념의 생각으로 ‘我’에 머물고 있는 我相의 실체를 보시행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소유를 다른 이에게 베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보시를 행함이 쉬운 일이 아니면서도, 보시를 행함에 있어 ‘無住相布施’를 행하여 보시를 했다는 相에 머물지 않는 것이 진실된 보시라는 것이다. 만약 보시를 행하되 無住相布施를 행하지 않고, “마음에 상을 취하게 되면 곧바로 아인중생수자상에 집착 하게 되다.” 23)) 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23)『金剛經』(대정장8, p.749中).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이처럼 마음속에 어떤 相즉 생각이 이미 형성 되어 마음 속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점차 自我에 대한 執着 (ātma-grāha, 영어로 grasp and hold on : 움켜잡다)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 한 생각의 집착이 마음속에 지속 된다면 “若樂小法者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24) 하여서, 마치 그것의 세계가 실체인 것처럼 마음속에 한 見解(dṛṣti : √dṛś →to see의 명사로 見)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어떠한 妄念된 견해를 가지고, 그것을 움켜잡고, 자기의 것으로 견해를 피력하게 된다면 실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相으로 발전되어 버린다.

 

각묵스님은 “산냐(相)가 있으면 그것을 국집하고(grāha) 그것을 법으로 진리를 세우게 된다(dṛṣti,見). 다시 말해 산냐가 자리 잡게 되면 그것은 강한 의도(saṅkhāra, 行)를 수반하게 된다.”25)고 하고 있다.

 

David Brazier는 보살의 상징인 자비 행에서
“일반적인 사랑은 자신에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들이나 사람들을 위해서 가지는 사랑이다. 대자비(Great love)는 소유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이다.”26)고 한 것은 아상을 뛰어넘는 무주상의 보시행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24) 上揭書, (대정장8, p.749上).
25) 각묵, 『금강경 역해』(서울 : 불광출판사,2003).p.141.
26) David Brazier. Zen Therapy. New York : John Wiley & Sons 1966.p.201.

 

이처럼 보살의 행은 무주상이기 때문에 相을 세우지 않는다. 이 경에서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도 즉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 하여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이다.”27) 이라고 했다. 곧 부처님은 아상인상중생상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상은 즉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즉 상이 아니다. 다만 이름하여 말할 뿐이다.

27) 『金剛經』(대정장8, p.750中)

 “所以者何  我相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위에서 보듯이 상에 머물지 말고, 상의 집착에서 뛰어넘을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마음속에 상을 가까이 한다면 곧 머물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데, 色에 머물러 마음을 일으키지 말며, 聲香味觸法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서 마땅히 머물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28)고 하였다.

28) 『金剛經』(대정장8, p.749下) “是故  須菩堤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처럼 모든 보살은 색성향미촉법도 머물러야 할 실체가 아님을 알고서, 그러한 상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보살이라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그곳에 마음을 머물게 된다면 苦는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상의 실체는 없다는 것인가?
第17 究竟無我分에서 “我도 法도 없다는 것을 통달한 보살은 여래께서 진실한 보살이다.”29)이라고 했다. 즉 我에도 法에도 상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이름하여 부를 뿐이라는 것을 여실지견 하여야 한다. 이것의 근원을 알고 행한다면 그를 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를 성취한 자로 볼수 있다.

29) 『金剛經』(대정장8, p.755下) “佛說一切法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明眞 是菩薩”

 

이처럼 실상을 바로보고 바로 안다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Mark Epstein은 고뇌를 벗어나는 길은, “苦의 원인이 바로 그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알도록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뇌를 받고 있는 그 사람의 생각이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속박을 받기도하는 어떠한 세계를 결정 한다. … 올바르지 못한 인식은 세계를 잘못 보게 하여 고통을 계속 생기게 한다.”30)고 하였다.

 

이처럼 『金剛經』은 상의 실체를 바로 보게 함으로써 苦에서 벗어나 涅槃의 기쁨을 얻게 한다.

 

30) Mark Epstein저, 현각옮김 (서울 : 불일출판부 2000).p.31.

 

 

3. 마음을 항복 받는 훈련

 

이 경의 初頭善現起請分에서 두 번째 질문인 ‘云何降伏其心’에 대한 훈련을 알아보고자 한다.

 

‘降伏其心’에서 산스끄리트 원어는 ‘cittaṃ pragrahītavyam’ 로서, citta는 √cit(to think)에서 파생된 명사로 우리의 사고작용, 생각 일반을 뜻하며, pragrahītavyam은 pra(앞으로) +grah(움켜잡다)의 과거분사이다.

마음의 사고 작용이나 생각을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움켜잡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구마라집은 降伏으로, 현장은 攝伏31)으로 번역했다.
영어로는 단순히 ‘control their thoughts’32)한다고 했다.

 

31) 玄獎譯『第九能斷金剛分』(大正藏7, p.980上) “云何攝伏其心”
32) The Diamond Sutra, Translated by A. F. Price & Wong Mou-lam, Boston : Shambhala, 1990. p.18.

 

 

가. 보시에 의한 마음 조복 훈련

 

착한 일은 누구에게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특히 남에게 베풀어주는 보시 행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을 부처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고, 짐직 마음속에서 남에게 베풀어 준 그것에 머물러 있다면 그 머물고 있는 아상을 조복 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보시에 관련된 사례들을 통해서 마음을 올바르게 다스리고자 하였다.

 

첫째 布施를 바르게 하는 훈련이다.

 

“수보리여 법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 형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해도 안 되며 … nimitta-saṃjñāyām(겉모양의 상)에도 역시 머무르지 않는 그러한 보시를 해야 한다”33)고 맨 먼저 참다운 보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의 옮김은 구마라섭은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라 하였으며, 현장은 ‘不住於事 應行布施’라 하였다. 이 글은 어떤 경계 즉 六境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33) 『金剛經』(대정장8, p.747中)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에서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의 원어는 'vastu-pratiṣṭhitena dānaṃ dātavyam'으로서. ‘vastus’는 √vas(to dwell)에서 파생하여 ‘어떤 상태로 살아가다, 마음속에 남아있다.’이며, ‘pratiṣṭhitena’는 무엇에 머무르거나 국집하는 것을 나타내며, dānaṃ 는 보시를, dātavyam은 해서는 안 된다가 함축되어 있다.

 

또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에서 구마라섭은 相의 어원에서 ‘nimitta-saṃjñāyām’을 相으로, 현장은 相想으로 옮기고 있다. nimitta는 ni(아래로) +√mā(to measure)의 명사로 ‘결정된 크기나 모양을 가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모양, 외관, 모습’ 등을 뜻하기 때문에, 我相(ātma-saṃjñā)에서 말하는 相(마음속에 굳게 그리거나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구체적 대상이 아닌 일반적인 겉모양’의 相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보시를 행하되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34)고 하였다. 보시를 행하되 행한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34) 『金剛經』(대정장8, p.749上)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우리는 가끔 적게 보시하고도 몇 배 이상 그 대가를 받고자 한다.

 

둘째 이 경의 四句偈를 爲人演說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훈련이다

 

경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 동안에 보시공덕을 쌓는 것보다 이 경을 듣고 신심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 크다.”35)고 하였다. 또 “보살심을 일으킨 자가 이 경을 지니고 내지 사구게 등을 수지 독송하여 다른 이에게 연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뛰어나다.”36)고 하였다.

위와 같이, 여러 겁 동안 남에게 단순히 베풀어 준 공덕보다 무주상보시를 행한 보시 공덕이 더 높다고 한 이 경전의 근본 뜻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한 훈련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남에게 이 경이 지향하고 있는 그 뜻을 연설 하거나, 이 뜻을 깨닫게 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여 법보시의 훈련이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36) 上揭書. (大正藏p.756.上)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

 

 

나. 법의 실체를 보는 훈련

 

첫째 부처님의 形相을 바로 보는 훈련이다.

 

第五如理實見分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고 그에 대한 답을 행한다. 여기서 단순히 “부처님께서 32相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37)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는 특별한 상을 구족하여 갖추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여 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래의 상은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38)라고 하였다.

 

第二十離色離相分에서 “부처님은 색신의 모습이 구족 되어 있으나 그것만으로 여래로 볼 수 없다.”39)

 

37) 上揭書. (大正藏p.749.上)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不可 以身相得見如來”
38) 上揭書, (大正藏p.749.上)
39) 『金剛經』(대정장8, p.749.中) “佛可以具足色身  見不不也”

 

그러므로 第二十六法身非相分에서 三十二相이 구족한 것만을 여래라 할 수 없다. 법신은 항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으로 부처님을 보아야하며, 법의 본성은 분별로 알아지지 않기 때문에 법은 분별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第二十九威儀寂靜分에서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40) 라. 즉 “여래라고 일컫는 것은 온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한다.”고 하여 相으로써 여래를 찾지 말라는 것이다.

40) 上揭書p.756上. “佛加以具足色身見不”

 

위에서 보았듯이 “삼십이상이 구족한 상만으로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로서, 상응부 경에 잘 나타나 있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왁깔리 비구를 찾아가신 세존께서 마지막 설법에서 상의 집착을 여위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만하라. 왁깔리여, 이 더러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41)고 하였다.

41) 상응부경( s22.87)

 

또한 마지막으로 법이라는 相마저 일으키지 말고 諸法을 알고, 보고 확신하라고 하였다.

第三十二知見不生分에서 “아뇩다라샴약삼보리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일체 법들을 알아야하고, 보아야하고 믿고 알아야 하며, 법이라는 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야 소위 법이라고 하는 相은 법상이 아니며 다만 이름이 법상이다.”42) 고 하였다.

42) 『金剛經』(대정장8, p.749.中).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應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堤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앞에서 ‘법을 보는 자 여래를 본다.’고 하였지만 그 법이라는 相마저도 떨쳐버려야 진정으로 여래가 가르친 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인 것이다.

 

 

4. 보살이 일으키는 보리심의 훈련

 

이 경은 보살이 최상승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훈련의 지침서 이다. 이러한 지침은 보살이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만 될 일”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가. 보살이 해서는 안 될 일

 

이 경에서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첫째 “菩薩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보살이 아니다.”

즉 보살은 결코 상을 일으키는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을 일으키는 순간에 상을 집착하기 때문에 보살의 마음을 지닐 수가 없다.

 

둘째 “마음에 상을 취하게 되면, 아인중생수자를 집착하게 된다.”

즉 상을 취하면 바로 집착심이 일어나 아인중생수자가 되기 때문에 상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如來의 신상을 32상으로 보아서 그 상을 여래라고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32상은 상이 아니고 이름이 32상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32상의 相만을 가지
고 여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 3가지 사례는 이 경에서 보살이 취해서는 안 될 대표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상을 일으키지 말며, 상을 마음에 취하지도 말며, 세존의 빼어난 32상을 여래라는 견해를 세우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나. 보살이 깨달아 지녀야 할 일

 

첫째 “菩薩은 법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보살이 법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행한다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無住相보시를 행해야 한다. 저 옛날 달마가 梁武帝와의 대화에서 ‘布施功德이 많겠는가? 하니, 無所功德이라’ 고 한 것이나, ‘알지 못 한다(不識)’고43)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대목에서 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다.

43) 柳田聖山著. 양기봉역 『초기선종사Ⅱ』(서울 : 김영사, 1992)p.68

 

둘째 “법문이란 뗏목과 같은 것이라고 깊게 아는 자들은 법들도 반드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임에랴” 고. 무슨 이유인가하면, 보살은 법을 집착해서도 안 되며 법이 아닌 것을 집착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셋째 “보살은 일체의 상을 버리고서 위없는 깨달음에 마음을 내어야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六境의 형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하며, 법에 머무는 마음, 비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또한 어떠한 것에도 마음이 머무는 것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체 상을 떠남으로써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가리왕에게 신체가 찢기여도 화가 나지 않았다.”44)는 것이다. 이 가리왕에게 신체가 찢기어도 화를 내지 않았던 행은 이름하여 인욕바라밀이며, 이러한 바라밀은 여래가 설한 최상의 바리밀이다고 하였다.

또한 보살이 一切相을 떠나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면 어떤 사람이 캄캄한 방에 들어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에 법을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면 눈 밝은 사람이 있어 태양이 밝게 비치는 곳에서 여러 색깔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45)고 하였다.

44) 上揭書p.749.下“須菩堤  如我昔爲歌利王  豁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
45) 上揭書p.749.下“若菩薩  心住於法  以行布施  如人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於法  以行布施  如人入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이처럼 일체 상을 떠나서 최상승의 보살행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넷째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은 어떤 법의 소멸이나 단멸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46)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근기가 약한 사람은 ‘법이 없다고 하니 그럼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라고 하다면, 그 또한 단멸의 상을 가지게 됨으로 단멸이라는 상도 가지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46) 上揭書p.749.下“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於法 佛說斷滅相”

 

다섯째“어떤 사람에게 법을 가르쳐주면서도 내가 가르쳐 준다는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 하여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47)고 하고 있다. 매 순간 순간 마음을 일으킬 때마다 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그곳에서 머물지 말아야한다.

47) 上揭書p.749.下“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물론 여기서 주장은 相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중복하고 있다. 그러나 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5. 相의 執着을 뛰어 넘는 마음의 치유 사례

 

가. 마음 다스림에 의한 심리치료

 

앞 장에서 보살이 ‘행해야 할 행과 하지 말아야 할 행’에 대해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행의 실천이 곧 최고의 보살승에 나아가는 것이며, 마음을 조복 받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經을 수행지침으로 삼았던 六祖慧能은 『六祖壇經』에서 “나의 법문은 옛부터 모두 無念을 세워 宗을 삼고, 無相으로 體를 삼고 無住으로 근본을 삼는다.”48)고 하였다. 이 無念․無住․無相의 이치는 相(saṃjñā)의 ‘집착(graha)’에서 벗어나는 般若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相(saṃjñā)에 대한 ‘집착(graha)’은 無明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아상과 법상의 집착에서 뛰어넘는 길이 이 경의 핵심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에서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相에 대한 집착’은 사람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 보고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무명으로 인하여 아상을 일으켜서 ‘나’라고 하는 존재의 틀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自我라는 틀 속에 집착 되어 또 다른 견해를 만들기 때문에 ‘我相(atma-saṃjñā)’ 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끝임 없이 점검되어 간다.

 

48) 退翁性澈편역, 『敦煌本六祖壇經』(경남 : 장경각,1988),p.54.

 

앞에서 보았듯이, 부처님께서 ‘我와 法의 집착에 머무르지 말아야 진실로 그는 보살이 된다.’고 하였듯이, 보살승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보살은 어떤 분인가?

 

이는 我의 본질이 無我임을 깨닫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는 無我이므로, 보살은 보시를 행하되 색성향미촉법의 六境의 대상에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게 되므로 법마저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인욕바라밀을 행하 실 때 ‘가리왕에게 신체가 찢기어 질 때도 응당 성난 마음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체 상을 버렸기에 내가 없는 즉 무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이 마음을 조복 받는 수행이요 훈련이라 볼수 있다.

 

Mark Epstein은 이러한 무아의 사실을 정확히 이해될 때 진정한 자신의 본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해 자신의 본래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미 불완전한 자아를 보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세상에서 효과적이고 자발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중요한 핵심에 대해 진실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를 가장 실재적으로 느끼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서양의 분석 학자들을 사로잡는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체험은 불교에서 말하는 無我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49)고 하였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는 없으며, 본래모습은 無我임을 정확히 이해를 하고 자신의 마음을 계속해서 지켜본다면 이미 취한 상이나, 앞으로 취할 상에 더 이상 집착하는 마음은 사라진다.

 

相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훈련은 과거에 경험 했던 생각에 머물지 아니하고 현재 지금의 자신을 돌이켜 봄으로써 나의 존재가 무아임을 확실히 통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더 이상 거짓된 自我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이 처럼 ‘마음에 상을 취하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는 상에 집착’하지만 마음에 일체 상을 버리면 곧 진정한 자신은 ‘무아상무수자상무중생상무수자상’이 되기 때문에 마음에 상이 머물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지니게 되고 온전한 자기로 돌아오게 된다.

 

49) 현각옮김, Mark Epstein 저. 『생각은 있으나 생각하는 자는 없다』(서울 : 불일출판사, 2000).p.100.

 

 

심리치료자인 David Brazier는 菩薩을 Therapist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佛敎의 전문용로서, 菩薩은 그에 노력으로 남을 도와주면서도 깨달음의 길로 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일은 therapist로서 이상적 개념이다. 보살은 고통을 지닌 사람에게 그 고통의 실상을 보여주거나 보살펴주는 이를 말한다. 보살의 수행은 남을 도와주는(無住相布施)것이다.

심리치료자도 이와 같이 그 자신의 인격성장을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 보살은 아직도 완전히 깨달음 얻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가장 성숙된 심리치료자도 사람의 문제를 다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성숙된 치료자나 보살도 그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욕구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만, 남을 도와주는 일에 있어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50)

50) David Brazier. Zen Therapy. New York : John Wiley & Sons 1966.p.52.

 

위에서 보듯이 보살은 아직도 깨달음의 길로 가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남의 고통을 도와주는 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지는『金剛經』에서 “應無所住 行於布施”라는 설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보살이 왜 상(saṃjñā)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보살이 응당 보시를 행하되 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51)고 하였다. 왜 그 공덕이 가장 큰 것일까?

51) 『金剛經』(大正藏8 p.749.上)

 

David Brazier는 “남을 도움으로써 가장 큰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 정신적 성장을 얻는 것이며, 정신적 성장을 스스로 행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남을 돕는데 있다.”고52) 하였다.

 

보살이 돕는 布施에는 三輪이 淸淨해야 한다고 한다. 주는 이의 마음과 받는 이의 마음이 서로 깨끗해야 하며, 전달되는 물건마저 순수 할 때 그 보시는 참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선한 공덕은 주거나 받거나 하지만 경계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서 ‘我相즉 ego’의 집착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다.

 

이러한 수행의 결과는 거짓되고 번뇌에 가득한 마음을 참 마음으로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David Brazier는 ‘禪수행의 기술을 통해서

 

“禪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한 번 더 행위에 대해 음미하는 훈련을 하게한다.

…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지나쳐버린 일, 남의 입장 보다는 자신의 ego를 강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행동을 했는지 지켜보는 것이다.”53)

53) 상게서. pp. 183~189.

 

고 하면서 참 마음을 찾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생각들을 되새겨보고 지켜보는 훈련을 한다면 마음속에 머무는 相들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은 부처님께서 수보리와의 문답 속에서 여러 번 나타난다.

예로서.

 

如來(佛) 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如來說  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如來說  忍辱波羅蜜  卽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등으로 『卽非… 是名…』이라 표현하고 있다.

‘여래께서 설한 A는 …이 아니다. 이름이 … 이다.’고 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법산스님은 “이름 지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생각으로 지을 뿐 본래 어떤 이름과 모양의 일정한 상이 없으며, 다만 방편 상 붙여진 이름일 따름이다.”54)고 했다.

이처럼 마음속에 법에 대한 견해를 세우지 말며, 법이라는 상을 일으키지도 말고 일체 법을 알고 보아서 확신을 가져야 참다운 보살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이 경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에 머무는 상을 가만히 관찰(正念mindfulness)하여 無我法을 몸소 체득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갖고 있던 인식(想, saññā)과 견해(見, diṭṭhi)를 버리고 나면 아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으며, 법상도 없어진다.

 

이러한 수행이 이루어 질 때 참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갈 수가 있으며, 몸도 더불어 경직됨이 없어지고 이완 되어 건강한 육체로 나아가게 된다.

 

54) 이법산, 「金剛經의 禪思想」, 『印度哲學』(인도철학회, 2002) p.39.

 

 

나. 집착에 갇힌 자의 심리치료 응용 사례

 

이 『金剛經』에서 보여주고 있는 과제는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착한이가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고자 그 마음을 낸자’의 수행에서 부딪히는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는가”에 있다.

 

그 문제 해결의 기본은 ‘我相과 法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般若波羅蜜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있다.

 

이 경은 ‘일체 상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면 곧 부처님이라 이름 한다.’고 하였으며, 相에 대한 집착은 곧 잘못된 견해를 만들며, 그 견해로 말미암아 상에 탐착하는 중생의 원인이 되며, 또한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도 되기 때문에, 집착에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般若波羅蜜을 성취하게 된다.

 

위에서 보듯이 철저히 ‘四相을 뛰어넘고 無我와 無法相을 성취하여 我相에도 法相에 머무는 바가 없이 布施를 행한다면 부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진실보살이라 이름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보살은 아상과 법상에서 벗어나 무주상 보시를 행할 것을 제시한다.

 

선 심리치료를 연구한 David Brazier도 심리치료에서 집착을 뛰어넘는 空(shunya)의 실천을 강조한다.

 

“앞 장의 참회에서 보았듯이, 종교적인 신성한 작업은 마치 therapist에게 있어서 자아를 포기하는데서 시작한다. 禪은 therapist들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도록 한다. 가장 훌륭한 therapist는 철저히 비우는데 있다.

비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ego를 비우는 것이다. Shunyata(emptiness)는 terapist들이 내담자나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해서 완전하게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therapy는 내담자로 하여금 shunya가 되도록 이끌어 준다.”55)

 

이처럼 상담치료 과정에서 therapist는 철저히 마음을 비워야 하며, 내담자들로 하여금 相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이 경 第十八分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며,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다.

왜냐하면, 과거심도 얻지 못하고 미래심도 얻지 못하며 현재심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56)고 하고 있다.

 

이처럼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집착 할 마음마저 없다. 그러나 마음의 집착은 여전히 우리에게 일어나며, 그 집착의 강도에 따라 고통도 함께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에서는 我와 法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실존의 심리적 고통문제를 해결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대승 불교 권에서 크게 유통되고 있다고 하겠다.

 

55) David Brazier. Zen Therapy. New York : John Wiley & Sons 1966.p.205.
56) 『金剛經』(大正藏8, p.755下)

 

 

특히 이 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집착의 문제를 “執着測度” 라는 도구를 통해서 ‘집착지수와 심리적 고통문제’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그 고통을 해결하여 주는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실례를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1) 과거 경험에 집착하여 현재성의 결여로 고통 받고 있는 내담자의 심리치료 사례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군 생활 적응에 힘들어하는 병사들에 대해 ‘집착 척도의 도구’를 통해 집착의 정도를 먼저 알아보았다. 집착척도가 높은 병사들에 대해서 개별 면담을 통해 상담을 실시했다.

 

집착 척도지수 도구를 고안한 김정희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발표하고 있다.57) 이 집착 척도는 “현실성 결여, 경직성, 의존성”에 대해 각각 9문항씩 구성하여 그 척도를 측정하고 있다..
집착도의 측정 도구는 다음과 같다.

 

57) 김정희, 「집착척도의 타당화」『한국심리학회』(한국심리학회지 : 상담 및 심리치료, 2004).p.638.

 

 

집착척도 심리검사

 

(검사 안내 : 다음 문항을 잘 읽으시고 문항내용이 평소의 자기 자신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지를 체크해 주십시오. 문항내용이 자신과 전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전혀 그렇지 않다’에, 매우 일치하는 경우 ‘매우 그렇다’에 체크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례 1)


과거의 아픈 경험의 굴레에서 집착하여 현재성 결여로 고통 받는 한 병사의 심리상담

 

 

※ 집착 척도기준 : 건강(1〜67), 이상(68〜121), 매우이상(122〜135)

 

상기 집착 척도자의 지수가 86점으로 나타나 전체 지수는 크게 높지 않지만, 1〜9항 현실성 결여 척도에서 42점(10〜18항 유연성 척도는 25점, 19〜27항 의존성 척도는 19점)으로 특히 높게 나타난다.

 

군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병사의 상담 결과, 그는 최근 친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여자 친구와의 헤어짐으로 말미암아 지난 과거의 생각에 얽매여 심각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이 병사에 대한 심리치료는 과거의 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현재를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먼저 이 병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안정을 시킨 후, 친구의 죽음 문제에 대해서 生者必滅의 이치를 보여주기 위해 먼저 국립묘지에 함께 가면서,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도록 대화를 하였다. 또한 친구와의 헤어짐에서 오는 고통은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보살이 법에 머무름에 없이 보시하듯이 인연을 억지로 만들 수 없다는 이치를 밝혀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자신에게 이익 되고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찾아보았다.

 

친구로부터 집착된 생각을 비우기 위해, ‘생각이 일어나는 동기’를 조용히 알아차려봄으로써 자신의 현재 여기의 상태로 돌아옴을 깨닫도록 했다. 과거의 생각은 이미 지나간 것이며 미래의 생각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므로 과거의 시간 속에 얽매여 있는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리게 했다. 대화를 진행하면서 자신에게 항상 불만하던 우울증적 스트레스를 자신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졌음을 알아차릴 때 많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존재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자신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된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존재가 무아임을 알아차릴 때 밝은 웃음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었다.

 

 

(2) 지나치게 경직된 마음으로 고통 받는 병사의 심리치료 사례 2)

 

문 항 /  전혀그렇지않다①  그렇지않다②  보통이다③  그렇다④  매우그렇다⑤

 

1. 잊고 싶지만 자꾸 떠오르는 과거 기억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① ② ● ④ ⑤

2. 과거의 괴로운 생각이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① ● ③ ④ ⑤

3. 잊고 싶은 과거 기억 때문에 지금의 기분이 좌우된다.            ① ② ● ④ ⑤

4. 지금 하는 일에 열중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기억이 자꾸만      ① ② ● ④ ⑤

    떠오른다.

5.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한다.                     ① ② ● ④ ⑤

6. 현재 내 행위에 영향을 미치 는 것은 주로 과거 경험이나        ① ② ③ ● ⑤

   기억이다.

7. 예전의 나쁜 기억 때문에 지금도 불편한 사람이 있다.             ① ② ③ ● ⑤

8. 지금 해야할 과제에 몰두하기가 어렵다.                               ① ● ③ ④ ⑤

9. 결과에 대한 걱정 때문에 과제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다.      ① ② ● ④ ⑤

10. 미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든 계속 밉게 보인다.                  ① ② ③ ● ⑤

11. 한 번 미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말해도 계혹 밉       ① ② ③ ● ⑤

    게 보인다.

12. 싫은 사람의 행동은 모두 싫게 보인다.                               ① ② ③ ● ⑤

13.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도 여전히 싫다.  ① ② ● ④ ⑤

14. 싫은 사람은 너무 싫고 좋은 사람은 너무 좋다.                    ① ② ③ ● ⑤

15. 나는 좋은 사람과 싷은 사람을 분명히 구분한다.                  ① ② ③ ● ⑤

16. 나는 싫은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다.                                   ① ② ③ ● ⑤

17. 싫은 사람을 대할 때와 좋은 사람을 대할 때의 나의 태도는    ① ② ③ ● ⑤

     정반대이다.

18. 나는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편이다.                                    ① ② ● ④ ⑤

19. 내 일을 내 스스로 결정해 나가기 보다 주위 사람들의 권       ① ② ● ④ ⑤

     유에 따른다.

20. 일을 할 때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① ② ③ ● ⑤

21. 무엇을 평가할 때 내 의견보다 나에게 중요한 다른 사람        ① ② ● ④ ⑤

    의 의견을 우선시한다.

22. 내 판단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판단에 지나      ① ② ● ④ ⑤

    치게 좌우된다.

23. 다른 사람들이 반대의견을 야기하면 내 경정을 바꾼다.         ① ● ③ ④ ⑤

24. 진로를 결정할 때 부모님이나 친구의 권유에 따른다.            ① ② ● ④ ⑤

25.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많이 쓴다.                 ① ② ● ④ ⑤

26. 누군가 나의 일을 대신 결정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① ● ③ ④ ⑤

27. 사람들의 동의나 인정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① ● ③ ④ ⑤

 

 

위 병사의 심리척도는 보통장병 보다 집착 척도가 높게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직성(9~18)에 대한 측정지수가 34점으로 유난히 높다.

 

이 병사와 상담한 결과 특히 어린시절 1남의 외동아들로 자라서며, 아버지가 직장일로 장기간 출장을 가며, 주변에 친척들 없이 외롭게 자랐다. 또한 중학교 때 아이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등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기억나는 친구의 이름을 말했을 때 2명만을 말했다. 어릴 때 자주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에게 가끔 이런 친구들만 어울러 지내도록 설득했으며, 음식도 어머니가 좋아하는 편식을 강요당했다.

 

이런 까닭에 이 병사는 자신이 말 할고 싶은 언어를 잘 표현하지 못하여,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지를 못했다. 또한 동료들이 다가오면 자신과 어울릴 수가 있는지를 빨리 속단하고 더 이상 동료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다. 이러한 행위는 경직된 사고의 틀은 점점 굳어가게 되었다.

 

이 병사와의 상담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과거로부터 경직되어 있고 고착 되어 있는 지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다. 특히『金剛經』에서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의 個我의 相을 경계하였으며,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의 정적 見解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위 병사처럼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틀에서 동료나 사물을 보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의 아픈 상처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를 원상회복 시켜주는데 관심을 가져야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은 다른 이를도와주는 자비행(보시를 통해서)에서 빨리 깨달을 수가 수있다.

 

이 병사와 함께 장애인 요양 시설에 가서 하루 동안 봉사를 했다. 처음에는 장애자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던 행동이 점차로 따뜻하게 행동이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이 도움 받기 보다는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마음의 벽이 무너지면서 한결 유연해지면서 자신을 새롭게 보기 시작 한다.

 

이 병사뿐만 아니라 최근 전입해 오는 이등병들에 대해 인성검사를 실시해보면 20% 정도는 경직성 부분이 유난히 높게 나타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핵가족과 더불어 컴프터 생활문화와 복잡한 도심생활에서 오는 폐쇄적 주거환경과 단조로운 인간관계에서 오는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병사들은 남을 배려하고 수용하거나 땀을 흘리면서 몸으로 부딪히면서 남에게 도움을 주었던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할 기회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체생활적응에 어려움을 느끼며 더욱 위축되어 자기의 틀 속에 함몰된다.

 

이러한 병사들에게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자아 존재를 진단하기 위해 성격검사 등을 통해서 보완 해 줄 수 있지만, 『金剛經』에서 제시한 거짓된 자아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하여,자신의 존재가 有我的아니라 緣起에 의하여 구성된 無我的존재임을 깨닫도록 하여, 무주상 보시행을 실행하게 함으로서 건전한 젊은이로 거듭 태어 날 수 있게 한다.

 

 

Ⅲ. 結論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金剛經』은 최고의 경지인 “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을 발하기 위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個別相에 머물지 않으며, 아견인견중생견수자見의 개별 견해의 집착’에서 뛰어넘도록 하고 있다.

 

有我에 집착된 사고의 체계를 無我의 세계로 이끌어 냄으로서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사고체계를 전체성과 연결성으로 확대하여 “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을 發하게 함으로서,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보살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다시 말해 연기적 지혜로서 자아의 實相똑바로 보게 함으로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굳어져 있던 견해를 떨쳐버리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되돌아가도록 마음 다스림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은 ‘我相인상중생상수자상’의 相에 대하여, ‘我見인견중생견수자견’의 見에 대하여 볼 수 있었다.

 

특히 구마라집이 번역한 이 ‘相’은 五蘊에서 가르치고 있는 생각과 관념을 표시한 想이 아니라 형상을 포함한 ‘相(saṃjñā,lakṣaṇṣ)’임을 볼 수 있다. 이 ‘相’은 고정불변한 ‘相’이 아니라, 마음에 그리거나 만들어 가지고 있는 거짓된 형상의 ‘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相은 我相이 되며, 法相이 되어 마음속에 고정된 틀로서 집착되어 마음에 머물게 된다. 이 마음속에 고정된 집착의 틀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경의 키 워드이다.

 

이는 곧 중생심에서 菩薩心으로 화현 하도록 한다. 다시말해 보살은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여 거짓된 相에 머물지 않으며, 무주상으로 보시하기 때문에 我相과 法相의 집착에서 벗어나 열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은 철저히 我가 본래 無我이며 法이 본래 無相임을 깨달아서 참된 보시행에 대한 훈련으로서 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을 얻도록 하고 있다.

 

무주상 보시에 대한 훈련은 고정불변한 실체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보시했다는 아상을 버리게 되며, 동시에 마음을 텅 비우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집착된 견해로부터 벗어나 현실의 존재실상(諸法實相)을 如實知見하게 한다. 이러한 如實知見의 菩薩行은 어떠한 보시 복덕보다 그 공덕이 헤아릴 수가 없기 때문에 『金剛經』은 四句偈만이라도 널리 펴는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경의 가르침은 일체상을 뛰어넘고 계신 분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고 일체상을 뛰어넘어 보리심을 발한 자를 보살이라 하였듯이, 모든 상의 집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이는 곳 마음 다스림이 되며, 번뇌로부터 집착된 그 마음을 항복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이 『金剛經』은 잘못된 마음,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는데 있어 더없이 좋은 경전으로 생각된다.

 

본문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이 경을 응용하여 번뇌의 집착에서 고뇌하는 이를 돕는 한 방법으로서 “집착 심리척도” 를 활용하여 집착척도가 높은 사람에게 직접 치료해 봄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金剛經』의 수행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밝게 하고 평화롭게 하여 행복한 삶을 영유 할 수 있도록 하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더욱 건강한 삶을 유지 할 수 있게하는 좋은 경전임을 살펴보았다.

 

 

◎국문요약문

 

불경의 대부분은 무명에 의하여 어리석은 마음을 지혜로운 밝은 마음으로 깨달아 나아가도록 하고 있다. 특히 이『金剛經』은 최상의 깨달음의 마음 즉 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을 일으킨 사람에게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항복 받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대답해주고 있다.

 

먼저 잘못된 마음을 항복 받는 수행이란 무엇인가?
我의 실체를 바로 아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리석은 我는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에 집착하여 我의 실상을 바로보지 못한다. 만약 마음이 깨끗하고 청정하여 지혜롭다면 모든 상의 실체는 고정된 相의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我의 실체를 통달한다면, 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無壽者相이 되고, 無我見無人見無衆生見無壽者見이 되어 진실된 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정된 상의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의 말미에 “一切有爲法은 如夢幻泡影이며, 如露亦如電이기 때문에, 應作如是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철저히 我의 相이 無我임을 깨닫는 수행이다.
그 다음 어떻게 그 마음을 바르게 머무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我의 실체가 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의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면 모든 중생을 차별 짓지 않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보시를 행하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게 되며, 머무는 바 없는 자유자재의 보시행은 그 어떤 복덕 보다 크다는 것이다. 보살이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나아가는 길은 모든 경계 즉 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보살은 일체의 相에 초월하여 머무르기 때문에 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을 얻게 된다.
이처럼 이 경의 핵심은 無我를 깨달아 “應無所住而生其心”을 통해서 보살행을 함으로써 최상의 깨달음의 마음 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을 얻는다.

 

이 최상의 깨달음의 마음은 어리석은 마음을 멀리 여이고 지혜로운 마음이 되어 언제 어디서나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 보살이 되는데 있다.

 

우리가 어리석음으로 방황하는 것은 위 경전에서 보았듯이 我의 실체를 바로보지 못하고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에 집착하여, 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위의 논문에서 이러한 사례를 분석하면서 얻은 결과는 자기 자신을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생각에 유난히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마음에 큰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경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我의 실체인 無我를 깨닫고 마음에 집착을 여인 다면 허상에 얽매여 고통 받는 이들의 마음을 치유 할 수가 있는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경은 적어도 최상의 깨달음은 얻도록 우리를 인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리석은 마음을 지혜로운 마음으로 나아가게하고, 집착에 의해 고통 받는 이들을 마음을 치유하는 데는 좋은 경전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국문핵심어
我相, 我見, 有我와 無我, 無住相布施, 着我見, 執着과 執着尺度,

 

 

◎영문요약문

 

A Study of 'Thought Control and Psychological Therapy in the Diamond Sutra'

 

By Mal hyan, Kim

 

Most Buddhist Sutras help awaken people with ignorant and foolish minds to have bright and enlightened minds. Especially this Diamond Sutra clearly addresses how a man who reached the utmost enlightenment by setting out in the Bodhisattva-vehicle(阿耨多羅三藐三菩堤) can stand, progress and control his thoughts.

First and foremost, how we control our thoughts?

It is critical to know the reality of a self. A foolish self who has attained the sign of a self or of a being, or the sign of a living soul or of a person grasps to the perception of these even though that is indeed no perception. He simply fails to see the reality of a self. With a perfectly enlightened mind, you come to realize that true perception is no perception. Therefore, if you master the true perception of a self, you com to have no sign of a self, a being, a living soul or a person and then have no perception of all these and become a true Bodhi-being. It is because there is no such things as a reality of a fixed sign.

Thus, to control our thoughts, we must practice to realize that the sign of a self is indeed no sign(無我).

Now, how can we practice to stand?

If your perception of a self is freed from the attachment of all the perceptions mentioned above, now you'd rather approach beings with merciful hearts than discriminate them. So you give a gift(布施) but you are not supported by a thing nor supported anywhere. The heap of merit of that Bodhi-being, who unsupported gives a gift, is not easy to measure

Therefore then, the Bodhisattva, the great bing, produces an unsupported thought, i.e., a thought which is nowhere supported, a thought unsupported by sights, sound, smells, tastes, touchables, or mind-objects.

Likewise, the essence of this Sutra is to have o perception of a self and set out in the Bodhisattva-vehicle to have the utmost enlightened mind by producing an unsupported thought which is supported nowhere.

This utmost enlightenment is for Bodhi-beings to stay away from foolish minds and to have bright minds. They are to live a happy life whenever and whenever possible.

We are wandering off by foolish minds because we fail to see the true perception of a self and grasp to the sign of a self or of a being, or the sign of a living soul or of a person and we are bound by perception of these.

As we have analyzed in the study, people who stick to the thoughts of a past and future lived with tremendous agony. As this Sutra suggests, if we realize the true perception at all and give up all the attachments in our minds, we will be able to cure suffering minds bound by false sign

This Sutra alone would not be sufficient to lead us to the utmost enlightenment. However, this surely will lead our foolish minds to brighter minds and will be truly useful curing people's minds agonized by attachments.

 

◎영문핵심어

the utmost enlightenment

gift(布施)

the sign of a self is indeed no sign(無我)

Diamond Sutra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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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razier. Zen Therapy. New York : John Wiley & Sons 1966
․Kabat-Zinn,J. Full Catastrophe Living. New York : Delta, 1990.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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