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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과 죽음의 번뇌 - 불교철학의 사생관(死生觀) -

장안봉(微山) 2016. 6. 4.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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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번뇌

- 불교철학의 사생관(死生觀) -

 

鄭柄朝(한국불교연구원장, 동국대학교 교수)

 

 

목차

1. 머리 말
2. 죽음에 대한 불교적 견해
  1) 석존의 사생관
  2) 부파 불교의 견해
  3) 라마 불교의 전통
  4) 대승불교적 견해
3. 맺는 말

 

 

1. 머리말

 

이 글에서는 ‘죽음’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철학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본질적으로 죽음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문제일 뿐 아니라 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고래로 인간이 가진 원초적 의문 중의 하나가 ‘삶과 죽음에 대한 번민’이었다. 석존 당시에도 이 문제는 중요한 철학적 이슈의 하나였으며, 또 절대적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적 전통 때문에 자칫 불교는 합리적인 내세관을 갖지 못했으리라는 세간의 편견마저 있어 왔다.

 

하지만 불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천착해 왔다. 죽음에 대한 원만한 해석이 없을 때, 인간의 삶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죽음에 관한 사색은 교리적 관점에 따라서 혹은 문화적 역사배경에 의해서 수 없이 많은 상이한 견해가 도출되었지만, 종합적으로 이를 대별할 만한 몇 가지 유형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내세(來世)에 대한 확신이다. 사후에 영계(靈界)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존재한다는 것과 ‘나’라는 자아는 그 곳에 왕생(往生)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흔히 지옥과 극락이라는 교훈적 설명으로 나타난다. 민간신앙의 형태로는 가장 보편적이며, 윤리적 기능 또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다. 특히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이와 같은 내세관은 폭 넓은 반향을 일으켜왔다.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는 정토신앙으로 정착하기도 하였다.

 

둘째는 죽음을 내세와 결부시키지 않는 견해이다. 생과 사를 서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존재로 보지 않고 일여(一如)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죽어서 극락이나 지옥에 간다는 관념은 배제되는 가운데 무상한 존재로서의 인간 모순을 직시하여 그 생사를 뛰어넘고자 노력한다. 나아가 우주의 질서는 무상(無常)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사대(四大)의 가합(假合)이 생(生)이라면, 그 소멸은 사대가 흩어지는 바라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존재의 체성(體性)이 공(空)이기에, 이 공성을 기반으로 죽음에 대한 허무적 환원마저 극복하려 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지성적 불교인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 하겠다.


세 번째는 생명의 영원한 윤회유전(輪廻流轉)이다. 생명은 인연에 따라 생성소멸(生成消滅)을 거듭하는 존재라고 파악한다. 이 경우 업(業)의 상속성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논쟁으로 등장한다.
불교 형이상학에서 이 문제는 ‘자아(自我)’와 ‘무아(無我)’에 대한 끈질긴 논쟁거리이다. 간혹 교단 내부에서 조차 자아의 실체를 합리화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곤 하였다. 설일체유부 등에서는 이 업의 실체를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승의 전통에서는 업을 공으로 파악하고 있다.


상기의 입장들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한 교리적 ․ 윤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 교조적(敎條的) 권위로서 불교가 받아들여지던 고중세의 경우 주로 첫 번째의 입장이 존중되었다. 내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윤리적인 면에서 긍정성을 띄지만, 철학적으로는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한편 선종이 일세를 풍미하던 시대에는 주로 두 번째의 입장이 선호되었다. 죽음을 객관화 시키고 생사일여의 미학을 정착시키는 일이 미덕으로 여겨지곤 하였다. 불교적 가치가 지배하지 않던 시대에서 조차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온 주장이 세 번째의 경우이다.


다만 윤회의 주체를 자아로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상이한 경우가 많다. 또한 이 세 가지의 견해가 혼융하여 불교적 내세관을 형성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불교는 관용을 표방하기 때문에 불교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 광범위한 지역적 문화특성과 정서적 환경요인에 따라 사생관(死生觀)이 다채로운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특정 교리에 대한 부분적인 논구(論究)만으로 결론을 얻기에는 외연의 범위가 모호해진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철학적 타당성, 즉 불교적 사생관의 합리적 입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원론적 교리 위에 역사적인 변용을 읽어내어 그 특질을 추출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세 가지의 견해를 중심으로 교리적 입장을 간략히 개진하고 죽음의 실체를 파악하려 했던 교학적 전개의 흐름을 살펴 볼 것이다. 그 첫 번째의 자각은 생멸(生滅)의 연기인 ‘삶과 죽음의 진리’에서 시작한다. 다음으로는 무생연기(無生緣起)의 철저한 자기부정과 자기헌신이다. 마지막 단계는 생사의 피안을 넘어서는 무애와 초탈의 경지이다. 그 때 비로소 자비를 궁구케하는 불교의 살아있는 교훈은 제시될 수 있다.

 

 

2. 죽음에 대한 불교적 견해

 

1) 석존(釋尊)의 사생관(死生觀)

 

"사람의 목숨이란 비참하며, 짧고, 고뇌로 얽혀있다. 태어나면 죽음을 피할 길이 없으며, 늙으면 죽음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따른다. 보라! 가까운 이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는가.

그러나 슬기로운 이는 참 모습[實相]을 알고 슬퍼하지 않노라. 자신의 즐거움을 구하는 사람은 슬픔과 욕심과 걱정을 버리고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도록 하라.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거리낌 없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근심을 초월하고 근심 없는 경지, 평안에 돌아간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1)"

 

우리는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생명들의 공존(共存)질서 모색이며 둘째는 죽음에 대한 번민이다. 공존질서 모색을 그는 다르마(Dharma)의 회복이라고 보았다. 한편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길을 ‘무명(無明)의 초월’이라고 가르쳤다.

죽음을 결코 ‘일회적 모순’이라고 파악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고리로 판단한다. 이것은 물론 인도인 특유의 삼세양중(三世兩中)적 사고와 연결된다. 『베다』나 『우파니샤드』등 일련의 고대 인도 종교서들 속에는 언제나 윤회(Saṁsāra)에 대한 언급이 있다.
특히 베다의 후기시대에 이르면 사후의 세계인 야마(Yama, 염라)에서의 재사(再死)문제가 언급된다.


석존은 이 윤회의 사고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삶의 영속성을 깨닫고, 올바른 삶의 길을 따르는 일이 초기불교에서는 강조되고 있다.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삶의 영속성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면서 윤회전변한다는 영속성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인간의 무상성이 강조된다.

사제 팔정도(四諦八正道) ․ 십이인연(十二因緣) ․ 중도 ․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등에서 줄곧 강조되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의 진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러나 무상은 결코 최종적 허무만은 아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시공은 현금(現今)의 삶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까닭도 바로 이 무상성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무상의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불안과 초조를 떨칠 수 없다.


또한 무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생사를 거듭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영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상을 떠나 영겁의 세월은 있을 수 없다. 찰나 즉 영원이다. 그래야만 우리들은 무상이라는 찰나적 현실 속에서 영원을 직시하여 무상 속에서 영원으로 향하는 종교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석존이 몸소 보여준 허무의 극복이고 열반(Nirvāṇa)의 증득이다.

 

잘 알려진 ‘화살의 비유’ 등을 통해 볼 때 적어도 초기불교에서는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일이 수행자의 과제였을 뿐, 내세에 대한 확신은 명료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내세를 비롯한 형이상학적 의문에 대하여 석존은 냉정하리만치 그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다. 많은 서양불교학자들에 의하여 불교가 ‘실존적 경향’이라고 간주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어도 초기 불교에는 죽음의 문제보다는 삶의 문제가 훨씬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모든 논의의 귀결은 ‘How to live’의 문제였다.

 

대승불교의 대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교사상의 화려한 르네상스를 이루었고, 특히 종교성의 고양은 중요한 진전이었다. 초기 불교는 철학적 특성이 강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언급이 부족했지만, 대승불교는 많은 부분을 이 죽음의 문제에 할애하였다.


발달된 대승불교의 이론에서는 열반을 유여의(有餘依) ․ 무여의(無餘依) ․ 무주처(無住處) 등으로 세분하고 특히 『열반경』의 경우에는 ‘진여의 경지’ 내지 자유자재한 적멸의 즐거움, 즉 ‘안온한 경지’로도 이해한다.2)

이미 사법인(四法印)에서 설명된 바 있는 열반적정(涅槃寂靜)에 해당한다 하겠다. 내세를 ‘실체적 세계’로 파악하려는 노력에 대해 석존은 회의적이었다.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답이 그 반증이다.

 

“사람은 죽어서 어디에 태어납니까?”
“그 질문은 옳지 않다.”
“어째서입니까?”
“예컨대 장작더미에 불이 타오르고 있다하자. 불은 꺼지면 어디로 가서 태어나는 것일까?”
“그 논의는 옳지 않습니다. 장작이 있어서 탔고, 장작이 없어져서 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있어서 삶을 유지하였고, 종국에 이르러 숨을 거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3)

 

즉 석존은 삶과 죽음을 단순히 수직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바로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다. 단절과 별리(別離)로 보는 것은 중생의 미망(迷妄) 때문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해탈이 ‘윤회의 극복’이라는 설명이다. 소승성자(小乘聖者)의 사위(四位)를 설명할 때 언제나 그것을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신음하는 이 세상을 등지는데 있다고 해석을 내리는 것이 흥미롭다.

 

이를테면 일왕래(一往來) 혹은 불래(不來) 등의 표현은 윤회를 고통으로 이해하는 전형적인 사고의 반영이다. 이는 이 세상을 버리고 저쪽 피안의 열반의 세계로 떠난다고 하는 현실도피적인 냄새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또한 소승불교의 열반관은 회신멸지(灰身滅智)라 하여 이 몸도 지혜도 모두 없앤다고 하는 허무적 ․ 소극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석존의 경우에는 열반 자체가 하나의 ‘경지’일 뿐 내세를 형용하는 ‘실체’는 아니었다.
이를 소승불교에서 해석적 학문불교에 치중한 나머지 세상과 유리된 고착적이고도 실체화된 열반관으로 제시하였다. 대승불교도들은 이를 소극적 열반이라고 보고, 석존 당시의 열반관으로 귀착하고자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열반을 하나의 이상향으로서 묘사하게 되는 사상적 비약이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이 점은 대승불교가 대두되는 기원전후의 시대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불교의 종교성을 부각시키면서 일반 민중들의 바람에 대한 불교의 「응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라마불교의 전통이 강한 티벳불교는 윤회전생이라는 관점에서 생명의 영속성을 주장한다. 반면 한국 등 대승불교의 영향권에서는 정토사상이 발전해 왔다.

 

1) 필자 초역 『숫타니파아타』「대품」중에서.

2) 열반(Nirvāṇa)이란 번뇌의 불이 꺼져버린 경지이다. 또 열반은 우리들이 거처하는 房과 같아서 번뇌의 비바람을 막는 법이다. (曇無讖譯, 『大般涅槃經』권 27, 「師子吼菩薩品」, 『大正藏』12, p. 527 상)
또한 열반이란 번뇌를 끊어 머물 곳이 없고, 안온하고 적멸의 즐거움을 누리는 자유자재의 경지이다.
영원하고 즐겁고 진정한 자신이자 청정한 것이 큰 열반으로 따로 구하는 법이 없으니 얻을 법도 없고, 허공처럼 모든 곳에 두루 차 있으니 없는 것 같지만 누구에게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며, 선악에서 벗어난 것으로 모든 번뇌를 끊어 지혜가 원만하고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평안하고, 한결같이 청정한 큰 열반으로서 중생들 모두 부처의 성품을 지닌 것이다. (曇無讖譯, 『大般涅槃經』권 23, 「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 『大正藏』12, p. 502 하)
3) 필자 초역 『숫타니파아타』「소품」중에서.

 

 

2) 부파불교(部派佛敎)의 입장

 

불교의 윤회설은 육도윤회로 집약된다. 부파불교의 등식은 윤회→고통→해탈로 설명된다. 즉 윤회의 생존임을 자각하는 지혜와, 그 고통에서 탈각하려는 노력이 수도의 핵심이었다. 육도윤회의 근본은 업(業, Karman)이다. 이 ‘업’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는 부파불교의 중심적 술어이다.
첫째, 작용의 의미가 있다. 광범위한 행위 일반을 가리킨다.

둘째는 법식(法式)을 행한다는 뜻이다. 제사의식 등 종교의례를 엄수하는 행위를 말한다.

셋째는 과(果)를 분별하는 작용이다. 선악의 행위는 각기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낳는다는 의미이다.4)

즉 모든 생명의 행위와 과보를 갖는다.

유정(有情)인 경우에는 신(身) ․ 구(口) ․ 의(意)의 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삼업은 구체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그 업의 덩어리가 쌓여 마침내 각자의 미래 생존을 결정하게 된다고 본다. 선인선과(善人善果) ․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소박한 윤리의식이 싹트게 된다. 중생들은 이러한 ‘업’의 엄정한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그 업보의 덩어리가 옳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유루업(有漏業)이라고 한다.


그러나 업의 덩어리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광폭한 ‘힘’이다. 즉 그 자체로서 어떤 변하지 않는 성품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존재형태를 결정짓는 원인이 된다. 업은 마치 불길과도 같다. 불길은 엄청난 힘으로 산하대지를 태울 수 있다. 그러나 꺼지면 그 힘은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올바른 업을 가꾸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본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 윤회의 시원을 무명(無明)으로 파악한다. 즉 무명에서 비롯하여 노사(老死)에 이르는 과정을 생명의 윤회로 보고 있다. 따라서 무명의 극복은 윤회의 단절이 될 수 있다.
무명은 삼독(三毒)의 근원이기 때문에 번뇌지(煩惱地)이기도 하다. 부파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이것을 다시 대지법(大地法, mahā-bhūmika), 대선지법(大善地法,kuśala-mahābhūmika),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kleśa-mahābhūmika),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akuśala-bhūmikā),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upakleśa-bhūmika)의 다섯 가지 심지법(心地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5)

 

4) 카르마를 통상 Action의 의미로 국한하여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部派佛敎의 논서, 예컨대 玄奘譯의 「大毘婆沙論」에서는 이 카르마를 細分하고 있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권 113, 『大正藏』27,p. 587 중)

5) 玄奘譯, 「阿毘達磨大毘婆沙論」권 42, 『大正藏』27, p. 220 중. ; 衆賢造, 玄奘譯, 「阿毘達磨順正理論」권 10, 『大正藏』29, p. 384 상. ; 衆賢造, 玄奘譯, 「阿毘達磨藏顯宗論」권 5, 『大正藏』29, p. 799 중.

 

 

한편 경량부(輕量部)에서는 이것을 종자(種子, bīja)로 이해하였다. 마음의 종자는 물질→전변→차별의 심리현상을 통하여 업의 변환을 증명하려 한다. 다만 부파불교의 최대 쟁점은 업과 인과세계의 완전한 소멸이 가능한가 하는 데 대한 논구이다. 예를 들어 경량부는 어디까지나 열반의 무체(無體)를 주장하여 그 경지를 번뇌업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고 주장했다. 즉 ‘극악한 업도 소멸된다(無間業消滅)’라고 하여 업의 소멸 가능성을 인정했다. 반면 설일체유부는 올바른 지혜의 대상으로서 열반이 분명히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억지로 업을 부정한다면 끝내 허무론에 떨어질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불교의 업사상이 이와 같은 공무(空無)의 견해에 대한 윤리적 의미를 지님으로써 부파불교의 중요한 교의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의는 언제나 사변성과 현학성을 띄기 마련이어서 지엽말단적인 개념의 유희로 전락할 빠져들 위험성이 있다. 즉 생사의 고뇌를 벗어난다는 대명제보다는 무명 내지 업 등을 고착된 실체로서 개념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만다.
바로 이 점이 대승불교가 제기한 비판의 초점이 된다. 마치 실존철학을 연상시키듯, 강렬한 ‘삶에로의 회귀(回歸)’가 강조된다.


니체는 진리를 「과정」이라 지적하였다. 피와 땀으로 농부가 대지를 갈 듯이, 끝없는 영겁회귀의 과정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 허망한 삶에 점화(點化) 될 수 없는 관념은 유희일 따름이다.

부파불교의 사생관(死生觀)은 이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본질을 벗어난 형식의 덫에 걸렸다. 즉 주객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고뇌를 해결한다는 과제에서 일탈해버린 번쇄하고 현학적인 학문불교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3) 라마(Lama) 불교의 전통

 

죽은 생명을 위한 불교적 제의(祭儀)에 사십구(四十九)재가 있다. 49는 7의 7배수로서 완결성을 상징한다.

이 49일 동안 망인(亡人)의 업은 정리의 단계를 거쳐 또 다른 생명으로 환원한다고 보는 전통이다.

특히 이와 같은 전통은 라마불교에서 회자되어 오던 『사자(死者)의 서(書)』6)속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 7주간의 생명의 윤회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죽음을 기다리며(서문)
죽음은 평안한 무감각의 상태이다. 천천히 정신적 활동이 육체에서 분리된다. 정신적 활동은 이제 중간적 상태에 서서히 빠져들게 된다.

 

(2) 죽음의 순간, 그 순결한 실체의 밝은 빛
번갯불보다도 빠르고 선명한 무색의 광휘가 나타난다. 이윽고 며칠이 지나면 ‘정신적 육체’라고 부르는 교묘한 환각의 공상적 육체가 홀연히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과거에 행하였던 욕망의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 환상의 육체는 여전히 여러 가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업의 후유증이다. 그러나 보이고 들리는 것은 단순히 환상이며, 망상이며, 진정하게 존재하는 어떤 대상도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3) 정신적 실체의 경험
죽은 후 첫 주에는 불보살들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둘째 주에는 성난 야수들을 만난다. 이것들이 생겨나게 된 근본원인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의 마음 자체가 서로 충돌하는 마음의 내용일 따름이다. 그대가 보는 것은 공허한 거울에 나타난 그대 스스로의 마음, 그 내용의 반사에 불과하다. 이제 불가사의한 육체는 무지개 속으로 분산된다.

 

(4) 다시 태어남의 추구
이제 그대는 죽음의 왕 야마(Yama) 앞에 있다. 빛나는 업의 거울 속에 그대의 모든 행동들이 반사된다.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태어남을 결정짓게 된다. 이윽고 다시 태어날 여섯 갈래의 길이 그대의 앞에 비춰진다. … 될 수 있는 대로 단념해야 한다. 생존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포근한 친화의 마음씨를 지니도록 하여라.


(5) 또 다른 생명의 길로
이제까지는 가질 수 없었던 감각경험에 저항할 수 없는 막강한 갈망이 그대를 압도하리라. 그대가 경험하는 감정은 마치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려는 순간처럼 그대를 기절하게 만든다.

 

이 49일 동안의 생명은 일종의 ‘중간상태’이기 때문에 한문 문화권에서는 중유(中有,antarā-bhava)라고 표기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자세한 윤회의 일정을 언급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역시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사상성 때문이라고 본다. 또 죽음과 환생에 대한 정서적 차이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만 ‘죽음’을 뇌사(腦死)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할 때 중요한 단서가 이 곳에 있다. 즉 죽음의 마지막 행위를 라마불교에서는 사망의식(Death-Consciousness)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렴풋이나마 뇌사를 인정한다는 입장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대환신(四大幻身)을 버림이 죽음이라는 『유마경』의 정의와 함께 불교적 죽음의 개념 정립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고대사회의 뇌사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처럼 첨예하게 논리화되지는 못하였다. 가장 소박하게 표현한다면 ‘죽음’이란 ‘육근(六根)의 단절’이다. 즉 인격과 생명을 표상하는 여섯 가지의 감각적 기능이 정지될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덧붙여 육신의 무의미함을 일깨워 온 초기불교의 교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색신이란 사대(四大)의 집합이기 때문에 반드시 소멸되리라는 가르침은 불교사상을 일관하는 견해였다. 초기불교에서는 그 무상성을 보다 무게 있게 언급해 왔었다. 대승불교에 들어서면서 이 무상성은 반야공의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논리적인 타당성을 갖게 되었고, 또 실천성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6) 원본은 Tibet 秘傳, 1957年Evans Wentz의 英譯및 Alexandra David Neel의 佛譯版등이 있다. 중요한 우리말 발췌번역은 고려원刊(1983)의 拙譯『佛敎의 聖典』(Buddhist Scriptures by Edward Conze) 중 pp. 259~269를 참조.

 

 

4) 대승불교적 견해

 

(1) 열반의 개념과 의의

 

열반은 니르바나(Nirvāṇa)의 음역(音譯)이다. 원래의 뜻은 불을 ‘불어서 끄다’라는 의미이다. 번뇌의 불을 멸진(滅盡)해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하는 경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탐․진․치의 삼독을 불어 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후세에 들어서 이 개념은 ‘죽음’과 동의어로 쓰인다. 특히 석존 등 위대한 성인(聖人)의 죽음을 지칭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인도불교의 형이상학적 논쟁 가운데 ‘사후(死後) 성자의 실재’에 대한 논구가 있다. 즉 성인은 죽어서도 성인일 수 있을까 하는 논의이다. 따라서 유여의(有餘依), 무여의(無餘依)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 전자는 생전을, 후자는 사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인이 죽어서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응답하는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영원한 ‘인격으로서의 불신(佛身)’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대승불교의 해답이 바로 삼신(三身)사상이다.


① 법신(法身, Dharman-kāya) : 영원한 진리[眞如]의 몸, 진리는 실체로 파악할 수 없는 공(空)처럼 초인격적인 진리의 당체를 가리킨다.


② 보신(報身, Saṁbhoga-kāya) : 법신을 근원으로 하여 그 결과로 나타난 몸, 생멸이 있을 수 있으며 유여(有餘) 열반의 모습을 보인다. 이상적인 인격의 모습을 갖춘다.


③ 화신(化身, Nirmāṇa-kāya) : 법신을 근본으로 하여 나타나는 변화의 몸, 인격의 모습으로 나타나 각 중생에게 응답한다.


『법화경』․ 『열반경』등 일련의 대승문헌들에서는 이 삼신(三身)의 주체를 열반으로 승화시킨다. 열반의 사덕(四德)으로 열거되는 상(常) ․ 낙(樂) ․ 아(我) ․ 정(淨)은 무상신(無常身)의 초월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열반을 ‘평안한 경지’로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진여의 근원으로 보려는 사상경향이다. 예컨대 우주의 질서를 법계(法界)라고 표현했을 때 열반이라는 이상향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 또 공(空)을 설명할 때 불공(不空)의 대칭적 개념인 경우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되며, 이때의 경지 또한 열반일 수 있다. 요컨대 진여의 궁극, 삼라만상의 심연이 열반이며 그것을 향한 발걸음이 수도의 요체라는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적극적 의미로서 법신(法身) ․ 반야(般若) ․ 해탈(解脫)을 열반의 이자 삼점(伊字三点)이라고도 했다. 실담(悉曇, siddhaṁ) 문자‘이(伊, ༜)’로 나타내는 열반 3덕의 의미는 법신과 반야와 해탈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는 뜻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체(體) ․ 상(相) ․ 용(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진여에는 그 본질로서의 체[體]와 그 속성[相]으로서의 모습, 그리고 그 활동으로서의 움직임[用]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대승불교에서는 이 열반을 ‘궁극적 초월(Ultimate Transcendent)로서 이해하지만, 그것은 저 세계로의 초월이 아닌 이 세계 속에서의 초월이다. 바로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와서 현실을 전환시키는 환멸연기로서의 삶이다. 거기에서 세속과 열반을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편견이 지양돼야 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가진 일반적 경향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진속원융(眞俗圓融)을 표방하는 반야적 논리의 현전화이기도 하다. 원효는 열반을 진여로 설명한다.

 

 

“『대품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 열반이다’라 하셨고, 『점찰경』에서는 ‘번뇌와 생사는 마침내는 그 체가 없는 것이어서 구하여도 얻을 수가 없다. 본래 생하지도 아니하였고, 참으로 다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자성이 고요하고 또 고요한 것이 곧 열반이다’라고 하셨다. 따라서 진여의 바른 지혜가 곧 열반임을 알 수 있다. 번뇌를 끊어 없애고 나타나는 뜻의 부분에서는 곧 진여가 수멸(數滅)이 됨을 말하는 것이니 수멸이 곧 무구한 진여이기 때문이다.”7)

7) 元曉, 「涅槃宗要」, 『韓佛全』7 朝鮮時代篇1, (서울: 東國大學校, 2002), p. 528 상. : “大品經云諸法性空即是涅槃 占察經云 煩惱生死畢竟無體 求不可得 本來不生 實更不滅 自性寂靜即是涅槃 如是等文不可具陳 故知眞如正知其是涅槃 斷滅煩惱所顯義門即說眞如名 為數滅 數滅即是無垢真如.”

 

 

즉 열반은 세속과 상치되는 정반대의 개념은 아니라는 뜻이다. 열반 속에 세속이 있고, 세속의 번잡 속에 열반은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열반이건, 세속이건 간에 그 본성은 공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열반을 추구하는 점 때문에 세속은 가치로울 수 있다는 것이 핵심적 내용이다.

 

 

(2)아미타신행(阿彌陀信行)의 발전

 

대승불교의 내세관을 구상화(具象化)시킨 사상 가운데 아미타신행이 있다. 서방정토(西方淨土, Sukhǡvati)에 대한 믿음과 그 곳에 왕생하려는 원력(願力)은 이른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등장과 함께 구체화되었다. 정토신행이 민간에 수용될 때, 그것은 타력적 경향이 강하다. 정토에 왕생하는 인연이 염불공덕이라는 사상패턴 때문에 그렇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의 경우에는 대승적 전통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정토신행이 신라, 고려를 거치는 동안 가장 설득력 있는 신행형태의 하나로 이어져 온다. 그러나 신라인의 경우 이 정토신행은 반드시 타력적 경향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정토로 가는 왕생인(往生因)은 정업(淨業)의 증장(增長)이기 때문에 자력적 노력이 겸행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단순논리로 보면 염불은 왕생을 염원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타력성을 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염불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또 선업을 닦기 위한 노력 또한 자력의 행위이다. 따라서 염불은 자력신앙이며 선업을 얻기 위한 인격적 자기 수련이다.


한편 정토에 대한 확신은 이른바 『정토삼부경』의 편집 이후에 나타난다. 그 경전들의 산스크리트 본은 간다라(gandhāra)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곳을 정토신앙의 진원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정토는 극락을 의미하지만 시대가 내려 갈수록 그 이상향에 대한 묘사가 적극적이며 사실적으로 전환된다. 구품왕생(九品往生)의 사고는 그 정토사상의 집합이다.
아홉이라는 숫자는 삼(三)의 삼배수이다. 인간의 업을 상 ․ 중 ․ 하로 나누고 그 각각을 또 다시 삼등분하면 결국 구품(九品)이 된다. 이것을 회화에서는 즐겨 묘사하여 구품왕생도(九品往生圖)로 표현한다. 사상적으로 보면 초기의 타력적 정토신앙은 유토피아적 성격이 강하였다.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중생들에게 정토를 희구하게 하는 교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자(自) ․ 타력(他力) 조화의 신행형태는 그 이상향을 현전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8)

 

8) 義湘(625~702)의 불국토사상이 이를 대변한다. 洛山寺창건에서 보여주는 대로, 그는 신라가 불교와 인연 있는 국토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인물이다. 결국 그에 있어서 阿彌陀는 久遠의 이상향이었을 뿐 아니라, 바로 現今의 존재라는 自力性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自․他力習合의 阿彌陀信行이라고 보아야 할 줄 안다. : 拙稿, 『이기영 박사고희기념논총 佛敎와 歷史』, 「한국불교의 神觀」(서울: 한국불교연구원, 1991), pp. 558~589.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불교도입 초기부터 이와 같은 사상 경향이 농후하였다. 특히 통일신라 이후부터 정토신행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여 대부분의 불교사상가들에 의해 크게 선양되었다.
고려후기에 접어들면 이 아미타신행은 자성미타론(自性彌陀論)으로 발전한다. 태고 보우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아미타불은 산스크리트인데, 우리말로는 ‘한량없는 목숨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모든 이에 게는 각각의 본성에 신령스러운 깨달음이 있고, 그것은 본래 나고 죽음이 없다.

… 그러므로 그 마음을 밝게 깨달은 이를 부처라고 하고 이 마음을 설명한 것을 교(敎)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팔만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성품을 자각케 한 방편이다. 방편은 많지만 요점을 말하면 오직 마음의 정토요, 내 성품의 아미타불이다.

마음이 맑은 즉 불국토가 맑고, 성품이 나타난 즉 부처의 몸이 나타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아미타불의 맑고 심묘한 법신은 일체중생의 마음 속에 두루 존재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에는 차별이 없다' 하였으며, 또한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라,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고 하셨다.

… (참된 염불의 마음이 끊임없이 이어져) 생각마다 어둡지 않게 하고 때로는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자세히 돌이켜보아 오랫동안 계속한다면, 갑자기 생각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진실한 본질이 눈 앞에 나타나리라.9)"

9) 「太古和尙語錄」‘示樂庵居士念佛樂略要’ (順天: 普濟社[오대산 월정사 藏版활판본], 1940), p. 51. :
“阿彌陀佛 梵語 此云無量壽佛 佛字亦梵語 此云覺 是人人箇箇 亦本性有大靈覺 本無生死

… 故云明此心之謂佛說 此心之謂敎 佛說一大藏敎 指示人人 自覺性之方便也 方便雖多以要言之 則唯心淨土 自性彌陀

心淨則佛土淨 性現則佛身現 正謂此耳 阿彌陀佛淨妙法身 遍在一切衆生心地  故云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亦云心卽佛  佛卽心 心外無佛  佛外無心

… [眞實念佛  心心相續] 念念不昧 時或密密 返觀念者是誰久久成功則忽爾之間  心念斷絶  阿彌陀佛眞軆  卓爾現前.”

 

 

요컨대 나 자신을 떠난 아미타불의 실재와 초월성에 관해서 부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 다만 ‘마음’이라는 비인격적(非人格的) 실재만이 아미타불의 권능을 대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자성미타론은 ‘견성’을 앞세우는 선종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육조단경』에서도 혜능은 ‘동쪽 사람들은 서쪽으로 가서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 있겠지만 서쪽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를 되묻고, 삼만팔천리라는 정토와의 간격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십악팔사(十惡八邪)를 상징하는 언사라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이것이 태고 보우에게만 국한된 사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말의 대표적 선사인 나옹 혜근(1320~1376), 백운 경한(1299~1375) 등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고려 말이라는 시기는 불교사상적으로 보아 선교(禪敎)의 대립이 노골화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선풍(禪風)의 진작이라는 면에서 이 자력적 미타신앙이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력위주적(근본불교)   타력위주적(정토신앙) →  자․타력조화적(선불교)

 

그러나 억불로 일관한 조선에 들어서면서 이와 같은 자성미타의 입장을 민간의 호응을 얻기에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소박한 내세신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주술적 경향마저 띄게 된다.
즉 유교가 가진 현실성에 비해 불교는 종교성을 띄운다는 점에서 호교(護敎)의 방편으로 제시되었다. 이것은 훼불이라는 시대사조와 맞물려 억불의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정토신앙은 자력과 타력을 조화시키는 일에 그 역점을 두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 양자 중 어느 한 편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교리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지 않을까.

 

 

(3) 생사일여의 미학 - 선종의 입장

 

生也一片浮雲起死也一片浮雲滅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10)

10) 「涵虛堂得通和尙語錄」'爲元敬王太后仙駕下語', 『韓佛全』7 朝鮮時代篇1 (서울: 東國大學校, 2002),
p. 228. :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澈底空  幻身生滅亦如然.”

 

선종은 언제나 생사를 이와 같이 담담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나고 죽음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범인에게 상존한다. 앞서 우리는 불교적 대각의 의미를 ‘실상의 통찰’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실상은 진제(眞諦) ․ 제일의(第一義) ․ 법계(法界) ․ 진여(眞如) 등 다양한 어휘로 표현하지만 그 뜻은 같다.


불교의 세계관은 삼라만상의 질서를 인과로 설명하는 데 있다. 대각(大覺)이란 그 인과의 질서를 통달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불교적 대각을 ‘죽음’과 관련시켜서 해석한다면 생사일여라는 주장이다. 나고 죽음이 없다는 것은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이기적 편견을 우주적 자아로 승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이 우주에는 무한한 생명이 있다. 유정(有情) ․ 무정(無情)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물줄기들이 흐르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본다면 ‘나’라는 개체적 생명은 그 원류의 지극히 미세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 개인적으로는 생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생명의 입장에서는 생멸이 없다. 전체 균형은 유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표현은 개체적 자아를 우주적 생명과 동일시했을 때 가능한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라고 부르는 개체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 국가적 자아로 승화되고 궁극적으로는 나와 남을 차별하지 않는 전체적 자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것을 위해서 선행해야 할 필수적 관심이 이기심의 극복이다. 삼독심(三毒心)으로 묘사되는 윤회의 근본 원인 또한 이기적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불교의 실천윤리로 강조되는 동체대비도 같은 맥락이다. 너와 내가 대립적으로 인식되지 않으려면 본질적으로 그들이 하나라는 자각이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개체적 의식이 전체와 합일하느냐 하는 방법론상의 문제가 되고 만다. 초기불교의 사생관(死生觀)은 ‘이기심의 극복’을 과제로 삼았다. 나만을 사랑하고, 남을 미워하는 그릇된 마음씨로는 결코 동체대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초기에서 강조된 바 있던 반야지도 마찬가지이다. 무상성(無常性)의 자각은 결코 우리를 허무의 감방으로 몰기 위한 주장이 아니었다. 후기 대승불교가 완성시킨 보살사상은 바로 이 비원(悲願)의 구상화(具象化)라고 볼 수 있다. 이기적 자아가 극복되고 우주적 자아가 자리 잡을 때 그 생사의 번민을 없앨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개체적 생멸의 단위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강조한다.


『반야심경』의 선언인 불생불멸(不生不滅)도 같은 사상적 맥락이다. 생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 생명관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지로 이해해야 한다. 그 때의 부정은 물론 절대 긍정을 향한 변증법적 부정이다. 따라서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미학은 그 역사적 전개로서 달관․ 무애 ․ 초탈(超脫) 등의 행동적 규범을 낳게 된다.


또 그와 같은 관점에서 불교 신행을 재조합하면 초기 불교의 교설은 결국 이기심의 극복이며, 반야사상은 허무의 극복, 화엄사상은 공존의 지혜로 귀결될 수 있다. 선종의 실천성은 바로 이 생사일여의 미학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3. 맺는 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멍에이다. 죽음의 불안이 가져다주는 암울한 허무의 심연(深淵) 앞에 우리는 좌절한다. 그래서 영생(永生)이라는 믿음으로 그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생이 혼자만의 안일을 탐하는 경향이라면 그것은 비판되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종교적 집단이기주의를 경계한다. 오히려 죽음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불교는 삶과 죽음을 동일한 수평선상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모든 생명이 인과의 질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부정과 자기헌신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중생들은 ‘더불어 사는 존재’ 를 체득할 수 있다. 그 완성자를 부처라고 말하지만, 모든 생명 속에는 이미 그 가능성이 잉태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얼핏 보면 타력적 정토신앙과 자력적 선종의 입장은 상반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방편에 불과하다. 중생은 그 지적 수준과 문화 환경의 차이로 말미암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일관된 내세관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이다.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 중앙아시아 불교국가들 속에 주술적 내세관이 뿌리 깊게 이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단계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소박한 내세관이 윤리적 의미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그러다가 실재적 내세관은 마음을 주체로 생각하는 자성미타론으로 대체된다. 그 마지막 단계는 삶과 죽음의 흐름 자체를 초월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지이다. 앞 장에서 설명한 대로 동체대비의 현전화가 이룩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사생관(死生觀)은 고정적 ‘응답’의 형태로 나타낼 수 없다. 죽음의 불안을 안고 사는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각기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양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안락사라든지 존엄사, 뇌사 등의 현실적 문제들에 관해서도 일률적인 원칙을 제시하기 보다는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와 판단이 요구된다. 생명 존중이라는 원칙 위에 복잡다단한 인연의 고리를 해석하는 현실 응용적 가치판단이 필요하다.


불교는 뇌사의 의학적 기준을 제시할 만한 검증적 자료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한다든가, 죽음의 무상성을 지시하는 철학적 원리를 도출할 수는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은 ‘업의 집합’이다. 멀리는 사대(四大)의 소산이며 가깝게는 전생업(前生業)의 소산이다. 그 육신의 기능에 있어서 살아 있을 때의 소중한 가치실현이 성도(成道)라고 한다면 사후의 절대가치는 장기기증의 방편이다. 이 점은 철저히 불교적 정신의 긍정성을 내포하는 행위라 말할 수 있다.


『본생담』등에서 자주 언급된 바 있는 보살의 전생은 바로 ‘육신의 포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던진다거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살을 벤다는 등의 표현은 바로 그 상징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장기기증의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자의지(自意志)가 존중되어야 하리라는 점이다. 물론 합법화되지 않은 요즈음의 모든 장기기증 사례가 자의지에 의한 것으로 보도되지만, 보다 검증적이고 실천적인 절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공명심의 단계뿐 아니라, 범죄 조직 등에 이용될 수 있는 개연성을 방지하려면, 역시 법적인 구속력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몸을 버리는 행위 자체가 숭고한 의지의 표현이라면, 그를 뒷받침할 만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불교 교리 전반에 나타나는 사생관을 섭렵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대승불교의 교의를 보다 심층적으로 전개하지 못한 점이다. 『대승기신론』등에서는 보다 상세한 생사의 극복 등이 방법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기회 있는 대로 보완할 작정이다.


죽음을 영겁회귀의 윤회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허무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반면에 ‘나’라는 자아의식이 전환한다는 인식도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전생에 관련한 관심들은 집중적으로 이 자아의식에 대한 윤회과정을 응시하고 있는 듯 여겨진다. 전생의 나, 내생의 나 등 철저히 자아의 윤회전변에만 집중적인 과심을 보이고 있다. 불교는 이기심의 극복을 이상으로 삼는 종교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라도 자아의식에 매몰된 견해는 정견으로 간주할 수 없다. 불교의 자아는 업의 집합일 뿐이지, 영속성을 가진 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종에서 제시하는 생사일여의 경지는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람직한 불교적 사생관을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생에 대한 확신, 내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적 견해를 동시에 극복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걸어 온 길을 민중과의 관련에서만 해석한다고 하면 대중적 원망(願望)심리에 야합하는 경우와 그 그릇됨을 지적하면서 계도하려는 노력의 양면성으로 볼 수 있다. 그 단적인 시례는 기복성의 문제이다.


민중은 현실적이고 단적인 욕구를 불교에 요구한다. 그때 불교는 그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 다음 단계로 승화해 나가야 한다. 즉 양적(量的)인 행복에서 질적(質的)인 행복으로 전환, 이기적 복락 추구에서 보살심의 전개로 그 불교적 가치를 고양(高揚)시켜 나가야 한다.


같은 논리가 불교의 내세관에 적용될 수 있다. 앞서 제시한대로 타력적 내세관이 자력으로 뒤바뀌고, 나아가서 자타력(自他力)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는 사상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은 자력적이기만 해서도 안 되고 타력적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세에 대한 확신이라는 면에서는 자력이어야 하지만, 우리의 논리와 한계상황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면에서는 타력이다. 이 자력과 타력의 균형, 조화야말로 불교적 사생관의 키워드인 셈이다.

 

 

 

사단법인 한국불교연구원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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