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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
-윤리적 극복가능성을 중심으로-
허 남 결
동국대학교
<국문초록>
초기불교에서 삶은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이 일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것에 불과하며, 이 때 인간의 모습은 유전문적 존재로 설명된다. 반면, 죽음은 오온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해체되어 각각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간 상태를 말하며, 이 때 인간의 모습은 환멸문적 존재로 묘사된다. 여기서 불교는 일체의 고통을 벗어난 절대자유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를 제시한다. 이는 곧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곳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붓다는 이른바 사제팔정도의 가르침을 설파하신다. 사제팔정도란 일상적 의미의 도덕행위와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초기불교는 신앙중심적인 종교라기보다는 윤리지향적인 종교에 더 가까운 것으로 성격 규정될 수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불교는 지극히 인간학적인 종교인 셈이다. 이 논문은 초기불교의 그와 같은 사상적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 이 논문은 2012년 4월 23일~27일에 열렸던 제20차 <한․중 윤리학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논평을 맡아 의미 있는 비판과 함께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신 중국 政法大의 王今一교수와 부산대의 조남욱 교수, 그리고 진주보건대의 이상철 교수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주제어 : 초기불교, 오온, 유전문적 존재, 환멸문적 존재, 열반, 사제팔정도, 신앙중심적 종교, 윤리지향적 종교
Ⅰ. 서론
개인적인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너무나 두려운, 그래서 회피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거부하고 싶은 대상 그 자체일 것으로 생각된다. 거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아직은 죽음과 전혀 상관 없는 현재적 존재로 엄연히 ‘살아 있음’을 애써 확인하고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젠가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갑자기 근원적인 공포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쩌면 바로 이와 같은 실존적 두려움 앞에서 인류는 종교라는 위대한 정신문화유산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종교는 처음부터 죽음의 고통과 그것의 극복문제를 화두로 삼아 출발했다는 평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종교는 일반적으로 죽음의 극복문제라는 보편적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은 사색을 해온 분야가 종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동서양의 종교전통들은 죽음과 관련된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한편,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각자 나름의 고유한 방법들을 제시해 왔다.
인류는 그러한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함과 동시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자신의 영역에서 세상을 향한 유익하고 용기 있는 삶들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죽음을 둘러싼 각종 물음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및 실천윤리학적 답변체계라고1)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 케네스 J. 도카/존 D. 모건 엮음, 김재영 옮김, 『죽음학의 이해-죽음과 영성』(경기 일산; 인간사랑, 2006), p.13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지가 전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불교는 말 그대로 생로병사의 고통스러운 실상(實相)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깨달음의 종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붓다의 출가동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의 전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왕세자 싯다르타는 궁전의 동서남북 네 성문을 통해 나들이를 나갔다가 그때마다 태어나거나, 늙고, 병들어, 죽는(생로병사)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목격한 뒤 오랫동안 깊은 번뇌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나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 것을 계기로 세속의 아픔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얻고자 출가의 길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 사문유관상의 줄거리이다.
이처럼 불교는 스스로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 싯다르타 태자가 자신을 비롯한 다른 모든 중생들의 지대한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지극히 인간학적인 종교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대부분의 이웃 종교들과는 달리 죽음의 문제를 내세와 관련짓거나 영생불사의 길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신앙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육체적인 죽음은 어떤 존재도 피해 갈 수 없는 하나의 필연적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죽음과의 결연한 대결을 통해(수행) 고도의 정신심리학적 각성을 획득함으로써 현실적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와 같은 죽음 초월의 가능성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 바로 석가모니 붓다였던 것이다.
여기서 붓다(buddha)란 말은 생로병사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게 됨으로써(깨달음)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사람을 일컫는다.
즉 붓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부여될 수 있는 보통명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세존 역시 수많은 붓다들 가운데 한 분에 불과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들에게도 미래의 붓다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다.
붓다는 곧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한 대자유인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불교의 관
심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이었지 사후의 존재유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물음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2) 이와 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일부 학자들은 불교의 죽음관을 가리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말하는 ‘사망학’이나 ‘임종학’이라는 말 대신 ‘생사학(生死學)’이라는 용어로 이해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데,3) 이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다양한 불교전통 안에서도 삶과 죽음의 문제는 윤회(saṃsāra)와 열반(nibbāna)이라는 두 개념을 축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윤회와 열반에 대한 이해 또한 지역과 시대적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여기서는 교학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상식적인 논의에 국한하기로 한다. 붓다의 화두는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삶을 끊고, 언젠가 직면하게 될 ‘죽음’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붓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별도의 다른 세계가 아니라 무명(avijjā;無明)을 공통분모로 하는, 하나의 연속
체이자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며 그와 같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모습, 즉 실상을 깨달으면 삶과 죽음의 문제는 자연히 극복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것이 곧 ‘무상(anicca;無常)-고(dukkha;苦)-무아(anattan;無我)’로 요약, 정리되는 불교의 기본적 가르침이다.
이러한 붓다의 입장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4) “삶을 부정하면서도 긍정하고, 죽음을 회피하면서도 활용하는”5) 적극적 불이(不二)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는 흔히 말하는 허무주의가 결코 아니다. 그동안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사회 일각의 부정적 편견들은 대체로 불교를 세상의 일에는 무관심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의 일종으로 보는데서 비롯된 측면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서 우리는 윤회와 열반의 관점에 입각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불교의 생사관을 윤리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윤회’가 생로병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표현하는 개념이라면6) ‘열반’은 그와 같은 존재의 실존적 한계를 넘어선 최상의 윤리적 경지를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열반을 얻었다는 것은 결국 생로병사의 현실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과 정확하게 동격이기도 하다.
2) 정승석,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한국종교학회편, 『죽음이란 무엇인가』(서울; 창, 2009),pp.75-76.
3) 오진탁, “성숙한 죽음문화의 모색-소극적 안락사의 3가지 대안”, 『불교학연구』 제15호(2006), pp.29-54; 김용표, “불교에서 본 죽음과 종교교육”, 『종교교육학연구』 제19권(2004), pp.57-79; 안옥선, “불교에서 보는 삶과 죽음: 생사윤회를 벗어난 삶의 추구”, 『철학연구』 제75집(2006), pp.21-51 등에서 이런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정승석, 위의 논문, pp.75-77. 이는 불교를 일종의 허무주의 내지는 염세주의로 보는 입장을 가리키고 있다.
5) 안옥선, 위의 논문, pp.22-23.
Ⅱ. 불교에서 바라본 삶의 윤리적 의미
(1) 오온 또는 오취온의 가합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흐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無始無終)는 것이 생명현상을 바라보는 불교의 기본적 인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르는 윤회전생의 산물이자 말 그대로 임시적 생명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7) 이러한 사고는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만물은 그 본성상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 소멸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수많은 인연들의 찰나적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라는- 불교 고유의 독특한 자연관을 반영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연기법(pratītyasamutpāda)은 그와 같은 사유방식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모든 존재들은 무수한 조건(pratītya)들이 서로 화합(sam)하여 발생(utpāda)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런데 연기법의 시각에 따르면 인간의 생명은 색(色),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잠시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오온(五蘊)’ 또는 그것을 영구불변의 실체, 즉 자아로 알고 이에 집착한다는 의미를 담은 ‘오취온(五取蘊)’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오취온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삶이 부질없는 속박에서 연유하는 고통 그 자체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불교는 이와 같은 생명의 존재양상을 여실하게 깨달아 그것의 집착으로부터 발생하는 각종 고통들을 철저하게 여읜 고요하고 깨끗한 평정심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신적 수행체계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명이 오온의 기능과 작용의 결과라면 색, 수, 상, 행, 식의 각 요소들이 하는 일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6) 업과 윤회사상의 현대적 해석에 대해서는 졸고, “업과 윤회사상의 일상적 수용태도-삶과 죽음의 윤리적 극복 가능성”, 『인도철학』 제26집(2009), pp.125-149 참조.
7) 데미언 키온 지음, 졸역, 『불교와 생명윤리학』(서울; 불교시대사, 2000), p.126.
먼저 색(rūpa)은 물질작용을 주도하는 신체적 기관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우리들의 이른바 육신에 해당하는 말로서 흔히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진다. 색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의 여섯 가지 인식기관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수(vedanā)는 감각과 느낌을 담당하는 정신작용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수는 육체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유쾌함 및 불쾌감 따위의 느낌과 이에 따라 정신이 지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괴로움 및 즐거움 등과 관계하는 감수(感受)작용을 일컫는다.
셋째, 상(saññā)은 앞의 감수작용에 따른 느낌을 이미 축적된 다른 개념들과 결합하여 소위 표상화하거나 개념화하는 작용을 말한다. 예컨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수준, 아름답거나 추함, 좋고 나쁜 평판 등과 같은 상대적 개념의 형성은 바로 이상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넷째, 행(saṅkhārā)은 위의 두 가지 감수작용과 개념작용 및 다음의 인식작용, 즉 식을 제외한 일체의 창조적 의지작용을 가리킨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우리들의 행위일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의업(意業)을 형성하기 때문에 종종 형성력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다섯째, 오온의 마지막 요소인 식(viññāṇa)은 구분해서 아는 것, 범주 나누기, 가치판단, 철학적 사유와 같은 모든 의식작용을 포함한다.
지금까지 말한 다섯 가지 요소들은 크게 색의 물질작용과 수, 상, 행, 식의 정신작용으로 구별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한 덩어리처럼 움직이고 있다. 이는 곧 아무개라는 우리 자신들의 살아있는 모습, 바로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오온의 각 요소들 역시 스스로 연기하는 과정에 있을 뿐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경전의 비유를 빌리자면 우리의 몸은 오온의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마치 여러 가지 부품들로 이루어진 비파나 마차가 제 이름에 걸 맞는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8) 이처럼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명칭으로 불릴 때 비로소 어떤 ‘존재’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비파와 마차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놓는다면 더 이상 비파와 마차의 본래 모습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9)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몸 또한 오온의 잠정적 가합태(假合態)에10) 불과한 것임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서 보듯이 오온이라는 생명현상은 저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의 결합에 의해서 생긴, 말 그대로 끊임 없는 연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가꾸는 이 몸도 결코 내가 아니며, 나아가 언제나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느낌, 개념, 생각, 의식 역시 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의 복잡한 연기적 결합으로 간주할 뿐 ‘나’라는 영구불변의 자아를 어디에서도 상정하지 않는다.11) 불교에서는 이를 특히 오온무아설(五蘊無我說)이라고 부른다.
8) S(Saṁyutta-nikāya) Ⅳ, 196; SⅠ,135 등.
9) 이와 관련된 추가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루네 E. A. 요한슨 지음, 박태섭 옮김, 『불교심리학』(서울; 시공사, 1996), pp.142-145 참조.
10) 김종욱, “불교생명윤리-총론”, 불교생명윤리정립위원회편, 『현대사회와 불교생명윤리』(서울; 조계종출판사, 2006), p.16.
11) 미산, “불교의 연기적 생명관”, 불교생명윤리정립위원회편, 위의 책(2006), pp.56-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대부분의 범부중생들은 크고 작은 세 가지 나쁜 마음인 탐욕(rāga)과 성냄(dosa)과 어리석음(moha), 즉 탐진치(貪瞋癡)에 깊이 물들어 있는 탓에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언제나 그릇된 업을 쌓을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가 다름 아닌 우리들의 고통스러운 일상적 삶인 것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런 때 묻은 마음을 완전히 끊은 인격을 가리켜 우리는 붓다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온과 그것에 대한 애착심으로 가득한 이 몸의 껍질을 깨고 나와 절대적 자유를 성취하는 정신적 수행인 것이다. 좁게 말하면 불교의 수행은 이 다섯 가지 몸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내려놓음으로써 오온을 날이 갈수록 작게 만들어 가는 윤리적 인간의 형성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12) 본질적으로 ‘무상-고-무아(연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온 즉, 생명에 대한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된다. 이는 곧 불교에서 삶과 죽음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연쇄작용선상에서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어두운 무명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고 있는 어리석은 중생들에 불과하다는 데서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발생한다.
초기불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난다는 것은 ‘부모의 성적 결합과 어머니의 가임기 및 중음신(gandhabba/유사의식)의 하강’13)이라는 세 가지 조건의 충족과 더불어 위에서 말한 오온과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入;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획득을 뜻한다.14)
이 여섯 가지 감각기능은 모든 고통의 근원인 탐진치의 발원처이기도 하다. 무상한 윤회 전생의 과정에서 축생이나 아귀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마치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표류하다가 우연히 구멍 뚫린 판자를 만나 그 구멍에 목을 넣는 것과 같다고 비유될 정도로 드물고 귀한 일로 여겨진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도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인 ‘열반을 추구하는 삶’을 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열반으로 통하는 길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윤회 가운데서도 오직 인간 존재에게만 열려 있음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보다 인간계에 태어나는 것이 윤리적으로 훨씬 더 뜻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온의 담지자로서 우리들의 생명은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사용하는 와중에 탐진치와 같은 욕망의 구속을 받게 마련인데, 이것이 인간의 삶을 윤회전생의 삶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들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은 항상 색, 수, 상, 행, 식으로 구성된 오온에 집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생로병사의 고통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윤회의 삶으로 점철되기 십상인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바로 이와 같은 윤회의 삶을 정신적 수행을 통해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 삶으로 바꾸는 것, 바로 그것이다.
12) 박태섭, 앞의 책(1996), p.182.
13) M(Majjhima-nikāya)Ⅰ, 256. 인간생명의 시작과 관련된 낙태와 피임, 인공수정, 시험관아기 등의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는 데미언 키온 지음, 졸역, 『불교와 생명윤리학』(2000); 데미언 키온 지음, 졸역, 『불교응용윤리학 입문』(서울; 한국불교연구원, 2007); 피터 하비 지음, 졸역, 『불교윤리학 입문』(서울; 씨아이알, 2010) 등을 참조할 것.
14) 안옥선(2006), pp.24-25.
(2) 십이연기 속의 유전문적 존재
인간존재가 오온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업을 짓고 사는 모습(윤회의 삶)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의 유전문(流轉門)이다.
십이연기란 연기의 작동방식을 무명(avijjā;無明)-행(saṅkārā;行)-식(viññāņa;識)-명색(nāmarūpa;名色)-육입(saḷāyatana;六入)-촉(phassa;觸)-수(vedanā;受)-애(taṇhā;愛)-취(upādāna;取)-유(bhava;有)-생(jāti;生)-노사(jarāmaraņa;老死)의 12가지 구성요소로 나누어 연기법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유전문은 위의 순서대로 각 단계마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이어가면서 현재의 삶(생명)이 영위되고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경전에서는 이에 대해 “무명이 있을 때 행(지음)이 있고, 행이 있을 때 식(의식)이 있고, 식이 있을 때 명색(정신과 육체)이 있고, 명색이 있을 때 육입(여섯 가지 감각기능)이 있고, 육입이 있을 때 촉(접촉)이 있고, 촉이 있을 때 수(감각, 느낌)가 있고, 수가 있을 때 애(갈애)가 있고, 애가 있을 때 취(집착)가 있고, 취가 있을 때 유(존재, 있음, 되어감)가 있고, 유가 있을 때 생(태어남)이 있고, 생이 있을 때 노사(늙음과 죽음), 근심, 비탄, 고통(신체적 고통), 슬픔(정신적 고통), 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고통의 무더기(쌓음)가 생겨난다.”15)고 말한다. 붓다의 이 말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지분간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보기로 한다.
12연기의 첫째 항목인 무명은 연기법이 세상의 다르마(dharma; 법, 이치,원리)가 된다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고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이 연기하므로 무상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며, 고이기 때문에 영원한 나 또는 영원한 나의 것이란 없다는 ‘무상-고-무아’의 원리를 체득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가운데 행이 있게 된다. 행은 곧 업이다. 여기에는 행동할 때 수반되는 의도, 기질, 성향, 활동, 행위, 업의 형성, 습관 등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때 행은 대체로 무지에서 비롯되는 맹목적 삶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다음 식이 이어진다.
의식 또는 인식작용은 식, 명색, 육입, 촉이 동시에 작용하여 일어나는 종합적 사고현상이다. 식이 일종의 인식주관이라면 명색은 정신적인 대상과 물질적인 대상을 동시에 아우르는 개념이다.
육입은 이와 같은 외부 대상을 인식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또는 감각기능을 가리킨다. 촉은 감각기관이 대상과 접촉하여 무엇인가를 형성하는 순간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인식주관인 식과 명색이라는 인식대상 및 육입이라는 인식기관, 그리고 촉은 찰나적으로 결합하여 특정한 의식 또는 인식활동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작용의 결과, 수가 발생한다. 수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됨으로써 예컨대, 즐겁다거나 괴롭다는 감각을 얻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에 대해 간절히 갖고 싶은 마음을 낳게 되는데, 그것이 곧 애(욕망 또는 갈애)이다.
애는 자연스럽게 집착하는 마음인 취를 불러일으킨다. 취란 갈애의 대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쟁취하고 싶은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마음에서 유가 일어난다. 유란 말 그대로 무엇인가의 존재함, 즉 ‘있음’이다.
이는 갈애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더욱 강렬한 집착심이기도 하다. 이 유에서 생, 즉 태어남이 있게 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노사로 이어지면서16) 우리들의 윤회적 삶(생명활동)이 전개된다고 보는 것이 12연기의 유전문이다. 결과적으로 생과 노사라는 업의 삶은 연기법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 무지, 즉 무명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말하자면 유전문의 윤리적 의미인 셈이다.
유전문의 삶은 곧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범부중생들의 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12연기의 유전문을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자 구조라고 이해하더라도 이는 단지 개인 차원의 마음에서만 머무는 작용이 아니라 그와 같은 마음이 작용한 결과로서의 외부세계까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12연기의 유전문은 생사윤회와 괴로움이 일어나는 개인의 마음과정을 의미함과 동시에 세계 자체의 윤회적 전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세계가 곧 마음의 전개양상이라고 보는 불교적 관점이 반영된 관점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세계와 물리의 세계가 둘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므로 마음의 작용을 반영한 마음의 세계란 동시에 물리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7)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붓다가 오늘 나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의 삶이 결정된다는 윤리적 가르침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붓다의 말을 빌리면 “개의 행실을 하면서 개같이 살면 개로 태어나고, 소의 행실을 하면서 소같이 살면 소로 태어난다.”18)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태어난 인간존재가 갈 길이 아니다.
업의 본질은 현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이전의 업력 때문이지만, 미래의 삶을 담보하는 것은 바로 오늘 나
자신의 몸과 입과 뜻이 짓는 업의 결과임을 보장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불교의 업설이 숙명론이 아니라 정반대로 희망론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을 확장하면 중생의 업은 지금부터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는 절대적 자유, 즉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때때로 우리가 죽음을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죽음을 높인 말 내지는 축복하는 말이 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살아서도 열반, 죽어서도 열반을 추구하는 지극히 윤리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 S(Saṁyutta-nikāya) Ⅱ, 1. 안옥선, 앞의 논문(2006), pp.34-35과 임승택,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고찰-초기불교를 중심으로”, 『불교학보』 제43집(2005), p.5를 참조했음.
16) 이 부분의 정리, 요약은 김종욱, 앞의 논문(2006), pp.24-25를 많이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17) 안옥선, 앞의 논문(2006), p.35의 각주 28) 참조.
18) M Ⅰ, 387-388. 위의 논문(2006), p.38에서 재인용함.
Ⅲ. 불교에서 바라본 죽음의 윤리적 의미
(1) 오온 또는 오취온의 소멸
인간의 삶이 색, 수, 상, 행, 식의 연기적 생명활동을 망라하는 오온의 가합에 불과한 것이라면 ‘삶 또는 생명’의 대칭 개념인 ‘죽음’은 곧 오온의 해체이거나 사라짐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로 경전에서는 불교적 의미의 죽음을 이런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죽음(maraṇa;死)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이 이러저러한 부류의 중생들로부터 없어짐(cuti), 옮겨감(cavanatā), 단절(bhedo), 사라짐(antaradhāna), 죽음(maccumaraṇa), 임종(kālakiriyā), 쌓임(오온)의 파괴(khandhānaṁ bhedo), 신체를 버림(kalebarassa nikkhepo), 목숨기능의 끊어짐(jīvitindriyassa upacchedo)이 있으니, 바로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19)
이러한 죽음은 다시 “낱낱의 중생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중생이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을 다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오온)이 파괴되고, 유해가 내던져지는데,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른
다.”20)고 서술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을 다하고’는 사실상 죽음과 동의어이므로 죽음의 정의라고 할 수 없는 반면, ‘존재의 다발(오온)이 파괴되고, 유해가 내던져지는 것’이란 표현은 붓다 당시의 죽음 정의를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다발, 즉 오온의 파괴는 위에서 살펴본 교학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이라면, 유해가 내던져지는 것은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을 일컫는다. 경전에 의하면 유해가 내던져져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조건은 ‘수명(āyu)과 체열(usmā)과 의식(viññāņa)’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여야 한다.21) 간단하게 말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의 소멸이었던 것이다.22)
여기서 수명은 생명과 동어반복이자 체온과 의식을 보존하고 지속시키는 명근(jīvita-indriya;命根)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명근은 생명의 본질로서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 보존시키는 근원적인 힘으로 볼 수 있다. 명근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체온과 의식이 감지되지만 명근이 끊어지면 체온과 의식의 움직임은 없어진다. 다시 말해 체온과 의식이 신체로부터 사라질 때 수명이 파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때가 곧 죽음의 단계에 해당할 것이다.23) 다시 말해 죽음은 수명과 온기와 의식이 동시에 신체를 떠나 모든 감각기능이 완전히 멈춘 것으로 그것은 하나의 불가역적인 사건이다.
19) S Ⅱ, 3; M Ⅲ, 24. 여기서는 임승택, 앞의 논문(2005), p.10 및 강윤곤, “열반을 통해 본 불교의 생사관”, 『종교연구』 제55집(2009), p.301 등의 인용문을 참고했음.
20) S Ⅱ, 43. 전재성,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불교생명윤리정립연구위원회편, 앞의 책(2006), p.173에서 재인용함.
21) 인간생명의 끝과 관련된 자살, 안락사, 식물인간, 뇌사 및 장기이식 등의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는 전술한 데미언 키온 지음, 졸역, 『불교와 생명윤리학』; 데미언 키온 지음, 졸역, 『불교응용윤리학 입문』; 피터 하비 지음, 졸역, 『불교윤리학 입문』등을 참조할 것.
22) S Ⅲ, 143. 전재성, 같은 논문(2006), p.173의 각주 2) 참조. 더 많은 인용문 및 추가설명에 대해서는 졸역, 『불교와 생명윤리학』(2000), p.246 이하 참조.
23) 정승석, 앞의 논문(2009),pp.81-82.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의 종류와 죽음의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같은 논문의 pp.85-93을 참조할 것.
이처럼 죽음은 감각기능의 멈춤과 함께 오온의 해체를 동반한다. 오온 가운데 색(몸)에 국한시켜 본다면 죽음은 지수화풍의 사대가 자연 속으로 흩어지면서 흙은 흙의 성분으로, 물은 물의 성분으로, 불은 불의 성분으로,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각각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다소 추상적으로 비치는 감각기능 역시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고 설명되고 있다.24) 그런데 붓다는 죽음을 말할 때마다 이를 늙음과 관련지어 언급한다.
“비구들이여, 늙음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종류의 존재들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늙음이 있는데, 노쇠, 치아의 부서짐, 머리칼의 희어짐, 피부의 주름살, 수명의 줄어듦, 감각기능(육입)의 노쇠를 늙음이라고 한다.
다양한 종류의 존재들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소멸이 있는데, 소멸하여 사라짐, 부서짐, 사라짐, 죽어감, 죽음, 온의 해체, 육신의 폐기를 죽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늙음과 이러한 죽음을 곧 늙음과 죽음이라고 한다.”25)
그렇다면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나 중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윤회의 한 부분에 불과하듯 이 죽음 또한 늙음과 함께 윤회의 사슬 속에 묶여있는 하나의 반복적 과정일 따름이다. 삶도 죽음도 윤회의 흐름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연쇄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별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는, 누구나 직면하게 될 윤회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인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죽음에 대해서도 언제나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24) S Ⅲ, 206-207.
25) S Ⅱ, 2-3. 안옥선, 앞의 논문(2006), p.28에서 재인용함.
(2) 십이연기 속의 환멸문적 존재
갖가지 업을 짓고 사는 인간존재의 현재 모습을 묘사한 것이 12연기의 유전문이라면, 환멸문(還滅門)은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12연기의 윤회적 지분을 하나씩 소멸시켜 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이는 곧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수행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에 이르는 윤리적 삶의 방식을 말한다. 그것의 서술형식은 유전문과는 정반대이다. 붓다의 표현을 빌리면 환멸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무명이 소멸할 때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할 때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할 때 육입이 소멸하고, 육입이 소멸할 때 촉이 소멸하고, 촉이 소멸할 때 수가 소멸하고, 수가 소멸할 때 애가 소멸하고, 애가 소멸할 때 취가 소멸하고, 취가 소멸할 때 유가 소멸하고, 유가 소멸할 때 생이 소멸하고, 생이 소멸할 때 노사, 근심,비탄, 고통(신체적 고통), 슬픔(정신적 고통),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고통의 무더기가 소멸한다.”26)
그렇다면 이 환멸문은 곧 생사윤회를 벗어 나는 실천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12연기의 각 지분을 하나씩 없애갈 때 삶과 죽음의 고통도 마침내 종식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바로 붓다였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도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붓다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마음의 근본 법칙을 깨달아 죽음의 정의 자체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영원한 해방을 얻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붓다의 가르침은 흔히 연기법으로 압축, 설명되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만약 연기를 본다면 이는 바로 법(法)을 보는 것이며, 만약 법을 본다면 이는 바로 연기를 보는 것이다.”27)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기법은 서로 상대방의 의지처가 되면서 동시에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세상의 존재 원리를 말한다. 그것의 위대성은 세상의 어떤 존재도 저 혼자 살수는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양 극단을 떠난 중도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연기법의 내용을 구체화한 것으로 열반을 향한 윤리적 행위의 실천원리가 바로 사제팔정도의 진리모음이다.
26) S Ⅱ, 1-2. 안옥선, 앞의 논문(2006), p.40의 각주 42) 참조.
27) “若見緣起便見法 若見法便見緣起”, 『中阿含經』卷7(『大正新修大藏經』1卷, 467a)
Ⅳ. 삶과 죽음의 윤리적 극복가능성-실천 및 수행의 요청
(1) 사제팔정도의 도덕적 함의
붓다는 연기법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깨달음을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의 정형화된 공식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잘 알려진 대로 사제란 ‘고(苦)-집(集)-멸(滅)-도(道)’ 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각각 이 세상이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르침과 그 고통의 원인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의 삼독심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 나아가 이를 지멸시키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의 가르침을 뜻한다.
붓다가 사제팔정도 가운데서도 특히 팔정도를 삶과 죽음을 극복하는 실천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은 그의 가르침이 종교 지상주의적이라기보다는 윤리지향적인 측면이 강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실천윤리학적으로도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적 불교학자인 프랑스의 에띠엔 라모트(Étienne Lamotte)는 붓다가 염두에 두었던 가르침은 고상한 철학이나 형이상학이 아니라 오히려 유용한 도덕과 윤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28) 말하자면 ‘깨달은 자’, 붓다는 그렇지 못한 중생들에게 먼저 도덕적 인간으로 사는 것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팔정도는 일상적 도덕행위이자 더 나아가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의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경전에 따르면 팔정도는 업을 소멸하는 길일뿐만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음(불사/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진리의 가르침으로 인식되었다.
예컨대,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의 소멸로가는 길인가? 그것은 팔정도이다.”29)라거나 “팔정도가 노사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12연기의 나머지 지분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함)”30)와 같은 표현 및 “건강이 최고의 얻음이며, 열반이 최고의 행복이며, 팔정도가 불사에 안전하게 이르는 최선의 길이다.”31)라는 언급, 그리고 “사리불 존자시여, 열반, 열반이라고들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열반입니까? 탐냄의 소멸과 성냄의 소멸과 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을 일러 열반이라고 한다.”32) 등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팔정도란 사제와 연기, ‘무상-고-무아’ 등에 대한 올바른 견해(正見); 관능적인 욕망이나 남을 해치려는 악의 등을 품지않는 올바른 생각(正思); 거짓말과 욕설 및 꾸밈말, 이간질 등을 하지 않는 올바른 말(正語); 도둑질이나 상해, 삿된 음행, 지나친 음주 등을 삼가는 올바론 행위(正業); 나쁜 직업 등을 멀리하는 올바른 생계수단(正命); 악한 것을 배제하고 선한 것을 추구하려는 올바른 자세(正精進); 몸과 느낌과 마음 및 그 대상 등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맑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집중(正定) 등의 여덟 가지 올바른 수행자의 길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도 초기불교는 특히 정념과 정정의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든 고통의 근원인 탐진치의 마음을 청정하게 만드는 올바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팔정도의 고제와 집제는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12연기의 유전문에 해당한다면, 멸제와 도제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일러주고 있다는 점에서 12연기의 환멸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통으로 얼룩진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곧 팔정도의 올바른 실천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2연기의 환멸문이 그랬듯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팔정도의 수행은 늙음과 노사 및 태어남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열반이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의 경지를 열어준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보다 자세한 것은 글의 목적상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28) 에띠엔 라모트, 호진 옮김, 『인도불교사 1』(서울: 시공사, 2006), pp.108-117 참조.
29) S Ⅳ, 133. 이 부분과 아래의 각주들은 안옥선, 앞의 논문(2006), pp.39-40에서 재인용함.
30) S Ⅱ, 42-43.
31) M Ⅰ, 510.
32) S Ⅳ, 251. 임승택, 앞의 논문(2005), p.13을 참고함.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팔정도를 올바르게 닦은 사람들의 과보는 고통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열반세계의 증득이다.33)
이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으로부터의 해탈(mokṣa;解脫)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생사) 자체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라는 점에서 불교윤리 고유의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의 길은 붓다가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열반을 얻은 존재는 더 이상 생사윤회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열반의 길은 멀고도 험하며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생사의 반복과 거듭되는 탐진치 지멸의 노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생사관은 사제팔정도의 인식 및 그 것의 실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의 극복문제는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윤리적 물음에 대한 종교적 답변이라고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리즈 데이비드(Rhys Davids) 역시 이와 유사한 입장에서 삶과 죽음을 극복한 궁극적 자유인 열반에 대해서 “윤리적 실천과 마음집중 및 통찰력(계정혜, 즉 팔정도의 가르침)에 의해 이 세상의 태어남(현생) 속에서도 도달할 수 있는 완전 무결한 윤리적 상태(ethical state)”34)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종교적 진리가 일상생활 속의 평범한 윤리적 행위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본 것은 일단 긍정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비로소 종교는 우리가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의 따뜻한 마음과 같은 삶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3) 강윤곤, 앞의 논문(2009), pp.309-310.
34)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 eds.,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86), p.362의 “Nibbāna” 항목.
(2) 수행 및 정진의 필요성
그러나 불교는 무엇보다도 수행(bhāvanā)의 종교이다. 세상의 실존적 모습은 ‘무상-고-무아’의 진리(연기법)를 철저하게 통찰하고 이를 몸으로 직접 체험할 때 비로소 드러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바로 그 자리에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수행이 요청되고 있다. 수행은 스스로 내면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오온에 대한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 영원히 자유로운 열반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수행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법을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는 물질현상(色)에 대해 싫증을 낸다(nibbindati); 느낌(受)에 대해 싫증을 낸다 ;지각(想)에 대해 싫증을 낸다; 지음(行)에 대해 싫증을 낸다; 식(識)에 대해 싫증을 낸다; 싫증을 내게 되면서 탐욕으로부터 떠난다; 탐욕으로부터 떠나면서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게 된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행위는 완성되었으며, 행해야 할 일을 행했고, 다시는 이러한 상태가 없음을 알아차린다.”35)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초기불교의 수행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대한 통찰’과 이를 통한 ‘탐진치심의 지멸’, 그리고 그것에 따른 과보인 ‘해탈/열반’을 얻는다는, 간단한 형식으로 정식화된다. 이러한 수행의 진행방식은 사제팔정도와 12연기관 등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6)
점차 수행이 무르익게 됨에 따라 수행자는 12연기의 모든 지분들이 한순간에 일어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허망한 인연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갈애와 집착심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수행자는 새로운 있음(有)과 태어남(生)으로 나가지 않게 되고 마침내 늙음과 죽음(老死)에서도 벗어난 완전한 지혜(vijjā)의 세계에 머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수행의 과정은 경전에서 “존자시여, 어떻게 알아야 하며 또한 관찰할 때 무명이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납니까? 비구여, ... 눈(眼) 따위에 의한 접촉(觸)으로 인해 즐겁거나 괴롭거나 혹은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受)들이 존재하나니, 바로 그것을 무상한 것으로 알아야 하며 또한 관찰할 때 무명이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나느니라.”37)와 같은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와 같은 지혜를 얻은 자가 곧 붓다이다.
그는 자기 내외부의 대상에 대해 더 이상 집착심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되는데, 이는 곧 그가 생사의 끊임없는 고통을 내용으로 하는 윤회의 사슬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는 수행의 목적인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온갖 종류의 느낌들에서 비롯되는 각종 유혹들에 시달리면서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매 순간 일어나는 생각들을 곧바로 알아차려서(‘무상-고-무아’의 자각) 이에 대처하는 것은 곧 12연기법과 팔정도의 일상적 실천수행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다시 말해 몸과 입과 마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체의 행위들을 윤리적인 삶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5) S Ⅲ, 66-68; V(Vinaya) Ⅰ, 13-14 등. 여기서는 임승택, 앞의 논문(2005), p.11에서 재인용함.
36) 이와 관련된 논의는 임승택, “마음지킴(sati)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 『보조사상』 제19집(2003), pp.322-332에 잘 나와 있다.
37) S Ⅳ, 31. 임승택, 앞의 논문(2005), p.18 참조.
Ⅴ.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 및 죽음은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붓다는 이 모든 과정을 고통이라는 한 마디 말로 진단했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이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라면 그것의 무게는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더 좋을 것이다. 불교의 생사관은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2연기나 사제팔정도의 가르침은 그와 같은 붓다의 바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불교는 생로병사라는 고통의 원인을 밝힌 다음, 그것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다양한 윤리적 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난 2,600여 년 동안의 불교역사는 곧 그러한 붓다의 진리다발에 대한 지역적 및 시대적 재해석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시켜 본다면 불교는 한 마디로 말해 삶과 죽음의 극복문제를 다룬 ‘생사학이었고, 생사학이며, 생사학이 될 것이다’라고 성격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논자는 불교에서 바라본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논의 범위를 지극히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초기불교의 생사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불교의 생사관이 불교전통들에 따라 워낙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어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섣부른 짐작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글이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히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38) 다만 논자는 그 와중에서도 불교의 생사관은 결국 윤리적 실천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임을 강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나름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평소 논자는 종교의 가르침도 일상적인 의미의 윤리로 편하게 와 닿을 수 있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러한 논의를 계기로 불교를 비롯한 여러 이웃 종교들의 생사관이 현대인들의 보편적 관심사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전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들은 생로병사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참으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본다.
38) 불교의 생사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은 정재걸, “불교와 죽음 그리고 죽음교육”, 『동양철학연구』제55집(2008), pp.106-136; 문을식, “불교는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보조사상』 제22집(2004), pp.177-205; 정병조, “불교철학의 생사관”, 『한국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서울; 대원정사, 1995), pp.277-296 등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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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Problem of Suffering of Life and Death in the Early Buddhism
-focused on its ethical overcoming possibility-
NamKyol Heo
Dongguk University
In the early Buddhism, life is defined just as the five Skandhas(五蘊) to which matter(色), sensation(受), imagination(想), action(行), and analytic knowledge(識) is temporally united, when the human’s figures are explained as a being of the gate of Transmigration(流轉門). on the other hand, death is defined just as a state into which the five ingredients of Skandhas is dissolved and then came back to the original position, when the human’s figures are described as a being of the gate of Nirvana(還滅門). Here Buddhism suggest the world of Nirvana which is an absolute free stage being out of all sorts of sufferings in this world. This is also the ultimate destination of Buddhist practice. If so, what is the concrete way to arrive at that? Buddha reply to the above question with the teachings of so called Four Noble Truths. The Four Noble Truths is really the same conception as the everyday’s moral behavior. Viewing from such a dimension, I think that the early Buddhism could be characterized not as a faith oriented religion, but as close to an ethics oriented religion. That is to say, Buddhism is an extremely anthropological religion. This paper examines such an ethical features of the early Buddhism roughly.
Key words : the early Buddhism, the five Skandhas, a being of the gate of Transmigration, a being of the gate of Nirvana, Nirvana, the Four Noble Truths, a faith oriented religion, an ethics oriented religion.39)
▶ 투고일 : 2012.4.27. ▶ 심사(수정)일 : 2012.6.3. ▶게재확정일 : 201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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