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스크랩] 탐욕(貪)ㆍ분노(瞋)ㆍ무지(癡)의 철학적 읽기

장안봉(微山) 2016. 6. 4.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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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ㆍ분노ㆍ무지의 철학적 읽기

 

박태원(울산대)

 

 

[한글 요약]

 

붓다의 깨달음이 연기법이기에, 붓다는 자신의 모든 언어를 ‘연기적’으로 펼친다. 따라서 붓다와 대화하려는 사람들도 그의 모든 언어를 ‘연기적’으로 읽어야 한다. 붓다는, 탐욕ㆍ분노ㆍ무지에 대해서도 그 발생과 소멸의 조건을 밝히는 ‘탐/진/치 연기 설법’을 설하고 있다. 세 가지 느낌이 탐·진·치의 잠재성향을 발생시키는 조건이며, ‘아름다운 표상’·‘적의의 표상’·‘표상을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不如理作意)이 탐욕과 분노의 발생 및 증폭이 조건이고,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이 무지의 발생/증폭 조건으로 설해진다.

또한 멸(滅)연기/명(明)연기를 구현하는 다채로운 교설과 수행법이 탐/진/치의 소멸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붓다의 이러한 탐/진/치 연기교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층위와 좌표에서의 ‘연기적 이해’가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삶에 새겨진 탐/진/치의 결(理)과 무늬(彩)를 철학적 시선에서 음미해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붓다 진리관의 두 가지 철학적 기초를 ‘두 층의 경험주의’와 ‘실존 실용주의’로 압축시켜 탐/진/치 문제와의 연관을 읽어보는 동시에, 불변자아의 환각과 탐/진/치 현상의 연기적 관계를 읽어 보았다.

 

붓다의 실존 실용주의는 ‘탐욕·분노·무지를 축으로 삼는 삶의 실존적 오염과 왜곡을 치유하는 문제해결 능력을 중시하는 태도’, 다시 말해 탐욕·분노·무지를 조건으로 수립된 삶의 실존상황에 적용하여 탐욕·분노·무지의 문제를 경험적으로 해결하는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것에만 진리자격을 부여하겠다는 태도이다. 또한 경험 가능한 것, 그리고 경험을 통해 진실 여부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 탐구의 범주로 설정하겠다는 것이 붓다의 경험주의이다.

붓다의 경험주의는 두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층은, 진리 주장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층은, 진리 주장은 ‘온전한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 혹은 경험 가능한 것들은 ‘온전한 것과 왜곡된 것’의 두 유형이 있으며, 진리와 하나 됨은 ‘온전한 경험’으로써 구현된다는 것이, 붓다 경험주의의 궁극적 지향이다. 그리고 탐/진/치는 근원적으로 자아환각의 보존충동과 연관시켜 읽을 수 있다.

 

주제분야 : 불교철학, 인도불교, 초기불교

주 제 어 : 탐욕, 분노, 무지, 경험주의, 실존 실용주의

이 논문은 2015년도 울산대학교의 연구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Ⅰ. 탐욕(lobha 貪)ㆍ분노(dosa 瞋)ㆍ무지(moha 癡)

 

붓다의 언어는 다양한 매듭이 중층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하나의 새끼줄이다. 다양하게 꼬여진 언어의 새끼줄을 모두 수렴하여 묶는 매듭, 새끼줄 꼬기를 출발시키고 마무리하는 매듭들이 다채롭게 배열되어 있다.

탐욕·분노·무지는 붓다의 언어 새끼줄에서 목격되는 수렴과 발산의 대표적 매듭이다. 불학의 구성은 탐욕·분노·무지에서 출발하고,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사유의 결(理)과 무늬를 다루는 철학적 읽기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탐욕·분노·무지의 문제를 음미해 본다.

 

탐욕·분노·무지(이하 탐·진·치로도 표기)의 문제는 붓다 교설이 발산하고 수렴되는 원점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1] 붓다는 수행의 과제와 목표를 일관되게 탐·진·치를 중심으로 설하고 있다. 니까야에서 확인되는 붓다의 탐·진·치 관련문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

 

탐·진·치의 그침이 무위(無爲, Asaṅkhata: 行에서 풀려남)인 열반이며2] 청정범행의 완성이고3] 불사(不死)의 지평이자4] 최상의 평화이다.5]

세존은 자신을 일컬어 ‘탐·진·치를 멸진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잠을 잘 자는 사람’이라고 한다. 6]

불·법·승 삼보(三寶)는 탐·진·치 지멸의 상징이며, 7] 탐·진·치와 지혜의 눈(혜안)이 유익한 법의 쇠퇴 여부를 결정한다.8]

 

탐·진·치는 모든 업의 근원으로서, 9] 업은 탐·진·치에서 생기는 것과 탐·진·치 없음에서 생기는 것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10] 탐·진·치 때문에 일어난 업은 ‘해롭고’ ‘비난받아 마땅하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다른 업을 일어나게 하고’ ‘업을 소멸하게 하지 않으며’, 11] 탐·진·치 없음에서 일어난 업은 ‘유익하고’ ‘비난받을 일 없고’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고’ ‘다른 업을 일어나지 않게 하며’ ‘업을 소멸하게 한다.’ 12]

또 탐·진·치는 세 가지 해로움의 뿌리인데 비해 탐·진·치 없음은 세 가지 이로움의 뿌리이고, 13] 탐·진·치가 좋음/유익함(kusala, 善)과 좋지 않음/해로움(akusala, 不善)을 나누는 기준이다. 14]

 

1]탐·진·치를 중심주제로 다룬 연구로는 안옥선의 「불교덕윤리에서 부정적 성향의 제거 –탐진치의 지멸」(『불교학연구』26호, 불교학연구회, 2010)이 눈에 띈다.

2]『몸에 대한 마음챙김 경(S43:1)』(이하 상윳따니까야는 각묵 번역본)

3]『어떤 비구 경1(S45:6)』4]『어떤 비구 경2(S45:7)』

5]『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N.Ⅲ.237)』(이하 맛지마니까야는 전재성 번역본)

6]『알라와까 경(A3:34)』(이하 앙굿따라니까야는 대림 번역본)

7]『깃발 경(S11:3)』8]『쇠퇴 경(A4:158)』9]『업의 근원 경(A10:174)』10]『인연 경(A6:39)』

11]『원인 경1(A3:107)』12]『원인 경2(A3:108)』13]『불선근 경(A3:69)』

14]『밧차곳따의 큰 경(MN.Ⅰ.489)』

 

 

감각능력(六根)과 대상(六境)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세 가지 느낌(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즐거움과 괴로움에 쏠리지 않은 느낌)은 각각 탐욕/분노/무지의 잠재적 경향의 발전과 연관되며, 15] 대상(육경/경계)을 탐·진·치로서 경험하는가 아닌가가 해탈수행의 핵심이다.16]

식(識)이 감각능력(육근)과 감각대상(육경)의 관계를 ‘빠져 듦과 종속’으로 처리하게 되는 조건/원천/이유가 탐·진·치이다. 17]

탐·진·치에 묶이면 자신과 타인 그리고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게 되고, 탐·진·치에서 풀려나면 자신과 타인 그리고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18]

두려움과 공포, 슬픔은 탐·진·치에서 오며,19] 사유의 그릇인 개념도 탐·진·치에 물들어 있다. 20]

오온을 탐욕의 대상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여래4구(四句, 사후 여래에 대한 존재/비존재/존재·비존재/비존재·비비존재의 판단)의 개념환각에 빠지고, 오온을 탐욕의 대상으로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여래4구의 덫에 빠져들지 않는다. 21]

 

15]『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MN.Ⅲ.280)』/『화살 경(S36:6)』

16]『나가라빈다의 장자들에 대한 경(MN.Ⅲ.290)』

17]『유액을 가진 나무 비유 경(S35:231)』

18]『라시야 경(S42:12)』

19]『깃발 경(S11:3)』/『끊음 경(S1:71)』/『마가 경(S2:3)』

20]『비구 경1(S22:35)』/『비구 경2(S22:36)』

21]『사리뿟따와 꼿티따 경3(S44:5)』

 

 

판단/평가/이해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초기조건인 표상(nimitta, 相)은 탐·진·치의 산물이며,22] 동시에 아름다운 표상(相)은 탐욕(감각적 욕망)의 조건이고 적의의 표상은 분노의 조건이 된다. 23]

탐욕·분노가 발생하고 증폭하는 원인/조건은 ‘아름다운 표상·적의의 표상’ 및 그것을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ayoniso manasikāra, 不如理作意)이고, 무지 발생과 증폭의 원인/조건은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不如理作意)이다. 그리고 탐욕·분노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난 것이 사라지게 되는 원인/조건은 ‘부정(不淨)의 표상·자애심’ 및 그것을 ‘지혜롭게 마음에 둠’(yoniso manasikāra, 如理作意)이고, 무지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난 것이 사라지게 되는 원인/조건은 ‘지혜롭게 마음에 둠’(如理作意)이다.

 

탐욕은 허물은 적지만 천천히 사라지고, 분노는 허물은 크지만 빨리 사라지며, 무지는 허물은 크고 천천히 사라진다.24] 탐·진·치는 계·정·혜 삼학 수행의 구조와 맞물려 있다.

중생은 계행/마음/견해의 결함이 있는데, 오계를 범하는 것이 계행의 결함, 탐욕과 분노는 마음의 결함, 연기법을 외면하는 것은 견해의 결함이다. 따라서 오계를 준수하면 계행의 구족이고, 탐욕과 분노가 없으면 마음의 구족이며, 연기 정견을 지니면 견해의 구족이다. 견해의 결함이 곧 무지이라는 점에서, 탐욕·분노는 정학의 대상이고 무지는 혜학의 대상인 셈이다. 25]

선천적 탐·진·치 경향의 강약과 5근(信/精進/念/定/慧) 강약의 상호관계에 따라, 수행 진보의 난이와 최상의 지혜 성취의 더디고 빠름이 결정되기도 한다.26]

위빠사나 관법으로 수행할 경우, 탐욕은 부정관, 분노는 자애관, 아만/무지는 무상/무아관으로 대처한다. 27] 사마타 선정수행으로 보면, 초선(初禪)의 경지에서 탐욕과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풀리고, 제4선(第四禪)의 경지에서 무명의 잠재적 경향이 풀린다. 28]

 

22]『고닷따 경(S41:7)』

23]『조건 경1(A2:11:6)』/『조건 경2(A2:11:7)』

24]『외도 경(A3:68)』

25]『결함 경(A3:115)』

26]『상세하게 경(A4:162)』. 그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천적 탐/진/치

五根

  차이

 강  약  도닦음 어렵고, 최상의 지혜 더딤
 강  강  도닦음 어렵고, 최상의 지혜 빠름
 약  약  도닦음 쉽고, 최상의 지혜 더딤
 약  강  도닦음 쉽고, 최상의 지혜 빠름

 

27]『바쎗타의 경(MN.Ⅱ.196)』. 무지의 대처방법은 『탐욕 경(A6:107)』에서는 통찰지혜, 『깨달음 경(A9:1)』에서는 호흡념(일으킨 생각/尋을 대처)과 무상관(유신견/有身見을 대처)으로 설해진다.

28]『교리문답의 작은 경(MN.Ⅰ.299)』

 

 

Ⅱ. 진리관의 문제와 탐욕·분노·무지

 

1. 붓다 진리관의 철학적 기초 – 경험주의와 실존 실용주의

 

니까야/아함이 얼마나 붓다의 육성을 담고 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모든 불교 문헌들 가운데 붓다의 육성과 체취가 가장 짙게 배어있는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니까야/아함을 관통하는 ‘진리에 대한 관점’의 철학적 기초로서는 두 가지가 주목된다. 경험주의와 실존 실용주의가 그것이다.

붓다의 경험주의를 서양철학 계보에서의 경험주의로 치환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공유되는 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니까야/아함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는 붓다의 경험주의적 태도는 ‘경험/체험을 진리의 토대와 기준으로 삼는 태도’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붓다의 진리관은 ‘탐욕·분노·무지에 의해 발생한 문제를 가장 잘 풀어주는 해법이 진리’라고 하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제해결 능력을 진리치의 기준으로 삼는 프래그머티즘의 태도와 상통한다. 다만 붓다가 풀고자 하는 문제유형이 탐욕·분노·무지에 연루된 실존 오염의 문제라는 점에서, 현대 프래그머티즘과는 구별하여 ‘실존 실용주의’라고 불러본다.

따라서 붓다의 실존 실용주의는 ‘탐욕·분노·무지를 축으로 삼는 삶의 실존적 오염과 왜곡을 치유하는 문제해결 능력을 중시하는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경험 가능한 것, 그리고 경험을 통해 진실 여부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 탐구의 범주로 설정하겠다는 것이 붓다의 경험주의이다. 아울러 탐욕·분노·무지를 조건으로 수립된 삶의 실존상황에 적용하여 탐욕·분노·무지의 문제를 경험적으로 해결하는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것에만 진리자격을 부여하겠다는 것이 붓다의 실존 실용주의이다.

 

붓다의 경험주의와 실존 실용주의는 탐·진·치를 매개로 결합되어 있다. 탐·진·치는 경험/체험의 대상이다. 정신·물리적 몸(오온)에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지금 여기’의 현상이며, 그 현상들은 전적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탐·진·치는, 경험적 실재와 무관하게 성립할 수도 있는 개념이 아닐 뿐더러, 추론으로 성립하는 논리적 사태도 아니다. 몸에서 직접 접촉하고 알게 되는 경험적 사태가 탐·진·치이다.

그런 점에서 탐·진·치는 ‘실존의 불교적 문제’이다. 그리고 실존 실용주의는, 탐·진·치를 발생조건으로 하는 경험적 실존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을 진리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실존의 탐·진·치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어주는 문제해결 능력을 진리의 자격조건으로 보는 시선이 실존 실용주의이다. 따라서 경험주의와 실존 실용주의는 탐·진·치를 매개로 진리의 범주와 능력을 설정하는 두 시선이며, 상호 의존적으로 연관된다.

 

상호 연루된 경험주의와 실존 실용주의의 태도에 의해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붓다의 시선은, 맛지마니까야의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Cuḷamāluṅky aputtasutta)』29] 상윳따니까야의 『심사빠 숲 경(Siṃsapāvanasutta)』30] 앙굿따라니까야의 『깔라마경(Kālāmasutta)』31] 등에서 그 전형이 목격된다. 특히 『깔라마경』은 ‘탐·진·치의 문제/경험주의/실존 실용주의’를 결합시켜 진리판별의 기준문제를 다루고 있다.

 

29]『맛지마니까야(M1:426)』

30]『상윳따니까야(S56:31)』

31]『앙굿따라니까야(A3:65)』; 『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 경 -』(소마 영역/현음 번역, 고요한 소리, 1988)

 

 

2. 경험주의적 진리관과 탐욕·분노·무지

 

세계의 발생과 소멸 및 범주를 오온(五蘊)이나 육근(六根)을 조건으로 하는 18계의 범주에서 파악하는 것은 명백히 경험주의의 세계관적 기초이다. 붓다는 오직 감각기관(육내처)과 대상(육외처), 그리고 이 둘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경험세계(오온/18계)의 탐·진·치 문제만을, ‘풀 수 있는/풀어야 하는’ 문제로 선택한다.32]

탐·진·치에 연루된 경험/세계지평을, 탐·진·치가 없는 경험/세계지평으로 바꾸는 것만을, 구도의 과제로 선정한다. 인간이 경험 가능한 행위(업)는 ‘탐·진·치에서 생기는 것’과 ‘탐·진·치 없음에서 생기는 것’의 두 가지일 뿐이며, 이것만을 진리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33]

아라한이나 여래의 죽은 후의 상태, 34]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붓다의 경지나 선정의 경지에 대한 이런저런 사전 헤아림, 오지 않은 업의 과보, 세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에 몰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도, 직접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시선의 연장선에 있다.

 

붓다의 경험주의는 경험적 근거를 지니지 않은 판단이나 주장에 대해 원천적 불신을 제기한다. 그리하여, 경험적 근거를 요구하지 않거나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믿음/선호/구전/이론/사변에 의지하지 말며, 경험범주인 육내외처에서 탐·진·치를 기준으로 문제에 대처할 것을 권한다. 36]

니간타의 고행주의가 느낌의 원인을 전생의 업으로만 돌려버리는 것을 비판하는 붓다의 논법도 같은 맥락이다.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논거 위에 수립한 니간타의 고행주의는, 붓다의 경험주의로 볼 때, 무의미하고 독단적이며 해롭다. 37] 붓다가 자신이 설하는 진리(법)의 특성을 요약하고 있는 정형구는 이와 같은 경험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탐·진·치에서 풀려남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지금 여기에서의 경험)이고, ‘와서 보라는 것’(직접 경험으로 검증되는 것)이며, ‘향상으로 인도하고’(경험으로 확인 가능한 향상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각자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법의 특징(스스로 보아 앎/시간이 걸리지 않음/와서 봄/향상으로 인도/각자 알아야 함)은 탐·진·치의 증장/소멸에 따른 고통/행복 경험의 변화를 통해 직접 확인/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38]

 

32]『세상 경(S1:70』/『로히땃사 경(S2:26)』/『일체 경(S35:23)』/『우빠와나 경(S35:70)』/『쌍(雙) 경1(S35:92)』/『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음 경(S35:94)』

33]『원인 경1(A3:107)』/『원인 경2(A3:108)』/『인연 경(A6:39)』

34]『야마까 경(S22:85)』/『아누라다 경(S22:86)』

35]『생각할 수 없음 경(A4:77)』

36]『방법이 있는가 경(S35:153)』

37]『사와까 경(S36:21)』

38]『라시야 경(S42:12)』/『어떤 바라문 경(A3:53)』/『스스로 보아 알 수 있음 경1(A6:47)』/『스스로 보아 알 수 있음 경2(A6:48)』

 

 

그런데 붓다의 경험주의는 두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층은, 진리 주장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층은, 진리 주장은 ‘온전한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 혹은 경험 가능한 것들은 ‘온전한 것과 왜곡된 것’의 두 유형이 있으며, 진리와 하나 됨은 ‘온전한 경험’으로써 구현된다는 것이, 붓다 경험주의의 궁극적 지향이다.

 

니까야/아함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실재 그대로(yathābhūta, 如實)’라는 용어는 붓다 경험주의의 궁극을 지칭하는 전형적 표현으로 보인다. ‘실재대로 안다(yathābhūtaṁ pajānāti)’는 것은 ‘온전한 경험’ 지평이 열린 것이며, 이 경험지평에서 해탈의 명지(明知)가 밝아진다. 사성제 및 사성제의 다양한 변주들은 결국, 왜곡되지 않은 존재의 본래모습을 그대로 경험하는 ‘온전한 경험’의 가능조건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별망상 혹은 희론(戱論, papañca. 개념환각의 확산)은 존재의 온전한 면모를 왜곡시키는 인식적 장애이다. 그리고 이 인식장애는 모든 경험의 처소인 ‘지금 여기의 몸 범주’(오온/육근/12처/18계)에서 발생한다.

무지의 분별망상/희론에 의해 발생한 ‘왜곡된 세계경험’도 ‘지금 여기의 몸 범주’의 현상이고, 사성제 수행 등으로 생겨난 ‘온전한 세계경험’ 역시 ‘지금 여기의 몸 범주’에서의 일이다. 『맛지마니까야』의 「꿀과자의 경(Madhupiṇḍikasutta)」은 탐·진·치의 왜곡된 세계경험이 오온/육근의 지각경험에서 ‘느낌-지각-사유-희론-희론에 오염된 관념’이라는 연기적 연쇄를 통해 발생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39]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 40]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의 의미를, ‘지각경험은 언제나 모두 왜곡/오염되어 있을 뿐’이라는 의미로 읽는다면, 해탈/열반의 경험은 지각경험 범주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상수멸(想受滅, Saññāvedayitanirodha)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지각(saññā, 想)과 느낌(vedanā, 受)의 중지(nirodha, 滅)’로 보아 ‘모든 지각이 멈추고 감각기관이 외부로부터 차단된 상태’ ‘모든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 잠정적으로 중지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 41] 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감관을 통한 모든 지각은 의근(意根)의 결합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 의근의 기능은 생명이 유지되는 한 멈출 수가 없다는 점, 그리고 해탈/열반의 경험은 살아있는 육근에서 성취된다는 것(현법열반)을 모두 감안하면, 아무리 잠정적 형태라 할지라도 지각 자체의 중지를 상수멸의 상태로 보기는 어렵다. 설혹 가사상태라 할지라도 지각은 중지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한다. 안/이/비/설/신의 감관기능이 외부 세계의 정보유입과 차단되는 상태를 설정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럴 때에도 의근은 기억 등을 대상으로 내적 지각활동을 유지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느낌과 지각은 발생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2]

 

39]『꿀과자의 경(MN.Ⅰ.108)』, p. 260.

40]전재성은 papañca-saññā-saṅkhā를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으로 번역한다(p.260). 이에 비해 냐냐난다(Ñāṇananda)스님은 빠빤짜쌴냐쌍카가 ‘사념의 확산을 거치며 일어난 <개념화 경향의 특성을 갖는 관념이나 언어적 규정>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Concept and Reality in early Buddhist thought –An essay on ‘papañca’ and ‘papañca-saññā-saṅkhā’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1)/아눌라 번역, 『위빠사나 명상의 열쇠 빠빤차』,한언, 2006), pp.25-27.

41]예컨대 정준영의 「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불교학연구』제9호, 2004)/「초기불교의 깨달음 이해」(『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운주사, 2014)

42]의식상태, 무의식상태, 가사상태, 등 지각의 조건과 상태를 어떻게 분류하던 간에, 의근 기능이 살아있는 한 지각은 중지 내지 폐기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상수멸’이라는 용어와 관련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붓다 자신이 채택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용어 자체가 부적절한 것일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이고, 문자적 이해로 접근하는 것이 부적절할 가능성이 다른 하나이다. 필자로서는, 상수멸이라는 용어가 붓다의 육성일 가능성과 아닐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문자적 이해가 부적절할 가능성을 더 주목한다. 상수멸은, 정학(定學)을 구성하는 조건들의 의미지평 및 선정의 내용을 구성하는 언어들의 의미를 연기적 관계로 연관시켜 음미할 때라야 그 의미지평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수멸을 문자의 일상언어적 의미에 맞추어 이해하려는 주석이나 통설적 이해는 너무 단순하고 원색적이어서, 붓다 선정의 취지에서 일탈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붓다의 삶, 그리고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말에 의거하는 한, 해탈/열반은 살아있는 오온/육근의 몸에서 직접 경험/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지각활동은 어떤 수준과 내용으로든 단절되지 않는다는 점과, 인간의 모든 경험은 지각경험을 조건으로 성립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면, 해탈/열반의 ‘온전한 경험’과 분별/희론망상의 ‘왜곡된 경험’은 모두 지각경험 범주 내의 일이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지각하는 지평’과 ‘왜곡시켜 지각하는 지평’의 두 가지 지평 모두가, 지각경험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지평은 사실상 동일 사태에 대한 두 가지 관계방식이다.

인간의 몸은 언제나 존재의 ‘있는 그대로’(眞如) 지평을 대면하고 있다. 이 ‘있는 그대로’의 진여지평을 읽어 들이는 방식에 따라 ‘온전한 지각경험’과 ‘왜곡된 지각경험’으로 나뉜다.

중생의 지각은, 언제나 대면하고 있는 ‘실재(實在. 실체가 아니다) 그대로의 지평’, 그 진여지평을, 순간순간 놓치고 있을 뿐이다. 몸이 언제나 대면하는 실재지평, 그러나 그 지평을 순간순간 놓치고 마는 왜곡된 지각경험, 새로운 지각능력의 계발을 통해 실재지평을 지각에서 만나는 온전한 지각경험의 성취. - 이 세 가지가 불교철학과 수행의 근본구조이자 과제이다.

탐·진·치에의 속박과 그로부터 풀려남은, 이 철학과 수행구조의 핵심이다. 43]

 

흔히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거부로 이해되는 ‘무기(無記, avyākata. 설명되지 않은 것/대답되지 않은 것)’의 문제도 이러한 붓다 경험주의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 간단하게는 여래4구(如來四句, 사후의 여래에 대한 존재/비존재/존재·비존재/비존재·비비존재의 판단)나 신체와 정신의 동이(同異)판단에서부터, 10무기를 전형으로 14무기/16무기 유형까지 나타나는 무기설법은, 오랜 형이상학 전통을 유지해 온 서구인들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기설에 등장하는 질문들은 모두 경험적 명제가 아니다. 경험으로 그 진위를 판정할 수 없는 명제들이므로 ‘형이상학적 질문’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붓다의 판단거부는 ‘형이상학의 거부’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런데 붓다의 무기설법을 탐구하는 초점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거부한 이유’에 있다. 그 이유에 대한 추정이 무기설 탐구의 연구사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제시된 추정으로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무관심, 현실의 괴로움 문제에 집중하는 실천적 태도,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불가지론적 태도, 실재가 개념적 명제를 초월한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경험/분석철학적 태도, 사성제 같은 법설이 참된 철학적 문제임을 알리려는 것’ 등이 있다.44]

 

무기 설법을 대표하는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중아함『전유경』)에서 붓다는 10가지 유/무 판단과 관련한 말룽끼야뿟따의 질문에 대한 답변 거부의 이유를 독화살의 비유와 더불어 밝히는데, 이 견해들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탐·진·치를) 멀리 여의어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붓다 자신이 설명한 것은 ‘괴로움/괴로움의 발생/괴로움의 소멸/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며, 이 사성제 연기법은 ‘유익하고 청정한 삶과 관계가 있으며, (탐·진·치를) 멀리 여의고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45]

 

또한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에서는, 이러한 사변적 견해들은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으로서 ‘고통과 번뇌와 고뇌를 수반하며’ (탐·진·치를) ‘싫어하여 떠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깨달아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붓다는 이러한 사변적 견해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붓다는 오직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여 모든 환상과 혼란, ‘나’와 ‘나의 것을 만드는 모든 것, 자만의 잠재의식을 소멸시켜 해탈한다는 것이다.46]

 

43]후대에 전개되는 불교 인식논리학도 결국은 이 ‘온전한 지각경험’과 ‘왜곡된 지각경험’에 연관된 인식적/논리적 문제들을 다루는 학적 체계의 수립으로 볼 수 있다. 디그나가(Dignāga, 480–540)나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600-660)의 궁극관심사라 할 ‘직접지각(pratyakṣa)과 그 대상인 독자상(svalakṣaṇa)’은, 실재지평을 그대로 지각하는 ‘온전한 지각경험’의 조건이다. 다만, 독자상을 만나는 직접지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니까야/아함은 붓다가 설한 구체적 방법론을 전하고 있지만, 불교 인식논리학의 이론에서는 이 방법론에 대한 이해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전통적 주석이나 교학의 시선이 이 새로운 지각능력 확보 방법론에 대한 붓다의 언어를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읽어내고 있다고는 장담하기 어려워 보인다. 보다 개방되고 면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4]무기설에 대한 국내의 연구로는 「무기의 의미에 대한 고찰」(이중표, 『한국불교학』11, 한국불교학회, 1986)/「무기설에 대하여」(김용환, 『인문논총』37, 부산대학교, 1990)가 확인된다.

이중표는 무기설에 대한 학계의 이해를 ‘형이상학적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보는 관점과 ‘형이상학에 대한 적극적 태도’로 양분한 후, 소극적 태도로 보는 관점은 Murti의 분류에 따라‘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무관심’ ‘관심은 있었지만 현실 괴로움의 해결을 우선시하는 현실적/실천적 태도’ ‘불가지론자’로 보는 경우로, 적극적 태도로 보는 관점은 ‘무제약적 실재의 초월성을 나타낸 것’(Murti의 절대적 관념론 입장) ‘무기의 질문들이 참된 철학적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를 취한 것’(Kalupahana의 분석철학적 입장)으로 보는 경우로 정리한다.

아울러 논자 자신은, 무기의 질문들이 잘못된 철학적 태도에서 비롯된 무의미한 것들이기 때문에 올바른 철학적 방법(사성제 등의 불교교설)에 의해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 무기의 이유로 추정한다.

김용환은 무기설 관련문헌들을 종합하여 내용을 분석하고 선행 문헌학적 연구들을 정리하면서 무기설 유형의 형성과정을 추정하는 한편, 경전에 나타난 무기의 이유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아울러 무기설에 대한 학계의 관점들을 ‘형이상학의 부정과 거부’로 보는 시선과 ‘형이상학의 거부가 아니라 적극적 사유의 표현수단’으로 보는 시선의 두 가지로 구분한 후,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관점들을 연구사적으로 자세히 종합하는 한편,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일본학계에서 진행된 연구성과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결론으로, 여래4구가 무기설의 가장 원초적 형태일 수 있으며, 여기에 『범망경』에 등장하는 62견의 핵심내용을 종합함으로써 10무기가 성립하고 이어 14무기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용환은 ‘붓다가 『숫타니파아타』(sn837)에서 “나는 이런 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 없다”고 하고 무기설에서 침묵을 지키면서도 사성제를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모순이다.’(140쪽)고 한다. “나는 이런 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 없다”는 구절의 의미를 ‘견해 자체가 없다’는 것으로 본 것 같은데, 이 구절은 ‘그 어떤 견해도 자아에 귀속시키지 않는다’는 뜻이지 견해의 수립이나 개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무기의 태도와 사성제 등의 설법을 모순이라 할 수는 없다.

45]『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N.Ⅰ.426, 중아함 전유경』

46]『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MN.Ⅰ.483)』

 

 

답변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질문들은 모두 검증 불가능한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그리고 답변을 거부한 붓다의 태도는, 그가 제시한 거부 이유들을 감안한다면, ‘형이상학적 질문을 거부하는 철학적 근거와 원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철학적 태도를 ‘형이상학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가지론’ ‘실재의 개념초월’ 등에서 찾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붓다로 하여금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답변을 거부하게 하는 철학적 근거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실존 치유의 문제’ ‘검증 가능성의 문제’ ‘유익한/진정한 철학적 문제’ 등과 모두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철학적 이유들은 결국 두 가지 원리로 수렴된다. 하나는 ‘두 층으로 구성된 붓다의 경험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 실용주의’이다. 그리고 이 두 원리가 수렴되고 발산되는 원점은 ‘탐욕·분노·무지의 문제’이다.

 

붓다의 경험주의는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과 ‘온전한 경험/실재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입장이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붓다 경험주의로 볼 때, 무기설법에 등장하는 질문들은 배척될 수밖에 없다. 여래4구이든 10/14/16무기이든 간에, 모든 질문들은 결국 유(有)/무(無) 판단을 조건으로 성립된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유/무 판단은 존재와 세계의 연기적 지평을 일탈하는 실체론적 개념조건으로서 인식적 오류의 기초이다. 인간은 이 유/무 판단을 두 범주에 적용한다. 경험 가능한 세계의 지시와 분류 및 분석에 적용하기도 하고, 형이상학적 범주에 적용하기도 한다.

 

붓다 경험주의의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범주에 적용하는 유/무 판단명제는 검증 불가능한 무의미한 질문이므로 탐구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온전한 경험/실재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원리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유/무 판단명제들은 ‘경험적 실재에서 일탈한 왜곡된 사변적 견해들’로서 ‘온전한 경험/실재의 경험’ 가능성을 장애하므로, 이런 견해들에 몰두하면 할수록 개념적 독단과 환각의 덫에 걸려들어 해탈/열반의 삶에서 멀어진다. 따라서 붓다 경험주의의 두 번째 원리에 의해서도, 경험적 실재를 왜곡하는 실체론적 개념의 유/무 판단에 의거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거부되어야 한다.

 

실체론적 유/무 판단은 경험적 실재를 왜곡하는 개념적 환각이지만, 형이상학의 수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세계의 개념적 이해와 분석에서도 널리 채택된다. 무기설에 등장하는 형이상학적 명제의 조건이 되는 유/무 판단은 붓다 경험주의의 원리에 의해 거부된다. 그런데 경험세계와 연루된 유/무 판단은 어떻게 될까? 이 유/무 판단에 의거한 명제와 이론들은, 경험 가능한 것들에 적용된다는 점에서는, 붓다 경험주의의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에 충돌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온전한 경험/실재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원리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실체론적 유/무 판단은 ‘온전한 경험/실재의 경험’에 접속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경험의 실재를 은폐 내지 왜곡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경험세계를 대상으로 한 실체론적 유/무 판단에 대해서, 붓다는 침묵이 아닌 언설로써 대처한다. 답변이나 설명의 거부방식(無記)이 아니라, 실재에 상응하는 언어에 의해 비판하고 치유한다. 연기 통찰에 의거한 ‘연기적 방식의 언어와 논리’로써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붓다의 경험주의는, 경험 가능한 현상들의 ‘모든’ 문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붓다의 경험주의는 물리적/의학적/천문학적/생물학적 문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탐욕·분노·무지와 연관된 문제범주를 대상으로 삼는다. 경험세계의 과학적 탐구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붓다가 경험주의 원리를 적용하는 문제영역은 탐·진·치를 조건으로 성립한 문제들로 특화되어 있다.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답변을 거부한 또 하나의 철학적 이유인 실존 실용주의의 문제는 아래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3. 실존 실용주의적 진리관과 진리판별의 기준 그리고 탐욕·분노·무지

 

실존 실용주의는 ‘탐욕·분노·무지를 축으로 삼는 삶의 실존적 오염과 왜곡을 치유하는 문제해결 능력을 중시하는 태도’라고 정의하였다. 탐·진·치를 조건으로 발생한 실존의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풀어주는 힘, 그 문제해결 능력을, 진리의 자격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이 실존 실용주의이다.

붓다가 밝힌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설명거부의 이유들은, 탐·진·치의 실존오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만을 진리의 이름으로 설하겠다는 실존 실용주의의 천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존 실용주의는 『심사빠 숲 경』과 『깔라마경』에서도 명확하게 표명된다. 붓다가 심사빠 숲에 머물 때 나뭇잎을 비유 삼아 설한 가르침은,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문제해법들 가운데 오직 탐·진·치에 연루된 실존의 근원적 결핍을 해소하는 데 유효한 것만을 선택하여 진리의 가치를 부여하고 설한다는 붓다의 명시적 입장이다.47] 붓다에게 진리란, 고(苦dukkha, 삶의 근원적 불안)를 경험하게 하는 실존의 문제상황에 적용되어 그것을 해결해 주는 해법이다. 달리 말해, 탐·진·치에서 발생하는 실존의 근원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지식이나 이론은 붓다의 관심사가 아니며, 그런 지식이나 이론을 진리의 이름으로 탐구하지도 않았고 또 설하지도 않겠다는 입장이다.

47] 『상윳따니까야(S56:31)』

 

붓다의 이러한 입장은 어떤 주장과 이론의 진리치를 판별하는 문제에서도 고스란히 관철된다. 삶에 적용했을 나타나는 탐·진·치의 증가/감소를 기준 삼아 어떤 가르침의 진리치를 판단하라는『깔라마경』의 가르침은 그 전형이다.

 

철학적 탐구력이 돋보이는 깔라마인들이 붓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설하는 진리의 내용은 각기 다르다. 게다가 각자 자신의 가르침은 진리지만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라고 비난한다. 도대체 어떤 가르침의 진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진리 판별의 기준이 없다보니,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만 더해 간다. 붓다 당신은 무엇을 진리 판별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가?’ - 이에 대한 붓다의 응답에는 진리에 대한 경험주의 및 실존 실용주의의 태도가 종합되어 있다.

 

 

“(1) 그대들이 의문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깔라마인들이여,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거듭 들어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성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 해서, 추론이 그럴듯하다고 해서, 이유가 그럴듯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인물이 말한 것이라 해서, 혹은 ‘이 분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어떤 가르침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는 말라.

 

(2) 깔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생각하여 ‘이 가르침대로 따라 행하면 해롭고 괴롭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버리도록 하라. 또한 스스로 생각하여 ‘이 가르침대로 따라 행하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

 

(3) 어떻게 생각하는가, 칼라마인들이여.

사람의 마음속에 탐욕(분노, 무지)이 일어나면 그것이 그에게 이로움이 되겠는가, 해로움이 되겠는가?

(깔라마인) 해롭습니다, 존자시여.

(붓다) 그렇다. 그 사람은 탐욕(분노, 무지)에 빠져 그 탐욕(분노, 무지)에 압도되고 정복되었기에 산목숨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갖게 되고, 불륜을 행하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또 다른 사람마저도 그렇게 만들고 만다. 그리하여 해로움과 괴로움이 오래가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칼라마인들이여.

사람의 마음속에 탐욕(분노, 무지)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그에게 이로움이 되겠는가, 해로움이 되겠는가? (깔라마인) 이롭습니다, 존자시여.

(붓다) 그렇다. 그 사람은 탐욕(분노, 무지)에 빠지지 않고 탐욕(분노, 무지)에 압도되거나 정복되지 않아서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은 갖지 않으며, 불륜을 행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마저도 그렇게 인도한다. 그리하여 이로움과 행복이 오래가게 된다. 깔라마인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이 탐욕을 여의고 분노를 여의고 무지를 벗어나 올바로 깨어있다.” 48]

48] 『앙굿따라니까야(A3:65)』, pp.459-469; 소마 영역/현음 번역, 『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 경 -』, 고요한 소리, 1988.

 

 

붓다의 답변은 세 단계로 펼쳐지고 있다(구분을 위해 본문에 임의로 번호 추(1) 첫 단계는, 자기 삶에서 발생하고 직접 검증되는 경험과 무관한 것들을 진리판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어떤 주장이나 가르침을 삶에 적용했을 때 발생하는 경험적 변화를 이로움/해로움의 기준으로써 판단하라는 것이며, 셋째 단계는, 이로움/해로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탐욕·분노·무지라는 것이다.

 

첫 단계에서 붓다가 열거하는 진리판별의 부적절한 근거들은 모두 직접경험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경험을 통해 그 타당성을 검증하지 않은 것이거나, 검증할 수 없는 것들이다. 경험하지 않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것에 기대어 진리를 주장하는 태도를 붓다는 비판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어떤 가르침의 진리치를 판단하려면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경험적 결과’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 경험적 결과가 해롭고 괴로운 것이면 진리답지 못하다고 보아 외면하면 되고, 이롭고 행복한 것이면 진리답다고 보아 수용하면 된다는 것이 붓다의 조언이다. 경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문제풀이의 실제결과’를 기준으로 해법/진리의 타당성과 수준을 판정하자는 프래그머티즘의 정신은, 붓다의 관점과 분명 상통한다.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이로움과 해로움, 행복과 괴로움의 판별기준은 무엇인가? 문제풀이의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 탐욕과 분노와 무지가 그 기준이다. 탐욕과 분노와 무지가 증대되면 될수록 해로움과 괴로움이 커지고, 탐욕/분노/무지에서 풀려나면 날수록 이로움과 행복이 커진다는 것이 붓다의 관점이다.

 

경험을 통해 검증되지 않았거나 검증될 수 없는 것은 진리판별의 기준이 되기에 부적합하다는 경험주의 원리, 삶이라는 문제상황에 실제로 적용했을 때 발생하는 경험적 결과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탐·진·치를 기준으로 평가하여 그 해법의 진리치를 판단하라는 실존 실용주의 원리. - 붓다의 진리관은 이 두 원리를 조건으로 수립되어 있다. 집단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각 집단이 고안해 낸 논리와 주장의 허구 비판, 49] 연극집단의 자기옹호 논리에 대한 비판, 50] 상반되는 진리주장들을 처리하는 방법,51] 개종의 문제,52] 논리의 승리와 삶의 이익의 승리 문제 53] 등을 처리하는 붓다의 설법에는 일관되게 이러한 진리관이 적용되고 있다.

 

49]『짠다 경(S42:1)』

50]『딸라뿌따 경(S42:2)』

51]『빠딸리야 경(S42:13)』

52]『밧디야 경(A4:193)』

53]『아지따 경(A10:116)』

 

 

Ⅲ. 자아환각과 탐욕·분노·무지

 

실존 왜곡과 오염의 원인들이 탐욕과 분노 그리고 무지의 문제로 수렴된다는 붓다의 통찰은 충분히 타당하다. 삶의 모든 해악적 상황은 결국 개별화/집단화된 탐욕과 분노 및 무지의 표현 양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붓다는 진리의 모든 문제를 일관되게 탐·진·치를 중심으로 다룬다.

이러한 붓다의 입장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탐욕·분노·무지의 철학적 의미를 가급적 명료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채워지지 않은 감각적 욕망/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탐욕, 탐욕을 좌절시키는 것들에 대한 부정충동이 분노, 사성제에 대한 몰이해가 무지라는 것이, 아마도 탐·진·치에 관한 이해의 전형일 것이다. 54]

 

탐·진·치의 발생조건에 관해서는 붓다의 명확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다. 감각능력(六根)과 대상(六境)이 접촉할 때 발생하는 세 가지 느낌(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즐거움과 괴로움에 쏠리지 않은 느낌), 그리고 인식 성립의 초기조건인 표상(nimitta, 相)이, 탐·진·치의 발생조건으로 설해진다. 육근과 육경의 만남을 조건으로 세 가지 느낌이 발생하는데, 이 세 느낌이 각각 탐욕/분노/무지의 잠재적 경향을 발생시키는 조건이다.55]

또한 탐욕·분노가 발생하고 증폭하는 원인조건은 ‘아름다운 표상’·‘적의의 표상’ 및 그것을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ayoniso manasikāra, 不如理作意)이며, 무지가 발생하고 증폭하는 원인조건은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不如理作意)이다. 56]

 

세 가지 느낌이 탐·진·치의 잠재성향을 발생시키는 조건이며, ‘아름다운 표상’·‘적의의 표상’·‘표상을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ayoniso manasikāra, 不如理作意)이 탐욕과 분노의 발생 및 증폭이 조건이고,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不如理作意)이 무지의 발생/증폭 조건이라는 붓다의 설법은, 그 의미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일상적 지성과 직관으로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탐·진·치 발생연기의 철학적 의미는 단순하지도 않고 용이하게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탐·진·치의 발생조건을 밝히는 것은 곧 소멸조건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붓다가 설하는 탐·진·치 연기설법도 발생과 소멸의 조건을 동시에 밝히고 있다. 이 탐·진·치 연기설법의 의미를 읽어내려면 다양한 각도에서의 조명이 필요하다. 밑그림을 그려 본그림을 드러내는 기법에 비유한다면, 탐·진·치 연기설법이라는 본그림을 제대로 드러내려면 수많은 밑그림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탐·진·치를 자아환각과의 연관에서 읽어 밑그림 한 장을 그려본다.

 

54]안옥선은 냐나포니카(Nyanaponika)스님의 간략한 탐·진·치 정의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탐진치에 관한 이해의 전형으로 보이기에 그대로 옮긴다.

“탐심은 만족되지 않은 (감각적) 욕망, 쾌락, 혹은 갈애를 추구하는 마음이며, 진심은 욕망, 쾌락, 혹은 갈애에 대한 좌절로부터 발생하는 싫어함/혐오와 성냄/분노의 마음이다.

탐심은 쾌락/쾌감을 주는 것에 대한 좇음이며, 진심은 그 반대의 것에 대한 거부이다. 탐심이 좋아하여 끌려 즐기려는 마음이라면, 진심은 싫어하고 혐오하여 물리치고 성내는 마음이다. 탐심은 집착으로 나타나며, 진심은 회피, 혐오, 적의 등으로 표현된다. 탐심과 진심은 외적으로는 서로 다른 양태로 표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쾌에 대해서 환락·집착하며 고통을 거부·혐오하는 한 가지 마음작용이다. 보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탐심과 진심은 쾌추구(고거부) 본능의 표현이다.

냐나포니카 스님은 진심을 ‘탐심 혹은 쾌락에 대한 반작용’이라 하고 있는데, 이는 진심이 쾌추구 본능의 또 다른 표현임을 지적한 것이다. 갈애로 말하자면 탐심과 진심은 갈애의 표현이다. 감각적 욕망/쾌락에 대한 갈애와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가 탐심의 표현이며, 고에 대한 역겨움 때문에 생명을 회피하는 갈애, 즉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진심의 표현이다.

이와 달리 치심은 존재실상에 대한 무지의 마음으로서 존재를 무상/고/무아, 사성제, 혹은 연기/공/무아로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치심은 항상 탐심과 진심을 수반한다. 탐심과 진심에는 항상 치심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진치는 서로 분리된 세 가지가 아니다. 탐진치는 하나의 작용이다. 쾌락추구의 탐심과 쾌락추구 과정에서의 좌절/분노/적의의 진심은 치심을 전제하는 마음의 한 작용이다. 치심으로 인하여 쾌에 대해 환락·집착하고, 그 반대의 것에 대해서는 혐오·분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탐진치는 서로 수반하여 일어나는 하나의 작용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은 치심이다. 치심이 사라지면 탐심과 치심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앞의 논문, pp.252-254).

55]『여섯의 여섯에 대한 경(MN.Ⅲ.280)』/『화살 경(S36:6)』

56]『조건 경1(A2:11:6)』/『조건 경2(A2:11:7)』

 

 

1. 무지와 자아환각 그리고 비(非)연기적 이해

 

붓다는 무명을 ‘사성제(四聖諦)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57] 사성제는, 근원무지에 묶인 고통의 삶과 그 원인조건들(苦와 集), 근원무지에서 풀려난 해탈의 삶과 그 원인조건들(滅과 道)을 함께 열거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사성제 연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사성제 연기의 내용은 결국 ‘자아환각을 둘러싼 조건인과’로 압축된다. 불변의 본질을 지닌 독자적 자아/존재가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무지를 ‘유지/강화/표현하는 조건인과’(고집연기苦集緣起)와, 그 무지에서 ‘풀려나는 조건인과’(멸도연기滅道緣起)를 밝히는 것이 사성제 연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명은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은, ‘불변자아라는 환각을 둘러싼 두 가지 조건인과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불변자아라는 무지가 발생/유지/강화되는 조건인과와 소멸하는 조건인과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근원무지의 핵심을 차지한다.

 

무명의 핵심내용을 이렇게 본다면, 무명의 무지는 ‘불변자아에 대한 지적(知的) 선호’라 할 수 있다. ‘변치 않는 내용물을 자신의 본질로서 지닌 독자적 자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지적 경향성이, 근원무지의 정체성이다. 따라서 무명의 무지(無知, delusion)는 지식의 결핍이나 지능(知能, intellectual faculties, intelligence)의 열등이 아니다.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지능도 무지와 동반할 수 있다.

무지는 단지 ‘제대로 알지 못함’이라는 소극적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불변자아에 대한 지적 선호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 옹호와 방어 작업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불변의 독자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이해/관점에 대해서는, 그것을 피하거나 그에 반항하는 지적 작업을 수행한다.

따라서 무지는 자아환각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지식을 동원하고 정교한 논리를 마련한다. 자아환각을 움켜쥔 무지는 자기방어를 위한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무지의 치유가 가장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탐욕은 근본적으로 불변자아에 대한 기대를 채우려는 욕망이고, 분노는 이 탐욕과 맞물려 있는 것이므로, 무지가 탐욕과 분노를 발생시키는 원천이다. 탐욕이 자아환각을 유지하기 위한 긍정방식이라면, 분노는 동일 목적의 부정방식이다. 무지는 이 두 가지 환각유지 방식의 원천인 동시에, 양자를 결합시키는 매개역할도 한다.

 

무지의 일반적 특성은 ‘사실에 대한 이해의 왜곡’이다. 인간은 어느 상황, 어떤 대상에 대해서라도 ‘이해의 공백상태’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무지(無知)’라는 말은, ‘지식이나 이해의 공백’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과 이해’를 의미한다. ‘오해’ ‘편견’ ‘선입견’ ‘독단’ ‘독선’ 등이 모두 무지의 양상인 이유이다. 무지는 ‘잘못된 이해’이므로 관점이나 견해를 바꾸는 것이 무지 치유의 핵심이다.

 

무지가 삶을 오염시키는 근원적 요인이며, 무지를 치유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 - 이것은 분명 인간 특유의 사태이다. 인간이 고도화시켜 온 사유/언어의 능력이라는 것은 결국 ‘관점/견해/논리의 수립능력’이나 ‘법칙적/논리적 포착능력’, 즉 ‘이해능력’이다.

인간에게는 감성/감정의 현상도 ‘어떤 이해를 성립시키는데 기여하는 조건’이 된다. 예컨대 경이로움, 호감 같은 감정이 사물과 세계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는가 하면, 혐오나 반감 같은 감정은 오해나 편견을 성립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 이해능력은, 희망과 절망의 면모를 모두 품고 있다.

지식/이해능력을 ‘어둠을 밝히는 이성의 빛’으로만 찬탄하는 것도 치우친 태도이고, 지식/이해능력의 해악성에 환멸을 느껴 지식/이해를 ‘해로운 분별’이라고만 경멸하는 것도 치우친 태도이다.

지식/이해능력의 해악성은 경멸이나 거부와 같은 퇴행적 방식으로는 극복할 수 없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감으로써 그 그늘에서 탈출해야 한다.

 

57] 『분석 경(S12:2)』, p.101.

 

 

붓다의 태도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언어/논리/이해의 덫과 부작용을 지적하면서도 결코 언어/논리/이해의 능력을 포기하거나 폐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붓다의 시선은 상위 차원의 언어/논리/이해, 다시 말해 일종의 ‘메타(meta)적 언어/논리/이해의 능력’에 닿아 있다. 본질주의/실체주의에 입각한 언어/논리/이해를 비판할 수 있고, 비본질/비실체의 연기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차원 다른 새로운 이해/논리/언어의 능력을, 붓다는 성취하여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비(非)본질/비(非)실체인 존재와 세계를 읽어내는 이해’를 언어와 논리에 담아 펼쳐 놓는다. 붓다가 실존왜곡과 오염의 원점에서 무명의 무지를 지목하는 동시에, 명지(明知; 제대로 아는 것, 실재대로 아는 것, 있는 그대로 아는 것)를 통해 근원무지로부터의 자유(해탈)가 성취된다는 것을 밝힌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지닌 이중적 면모, 그 양가(兩價)적 의미를, 깊은 수준에서 드러낸 것이다.

 

인간 특유의 지식/이해능력에서 발생한 무지를 지식/이해능력의 자기향상을 통해 치유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도 용이하지도 않다. 지식/이해능력의 자기초월적 자기치유를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은 ‘이미 정착한 잘못된 지식/이해능력’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무지의 그늘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인가?

논리적 이해, 법칙적 판단, 개념분석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발달시켜 온 인간이, 왜 아직도 ‘오해, 편견, 독단, 선입견, 독선’ 타령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왜 아직도 오해나 편견, 선입견에 쉽게 빠져들며, 또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어려운 것인가?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라는 붓다의 말은 그 까닭을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불변자아라는 환각이 발생/유지/발전하는 조건인과와 소멸하는 조건인과를 알지 못하기에’, 다시 말해 연기적 사유를 외면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이나 견해도 ‘조건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기 때문에, 무지에 대한 선호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오해/편견/독단/잘못된 선입견/부당한 독선을 쉽게 수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 견해를 ‘조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견해와 같은 정신현상, 낮과 밤 같은 물질현상 등, 모든 현상은 예외 없이 ‘조건 인과적’으로 발생/소멸한다. 그리고 그 원인 되는 조건들은, 선택 가능한 것이든 불가능한 것이든, 모두 가변적이다. 이것은 모든 현상이 ‘가변적 조건에 따른 잠정적 양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이나 물질 그 어떤 현상도 ‘무조건/고정불변/확정/절대’의 사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견해나 관점도 마찬가지다. 어떤 판단이나 평가는 반드시 특정한 조건들에 의거하여 수립된다. 그 조건들이 얼마나 타당한가, 그리고 그 조건들과 견해/관점의 인과적 연결이 얼마나 적절한가에 따라, 견해나 관점의 타당성이 결정된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자신이나 타인의 견해를 ‘조건 인과적’으로 이해하며, 견해의 성립조건이 부적절하거나 틀렸으면 적절하고 합당한 조건인과로 대체하여 견해를 수정한다.

반면, 무지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신과 타인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이해하여, 이미 수립된 견해를 무흠결의 절대정답으로 확정하거나 절대오답으로 판정해 버리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부적절한 조건인과에 의해 수립한 오해/편견/독단/선입견일지라도, 자기 내지 자기집단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무조건/불변의 절대정답/절대오답’으로 확정하려는 태도를 선호하게 된다.

무지의 표현양상인 오해/편견/독단/선입견은 ‘조건적 이해능력’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동시에, 이미 수립된 오해/편견/독단/선입견들은 그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이해하여 그대로 유지시켜 간다. 다음과 같은 붓다의 연기적 언어시설은 이상의 논의를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던 왓지야마히따 장자에게 외도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장자여, ‘사문 고따마는 모든 고행을 비난하고, 난행고행의 삶을 사는 고행자를 전적으로 힐난하고 비방한다.’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존자들이여, 세존께서는 모든 고행을 비난하지 않으시고, 난행고행의 삶을 사는 고행자를 전적으로 힐난하고 비방하지 않습니다. 존자들이여, 세존께서는 비난해야 할 것은 비난하시고 칭송해야 할 것은 칭송하십니다.

세존께서는 비난해야 할 것을 비난하시고 칭송해야 할 것을 칭송하시면서 분석적으로 설하시는 분이지, 획일적으로 설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왓지야마히따 장자는 외도들의 주장을 굴복시킨 후 붓다를 찾아가 외도들과 나눈 대화를 아뢰었다.

붓다는 장자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자여, 나는 모든 고행을 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고, 모든 고행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소임을 실천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고, 모든 소임을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고, 모든 노력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놓아버림을 놓아버려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고, 모든 놓아버림을 놓아버리지 않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결정을 결정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결정을 결정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장자여, 고행을 하여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쇠퇴하면, 그런 고행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고행을 하여 해로운 법들이 쇠퇴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하면, 그런 고행은 해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58]

58]『왓지야마히따 경(A10:94)』

 

 

2. 탐욕·분노와 자아환각

 

탐욕은 분명 욕망에 대한 지칭이지만, 모든 욕망이 탐욕은 아니다. 해탈하려는 욕망을 탐욕이라 할 수는 없다. ‘모든 언어를 조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연기 깨달음의 연장선에 있다. ‘탐욕’이라는 말도 연기적, 다시 말해 조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두 유형의 욕망을 그 발생조건에 따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풀려나야 할 욕망을 ‘조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 계기는, 사유능력과 언어능력 및 자아의식의 발달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고도의 사유능력과 언어능력, 이에 상응하여 독특하게 발달한 자아의식. - 진화과정에서 이들이 뚜렷해지는 시점에서, 이 세 면모를 조건으로 삼은 독특한 욕망이 발생하여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독특하게 강화된 ‘자아의식에 의거한 욕망’, 분석/판단/평가하며 기억하고 예상하는 ‘사고능력에 의한 욕망’, 개념의 체계를 만들고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언어능력에 의거한 욕망.’ - 인간의 이러한 욕망은 생존과 번식의 생물학적 욕구의 수준과는 분명 차원을 달리한다. 생존과 번식 충동에 따른 생물학적 욕망을 1차 욕망, 사유/언어/자아에 의해 발생한 욕망을 2차 욕망이라 부른다면, 지금 우리의 몸은 진화과정에서 수립된 생물학적 1차 욕망과 인간적 2차 욕망의 궤적들을 모두 계승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강력한 오염과 해악의 면모도, 독특한 희망과 특유의 가능성도, 모두 2차 욕망에서 발생한다. 붓다는 인간 욕망의 이러한 이중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희망과 긍정의 면모를 구현하는 길을 설했다. 따라서 ‘불교는 모든 욕망을 버리라고 한다’는 식의 이해는 비연기적 오독(誤讀)이다.

1차 욕망이든 2차 욕망이든, 욕망은 크게 두 유형이다. 하나는 ‘유익한 욕망/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해로운 욕망/욕구’이다. 탐욕은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욕망이다.

 

결핍을 채우려는 충동을 ‘욕망’이라고 하고(욕망과 욕구라는 용어는 굳이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욕망은 ‘생존과 번식’ 본능에 연루되어 있다는 생물학적 시선도 수용해 보자. 그리고 욕망을 ‘1차 욕망과 2차 욕망’ 혹은 ‘생물적 욕망과 인간적 욕망’으로 구분하자.

1차 욕망 혹은 생물적 욕망은 생존과 번식의 결핍을 채우려는 충동으로서, 이 욕망은 결핍상태만 해소되면 그친다는 것이 특징을 지닌다. 인간의 욕망도, 일차적으로는 ‘생존과 번식’의 본능충족과 관련된 감관의 결핍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는, 생물적 1차 욕망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생물적 결핍이 해소된 이후에도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허기를 느낀 사람이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아는 사람이 비싼 요리를 먹는 것을 보면, 그는 라면으로 배를 채워 식욕이 해소되었지만 만족스러워 하지 못한다. 추워서 낡은 옷을 입었는데 친구가 고가의 명품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비록 춥지는 않지만 옷에 대한 욕망은 해소되지 않는다.

 

생물적 감관 결핍이 충분히 해소되었지만 관련된 욕망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인간 특유의 강한 ‘자아의식’ 때문이다. 사유능력과 언어능력에 의거하여, 타자와 구분되는 자아를 ‘인식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아를 인식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자아를 개념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개념적 인식에 의해 자아를 경험하는 것이 인간이다.

개념적 경험에 의거한 인간의 인식적 자아감은, 여타 생물들의 본능적 자아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진화과정의 그 어느 단계부터인가 뚜렷해진 이 독특한 자아의식과 자아감은, 논리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도의 사유능력과 맞물려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뇌의 발달과정에서 본다면, 영장류 인간의 뇌에서 목격되는 대뇌 신피질의 형성과 보조를 맞춘다.

 

긍정으로 찬탄하든 부정으로 비판하든, 인간의 행보를 관통하는 거대한 허구는 ‘불변자아의 관념’이다. 인간의 자아의식은 ‘불변의 자아’라는 관념을 본능처럼 품고 있다. 자아 혹은 자아 안에 변치 않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 정신이든 물질이든 그 변치 않는 것이 바로 자아의 핵심이고 본질일 것이라는 본능과도 같은 신념을, 인간의 자아의식은 거의 무의식처럼 품고 있다. 만약 불변의 자아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실제로 있다면, 인간은 그것으로써 자아감을 충족시켜 동요 없이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불변의 그것’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자아감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아 내지 존재라고 부르는 것 그 어디에도 불변의 것이 목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특수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자기를 재인식하는 강한 자아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아를 확인하여 뚜렷하고 안정적인 자아감을 경험하려 한다. 만약 불변의 자아가 실제로 있다면, 이 자아감의 확보는 쉽게 성공할 것이다. 그 불변의 자아야말로 선명하고 안정적인 자아감의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의 존재를 불변의 안정으로 경험하고 싶지만, 변치 않는 자아는 어디에도 없다. 자아를 불변자아에서 확인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게 마련이다.

 

이 특수한 인간적 사태에 대응하여, 인간은 발달한 사고능력에 기대어 우회적 해법을 선택한다. 탐욕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을 종합할 때, 크게 세 가지 방법이 목격된다.

‘감관쾌락의 보존’ ‘소유’ ‘비교’를 통한 자아확인이 그것이다. 탐욕이라는 욕망은 이러한 우회적 자아확인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탐욕은 ‘강한 이기적 자기중심성’ ‘무한 증폭’ ‘노예적 의존성’ ‘무지의 고착’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불변자아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첫 번째 방식은 ‘감관쾌락의 보존을 통한 자아확인’이고, 이 과정에서 탐욕이 발생한다. 니까야/아함에서 모든 붓다 설법의 출발점처럼 등장하는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이에 해당한다.

 

동물의 본능적 자아감은 오직 감관의 1차적 지각에 의하여 성립되며, 감관의 생물적 결핍을 해소할 때 발생하는 쾌락감을 조건으로 한생존 자아감에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인간의 자아감은 1차 지각을 재가공한 2차 지각인 인식적 경험들에 의해 수립되며, 동물과 같은 1차적 생존 자아감에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개념적/인식적 자아감에 의해 자아를 확인하기 때문에, 감관의 생물적 결핍이 해소될 때 느끼는 쾌락을 단지 생존 자아감 차원에서 경험하지 않는다.

감관의 결핍이 충족될 때 인간은, 생존 자아감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나는 ~한 쾌락을 경험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적 자아감을 확인한다. 쾌락이 생존 자아감을 확인시키는 조건에 그치지 않고, ‘1인칭의 개념적/인식적 자아’를 확인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 개념적/인식적 자아감은 동물의 생존 자아감에 비해 지속적이고 자아의식적인 자아감이다. 기억하고 비교하며 자아를 재인식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개념적 자아가 없으므로, 감관결핍 해소에 따른 쾌락강도가 줄거나 사라진다고 해도 개념적 자아의 훼손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쾌락경험을 개념적 자아감 수립의 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쾌락강도의 감소와 소멸을 ‘1인칭 개념자아의 불안과 훼손’으로 경험한다. 생물적 본능이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쾌락강도를 더 높이려는 욕망, 줄어드는 쾌락강도를 재강화하려는 욕망, 사라지는 쾌락을 복원시켜 지속시키려는 욕망을 일으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쾌락의 강도와 지속 여부를 자아감의 강도와 안정의 문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쾌락강도가 떨어지면 자아감이 떨어지고, 쾌락감이 지속되지 않으면 자아감이 위협받으며, 쾌락감이 소멸하면 자아감의 훼손을 경험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감관의 대상인 맛/소리/모습/감촉/냄새/지식 등의 내용을 바꾸는 방식을 통해, 쾌락강도를 더 올리거나, 떨어져가는 쾌락강도를 유지하거나, 사라져가는 쾌락을 복구하려 한다. 자아를 지속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에게 자아감의 안정적 확보문제는 삶을 관통하는 과제이기에, 감관쾌락의 보존문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자아감에 대한 기대는 곧 ‘불변 자아감’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불변 자아감을 확보하기 위해 감관쾌락의 보존에 매달리는 욕망’이 발생하여 뿌리내린다. 이것이 탐욕이다. 이 탐욕을 ‘쾌락탐욕’이라 불러 본다면, 쾌락탐욕은 감관쾌락의 속성상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감관결핍을 채워서 얻게 되는 감관쾌락의 강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고, 쾌락감이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관쾌락의 이 자연적 속성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크게 두 유형이다.

 

한 유형은, 쾌락강도의 복구나 쾌락의 지속을 위한 노력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쾌락강도의 감소와 쾌락감의 자연적 소멸을 적절히 수용하는 경우로서, 이런 유형의 쾌락감 지속욕망은 자신과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치지는 않는 ‘약한 쾌락탐욕’이다. 그러나 여전히 불변자아라는 환각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풀려나야 할 욕망’이다.

 

또 하나의 유형은, 쾌락강도의 감소와 쾌락감의 소멸을 수용하지 못하여, 어떻게 해서든 쾌락강도를 복구하고 쾌락감을 지속시키려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의 쾌락감 지속욕망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강한 쾌락탐욕’이다. 강한 쾌락탐욕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쾌락강도를 복구하거나 더 높이기 위해, 그리고 사라져가는 쾌락감을 붙들어 지속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허영이나 변태적 욕구에 빠져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 감관쾌락을 맴돌며 달리는데, 그 결과는 삶과 사회적 관계의 심각한 오염과 훼손으로 나타난다.

 

강한 쾌락탐욕은 ‘이기적 자기중심성’ ‘무한 증폭’ ‘노예적 의존성’ ‘무지 고착’의 속성을 지닌다. 어떻게 해서든 쾌락강도를 확보하고 쾌락감을 유지하려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태도를 취한다. 쾌락의 쇠잔을 수용하지 않아, 타인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나의 쾌락’을 보존하려 든다(이기적 자기중심성). 또한 이러한 쾌락보존 행위는 계속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이미 익숙해진 쾌락은 강도가 떨어지므로, ‘더 새로운 것’ ‘더 강렬한 것’을 향한다(무한 증폭). 이렇듯 관심이 감관쾌락의 강화와 보존에 몰두되다보니, 감관쾌락과 자아감이 밀착되고 자아의 행위가 감관쾌락에 종속되어 노예적 의존도가 심화된다(노예적 의존성). 그리고 쾌락경험에서 불변의 자아감을 확보하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버리는 무지가 고착된다

(무지의 고착).

 

 

불변자아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두 번째 방식은 ‘소유를 통한 자아확인’이고, 이 과정에서도 탐욕이 발생한다. 니까야/아함의 무아설법에서 항상 등장하는 ‘나’ ‘나의 것’의 동시배열이 이에 해당한다.

 

자신의 정신과 신체 그 어디에서도 불변의 자아를 확인할 수 없는 인간은, 그 환각자아의 빈자리를 소유물로써 채우려 한다. ‘남의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이라 생각하는 상품/지식/재산/사람 등의 확보를 통해 자아감을 견실하게 방어하려고 한다. 이 자아확인 방식은 ‘내가 소유한 것’과 ‘자아’를 동일시하려는 것이기에, 소유물이 많을수록 견실한 자아감을 성취할 것이라 기대한다.

 

자아감은 능동적 경험이다.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능동 자리’에서의 경험이 자아감의 핵심이다. ‘능동 자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자아감은, 주인자리를 뺏긴 사람의 박탈감과도 같은 소외된 경험이다. 그것은 ‘주인의 자유에 의거한 능동적 존재감’을 상실한 ‘소외된 자아감’이고 ‘사이비 자아감’이다. 마치 재산권을 상실한 사람이 여전히 집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과 같은, 공허하고 무력한 자아감이다. ‘소유하는 능동주체’가 ‘소유되는 피동객체’에서 자아감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가 없다.

주인자리를 놓친 자아감은 불안과 공허, 예속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소유물에 의해 능동자아감을 확보하려는 일은 근본적으로 헛발질일 뿐 아니라, 소유물 자체도 ‘변치 않는 나의 것’일 수가 없다. 모든 ‘나의 것’은 끊임없이 ‘나의 것 아닌 것’으로 미끄러져 간다. 변치 않는 자아에 대한 기대를 ‘변치 않는 나의 것들’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나의 것’이라고 간주하는 소유물 자체가 ‘불변의 것’일 수 없기에, 환각의 공허를 또 다른 환각으로 채우는 실패로 끝난다.

 

소유를 통해 불변자아를 확인하려는 욕망이 탐욕이다. 이 탐욕을 ‘소유탐욕’이라 부른다면, 소유탐욕에도 크게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소유를 통해 자아감을 경험하려고 하면서도 소유자아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절한 선에서 자제하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의 소유욕은 ‘약한 소유탐욕’으로서 소위 ‘건전한 세속적 욕망’이다.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긴 하지만, 자신과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를 통해 견실하고 안정된 자아감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계속 좌절됨에도 불구하고, 소유자아에 대한 환상에 집착하여 집요하게 소유물 확보에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의 소유욕은 ‘강한 소유탐욕’으로서,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해악을 초래한다.

 

소유물로써 자아감을 확보하려는 소유탐욕도, ‘이기적 자기중심성’ ‘무한 증폭’ ‘노예적 의존성’ ‘무지 고착’의 속성을 지닌다. 소유탐욕에 몰두하는 사람은, 소유를 위한 배타적 이기심에 몰두하기 마련이고(이기적 자기중심성), 아무리 차지해도 만족할 수가 없기에 끝없이 확대되는 소유충동에 몸을 맡기게 된다(무한 증폭). 또 탐욕적일수록 소유물에 대한 의존도가 커져, ‘소유하는 주체’와 ‘소유되는 객체’의 본래자리가 뒤바뀌어 주인이 노예가 되는 소외현상이 발생한다(노예적 의존성). 그리고 소유탐욕에 몰입하는 동안에는, ‘소유물을 통한 자아확인’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성찰하지 못하여 무지가 굳건히 자리 잡는다

(무지 고착).

 

 

불변자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또 하나의 방법은 ‘비교를 통한 자아확인’이고, 여기서도 탐욕이 발생한다. 붓다가 극복대상으로 역설하는 ‘자만’의 충동과 경향성이 이에 해당한다.

 

인간은 개념적 비교를 행할 수 있는 생명체다. ‘나는 누구보다 ~한 사람이다’라는 비교판단을 수행하는 존재이며, 이 비교행위를 통해 자아를 규정하고 자아감을 확보한다. 자기 안에서 불변의 자아를 확보할 수 없는 인간은, 그래서 자기와 타인의 비교에서 발생하는 대비의 자아감으로써 불변자아의 빈자리를 채우려한다. ‘나는 누구보다 ~한 사람이다’라는 개념적 비교의 자아규정은 선명한 자아감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이 보여주는 끊임없는 비교충동은 자아감 확보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비교에서 발생하는 자아감은 두 유형이다. 비교우위에서 생겨나는 우월자아감이 한 유형이고, 비교열위에서 생겨나는 열등자아감이 다른 하나의 유형이다. 이 두 자아감은 모두 선명한 것이지만, 질적으로는 판이하다. 우월자아감은 자존의 우월감을, 열등자아감은 자학의 열등감을 수반한다. 인간이 어떤 유형의 자아감을 선호할지는 명백하다. 우월자아감을 통해 불변자아의 부재로 인한 결핍을 해소하려고 한다.

 

문제는 비교자아가 결코 절대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비교는 언제나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 비교상대가 언제나 자기보다 하열한 것은 아니다. 어떤 기준을 적용하든 자기보다 우월한 상대는 항상 존재한다. 게다가 하열한 사람이 우월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렇다고 하열한 상대만을 골라 비교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 자기보다 우월한 자들을 외면하고 싶어도 내면의 시선은 항상 그들을 향한다. 결국 비교의 우월자아감으로 불변자아의 빈자리를 대신하려는 시도도 성공할 수가 없다.

 

비교를 통해 우월한 자아감을 확보하여 불변자아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욕망이 탐욕이다. 이 탐욕을 ‘비교탐욕’이라고 불러본다면, 비교탐욕도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우월자아감의 절대적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수용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제한적 우월자아감을 누리려는 것이 한 유형이다.

재산, 외모, 성적, 직급 등을 기준 삼아 일상에서 경험하는 우월자아감이다. 이런 유형의 욕망은 ‘약한 비교탐욕’으로서, 자기와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치지는 않으며 일상에서 용인 가능하다. 또 하나의 비교탐욕이 있다. 우월자아의 절대적 확보가 불가능한 현실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면서, 우월자아감의 확보에 끝없이 집착하는 유형이다. 비교자아에 대한 이러한 욕망은 ‘강한 비교탐욕’으로서,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유해하다.

 

강한 비교탐욕에서도 ‘이기적 자기중심성’ ‘무한 증폭’ ‘노예적 의존성’ ‘무지 고착’의 속성이 선명하다. 비교탐욕은 ‘비교를 통한 우월자아’를 확보하려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배타적 자기중심성이 강화된다(이기적 자기중심성). 그리고 우월자아의 근거가 되는 비교우위는, 크면 클수록 선명한 우월자아감을 확인시켜 준다. 따라서 비교탐욕은 비교우위의 격차를 끝없이 확대하고자 하는 갈증에 불탄다(무한 증폭). 또 비교탐욕의 시선은 언제나 타인을 향한다. 타인과의 우월한 비교 격차만이 이 탐욕의 갈증을 달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만족이나 행복의 원천이 타인에 의존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족과 행복의 근거가 타인에게 있을 때, 달리 말해 타인에 의존하여 자기 존재감이 수립될 때, 그 존재감은 근본적으로 불안하고 공허하다. 자족적 자존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교탐욕이 강할수록 노예적인 타자 의존성이 심화된다(노예적 의존성). 비교의 우월자아감으로써 불변자아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비교탐욕에 지배받는다는 것은, 무지를 외면하고 방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무지 고착).

 

 

분노는 탐욕과 맞물려 있는 일종의 부정충동이다. 모든 욕구가 해로운 것은 아닌 것처럼, 모든 부정충동이 해로운 것은 아니다. 무지와 탐욕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취해야 하며, 이러한 부정반응은 진리에 눈뜨게 하여 깨달음의 토대가 된다. 탐욕은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의거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탐·진·치 맥락에서의 분노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 발생조건을 주목해야 한다.

분노를 발생시키는 핵심조건의 하나는, ‘불변의 독자적 자아를 확립하려는 노력과 신념에 대한 위협’이다. 분노는, 불변자아에 대한 기대를 위협하고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고, 두려움이며, 그 위협과 장애들을 배제/부정하려는 충동이다. 달리 말해, 탐욕 추구가 방해받는 것에 대한 반발이 분노이다. 공격, 폭력, 화, 시기, 질투, 증오, 원한, 한탄, 절망감 등 다양하게 모습으로 표현되는 분노는, ‘탐욕 충족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대한 부정반응’이다.

 

분노는 탐욕의 장애물에 대한 부정반응이므로, 분노가 발생하는 계기도 ‘감관쾌락/소유/비교’라고 할 수 있다. 감관쾌락의 강도를 높이고 지속시키고자 하는 쾌락탐욕이 좌절되거나 방해받을 때, 인간은 속 깊은 분노를 느낀다. 어떤 감관쾌락에 대한 욕망이 방해받거나 좌절될 때, 인간은 지속적이고 자아의식적인 ‘개념적 자아감에 대한 위협이나 훼손’을 경험하게 되어 강하게 반발한다. 소유를 통해 불변자아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 보려는 소유탐욕의 충족과정에서도 어김없이 분노가 발생한다. 자신의 소유탐욕을 방해하거나 좌절시키는 대상을 만날 때 분노가 솟구친다. 비교의 우월자아감을 통해 불변자아에 대한 헛된 기대를 채워보려는 비교탐욕의 충족과정도 분노가 장악한다. 그 분노는 시기, 질투, 음해, 우월의 교만과 추월의 두려움, 열등의 적개심과 자학 등으로 나타난다. 우열을 다투는 경쟁에서는 팔꿈치로 밀어내는 ‘배제의 분노’가 경쟁과정을 지배한다.

우월적 지위를 차지한 자들을 향한 시기와 질투, 미움과 증오심, 억울함과 복수심이, 하위로 밀려난 자들의 마음을 채운다. ‘박탈의 분노’이다. 또한 우위를 차지한 사람들은 보복기회를 노리는 하위 사람들을 향해 적대감을 품는다. ‘우월의 분노’이다. 이 우월의 분노는, 하열자들을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교만과 공포의 적개심이다.

 

 

Ⅳ. 마무리

 

붓다의 깨달음이 연기법이기에, 붓다는 자신의 모든 언어를 ‘연기적’으로 펼친다. 따라서 붓다와 대화하려는 사람들도 그의 모든 언어를 ‘연기적’으로 읽어야 한다. 붓다는, 탐욕·분노·무지에 대해서도 그 발생과 소멸의 조건을 밝히는 ‘탐/진/치 연기 설법’을 설하고 있다. 세 가지 느낌이 탐·진·치의 잠재성향을 발생시키는 조건이며, ‘아름다운 표상’·‘적의의 표상’·‘표상을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ayoniso manasikāra, 不如理作意)이 탐욕과 분노의 발생 및 증폭이 조건이고, ‘지혜롭지 못하게 마음에 둠’(不如理作意)이 무지의 발생/증폭 조건으로 설해진다. 또한 멸(滅)연기/명(明)연기를 구현하는 다채로운 교설과 수행법이 탐/진/치의 소멸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붓다의 탐/진/치 연기교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층위와 좌표에서의 ‘연기적 이해’가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삶에 새겨진 탐/진/치의 결(理)과 무늬(彩)를 철학적 시선에서 음미해 보았다. ‘지금 여기’의 관심으로 탐/진/치를 ‘연기적’으로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붓다 진리관의 두 가지 철학적 기초를 ‘두 층의 경험주의’와 ‘실존 실용주의’로 압축시켜 탐/진/치 문제와의 연관을 읽어보는 동시에, 불변자아의 환각과 탐/진/치 현상의 연기적 관계를 읽어 보았다.

 

붓다의 실존 실용주의는 ‘탐욕·분노·무지를 축으로 삼는 삶의 실존적 오염과 왜곡을 치유하는 문제해결 능력을 중시하는 태도’, 다시 말해 탐욕·분노·무지를 조건으로 수립된 삶의 실존상황에 적용하여 탐욕·분노·무지의 문제를 경험적으로 해결하는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것에만 진리자격을 부여하겠다는 태도이다. 또한 경험 가능한 것, 그리고 경험을 통해 진실 여부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 탐구의 범주로 설정하겠다는 것이 붓다의 경험주의이다. 붓다의 경험주의는 두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층은, 진리 주장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층은, 진리 주장은 ‘온전한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 혹은 경험 가능한 것들은 ‘온전한 것과 왜곡된 것’의 두 유형이 있으며, 진리와 하나 됨은 ‘온전한 경험’으로써 구현된다는 것이, 붓다 경험주의의 궁극적 지향이다. 그리고 탐/진/치는 근원적으로 자아환각의 보존충동과 연관시켜 읽을 수 있다.

 

 

 

참고 문헌

 

1. 원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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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윳따니까야』, 각묵 번역, 초기불전연구원, 2009.

『앙굿따라니까야』, 대림 번역, 초기불전연구원, 2006.

『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 경 -』, 소마 영역/현음 번역, 고요한 소리, 1988.

 

2. 저서 / 논문류

 

Ñāṇananda, 『Concept and Reality in early Buddhist thought – An essay on ‘papañ ca’ and ‘papañca - saññā-saṅkhā’ 』,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1/『위빠사나 명상의 열쇠 빠빤차』, 아눌라 번역, 한언, 2006.

김용환,「무기설에 대하여」』,『인문논총』37, 부산대학교, 1990.

안옥선,「불교덕윤리에서 부정적 성향의 제거 –탐진치의 지멸」,『불교학연구』 26호, 불교학연구회, 2010.

이중표,「무기의 의미에 대한 고찰」,『한국불교학』11, 한국불교학회, 1986.

정준영,「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 『불교학연구』제9호, 2004/「초기 불교의 깨달음 이해」,『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 운주사, 2014.

 

 

[Abstract]

 

A Philosophical Appreciation Concerning Greed(lobha, 貪) ·Hatred(dosa, 瞋)·Delusion(moha, 痴)

 

Park, Tae-Won(Ulsan Univ.)

 

According Buddha’s teaching, the originating condition of latent disposition in Greed(lobha, 貪)·Hatred(dosa, 瞋)·Delusion(moha, 痴) are the three kinds of feeling, and the originating/amplifying conditions of Greed and Hatred are the ‘charming/hostile image(nimitta, 相)’ and ‘keeping the images in mind unwisely’(ayoniso manasikāra, 不如理作意). And the originating/amplifying condition of Delusion is ‘keeping the images in mind unwisely.’ Furthermore Buddha explained the extinguishing conditions of GreedㆍHatredㆍDelusion in diverse. To understand Buddha’s teaching on the condition-dependent origination of GreedㆍHatredㆍDelusion, various approaches from diverse levels are necessary. This thesis appreciates the texture and figure of Greed·Hatred·Delusion engraved in life from a philosophical aspect.

Two-level Empiricism and Existential Pragmatism are the two philosophical basis of Buddha’s view on truth, and these two principles are associated with the teaching of Greed·Hatred·Delusion. Human makes efforts to fulfill the expectation of immortal Self indirectly. This effort gives expression as Self-confirming through ‘preserving sensory pleasures’ ‘possessing’ and ‘comparison.’ Greed and Hatred occur in this course of indirect Self-confirming. And the intellectual preference to immortal Self is the identification of Delusion.

 

Key Words : Greed(lobha, 貪)ㆍHatred(dosa, 瞋)ㆍDelusion(moha, 痴), Key Words : Two-level Empiricism. Existential Pragmatism, indirect Self-confirming, Key Words : Self-confirming through ‘the preservation of sensory pleasure’ ‘possess ing’ and ‘comparison.’

 

투고일 : 2015년 3월 14일

심사일 : 2015년 4월 2일

게재결정일 : 2015년 4월 11일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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