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스크랩]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삶의 기술. 죽음은 벽인가, 문인가? / 정현채

장안봉(微山) 2016. 6. 4.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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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삶의 기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간연구소
정 현 채

 

 

“죽음학”은 thanatology라고 하는데 thanatos는 그리스어로 “죽음”을 뜻합니다.

죽음은 삶과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사생(死生)학” 혹은 “생사학”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죽음학은 사람이 반드시 맞이하게 될 죽음에 관하여 종교학, 철학, 심리학, 간호학, 사회학, 의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연구를 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대표적 내과교과서인 Harrison에서도 2005년도 판부터는 완화의료 및 말기 환자 돌봄(Palliative and Endof-
life care)이 책 초반부 서론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말기 암 환자에게 나쁜 소식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 라든가,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의식이 없어 보여도 청각과 촉각은 가장 마지막까지 유지되는 감각이므로 가족들이 환자의 손을 잡고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눌 것을 권장하라는 등의 내용입니다.


2008년 1월 미국 하버드 의대에 단기연수를 다녀온 서울의대 의사학교실 김옥주 교수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죽음”을 다루는 수업이 있어서, 의대생들이 죽어가는 환자의 집이나 병상을 매주 방문하여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일기를 작성하여 환자 임종 경험이 많은 임상 의사 선배들로부터 조언을 받고 함께 모여서 경험을 나누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의과대학 교과과정에도 “환자-의사-사회”나 “의료윤리” 시간에 존엄사, 무의미한 연명 치료의 중단 등을 다루고 있으나 아직 미흡하다는 것이 많은 분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신학교육 교과과정도 사정은 비슷하여 장례식 절차와 하관식 집전 등에 대해서는 가르치나 죽음 자체에 대한 교육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그 실체를 파악하면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교과과정 중에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선 “죽음과 임종” 문제를 다룸으로써, 임종이 임박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죽음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이고 이로써 마지막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환자나 그 가족에게 알려주어 평온하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의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수많은 환자, 특히 어린이 환자의 임종을 지키면서 관찰한 공통된 현상과 그 외에 여러 사람의 근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에 대한 수십 년간의 경험이 포함된 관찰 연구인 저서 ”사후생(死後生, on life after death)”에서 죽음과 임종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로스박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수업” “상실수업” “생의 수레바퀴”라는 베스트셀러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2004년 타계했습니다.

로스박사는 세계적으로는 “죽음학”의 효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제창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는 유명한 이론으로 세계적으로는 물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스 박사는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중의 한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사후생”은 <한국 죽음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한국학)가 미국 한 대학의 서점에서 발견하고 번역해서 우리나라에 소개한 책입니다. 1996년 대화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온 후 최근 6~7년간 절판됐는데 2009년 1월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미국의 경우 ‘‘죽음학“이 1963년 경부터 대학의 교과목으로 채택되었고 죽음학회(www.adec.org)를 통해서
논문 발표 등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핀란드에서는 1983년에 근사체험에 관한 일련의 논문이 의학
회를 통하여 발표되어 많은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구에서는 근사체험에 대한 임상연구가 2001년 Lancet지(2001;358:2039-45) 에 발표되기도 했고, 이에 대한 논평(editorial)도 실렸습니다. 기획에서 발표까지 10년쯤 걸린 연구입니다. 근사체험이 죽음 전체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죽음의 세계를 문틈이나 열쇠구멍을 통해 엿본 정도는 충분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것이 자살예방교육이나 말기 암 환자 보살핌 등 의료에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 고령의 노인들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6월 한국죽음학회(www.kathana.or.kr)가 창립되어 월례 포럼도 하고 봄, 가을 학회
를 열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거나 회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죽음에 대한 갖는 태도는 무관심과 부정(denial), 두 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데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맞으면 잠시 관심을 두다가 다시 무관심해지지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무의식에는 “나만은 절대 안 죽는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고, 이는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
도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자인 유호종 교수는 “살아 있는 날의 선택”에서 평소에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하여 말하
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근사체험이나 삶의 종말체험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고 순전히 철학자의 사유만으로
죽음을 바라 본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기 전에 가려는 곳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하고 관련
책자를 사서 열심히 정보를 얻으려고 합니다. 또 떠나기 직전까지 집안을 정돈하고 다른 가족을 위해 이것
저것을 챙겨 놓거나 단속해 놓고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을 메모로 남겨 놓기도 하지
요. 하물며 장거리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에로의 여행을 위한 사전준비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사전준비서와 같습니다.


영국의 신경과 의사 피터 펜윅 박사는 임종 시에 관찰되는 여러 건의 삶의 종말 체험에 관한 증례와 근사체험 예를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수집한 뒤 이를 “죽음의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습니다.

신경과 의사라면 당연히 ”우리의 마음, 의식은 뇌에 국한된다”는 믿음을 금과옥조로 여길 텐데,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참신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 세상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이 세상의 물질적인 특성에 대한 연구만으로 충분하다는 “과학적 근본주의” 믿음에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관심을 갖고 주위를 살펴봤더니 우리나라에서도 “죽음의 기술”에 나오는 삶의 종말 체험 예가 상당히 많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한 인류의 공통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스피스 활동을 오래한 전문가들은 이러한 체험을 “마지막 선물 (Final gift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나 주위의 가족 모두에게 평안한 감정을 주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지식이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또한 상술한 주제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갖는 질병의 괴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줄 수 있고 삶의 마지막 마무리를 도울 수 있는 길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피터 펜윅 박사는 다음과 같이 좋은 죽음을 맞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훌륭한 죽음”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며, 그 일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화해입니다. 만약에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의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잘못이나 오해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은 그들에게 깨어졌거나 위기에 처한 인간관계를 바로 잡을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늦어도 관계없습니다.

만약에 마무리하지 못한 일, 즉 가족 사이의 불화나 문제가 있는 인간관계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면, 모두가 그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미안했어.” 라거나 “난 당신을 용서해.”라거나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 한 마디면 족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에 의하면 죽음은 나비가 고치를 벗어 던지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며, 죽음은 더 높은 의식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라고 합니다.

천둥과 번개를 하늘의 노여움으로 생각했던 과거에는 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청났으나 그 실체를 파악한 뒤부터는 공포감을 느끼지 않았듯이, 죽음의 과정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그 두려움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1. 사후생.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최준식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2. 살아 있는 날의 선택. 유호종. 사피엔스 21
3.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알폰스 데켄 지음. 오진탁 옮김.
4. 죽음 또 하나의 세계. 최준식 지음. 동아시아
5. 나도 이별이 서툴다. 죽음에 대한 어느 외과 의사의 아름다운 고백. 폴린 첸 지음. 박완범 옮김. 공존
6.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작가정신
7. 유경의 죽음준비학교. 유경 지음. 궁리
8.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9. 자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 죽음을 알면 자살하지 않는다. 오진탁 지음. 세종서적
10. 왜: 인간의 죽음, 의식 그리고 미래. 최준식 지음. 생각하는 책
11. 죽음아 날 살려라. 텍스트로 철학하기. 텍스트해석연구소. 유헌식 등저. 휴머니스트
12. 죽음의 기술. 피터 펜윅, 엘리자베스 펜윅 공저. 정명진 옮김. 부글 북스
13.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능행 지음. 도솔
14. 빛 색깔 공기. 우리가 죽음을 대할 때. 김동건 지음. 홍성사
15.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세종서적
16.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이진 옮김. 이레
17. 죽음에 대하여. 김진 지음. 울산대학교 출판부
18. 나쁜 소식 어떻게 전할까. 암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 우치토미 요스케, 후지모리 마이코 편저. 김종흔, 김미영, 권미
림 옮김. 국립암센터
19. 해피 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최철주 저. 궁리
20. 마지막 여행. 매기 캘러넌 저. 이기동 역. 프리뷰
21. Lommel PV, Wees RV, Meyers V, Elfferich I. Near death experience in survivors of cardiac arrest: a prospective study in the Netherlands. Lancet 2001;358:2039-2045.
22. Yun YH, Lee CG, Kim S, Lee S, Heo DS, Kim JS, et al. The attitudes of cancer patients and their families toward the disclosure of terminal illness. J Clin oncol 2004;22:307-314.
23. Lai CF, Kao TW, Wu MS, Chiang SS, Chang CH, Lu CS, et al. Impact of near-death experiences on dialysis patients: a multicenter collaborative study. Am J Kidney Dis 2007;50:124-132.
24. Morse DS, Edwardsen EA, Gordon HS. Missed opportunities for interval empathy in lung cancer communication. AMA 2008;168:1853-1858.

 

 

 

 

 

오다기리 죠의 도쿄 타워

 

내사랑 내곁에_

 

죽음은 벽인가, 문인가?: 영화를 통한 내과의사의 죽음 이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정 현 채

 

수년 전 어느 일간 신문 기사에 의하면 어느 재벌 그룹의 명예 회장이 고령의 나이에 임종이 임박해 오자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비서들과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고 한다. 후속기사가 없어서 이분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고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평소에 돈과 명예만 추구하지 말고 죽음 문제에 진작 관심을 쏟을 걸 하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로마의 철학자인 키케로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조선 왕실 인장 중에 상우천고(尙友千古)라는 말이 있다. 고전을 읽어 봄으로써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옛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의미인데, 시대와 공간을 넘어선 이 같은 소통과 만남의 체험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종합예술인 영화에는 음식, 복장, 주거 형태를 비롯해 그들이 겪었을 사건들과 무수한 삶의 자취들, 그리고 출생과 죽음과 병듦과 늙음을 겪으며 느꼈을 감정의 결결이 담겨져 있어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타인들과 만나고 소통하게 된다.

 

영화가 이 같이 문화인류사적으로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비판이나 공감을 통한 영화 읽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들이 여기저기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여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가치나 존재 이유를 발견하도록 이끌기 위한 웰다잉 교육에서 영화는 더욱 더 효과적인 매체로 활용될 수 있다.

 

의과대학 실습교육 과정에서 의학과 학생들이 말기 질환으로 임종이 임박한 환자를 보거나 이들의 임종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예비의사로서 대단히 중요한 경험이나, 병실 실습을 하는 의학과 학생의 10-20%만이 이러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게 의학교육의 현실이다. 따라서 말기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와 임종을 다룬 영화를 보게 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오다기리 조가 주연한 영화 “도쿄타워”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말기 위암으로 항암 화학요법을 받는 주인공의 어머니를 그리고 있는데, 말기 암의 증상, 항암 화학요법시 나타날 수 있는 이상 반응과 임종에 이르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어서, 내과 실습을 도는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줌으로써 상당한 교육적인 효과를 얻고 있다.


김명민과 하지원이 주연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는 루게릭병에 걸린 주인공이 점차 사지가 마비되면서 맞게 되는 임종을 잘 그리고 있다. 주인공이 투병 중 알게 된 여자 장례지도사는 바람직한 죽음 문화의 정착을 위해 입관체험 행사를 열면서 경로당 노인들에게 관 속에 들어가 볼 것을 권유하지만, “이게 지금 나보고 죽어보라는 거야, 뭐야? 노인네들 모아 놓고 희롱하는 거야? 뭐야 도대체?” 하는 폭언과 함께 폭행까지 당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무관심과 부정, 회피 그리고 혐오인 경우가 많다.

 

 

Ikiru (Japan: Akira Kurosawa, 1952)

 

영화 “이끼루”는 ‘살다’, ‘살아 있음’이라는 의미이나 사실은 죽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생문”이라는 영화로 유명한 일본의 故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1952년 발표한 영화인데, 죽음학 분야에서는 여전히 중요하게 인용된다. 초연후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50개가 넘는 상을 받았으며 1997년에는 세계 10대 고전명화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시청의 말단 과장인 주인공은 소화가 안 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데, 위암 말기여서 완치를 위한 수술은 불가능하고 남은 시간이 수개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크게 낙심하여 평소에 하지 않던 술과 도박도 잠시 해보지만 마음의 공허감은 채울 수가 없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던 중, 몇 달 안 남은 자신의 마지막 삶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나라도 끝마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꺼져 가던 장작더미에서 반짝 불이 일듯 기운을 차리고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미결 서류더미에서 마을 주민들의 숙원사업이 담겨진 민원서류 하나를 찾아낸다.

그것은 비만 오면 커다란 물웅덩이로 변하고 파리가 들끓는 마을 한 구석 버려진 공터를 어린이 공원으로 만들어 달라는 진정서였는데, 7개나 되는 부서가 관여된 일인데다 그 누구도 성의껏 추진하려고 하지 않아 전혀 진척이 되지 않았었다.

주인공은 이 일을 직접 나서서 추진해 나간다. 해당되는 여러 부서의 과장이 결재 도장을 찍어 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끈끈이’ 작전으로 매달린 결과, 마침내 어린이 공원은 완공되고, 공원 개장 전날 눈 내리는 밤 주인공은 그네에 앉아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다 숨을 거둔다.

 

 

Ikiru 1952 / Akira Kurosawa

 

 

주인공이 퇴근길 잠시 멈추어 서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저녁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모르고 30년을 살아 왔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없구나” 하고 말하고는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1960년대부터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바람직한 죽음 문화의 정착에 힘써 온 알퐁스 데켄 신부는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죽음에 임박해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주인공은 기쁨과 만족감을 느꼈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보다 바르게 살 수 있었다.”

 

역시 일본 영화인 “굿바이”는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인 주인공이 악단이 갑자기 해체되는 바람에 실직을 한 후 고향에 내려가 일자리를 찾던 중, 여행 도우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사실은 ‘영원한 여행’ 도우미, 즉 시신을 염습해 입관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고, 보수를 후하게 줄 테니 함께 일하자는 사장의 제안을 얼결에 받아들인 후 염습사로서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잔잔한 감동과 더불어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

건물을 헐고 큰 빌딩을 짓자고 떼를 쓰는 아들의 성화에도 오랜 단골손님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며 변함없이 목욕탕을 운영해 오던 주인공의 어릴 적 친구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주인공의 경건하고도 정성을 다한 염습을 마친 후 시신은 화장터의 화장로로 옮겨지는데, 목욕탕의 수십 년 단골손님이자 고인의 친구이며 오랜 세월 화장로의 불을 지피는 일을 해 온 노인은 뒤늦은 후회로 흐느껴 우는 고인의 아들에게 슬픔을 누르며
이야기한다.

 

“여기 화장터에서 오래 일하면서 알게 됐지. 죽음은 문이야. 죽는다는 건 끝이 아니야. 죽음을 통과해 나가서 다음 세상으로 향하는 거지. 난 문지기로서 많은 사람을 배웅했지.”

 

미국에서 발간된 죽음학 책 “The Last Dance; Encountering Death and dying” (생의 마지막 춤: 죽음, 죽어감과 대면하기)의 서문에서는 죽음을 꽉 막힌 벽으로 볼 것인지 열린 문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얘기한다.


미국의 사진작가 유진 스미스의 1951년 작품 “후안 라라의 장례식”에서는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에 둘러싸인 채 임종을 맞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은 수십 년 같이 살아 온 가족과 격리된 채 대형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외롭게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나는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대조된다.


한편, 중세의 바니타스 그림 등을 통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엿볼 수 있는데, 수천 년동안 인류가 지녀 온 죽음에 대한 이러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없는 것일까?

종교적 교리나 문화적 전통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죽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을 겪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이러한 두려움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을 중시하는 현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의학에서의 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 이에 대한 단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심장과 호흡이 멎은 사람을 되살리는 심폐소생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과거에는 죽어서 더 이상 말이 없었을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생겼고, 이들 중 일부가 자신의 심장이 멎어 있는 동안의 경험인 근사체험 혹은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에 관한 연구의 물꼬를 튼 사람은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레이먼드 무디 주니어이다. 그는 원래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는데, 이런 체험을 한 주위 사람들을 여럿 만나게 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정신과 의사가 되는 과정 중에 근사체험자 150명을 8년간에 걸쳐 면담한 후 낸 책이 “다시 산다는 것(Life after life)”이다.


또한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수많은 어린이 환자의 임종을 지키면서 관찰한 공통된 현상과 그 외에 여러 사람의 근사체험에 대한 수십 년간의 경험을 기록한 저서 “사후생(死後生, on life after death)” 에서 죽음과 임종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사후생”은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한국학)가 미국 한 대학의 서점에서 발견하고 번역해서 1996년 우리나라에 소개한 책인데, 최근 6-7년간 절판되었다가 2009년 1월 개정판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수업”, “상실수업”, “생의 수레바퀴”라는 베스트셀러의 작가이기도 한 로스 박사는 2004년 타계했고, 세계적으로는 죽음학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제창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론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로스박사는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500년경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가 그린 “천국으로의 승천”에는 근사체험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터널을 통과하여 빛을 만나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인 유진 스미스도 그의 한 작품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Hereafter Movie Supernatural Stills Poster Wallpaper Trailer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영화는 2011년 초 상영되었던 “히어애프터”이다.

Hereafter는 ‘지금부터는, 장래, 미래, 내세’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올해 나이 80대 중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했고 40대 중반의 맷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이다. 인기 절정의 한 프랑스 앵커우먼이 인도네시아로 휴가를 갔다가 때마침 몰려온 쓰나미에 휩쓸려 죽었다가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난다(심폐소생술을 해도 반응이 없자 포기했는데 잠시 후 극적으로 되살아난다).

심장과 호흡이 멎어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근사체험을 하는데, 자신이 겪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여러 곳을 찾다가 한 호스피스 병원의 의사를 만나서 그것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근사체험(임사체험)이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 이에 관해 그 의사가 모아 온 자료를 건네받는다. 의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과학자이고 무신론자여서 사후세계니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느니 하는 얘기는 다 지어낸 얘기라고 생각하고 믿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25년간 호스피스 일을 하면서 죽었다 깨어난 많은 사람들의 체험이 공통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걸 모두 우연의 일치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여주인공은 이 자료를 토대로 책을 완성하지만 어느 출판사에서도 출간하려고 하지 않자, 여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우리들이 죽어서 가게 될 곳이고 죽어서 경험하게 될 일들인데... 우리 모두의 일인데 어쩌면 모두들 그렇게 피하는지..."

 

근사체험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생전 일관되게 주장한 “인간의 육체는 영원불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이동일 뿐이다”를 잘 표현하고 있다.


천둥과 번개를 하늘의 노여움으로 생각했던 과거에는 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청났으나 그 실체를 파악한 뒤 부터는 공포감을 덜 느꼈듯이, 죽음의 과정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그 두려움이 훨씬 줄어드는 것은 물론 죽음을 내포한 생명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더 깊은 인식에 이르게 되어, 주어진 삶을 더욱 더 충만하게 향유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사후생.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최준식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2.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알폰스 데켄 지음. 오진탁 옮김.궁리
3. 죽음 또 하나의 세계. 최준식 지음. 동아시아
4. 나도 이별이 서툴다. 죽음에 대한 어느 외과 의사의 아름다운 고백. 폴린 첸 지음. 박완범 옮김. 공존
5.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작가정신
6. 유경의 죽음준비학교. 유경 지음. 궁리
7.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8. 죽음의 기술. 피터 펜윅, 엘리자베스 펜윅 공저. 정명진 옮김.부글 북스
9.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이진 옮김. 이레
10. 나쁜 소식 어떻게 전할까. 암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 우치토
미 요스케, 후지모리 마이코 편저. 김종흔, 김미영, 권미림 옮김. 국립암센터
11. 해피 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최철주 저. 궁리
12. 마지막 여행. 매기 캘러넌 저. 이기동 역. 프리뷰
13. 마지막 사진 한 장. 사랑하는 나의 가족, 친구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베아테 라코타 지음. 장혜경 역. 웅진지식하우스
14.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 셔원 B 뉴랜드 저. 명희진 역. 세종서적
15. 아이와 함께 나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 Earl A. Grollman 지음. 정경숙. 신종섭 옮김. 이너북스
16. 다시 산다는 것. 레이먼드 A. 무디 주니어 지음. 주진국 역. 행간
17. 죽음에게 삶을 묻다. 유호종 지음. 사피엔스 21
18. 죽음, 그 후. 제프리 롱, 폴 페리 공저. 김재성. 조옥경 공저. 한언
1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켄 윌버 지음. 주진국 옮김. 한언
20. 우리 아이가 죽음에 대해 묻기 시작했어요. 마리 엘렌 앙크르베 랑베르 지음. 윤미연 옮김. 프리미엄북스
21. 죽음을 어떻게 살까. 아이라 바이옥 저. 홍종현 역. 다산글방
22. 죽음의 수업. 이이다 후미히코 저. 김종문 역. 인간사랑
23. 한국인의 죽음관. 이은봉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24. 죽음이 눈뜨게 한 삶. 어느 말기암 환자가 보내는 삶의 메시지.김성찬 저. 책만드는집
25. 죽음 그리고 성장.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저. 이주혜 역. 이레
26.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한국인의 죽음론. 김열규 저.궁리
27. The Last Dance. Encountering death and Dying. DeSpelder LA, Strickland AL. 8th Edition. 2009. McGraw Hill 28. Lommel PV, Wees RV, Meyers V, Elfferich I. Near death experience in survivors of cardiac arrest: a prospective study in the Netherlands. Lancet 2001;358:2039-2045.
29.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 한국죽음학회 지음. 대화문화 아카데미
30. 죽음의 미래: 종교학자가 쓴 사후 세계 가이드 북. 최준식 지음.소나무
31.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 죽음 직전의 사람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아이라 바이오크 지음. 곽영단 옮김. 물푸레

32.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이부영 지음. 한길사
33. 삶과 죽음의 인문학. 정현채, 정진홍, 법타, 이기동 등 지음. 석탑출판
34. 의료인에 대한 죽음 교육으로서 영화의 활용. 대한소화기학회지(gastrokorea.org) 2012년 9월호 종설
35. 사후세계의 비밀. 마이클 팀 지음. 김자성 옮김. 북성재
36.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이시토비 고조 지음. 민경윤, 노미영 옮김. 마고북스
37. 죽음맞이. 인간의 죽음, 그리고 죽어감. 한국죽음학회 웰다잉 가이드라인 제정위원회. 모시는 사람들
38. 존엄사-III. 임종의료와 의학교육. 의학박사 김건열 편저. 최신의학사
39. 오늘이 내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KBS <생로병사의 비밀>제작팀 저. 애플북스
40. 죽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오진탁 편저. 한림대학교출판부.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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