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검지(恭儉池)
남한에서는 규모에 있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벼농사의 중요성과 함께 정치적·사회적 발전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에 의해 거대한 저수지가 축조되었는바, 제천 의림지(義林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등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 때인 1195년(명종 25) 상주사록(尙州司錄)으로 있던 최정분(崔正份)이 예로부터 있어 오던 제방을 그대로 수축했다고 하며, 제방의 길이는 860보(步)이고, 너비가 800보라고 한다. 저수지의 둘레는 22리나 되며, 이 저수지에 의해서 혜택을 받는 몽리(蒙利)면적은 260결(結)에 이르렀다.
조선 초에 홍귀달(洪貴達)이 쓴 「공검지기(恭儉池記)」에 의하면 축조연대는 언제인지 모르고 공검(恭儉)이라는 이름은 쌓은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평상시 못의 둘레가 1만 6,647척(尺)이며 이때 물의 깊이는 4, 5장(丈)이나 되었다.
이 제방은 고대의 제방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토사(土砂)를 판축(板築: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다짐)하여 단면이 사다리꼴이 되도록 쌓아 올린 것이다.
판축의 방법은 토성(土城)을 쌓는 방법에서 비롯되었으나 안팎의 물매를 더하여 물의 압력에 견디도록 아랫부분의 너비가 부채꼴로 넓게 되어 있다. 잔자갈과 흙을 다질 때 뻘흙을 사용하고 각각의 재료 사이에 있는 공극(空隙)을 거의 없앰으로써, 물분자가 공극으로 흡수될 틈을 막는 원리를 이용하였다.
현재 규모는 주변이 모두 논으로 개답되고, 만수 시 약 1,000평 정도의 작은 규모만 남아 있다. 이는 문화유산으로 그 흔적을 보존하고자 한 것으로, 수리시설의 기능은 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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