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전적기념관
중앙고속도로 다부 I·C에서 동쪽 아래 다부동고개가 시작되는 입구지점에서 25m 높이의 기념비와 탱크 모양의 전적기념관이 6·25 당시 격전지였던 유학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이 건물은 1980년 12월, 당시 다부동 새마을부녀회장인 정순덕 여사가 우리 군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6·25전쟁시 다부동 전투의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전승기념관 건립을 호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방부에서 건립하게 되었다.
국·도비를 지원받아 7억4천만원의 공사비로 1981년 7월 착공하여 11월에 완성한 이 기념관은 서울 남산 미술원에서 탱크모양으로 특별히 시공하였는데 외벽에는 격전 당시의 모습을 부조로 나타내고 내부에는 당시 전투에서 사용하였던 중화기와 소총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아래 부지좌측에는 4억1천만원(도비2억, 군비2억1천)의 공사비로 1995년 5월 준공한 2층 건물의 관리사가 있는데 1층은 사무실과 휴게실(매점), 2층은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5년 6월 24일 다부동전투 희생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행사시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신 가운데 구국용사충혼비 제막식과 함께 '구국관(救國館)'으로 명명되어 준공기념 행사를 가진바 있다.
우리 군에서는 1979년 3월 1일 전적지관리사업소를 설치하여 왜관지구 전적기념관과 함께 이 기념관을 관리해 오다가 보다 더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1997년 2월 1일부터는 한국자유총연맹 경상북도지회에 위탁관리하고 있는데 학생, 군인, 일반인 등 연간 약 1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 곳을 찾아 전쟁의 교훈과 자유수호 의지를 되새겨 가고 있다.
어떻게 이 다부동이 격전지가 되었을까, 잠시 지난 역사의 현장을 되새겨 보면 팔공산 자락이 서쪽으로 숨가쁘게 내달리다 가산, 오계산 봉우리를 맺어 놓고 허리가 휠때쯤 주저앉은 다부동고개, 다부동은 팔공산이 일어서 황학산, 유학산, 소학산을 빚어놓은 틈새에 고즈넉이 앉아 있다. 그래서 다부동 고개는 숙명적으로 격전을 치른 요충지일 수 밖에 없었다. 신라 - 조선시대에 걸쳐 축성된 천생산성, 가산산성, 냉산산성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다부동고개의 험난한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달구벌과 관문(문경새재)을 잇는 유일한 통로, 일찍이 왕건과 견휜이 대권의 길목에서 혈투를 벌인 곳이 바로 다부동 고개였고 병자, 임진 양난이 치열하게 펼쳐졌던 곳, 가까이는 6·25 전쟁때 조국의 최후 보루지로서 꽃같은 생명이 처절하게 쓰러져 갔던 곳이다.
조선시대까지 이 고개는 문경새재를 거쳐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1급 관도)이어서 경향을 드나드는 관원들을 위해 원이 설치돼 있었다. 역이 생기고 많은 관원과 행상인이 묵어가는 주막촌이 형성되면서 자연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이 때 돈많은 거상들이 몰려들면서 부자가 많은 곳이라 하여 다부원(多富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원들과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했기 때문에 다부동 고개는 전국의 여느 고개처럼 산적이나 맹수가 나타나 주민을 괴롭힌 적이 없다. 대신 부사, 목사 등 목민관의 선정비가 많았다. 하나 모두 전화속에 묻혀 찾을 길이 없다.
수많은 전란이 다부동 고개를 거쳐 갔지만 6·25라는 동족상잔의 참화는 아직도 고개구비마다 또 인접한 유학산 곳곳에 서려 있다. 실제 '94년과 '95년, '97년, 2000년, 군부대(50사단)의 유학산 일대 수색에서는 유골 및 전쟁유품들이 많이 발견되어 전쟁의 참상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으며 수습된 유골들은 기념관 입구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구국용사충혼비를 세워 '95년 6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참석하신 가운데 제막식과 추모제를 거행함으로써 이들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303고지(자고산 : 왜관읍 석전리) - 328고지(석적읍 포남리) - 숲데미산(석적읍 망정리) - 유학산(석적읍 성곡리, 가산면 학산리)을 잇는 방어선은 치열한 고지탈환전이 벌어졌던 곳이며 특히 유학산은 9번, 328고지는 무려 15번이나 고지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유학산은 다부동을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고 낙동강 동안에 펼쳐 놓은 것 같은 돌산인데 839m의 정상에 올라서면 적 포병이 대구시를 공격할 수 있는 요지이다. 따라서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처절한 죽음의 혈전을 벌였는데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9차례의 탈환전중 아군측 신병 병력이 하루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희생이 컸던 곳이며 당시 후방에서 신임 소위가 보충되어 오면 유학산 정상의 소대까지 올라가는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당시 다부동 고갯마루에는 조그만 옹달샘이 있어서 12연대 1·2대대가 '자유천', '생명천', '구국천'이라 부르며 식수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없어졌다. 다부동 전투는 9월 24일 천생산(구미시 인동) 진지를 탈환할 때까지 55일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북한군 2만 4천여명과 국군 1만여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피해를 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으로 북한군과 전차전이 벌어졌는데 볼링앨리 전투(포탄화구가 날아가 후방에서 폭발하는 상황이 마치 볼링공으로 핀을 넘어 뜨릴 때의 모양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John.H. 마이켈리스대령(전 미8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미 제27연대는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소방대(위급한 전선에 항시 투입되어 불을 끈다고하여 붙여진 별명)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다부동전투는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사단에 비참한 패배를 안겨 주었고 특히 13사단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북한의 적화야욕을 저지시켜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구실을 했던 것이다.
조지훈 시인은 직접 종군하면서 격렬했던 다부동 전투의 참상을 1950년 9월 26일, 이렇게 시로 표현하였다. 이 시는 1995년 시비로 만들어져 구국용사충혼비와 함께 제막식을 가진 뜻깊은 글이다. [칠곡군문화관광자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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