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진주강윤하지려(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晉州姜允河之閭)
강윤하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姜鳳衫)가 한겨울에 구하기 힘든 꿩탕을 먹고 싶어 하여 고민하던 차에 마침 꿩이 집 처마에 날아들어 잡아다 꿩탕을 해 드렸다. 또한 잉어를 먹고 싶어 하자 얼음을 깨고 잡아와 봉양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다.순조 때 효행으로 추천되어 동지중추부사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며,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순상국심공경택영세불망비(巡相國沈公敬澤永世不忘碑)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여(子輿). 서울 출신. 건지(健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능적(能迪)이고, 아버지는 의복(宜復)이며, 어머니는 이정규(李鼎奎)의 딸이다. 1833년(헌종 4)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53년(철종 4) 대사성을 지낸 뒤 이듬해 예방승지를 거쳐, 1855년에는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57년 독직사건으로 인하여 중화부에 유배되었다가 안변부에 찬배(竄配)되었다. 1859년 다시 복직되어 이조참판·행도승지·한성부판윤·공조판서 등을 거쳤다.
1860년에는 형조판서를 역임한 뒤, 이듬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1862년 다시 한성부판윤을 거쳐, 1865년(고종 2) 대사헌·한성부판윤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 뒤에도 대사헌으로 오랫동안 활약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부사민후치서영세불망비(府使閔侯治序永世不忘碑)
본관은 여흥(驪興). 1865년 공주판관(公州判官), 1871년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1880년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고, 1882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85년에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고, 1886년 2월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 1887(고종24)년 5월에는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부사윤후봉소거사비(府使尹侯鳳韶去思碑)
윤봉소는 1726년(영조 2) 9월 16일 선산도호부사(선산부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16일 부임하여 약 1년 동안 재직하였다. 1727년(영조 3) 8월 사장(辭狀; 사직서)을 올려 부사직에서 물러났다.
부사김후경진영세불망비(府使金侯敬鎭永世不忘碑)
김경진(金敬鎭)은 음사로 관직에 진출하여 1853년(철종 4)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1855년(철종 6) 상주목사로 이배되어 떠났다.
부사이후호숙청덕불망비(府使李侯鎬肅淸德不忘碑)
이호숙은 본관 우봉(牛峰), 자 정숙(正叔)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에 올랐다. 현풍·문경현감을 지낸 후 1874년(고종 11) 6월 23일 선산도호부사(선산부사)로 부임하여 약 2년 6개월 동안 재직하였고, 1876년 12월 20일 청주목사로 승진되어 이임하였다.
부사윤후봉소거사비(府使尹侯鳳韶去思碑)
효자황간감무임재정표문(孝子黃澗監務林載旌表門)
임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황간감무를 지냈던 인물로,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약을 달여 드렸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묘 앞에 초막을 지어 6년 간 시묘를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4월 효자 임재(林載)의 효행을 표창하는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이에 정려비가 세워졌다
선무랑행안기도찰방력정안강노공지묘
역정의 묘갈문은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선생이 찬하였다
학생경주노공휘경건지처열부여산송씨지정려비
본관은 여산(礪山). 아버지는 우곡(愚谷) 송량(宋亮)이다.
송씨는 사인(士人) 노경건의 처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1593년(선조 26) 5월 상주(尙州)의 산중으로 함께 피난하던 도중 적을 만났는데 적이 남편을 해치려 하자 송씨(宋氏)는 전력을 다하여 대항하였다. 적이 남편을 살해하고 다시 송씨를 겁탈하려고 하자 송씨는 자신의 목을 베더라도 그들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적이 송씨의 오른팔을 잘랐으나 굴하지 않고 오히려 꾸짖다가 피살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였다.
부사김후호겸영세불망비(府使金侯好謙永世不忘碑)
1889년 춘궁기에 굶주린 주민 5,000여 가구를 진휼하여 주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김호겸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익재(益哉)이다. 1888년 1월 진산군수에서 선산도호부사(선산부사)로 이임하여 2년 6개월 동안 재직하고, 1890년 6월 15일 황해도 황주목사로 승진되어 이임하였다.
부사이후형회청덕영세불망비(府使李侯亨會淸德永世不忘碑)
이형회는 1824년 7월 25일 충청도 보은군수에서 이임하여 선산도호부사(선산부사)로 부임하였으며, 부사로 재임하던 중 1827년 7월 3일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재임 중 누각 빙허각(憑虛閣)을 재건하고, 선산향교에 화재가 나자 동·서재와 청아루(菁莪樓)를 다시 지었으며, 자신의 봉록 중 일부를 기부하여 향교의 제기 및 제복을 마련하였다고 전해진다.
부사홍후술조거사비(府使洪侯述祖去思碑)
홍술조(洪述祖)는 병자호란 때 청군에 항거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의 손자로서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금천현감(衿川縣監)으로서 흉년에 봉록을 내어 진휼함으로써 선산부사에 승차하였다. 뒤에 순천부사로 있으면서도 진휼(賑恤)과 치적이 높이 평가받기도 하는 등 지방관으로서 많은 선정을 베푼 인물이다. 따라서 선산부사로서의 구체적인 치적은 알 수 없으나 비석을 세운 경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784년(정조 8)에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1785년(정조 9)에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떠난 후에 백성들이 그의 덕망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
순찰사김상국명진청덕선정비(巡察使金相國明鎭淸德善政碑)
1888년(고종 25)에 경상도관찰사로서 군비 태세를 살피는 순찰사를 겸직하여 도내를 순력하였으며, 이 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지자 이를 진휼(賑恤)하고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하였다.
부사서공경순영세불망비(府使徐公經淳永世不忘碑)
서경순의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성언(聖言)이다. 전라도 김제군수로 있다가 1858년(철종 9) 3월 26일 선산도호부사(선산부사)에 임명되어 약 2년 9개월 동안 재직하였다. 1860년 12월 20일 광주목사로 승진하여 이임하였다.
행군수이후소영거사비(行郡守李侯紹榮去思碑)
이소영은 1896년(고종 33) 2월 선산군수에 임명되어 같은 해 3월 부임하였으며, 3년여 동안 재직한 후 1899년 7월 예천군수로 이임하였다. 선산군수 재임 중 찰미루(察眉樓)를 중건하였다.
관찰사엄상국세영불망비(觀察使嚴相國世永不忘碑)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익(允翼), 호는 범재(凡齋). 석우(錫愚)의 아들이다.
186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가주서·부사정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주서가 되었다.
1866년에는 홍문관부수찬·남학교수(南學敎授)·부사과로 선전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1867년 4월까지 동지사(冬至使) 이풍익(李豐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부교리·교리·부수찬·부응교·사헌부집의·장악원정, 1868년에는 종친부정(宗親府正)·분승지(分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6년만에 발탁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임명되었고, 1875년과 1878년에 이조참의를지냈다. 1881년 2월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수행원으로 엄석주(嚴錫周)·최성대(崔成大)를, 통사로 서문두(徐文斗) 등을 대동하였다.
이 때 그가 시찰을 담당한 부서는 사법성(司法省)이었고, 이러한 일본 시찰이 토대가 되어 귀국 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서 율례사당상(律例司堂上)이 되었다.
1882년에는 병조참판·한성부우윤, 임오군란 때에는 청군영접관(淸軍迎接官)·한성부좌윤·성균관대사성, 1883년에는 한성부우윤·이조참판·예조참판·호군으로 정부당상(政府堂上), 1884년에는 한성부좌윤·반접관(伴接官)을 역임하였다.
1885년에는 정부유사당상(政府有司堂上)으로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묄렌도르프(Mollendorf, 穆麟德)와 함께 거문도를 조사하였다. 1886년에는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인천부사, 1888년에는 행호군(行護軍)으로 정부당상, 1890년에는 사헌부대사헌·한성부우윤, 1891년에는 형조참판·한성부좌윤·병조참판, 1893년에는 사헌부대사헌·병조참판·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행호군으로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와 호남선무사로 임명되어 동학교도의 귀향을 주관하였다. 김홍집(金弘集) 내각 성립 후 두 차례에 걸쳐 농상아문대신(農商衙門大臣)·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경상북도관찰사·종일품관으로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순찰사조상국강하만세불망비(巡察使趙相國康夏萬世不忘碑)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평(景平). 현령 병석(秉錫)의 아들로, 영하(寧夏)의 동생이며, 조대비(趙大妃)의 조카이다. 1864년(고종 1) 조대비의 일족이 대거 등용될 때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권점(翰林圈點)·관록(館錄)·도당록(都堂錄)에 잇달아 오르고, 1873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그를 전라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하였으나, 형 영하가 대원군을 축출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때 진휼을 요청하여 내탕전(內帑錢) 2만 냥과 관서곡(關西穀) 2만 석을 받았으므로 진주에는 그의 선정비가 세워졌다.
경관(京官)으로 있을 때에는 칭송이 없었지만, 지방관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내직에 들어와서도 경상도의 환곡(還穀)과 통영곡(統營穀)의 탕감을 직접 주청하기도 하였다. 1885년에 지춘추관사·공조판서·지의금부사가 되었고, 좌우포도대장이 되어 갑신정변 여당을 추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화당으로 지목을 받고 있던 유길준(兪吉濬)이 1885년에 귀국하자, 포도대장이 거짓으로 왕명을 빙자하여 그를 구금하자 조경하가 민응식(閔應植)에게 말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고 한규설(韓圭卨)의 집에 유폐되도록 하였다. 뒤에 선혜청제조·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지냈고, 1889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가 되었다.
순찰사김상국세균청덕선정비(巡察使金相國世均淸德善政碑)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익(公翼), 호는 만재(晩齋). 덕순(德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복근(復根)이고, 아버지는 서윤(庶尹) 병문(炳文)이며, 어머니는 송재덕(宋在德)의 딸이다. 현감인 큰아버지 병광(炳光)에게 입양되었다.
1834년(순조 34) 진사시에 합격하고,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봉상시정(奉常寺正)·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등을 거쳐 1853년(철종 4)에 대사성, 1856년에 이조참의, 1860년에 경상도관찰사, 1862년에 이조참판, 1863년에 대사헌, 1871년(고종 8)에 이조판서, 이듬해에 공조판서, 1877년에 좌참찬, 1878년에 수원유수(水原留守)를 역임하였다.
1873년 왕명으로 『기년아람(紀年兒覽)』의 속편을 편집하였다. 저서로는 『완염통고(琬琰通考)』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부사조준구신명선정비(府使趙駿九神明善政碑)
조준구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여관(驪觀)이다. 1883년 4월 5일 김포군수에서 선산도호부사(선산부사)로 제수되어 같은 해 5월 11일 부임하였고, 1885년 5월 29일 황해도 신천군수와 상환이배(相換移拜)되었다. 1890년 다시 선산도호부사로 복직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이임하였다.
고부사오후일영영세불망비(故府使吳侯鎰泳永世不忘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정여(定汝)이다. 1887년(고종 24) 4월 7일 전주판관에서 선산도호부사로 제수되어 5월 7일 부임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4일 관아에서 숨을 거뒀다
부사조박청정비(府使趙璞淸政碑)
조박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숙온(叔蘊), 호는 석곡(石谷)이다.
조박(趙璞)은 문과 갑과 3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광해군 때의 대북파에 의해 여러 차례 탄핵을 받는 등 관직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배천현감, 무장현감, 평안도도사 등을 지낸 후 1623년(인조 1)에 선산부사에 부임하였으며, 부임한 지 2개월여 만에 파직되었다. 2개월여의 재임 기간으로 보았을 때 청렴하게 행정을 펼쳤다며 청정비를 세운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면이 없지 않다.
부사전익희송덕비(府使全益禧頌德碑)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자수(子綬), 호는 망일당(望日堂)·설월당(雪月堂). 상장군(上將軍) 희철(希哲)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직장 개(漑)이고, 아버지는 봉사(奉事) 뇌(磊)이며, 어머니는 진주 정(鄭)씨로 7대가 나란히 청백록에 오르고 7대에 걸쳐 정려문이 무려 13위나 들어선 대제학 정척(鄭陟)의 현손녀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자품이 장중하고 정신이 명수(明粹)하였으며 총명 재기가 특출하였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중앙관직으로 정자(正字)를 거쳐, 박사·전적, 형조·예조 좌랑, 형조정랑, 전라도사, 성균관직강, 예조정랑, 강진현감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권신 김자점(金自點)의 죄를 탄핵하다가 북변의 외직으로 쫓겨났다. 외직으로는 함경도사 봉산현감·고산찰방·봉산군수·충청도사·장흥부사·선산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지방에 부임한 곳마다 공덕비가 세워졌는데, 특히 선산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저서로 『설원당문집』과 유고(遺稿)가 전한다. 경북 영주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성균진사송암선생안강노공휘수성지묘/배의인전의이씨부
부사김위선정비(府使金偉善政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기(汝器), 호는 만취(晩翠). 남원 출신. 할아버지는 신손(呻孫)이며, 아버지는 사걸(士傑)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이이(李珥)와 교유하였다.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1년(선조 4)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그 뒤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과 형조참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으로 어가를 호종하였다.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독서로 여생을 보냈으며, 뒤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사정공시선???(府使鄭公是先???)
정시선은 본관 동래(東萊), 자 백초(百初)로,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낸 정재해(鄭載海)의 아들이다. 1692년(숙종 18) 2월 12일 선산도호부사(선산부사)로 부임하여 1693년 4월 29일 장계(狀啓)를 받고 사임하였다. 그 후 판서(判書)를 역임한 바 있다.
부사김후명진청덕선정비(府使金侯明鎭淸德善政碑)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성(稚誠). 할아버지는 병선(炳先), 아버지는 석균(奭均)이며, 세균(世均)에게 입양되었다. 1870년(고종 7)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3년에 별겸춘추(別兼春秋)가 되고, 이듬해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좌도에 파견되었다. 1879년에 동부승지를 거쳐 1882년에는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뒤 춘천부사를 거쳐 1886년 경기관찰사, 1888년 경상도관찰사 등 외직에만 5년 이상 근무하였다.
경기·경상도관찰사로 재직중에 올린 장계(狀啓)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연간의 사회상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고종실록』에는 장계내용이 요약되어 나타나 있는 바, 경기도에 관한 것이 7회, 경상도에 관한 것이 4회나 기록되어 있다. 1890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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