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학정(梅鶴亭)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에 있는 조선 전기 황기로의 유적지.
황기로(黃耆老)는 조선의 명필가로 진사에 합격하여 별좌라는 벼슬을 지냈다. 필법이 뛰어나 필성(筆聖)이라 불렸다.
이 지역은 본래 황기로의 조부 상정공 황필의 만년 휴양지이었으며, 황기로가 조부의 뜻을 받들어 정자를 짓고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학정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뒤에 공의 사위인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의 소유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1654년(효종 5)에 다시 지었다. 1862년(철종 13)에 화재로 다시 타버린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70년 전면 중수하였다.
매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집으로, 보천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아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평면 구성을 보면 건물 전체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좌측 2칸에는 전면에 반 칸 크기의 툇마루방을 구성하였으며, 마루방과 우측 대청 사이에는 사분함 들어열개문을 달아 열면 통마루가 되고 닫으면 방이 되도록 하였다. 홑처마에 오량가구의 소로수장집이다.
옥산주인-옥산 이우 선생은 고산 황기로 선생의 사위이면서 율곡 이이 선생의 동생이다
고산 황기로 편액-차왕고운(次王考韻)
노산 이은상선생이 쓴 매학정 중수기
금오동학(金烏洞壑)-이 글씨는 조선 중기의 명필로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렸다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필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금오산(金烏山, 977m) 관리사무소(주차장) 근처의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150m 정도 산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서 있다. 그 바위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금오동학이란 ‘금오산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고산 황기로와 옥산 이우에 관한 신문기사 인용-2013.08.09 영남일보]
“왕희지 이후 일인자”… 海東草聖<해동초성>으로 불린 조선 최고의 명필가
구미 출신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가이다.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조선조 서예사에서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초서의 제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에 매학정을 짓고 풍류의 삶을 살았다. 특히 율곡 이이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 인연으로 율곡의 동생이자 신사임당의 넷째 아들인 옥산(玉山) 이우(李瑀)를 사위로 삼고, 훗날 매학정을 물려준다. 이우 역시 장인의 영향을 받아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다.
1.중국에도 알려져 ‘해동초성’이라 불려
황기로는 중종 16년(1521) 지금의 고아읍 대망리 속칭 ‘망장’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재능이 탁월했다. 집안은 그의 출사를 기대했으나 잠깐의 벼슬살이를 했을 뿐 그만두었다. 아버지 황계옥(黃季沃)이 조광조를 탄핵한 사실을 알고는 세상에 나가 활동할 면목이 없다며 벼슬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 초서(草書)에 몰두했다.
당시 유행하던 왕희지나 왕헌지의 글씨에서 벗어나 당의 장욱(張旭)과 회소(懷素), 명의 장필(張弼) 등이 즐겨 구사했던 초서체를 종합하여 자기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휘갈겨 쓴 이른바 ‘광초(狂草)’라는 독특한 서체를 구사했다. 차츰 독보적인 경지를 열어나가,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초서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의 글씨는 중국에 널리 알려져 ‘해동초성(海東草聖)’이라고 칭해졌으며, 왕희지 이후 일인자로 꼽히기도 했다.
황기로 초서-이군옥시. 황기로가 당나라 이군옥의 오언율시를 쓴 것으로 2009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625-1호로 지정됐다.사진출처=문화재청> |
그의 대표적인 필적으로 이백이 회소의 초서에 대해 읊은 ‘회소상인초서가행(懷素上人草書歌行)’을 쓴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필적은 돌판에 새겨 찍어낸 것인데, 사위 이우(李瑀)의 후손 집에 단계석에 새긴 원석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다고 한다. 말미에 “右李太白草書歌行. 嘉靖己酉夏, 孤山人書”라 쓰여 있어 1549년, 즉 그의 나이 29세에 해당하는 필적임을 알 수 있다. ‘근묵’ 등에 진적이 전하며, ‘관란정첩(觀瀾亭帖)’ ‘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최근 강릉 오죽헌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초서 ‘이군옥시’가 보물 제1625-1호로 지정됐다. 금석으로는 1555년(명종 10)에 승지 이번(李蕃)의 비문을 썼다. 금오산 정상 미군기지 내의 콘크리트에 묻혀 있는 바위에 새겨진 후망대(候望臺)는 황기로의 걸작에 속한다. 또한 금오산 케이블카 위쪽의 바위에 음각된 글씨 ‘금오동학(金烏洞壑)’이 있다. 저서로 ‘고산집’이 있다. 아들이 없어 사후 외손들이 그를 봉사했으며, 경락서원(景洛書院)에 봉향되었다고 한다.
#2.율곡의 동생 이우를 사위로 맞아
매학정은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낙동강 서편 보천탄(寶泉灘) 고산 기슭에 있다. 중종 14년(1519)에 황기로의 조부 황필이 처음 터를 잡아 모옥(茅屋)을 몇 칸 엮어 만년을 보낸 곳이다. 황필이 세상을 떠난 후 1533년 봄 황기로가 조부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송나라 때 임포(林逋)가 속세를 떠나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우며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산다”고 해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했는데, 황기로 역시 임포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자처해 산 이름을 고산으로 짓고, 그 이름으로 호를 삼았으며, 정자 이름을 매학정이라 한 것이다.
황기로의 슬하에는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있었다.
이이와 황기로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이의 부친 이원수는 을사사화 때 성주로 유배된 이문건(李文楗)과 친하게 지냈다. 이로 인해 이이는 더러 성주를 왕래하면서 도중에 있는 황기로를 방문, 교제를 튼 것이다. 이후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한 이이는 처가인 성주에 왔다가 칠곡 약목을 거쳐 구미를 지나 돌아갔다. 그 도중에 황기로를 찾곤 했다.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간 것이다.
이우는 서울에서 태어나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모친인 신사임당과 사별하고 장가를 왔다. 이우는 이이 집안의 형제들 가운데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예술적 재능을 정통으로 계승했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황기로는 이런 이우의 재능을 사랑해 그를 사위로 맞이한 것이다.
이우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비안현감, 괴산군수와 고부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시, 서, 화, 거문고를 잘 하여 ‘사절(四絶)’이라 일컬어졌다. 장인인 황기로의 영향을 받은 그의 필법은 정교하여 깨알에 거북 구(龜) 자를 써넣어도, 콩을 두 쪽으로 쪼개어 오언절구를 써넣어도 필법은 분명하였다고 한다. 선조대왕은 이우를 사랑하여 ‘초결백운가(草訣百韻歌)’를 하사하면서 손수 표지를 써주었다. 황기로는 이우의 글씨를 두고 “이군의 서법이 웅장하기는 나보다 훌륭하나 아름다움은 나에게 못 미친다. 조금 더 공부한다면 내가 이군에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매학정을 포함한 일대의 터전을 모두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그래서 황기로 사후 매학정과 그 일원은 덕수이씨 이우 집안의 터전이 됐다.
이우는 장인의 풍류를 따라 매학정을 사랑해 이런 시를 짓기도 했다.
그대가 나의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산 의지하고 강물에 임하여 사립문 닫힌 곳이라 말하리
때로는 구름 맑아 모래밭에 있노라니
사립문 보이지 않고 다만 구름만 보이네.
君問我家何處住, 依山臨水掩荊門,
有時雲淡沙場路, 不見荊門只見雲
이우는 1609년에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선산읍 북산동에 있다.
#3.영남지역의 특이한 예술 활동 공간
덕수이씨의 터전이 되고 난 뒤에도 매학정은 한동안 예술적 명성을 지켜나갔다. 이우의 아들 이경절(李景節)이 아버지 이우와 외조부 황기로의 예술세계를 계승해 글씨와 그림, 거문고 연주에 뛰어나 삼절로 명성이 높았다. 이경절은 특히 꽃이나 풀, 벌레 같은 화훼초충(花卉草蟲)을 잘 그렸다. 할머니 신사임당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가 이런 그림을 그려 길에다 던지면 닭들이 모여들어 쪼아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다.
매학정은 영남 일원에서 특이한 예술 활동의 공간으로 꼽힌다. 이우의 집안은 율곡 이래 서인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로 인해 이곳은 이후 영남지역에 드문 서인 노론계의 근거지였다. 이우의 아들 이경절과 이경절의 손자 이동명은 당시 노론계 핵심이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이의명이 각각 ‘매학정시집(梅鶴亭詩集)’의 발문을 짓고 송시열의 제자 이민서, 이상, 임방과 증손자 송능상, 김창협의 제자 이의현, 기타 김득신, 남용익, 김석주, 조지겸 등이 매학정과 관련된 글을 두루 남기고 있다. 이와 함께 당파와 상관없이 수많은 시인 묵객이 드나들었으며, 황준량과 이광려가 ‘매학정팔영(梅鶴亭八詠)’ 시를 지어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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