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절공 정수충(文節公 鄭守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경부(敬夫). 태보(台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熙)이고, 아버지는 감찰 제(提)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관찰사 약채(若采)의 딸이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재행(才行)이 있었다.
문절공 정수충 묘 전경
정수충 묘(하)와 부모 정제/광산김씨 묘(상)
문절공의 부모 정제(鄭提)/광산김씨 묘소
묘 후경
하동정씨 도선산입구에 세워져 있는 문절공 신도비
문절공의 신도비문은 윤보선전대통령이 찬하였다
문절공 정수충 행장(鄭守忠 行狀)
공의 성(姓)은 정씨(鄭氏)이고 휘(諱)는 수충(守忠)이며 자는 경부(敬夫)인데, 하동(河東) 사람이다. 아버지 정제(鄭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고, 할아버지 정희(鄭熙)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고, 증조 정태보(鄭台輔)는 약관(弱冠) 이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뒤에 밀직 부사(密直副使)의 벼슬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 김씨(金氏)는 광주(光州)의 세가(世家)인 관찰사(觀察使) 김약채(金若采)의 딸인데, 건문(建文) 3년 신사년(辛巳年, 1401년 태종 원년) 8월 11일(정묘)에 개성부(開城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겨우 5세에 어머니 김씨가 딸을 낳고 10월이 넘어 세상을 떠났으므로, 공이 어린 여동생과 같이 아버지를 따라 대구부(大邱府) 해안현(解顔縣)에서 자라다가 장성하자 뜻을 독실이 가지고 학문에 힘썼다. 영락(永樂) 임인년(壬寅年, 1422년 세종 4년)에 족제(族弟) 채신보(蔡申保) 등과 같이 하양(河陽)의 향학(鄕學)에서 글을 읽었다. 공의 아버지가 해안현의 집에서 돌림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였으므로 공이 곧바로 돌아와 병시중을 드니, 그 이튿날 병환이 조금 나았으나 공이 아버지의 대변 색이 평소와 다르고 냄새가 나지 않은 것을 보고 여동생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의원이 검루(黔婁)에게 가르치기를 ‘병환의 차도를 알려면 대변의 맛이 단지 쓴지 맛보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내 마땅히 시험해 보아야겠다.” 하고, 곧바로 대변의 맛을 보니 갈수록 달고 미끄러웠으므로 공이 더욱더 우려되어 여동생과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날 공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내가 들판으로 나가 거처하면 병이 나을 것이다.” 하면서, 매우 간곡하게 이야기하였으므로 집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들판으로 모시고 나갔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가르쳐 주기를 “조석으로 온신(瘟神)에게 제사를 지내면 병환이 나을 것이다.”고 하니, 공이 그 말에 따랐다. 그때 장마가 여러 달 졌는데, 공이 항상 맨 발로 조석으로 가서 지성으로 온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공이 슬퍼하다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불쌍하게 여기었다. 상례(喪禮)와 장례(葬禮)의 제도를 시골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모두 직접 전고(典故)를 상고하여 따라 하였고, 장사를 치르고 나서 여동생이 시집을 가지 않아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권도(權道)에 따라 자신이 직접 시묘(侍墓) 살이를 하지 않고 노복으로 하여금 묘소를 지키며 아침 저녁으로 설전(設奠)케 하는 한편 초하루 보름 및 명절이면 공이 친히 가서 제전(祭奠)을 드렸다. 이때부터 향리에서 모두 다 입을 모아 공의 효성을 칭송하니, 군수(郡守)가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공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갑진년(甲辰年, 1424년 세종 6년) 8월에 상복(喪服)을 벗고 12월에 여동생이 오숙동(吳叔瞳)에게 시집갔는데, 오숙동은 지금 조산 대부(朝散大夫)로 있고 해주(海州)의 세가(世家)이다. 공은 계축년(癸丑年, 1433년 세종 15년) 3월에 사정(司正) 민보흔(閔普忻)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여흥(驪興)의 세가이다. 무오년(戊午年, 1438년 세종 20년)에 공이 선영(先塋)을 참배하려고 대구부(大丘府)로 가다가 성주(星州)에 들러 처숙부(妻叔父) 민보열(閔普悅)을 찾아뵙자, 술을 내다놓고 공을 위로하는지라 공이 인하여 시 한 절구(絶句)를 지은 데 이르기를, “나이 한창 젊어서 고향을 찾았지만 옛날처럼 새하얀 하나의 포의라네. 외로운 소나무 늦도록 푸르른 걸 의심 말게. 연말 추위 극심해도 끝까지 지조를 지킬 테니.[年方强壯故鄕歸 皎皎如前一布衣 莫訝孤松含晩翠 歲寒應有後凋期]”라고 하였는데, 뒤에 공이 과연 크게 귀하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시참(詩讖)이라고 하였다.
공의 나이 40이 넘어도 녹(祿)을 구하려는 뜻이 조금도 없었다. 정통(正統) 을축년(乙丑年, 1445년 세종 27년)에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스승 김대뢰(金大賚)가 죽자, 세종(世宗)이 재주와 덕행을 겸비한 선비를 얻어 그의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때 이유(李瑜, 금성 대군(錦城大君))가 중추부사(中樞府事) 박거비(朴去非)의 아내 정씨(鄭氏)의 시양자(侍養子)가 되었는데, 이유가 평소에 공의 이름을 듣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공을 천거하여 아뢰었다. 세종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공을 불러다가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통감(通鑑)≫을 강론해 보도록 하였는데, 공이 모두 정통하였으므로 승정원에서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그때 세조(世祖)가 대군(大君)으로 있었는데, 또 명을 받아 공에게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의 강론을 시험해보고 나서 용비 시사(龍飛詩詞)를 내놓고 묻기를, “그대는 이 시를 아는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단지 그 이름만 들어보고 그 글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세조가 공에게 주어 읽도록 하고 뒤따라 물어보니, 공이 경전과 사기를 인용하여 매우 시원스럽게 대답하였다. 세조가 세종에게 보고하기를, “정수충은 행동이 차분하고 언론이 민첩하며 경전과 사기에 널리 통달하여 재주가 완벽하고 덕행이 갖추어졌으므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합니다.”고 하니, 세종이 기뻐하여 공을 영응 대군의 스승으로 삼게 하고 연회를 열어 사제(師弟)의 예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해 7월에 여러 등급을 뛰어넘어 진무 부위(進武副尉) 사용(司勇)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영응 대군이 강(講)을 파한 다음에 여러 대군들이 앞을 다투어 수업하여 해가 진 뒤에 파하였다. 문종(文宗)이 세자로 있을 때 세종에게 아뢰기를, “정수충이 인걸인지 아닌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현인(賢人)이 아닌가 싶습니다.”고 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446년 세종 28년) 9월에 수의 부위(修義副尉)로 승진하고, 정묘년(丁卯年, 1447년 세종 29년) 7월에 승의 부위(承義副尉) 사정(司正)으로 승진하였다가 8월에 수 사정(守司正)으로 승진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448년 세종 30년) 12월에 진용 부위(進勇副尉) 사정(司正)으로 승진하여 경창부 승(慶昌府丞)을 겸임하였다. 문종이 내장(內藏)한 직제학(直提學) 김문(金汶)이 토(吐)를 정한 ≪소학(小學)≫을 꺼내어 공으로 하여금 읽어보도록 하였는데, 중간에 원만하지 않은 곳을 공이 모두 기록하여 아뢰니, 문종이 “그렇다.” 하고, 공으로 하여금 개정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 경전과 사서를 상고할 일이 있으면 임금이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하여금 상고하도록 한 다음에 또 공으로 하여금 상고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집현전 학사들보다 앞선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년(己巳年, 1449년 세종 31년) 12월에 돈용 부위(敦勇副尉)로 승진하였다가 수 부사직(守副司直)으로 승진하여 경창부 승을 겸임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450년 문종 즉위년) 윤5월에 승의 교위(承義校尉)가 되었고, 10월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였는데,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 권남(權擥)의 방(榜)이었다. 품계를 뛰어넘어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행 전농시 주부(行典農寺主簿)가 되었다. 세조가 문종에게 아뢰기를, “세종께서 일찍이 하교하기를, ‘정수충이 만약 과거에 합격하면 내가 크게 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고 하니, 문종이 이르기를, “이 하교를 누구와 논하였는가?”라고 하자, 세조가 대답하기를, “여러 대군들은 모두 있었고 오직 안평(安平)만 없었습니다.”고 하니, 문종이 이르기를, “안평이 없었음이 한스러울 뿐이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더러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에게 그 말을 들은 것처럼 해 달라고 청하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그 임금을 먼저 속이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451년 문종 원년) 정월에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로 전직되어 세조를 따라 집현전으로 가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였다. 2월에 승의랑(承議郞)으로 승진하였고, 5월에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로 전직되었다가 9월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로 옮기었고, 12월에 부사직(副司直)으로 전직되어 상서원 주부(尙瑞院主簿)를 겸임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452년 단종 즉위년) 10월에 창신 교위(彰信校尉)로 승진하고,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 4월에 현신 교위(顯信校尉)로 승진하여 행 사용(行司勇)이 되어 상서원 주부를 겸임하였다. 세조가 난을 평정하고 정권을 잡자, 11월에 통선랑(通善郞)으로 승진되어 행 성균관 주부(行成均館主簿)로 양고사(養庫事)를 겸임하였다가 12월에 통덕랑(通德郞)으로 승진되어 서학 교수관(西學敎授官)으로 전직되었다.
갑술년(甲戌年, 1454년 단종 2년) 8월에 조봉 대부(朝奉大夫)로 승진되어 수 성균관 사예(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을해년(乙亥年, 1455년 세조 원년) 윤6월에 조산 대부(朝散大夫)로 승진하고, 8월에 봉렬 대부(奉列大夫)로 승진되었으며 9월에 좌익 공신(左翼功臣) 칭호가 내려졌는데, 공이 3등에 참여되었다. 이달에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통훈 대부(通訓大夫)가 되고, 10월에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남학 교수관(南學敎授官)으로 전직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456년 세조 2년) 5월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승진하고, 정축년(丁丑年, 1457년 세조 3년) 2월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그때 공이 훈련원 제조(訓鍊院提調)로 무과(武科) 시험을 관장하여 어득해(魚得海) 등을 선발하고 5월에 행 상호군(行上護軍)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영응 대군이 사서(四書)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통감(通鑑)≫ 등의 글을 다 읽었는데, 공이 그의 집에 가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세조가 공을 불러 이르기를, “근년에 어찌하여 영응 대군과 소원해졌는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대군의 학문이 이미 다 되었으므로 신이 다시금 가지 않은 것입니다.”고 하자, 세조가 이르기를, “영응 대군은 순수하고 신중하며 돈독하고 신실하니, 바로 경이 가르친 힘이었다. 영응 대군이 경의 집을 가지 않은 것은 나라의 법을 범할까 염려한 것이다.” 하고, 곧바로 하교하기를, “앞으로 명일(名日)을 만날 때마다 영응 대군은 술과 안주를 갖추어 가지고 정수충의 집에 가서 대접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세조가 또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경(卿)에게 글은 배우지 않았지만 학문의 도움은 정말로 많이 받았으니, 경은 영응 대군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스승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7월에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지고 봉조청(奉朝請)에 임명되었다. 9월에 의경 세자(懿敬世子)가 죽어 세조가 상례(喪禮)를 주관할 사람을 구하니, 조정에서 서원군(西原君) 한계미(韓繼美)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세조가 스스로 공을 간택하여 상례의 주관자로 삼으니, 사람들이 모두 적임자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달에 다시 봉조청에 임명되고 하원군에 봉해졌다.
무인년(戊寅年, 1458년 세조 4년) 6월에 공신에게 교서(敎書)를 하달하였는데, 그 교서에 “하늘이 융성한 왕업(王業)을 열려고 할 때는 반드시 훌륭한 인재를 탄생하여 보좌하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周)나라가 천자가 되었을 적에 열 명의 유능한 신하의 도움을 받았고 한(漢)나라가 흥기할 적에 또한 세 명의 걸출한 모사(三傑之謀, 소하(蕭何)ㆍ장량(張良)ㆍ한신(韓信))에 힘입었다. 이에 공로를 보아 철권(鐵券, 훈공(勳功)을 기록한 증서)을 주어 전공(前功)에 보답하고 후손들이 힘쓰도록 더욱더 격려하였다.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지마는 그 의의는 똑같다. 오직 경은 순아(醇雅)한 자질과 독실(篤實)한 행실로 유술(儒術)을 실천하고 서사(書史)에 널리 통달하였다. 비록 오랫동안 말직에 침체되어 있었으나 구차하게 용납되려고 한 적이 없었고 결국에는 과거에 합격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다. 공평과 청명으로 벼슬에 임하였고 충성과 의리로 자신을 가다듬었으니,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은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리고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서 거취(去就)에 어둡지 않았으므로 내가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난을 평정하고 정사를 보필하는 날에 이르러 남은 잔당들이 변란을 선동할 때 위험을 피하지 않고 시종 한결같이 하여 나에게 금일의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하였으니, 가정을 교화시켜 나라를 다스림을 따져보건대, 비록 천명(天命)이 집중된 것이기는 하나 호위하고 보필한 것은 실로 경들의 힘을 의뢰한 것이다. 내가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공훈을 책정하여 좌익 삼등 공신(佐翼三等功臣)으로 삼으니, 그의 부모(父母) 및 처(妻)에게 작첩(爵牒)을 내리고 대대로 영원히 죄를 사면해 주도록 할 것이다.”고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459년 세조 5년) 7월에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 정월에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어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지고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겸임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세조가 이르기를, “경이 가산(家産)을 경영하지 않은 것은 내가 평소에 알고 있다.” 하고, 쌀 2천 석을 주어 궁핍한 데 보태 쓰라고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464년 세조 10년) 9월에 공이 궁중에 숙직하다가 중풍(中風)에 걸려 말을 잘하지 못하였고 오른쪽 수족(手足) 마비되었다. 성화(成化) 을유년(乙酉年, 1465년 세조 11년) 9월에 겸임한 성균관 사성에서 체차되고 군(君)에 봉해졌으며, 10월에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여 군(君)에 봉해졌다. 병술년(丙戌年, 1466년 세조 12년) 10월에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군(君)에 봉해졌다. 기축년(己丑年, 1469년 예종 원년) 7월에 군에 봉해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9월에 병환으로 인해 향년 69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자질이 순아(醇雅)하고 표리(表裏)가 한결같았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장성하여 더욱더 갈고 닦았다. 공렴(公廉)하고 정직(正直)하며 희로(喜怒)를 드러내지 않았다. 올바르지 않은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고 은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세력에 빌붙지 않았고 청탁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사적으로 밀담을 나누지 않았고 사람들과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 일의 시종을 생각하여 모든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25년간 오래도록 벼슬하였으나 하루아침에 탄핵을 받을 우려가 없었다. 젊어서부터 재산을 경영하지 않았고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장단(長湍)에 살 때 몇 칸의 초가집에다 온 집안이 쓸쓸하여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였고, 집안에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나 태연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뒤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많아지자 어떤 일가가 공에게 집을 새로 지으라고 권하니, 공이 대뜸 말하기를 “집이라는 것은 바람과 햇볕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이 집도 바람과 햇볕을 가릴 수 있으니, 나에게 만족하다.” 하고 종신토록 다시 짓지 않았다. 사람이 선물을 주면 받을 수 있는 것만 가려서 받았고, 친족 중에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으면 밥을 주고 옷을 주었는가 하면 가난하여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못한 사람에게는 재화(財貨)로 도와주었다. 항상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인(仁)을 하려고 하면 부자가 될 수 없고, 부자가 되려고 하면 불인(不仁)해진다. 부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것을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아들 9명을 두었는데, 정화(鄭和)ㆍ정직(鄭稷)ㆍ정목(鄭穆)ㆍ정온(鄭)ㆍ정적(鄭積)은 모두 벼슬이 대부(大夫)에 이르렀고, 정육(鄭稑)ㆍ정조(鄭稠)는 참상(參上)이고, 정세(鄭稅)ㆍ정인(鄭秵)은 참하(參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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