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대구] 문경공 정초(?文景公 鄭招) 묘-하동정씨

장안봉(微山) 2015. 6. 5. 10:35

문경공 정초(文景公 鄭招)

 

?∼1434(세종 16). 조선 세종 때의 문신.

 

본관은 하동(). 자는 열지(), 시호는 문경(). 아버지는 사헌집의()를 지낸 정희()이다.

 

정초()는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중시()에 합격하여 사헌집의와 판군자감(), 승문원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경연시강관()을 겸직하였다. 이후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초 과학 사업에 중요한 소임을 맡아 정인지()·정흠지() 등과 함께 『대통통궤()』를 연구하고, 『칠정산내편()』을 편찬했으며, 간의대()를 제작·설치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그밖에도 왕명에 의해 『농사직설()』·『회례문무악장()』·『삼강행실도()』 등을 편찬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영매()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경사()에 널리 통하였다. 겸하여 관리의 재질이 있어, 대체로 국가의 의제()에 많이 참예하여 정한 바 있으며, 역산()·복서[]에도 모두 통달하였다고 전한다.

 

1434년(세종 16) 6월에 졸하자 이틀간 조시()를 정지하고, 부의를 내려 주고 치제()하였다. 시호를 문경(文景)이라 하니, 배움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요, 의()에 의하여 절제()함이 경()이다.

 

 

 

 

 

 

 

 

 

 

정희(鄭熙)

 

생몰년 미상.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지신사() 곽추()가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여 1389년(공양왕 1) 장령이 되었다. 1391년 사헌집의가 되었으며, 이 때 이염()이 술에 취하여 왕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데 대하여 국문하였다. 1392년정몽주()가 살해될 때 조준() 등을 탄핵하다가 유배당하였다.

 

 

 

 

 

 

 

 

 

광주 화담사(花潭祠)

 

화담사는 원래 세조 때의 좌익공신으로 경사()에 능하고 청렴결백한 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문절공() 정수충()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35년(영조 11)에 건립된 영당()이었다. 1776년(영조 52) 그의 가문인 하동정씨() 문중에서 사당을 새로 건립하자는 의견에 따라 1784년(정조 8) 지금의 화담사가 건립되고 정수충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이후 1796년(정조 20) 광주향교 유회소()의 발의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광주 출신의 무장 민제장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08년(순조 8)에는 정수충의 할아버지이며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킴으로써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묵은공() 정희 그리고 정수충의 둘째 큰아버지로 세종 때 《농사직설()》을 편찬하는 등 학문·예술·과학기술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문경공() 정초()를 함께 배향하였다. 1910년부터 조상의 예를 갖추어 할아버지인 정희의 위패를 으뜸으로 삼았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건물의 지붕을 가리고 제사만 폐하였다가 1905년 광주향교 유회소의 발의로 복설되었다. 1906년에는 광주 유생들의 발의로 충효가 출중한 광주 출신의 학자 약포공() 정오도를 추가로 배향하여 현재의 틀을 갖추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