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이순신을 구원해야 함을 논하는 상소문〔論救李舜臣箚〕

장안봉(微山) 2015. 2. 27. 06:17

                                                 이순신을 구원해야 함을 논하는 상소문〔論救李舜臣箚〕

                                                                                                                                                                       약포 정탁

-애당초 의론을 수렴하여 입계하였다. 또 이 상소문을 마련하여 아직 진달하지 않고 있었는데, 특명으로 건의에 따라 사형을 감면하라고 하였다. 의(議)는 아래에 보인다.-

삼가 생각하건대, 이순신은 몸소 큰 죄를 범하여 법률상의 죄명이 매우 엄격함에도 성상께서 즉시 극형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원초(元招)를 한 뒤에 다시 끝까지 추문(推問)할 것을 허락하셨으니, 이는 다만 옥사를 다스리는 체단(體段)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성상께서 인(仁)을 체행하시는 일념에서 끝까지 그 진상을 밝혀내어 혹시라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이 또한 죄를 지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었으니 신은 감격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신이 일찍이 위관(委官)에 임명되어 추국(推鞫)에서 죄수를 문초해 본 적이 진실로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 대개 죄인들이 한 차례의 심문을 겪고 더러는 큰 상처가 나서 간혹 재론할 만한 정상(情狀)이 있더라도 지레 목숨이 끊어져서 어찌할 길이 없었으므로 신은 일찍이 이를 항상 염려하였습니다. 이제 이순신은 이미 한 번의 형신(刑訊)을 치렀는데, 만약 또다시 형신을 가한다면 엄중한 추국에 반드시 살아남는다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본의를 손상시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임진년(1592) 당시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고 적세가 하늘을 찌르던 날에 국토를 지키던 신하들 중에는 성을 버린 자가 많았고 지방의 군사를 통솔하던 장수들도 군사를 온전히 보존한 자가 적었으며, 조정의 명령은 거의 사방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이순신이 창도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곧 원균(元均)과 함께 적의 흉봉(兇鋒)을 꺾음으로써 국내의 민심이 차츰 생기를 얻고 창의한 자들도 힘이 났으며 적에게 빌붙었던 자들이 마음을 돌렸으니, 그의 공로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도 매우 가상히 여겨 높은 작위로 올려 주고 통제사의 칭호를 하사하기까지 하였으니, 마땅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순신이 대장이 되어서 진격할만한 상황을 보고 나아가시기를 놓치지 않아 수군을 잘 움직여 성세(聲勢)를 크게 진작시켰으니, 어려움에 임해 피하지 않는 용기는 원균도 지녔으나 끝까지 적을 물리친 공로는 이순신 또한 원균에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적을 방어하는 방법에 대해 환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하(手下)의 재주 있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쓰이려 하여서 일찍이 군사를 잃은 적이 없었으며 위엄과 명성도 예나 다름없었으니, 왜노들이 수군을 가장 두려워한 것도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가 변방을 진압하여 공로를 세운 것이 이와 같은 데도 혹자는 이순신이 한 번 공로를 세운 뒤로 다시는 내세울 만한 공로가 별로 없다고 여겨 이것을 가지고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4ㆍ5년 이래로 명나라 장수들은 화친을 주장하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왜를 신하국으로 봉하려는 일까지 생겨서 우리나라의 모든 장사(壯士)들은 그 사이에서 손을 쓸 수 없었으니, 이순신이 다시 힘을 펼치지 못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닙니다. 최근 왜노들이 또다시 쳐들어왔을 때 이순신이 주선(周旋)하지 못한 것은 그 사이에 정세가 또한 논할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대개 지금은 변방 장수들이 한번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므로 다시는 지방의 군사를 마음대로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왜노들이 아직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조정에서 비밀리에 하교하였으나, 제때에 제대로 전달되었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으며, 바다의 바람이 순풍이었는지 역풍이었는지, 배가 운항하기에 좋았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군들이 번을 나눌 수밖에 없었던 부득이한 사정은 이미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스스로 탄핵한 장계(狀啓)에 분명히 실려 있고, 수군이 위기에 임해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은 형세가 또한 그러하니, 이것을 이순신에게만 전부 책임 지워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지난날 장계 속에 진술된 말들은 허망한 점이 있어 매우 괴이쩍고 놀라우나, 이 말이 만약 아랫사람들의 과장된 보고에서 나온 것이라면 중간에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을 수도 있었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순신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감히 이 같은 짓을 했겠습니까? 신은 삼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저 난리가 일어나던 초기에 군공(軍功)을 알리는 장계에서 하나하나 사실을 다루지 않고 남의 공로를 탐내어 자신의 공로로 삼은 것은 너무 무망(誣妄)한 짓이 되니, 이것으로 죄를 묻는다면 이순신인들 또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하니 완전한 덕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남과 내가 서로 상대할 때에 남보다 위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자가 대개 적어서, 인순(因循)하고 구차(苟且)한 사이에 실수를 범하지 않는 자가 드무니 다만 위에 있는 사람이 실수의 크고 작음을 살펴서 처분의 경중을 둘 뿐입니다.

대개 장수된 자는 군민(軍民)의 운명을 맡고 있어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 사람이기에 그 중요함이 이와 같으므로 예부터 제왕들이 군권을 위임하여 은전과 신의를 특별히 보여주었으며, 큰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곡진하게 보호하고 완전하게 하여 그 임무를 다하게 하였으니 그 뜻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대저 인재란 나라의 이기(利器)이므로 비록 저 통역관이나 주판질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도 진실로 재주와 기예가 있으면 모두 다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게다가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는 적을 막아내는 데 가장 관계가 깊습니다. 그러니 어찌 법을 적용함에 있어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은 진실로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재능은 수륙(水陸)을 겸비하여 혹시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쉽게 얻지 못하거니와 변방의 백성들이 촉망하는 바이고 적들이 두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만일 죄명이 매우 엄중하다고 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또 공로와 죄상의 비중을 묻지 않고 공로와 능력의 유무를 헤아리지 않은 채, 그 정세를 천천히 규명하여 보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권면할 수 없고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면려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원균 같이 원망을 품은 자라도 아마 스스로 편안할 수만은 없을 것이고, 안팎의 인심도 모두 해체될 것입니다.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정황이며, 한갓 적에게만 행운이 될 것입니다. 일개 이순신의 사형은 진실로 아깝지 않지만 국가에 있어서는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어찌 거듭 염려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장수를 교체하지 않아서 마침내 큰 공을 세우게 한 예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에게 한 일과 같은 경우가 진실로 한둘이 아닙니다만, 신이 먼 옛날의 일을 인용하지 않고 다만 성상께서 최근에 하신 일로써 아뢰겠습니다. 박명현(朴名賢) 또한 한때의 맹장(猛將)으로, 일찍이 국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저질렀으나 조정에서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충청도에 변란이 있었고 그 변란은 기축년(1589) 보다 더 심하였지만, 박명현이 일거에 난을 평정하여 종묘에 공을 남겼으니, 허물을 없애주고 공효를 책선한 뜻이 지극하였습니다.

지금 이순신이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십악(十惡)을 거의 다 범하였으므로 죄명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은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고, 이순신도 공론이 지극히 엄중하고 상형(常刑)이 두려운 것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특별히 형신을 감하여 주시고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신다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보답하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박명현에게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중흥을 이루어서 초상을 그려 관각에 걸만한 우리 성조(聖朝)의 훈신이 오늘의 서미(胥靡)에서 일어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조에서는 장수를 부리고 인재를 쓰는 도리, 공로를 의논하고 재능을 논의하는 은전, 사람이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허용하는 길이 한꺼번에 얻어질 것입니다. 성조에서 난리를 평정하는 정책에 보탬이 되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신은 삼가 의금부에서 수렴한 의론을 따라서 일찍이 고루한 견해를 진술하였으나, 여러 의론에 합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 또한 뜻을 다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수많은 생각 끝의 견해가 혹여 성상께 채택되기를 바라면서 이에 감히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다시 앞서의 말을 거듭 올려 추요(芻蕘)의 말에 대비하고 삼가 성상의 유지(諭旨)를 기다립니다. 만약 신의 어리석은 말〔瞽言〕이 나랏일에 천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있다면 신은 만 번 죽어도 좋습니다. 신이, 지독한 감기에 걸려 이미 20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이처럼 낫지 않아서 직접 대궐에 나아가지 못하고 삼가 차자를 갖추어 올립니다. 성상께 경솔함을 범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재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이택용의 e야기 - 晩濃
글쓴이 : 李澤容(이택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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