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역사와 성씨

[스크랩] 晋陽鄭氏(진양정씨,晉州)

장안봉(微山) 2014. 12. 27. 05:11

 

 

 

晋陽鄭氏(진양정씨,晉州)

 

▣ 由來

 

 

晉陽鄭氏(진양정씨)는 同姓同本(동성동본)이면서도 各各(각각) 始祖(시조)를 달리하는 8個派(개파)가 있어 흔히 晉陽(진양)(現在의 晉州) 8鄭(정)이라고들

일컫는다.元祖(원조)는 三國遺事(삼국유사)에 傳(전)하는 新羅 6村長(신라6촌장)中(중) 한 사람인 觜山振阜(자산진부)의 村長(촌장) 智伯虎(지백호)이며,그의 後代(후대)에서 鄭氏(정씨)의 分貫(분관),分派(분파)가 이루어졌다.忠莊公派(충장공파),殷烈公派(은열공파),恭戴公派(공대공파),御史公派(어사공파)等(등)은 晉陽鄭氏(진양정씨)의 4大(대)봉우리로,現在(현재)의 晉陽鄭氏(진양정씨)는 이들後孫(후손)들이 主流(주류)을 形成(형성)하고 있다.本貫地(본관지) 晉陽(진양)은 高麗時代(고려시대)에 先祖(선조)들이 살아오던 곳이다.
 

▣ 人物

 

 

高麗(고려)때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을 지낸 鄭時陽(정시양), 兵部尙書(병부상서)를 歷任(역임)한 鄭臣烈(정신열), 版圖判書(판도판서)인 鄭任德(정임덕), 禮義判書(예의판서)의 鄭愈(정유), 大提學9대제학)을 지낸 鄭需(정수),平章事(평장사)를 지낸 鄭綠(정록), 贊成事(찬성사)를 지낸 鄭乙輔(정을보) 等(등)이 있다.恭民王(공민왕)때 典客令(전객령)을 지내고,中國(중국)에서 木花(목화)씨를 들여온 文益漸(문익점)의 丈人(장인)으로 木花種子(목화종자)를 裁培(재배)하고 報給(보급)하는데 큰 功積(공적)을 남긴 鄭天益(정천익)도 빼놓을 수 없는 人物(인물)이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相臣(상신) 1名(그의 아들이 鄭之産(정지산)이다),大提學(대제학) 2名,文科(문과) 及第(급제)자 59名과 鄭陟(정척),鄭誠謹(정성근)等(등)의 淸白吏(청백리)를 輩出(배출)해냈다.朝鮮(조선) 仁祖(인조)때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鄭經世(정경세),西涯(서애)柳成龍(유성룡)의 首弟子(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湖堂(호당)에 뽑혔던 秀才(수재). 1592年 壬辰倭亂(임진왜란)이일어나자 義兵(의병)을 募集(모집)하여 功(

)을 세웠고 性理學(성리학) 뿐만아니라 禮學(예학)에도 밝아 金長生(김장생)과함께 禮學派(예학파)를 形成(형성)했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의 名將(명장)

鄭起龍(정기용)將軍(장군)은 壬辰倭亂(임진왜란)當時(당시) 尙州城(상주성)奪還(탈환), 丁酉再亂(정유재란)때의 星州(성주), 草溪(초계), 宜寧城(의령성) 奪還(탈환)戰鬪(전투)에도 눈부신 戰功(전공)을 세웠다.光海君(광해군)9年三道統制使(삼도통제사)兼(겸)慶尙右道水軍節度使(경상우군수군절도사)에 올라 南海岸(남해안)을 防禦(방어)하던 中(중) 統營陣中(통영진중)에서 숨졌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鄭兼濟(정겸제) (1718 戊戌生) : 文科英祖44年(1768) 式年試 丙科
鄭誾)(정은) (1782 壬寅生) : 司馬試 純祖16年(1816) 式年試 三等
鄭周洽(정주흡) (1874 甲戌生) : 司馬試 高宗31年(1894) 式年試 三等
等 모두 3名의 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1名, 司馬試 2名)

▣ 世居地

 

 

全羅南道 羅州市 鳳凰面 鐵川里. 俗稱 鐵野마을.


4百餘年(4백여년)의 年輪(연륜)을 자랑하는 德龍山(덕룡산) 기슭 蔚蒼(울창)한 느티나무 숲속에 철야마을은 묻혀있다.마을 入口(입구)에 지붕을 드리운 挽湖亨(만호정)은 이 마을 儒林(유림)들이 山水(산수)를 노래하며 노닐었던 由緖(유서)깊은 社交場(사교장)이다.마을 뒤 德龍山(덕룡산)은 피비린내나는 義兵戰跡地(의병전적지)였다. 羅州市(나주시) 一帶(일대)의 義兵(의병)들은 山勢(

세)가 險(험)한 德龍山(덕룡산)에 숨어 日本軍(일본군)과 對置(대치)하며 戰鬪(전투)를 繼續(계속)했고 밤이면마을 아낙네들이 치마 폭에 찐감자 等(등)먹을 것을 감춰 山(산)으로 날랐다고 한다.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南道  晉州


晉陽(진양)은 慶尙南道(경상남도) 南西(남서)쪽에 位置(위치)한 地名(지명)으로 本來(본래)三韓時代(삼한시대)에 小國(소국)인 古淳是國(고순시국)이 있었던 곳이다. 百濟(백제)의 居烈城(거열성)이었고,新羅(신라) 文武王(문무왕)때 新羅(신라)의 領土(영토)가 되어 居烈州(거열주)라 불리었으며,757年(新羅景德王16)九州五小京制(구주오소경제)의 實施(실시)와 함께 康州都督府(강주도독부)로 고쳤다가, 惠恭王(혜공왕)때 菁州(청주)로 改稱(개칭)되었다.高麗初에 康州(강주)로 還元(환원)되었다.983年(成宗2)全國(전국)에 12牧(목)을 둘 때 晉州牧(진주목)이 되었다. 995年(成宗14)에는 定海軍(정해군)이라 하고 節度使(절도사)를 두어 山南道(산남도)에 屬(속)하게 하였다.1012年에 按撫使(안무사)로 고쳤다가,

1018年(顯宗9)에 晉州牧(진주목)으로 復舊(복구)되었다.1310年(忠宣王2)에 晉州(진주)로 降等(강등)되었다가 1356年(恭愍王5)에 다시 晉州牧(진주목)으로 回復(회복)되었다. 1392年(太祖1)에 晉陽大都護府(진양대도호부)가 되었다가 1402年(太宗2)에 晉州牧(진주목)으로 還元(환원)되어 朝鮮時代(조선시대)同安(동안) 維持(유지)되었다. 1895年(高宗32)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으로 晉州府(진주부)晉州郡(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年에 13道制(도제)實施(실시)로 慶尙南道(경상남도) 晉州郡(진주군)이 되었다.1931年에晉州面(진주면)이 邑(읍)으로 昇格(승격)하였다.1939年 晉州邑(진주읍)이 晉州市(진주시)로 昇格(승격)하면서 나머지 地域(지역)이 晉陽郡(진양군)으로 改稱(개칭)되었으며, 1995年 晉陽郡(진양군)이 晉州市(진주시)에 統合(통합)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晉陽鄭氏(진양정씨)는
1985年에는 摠 55,464家口 231,289名,
2000年에는 摠 74,777家口 238,505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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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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