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고려)때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을 지낸 鄭時陽(정시양),
兵部尙書(병부상서)를 歷任(역임)한 鄭臣烈(정신열), 版圖判書(판도판서)인 鄭任德(정임덕), 禮義判書(예의판서)의 鄭愈(정유),
大提學9대제학)을 지낸 鄭需(정수),平章事(평장사)를 지낸 鄭綠(정록), 贊成事(찬성사)를 지낸 鄭乙輔(정을보) 等(등)이
있다.恭民王(공민왕)때 典客令(전객령)을
지내고,中國(중국)에서 木花(목화)씨를 들여온 文益漸(문익점)의 丈人(장인)으로 木花種子(목화종자)를 裁培(재배)하고 報給(보급)하는데 큰
功積(공적)을 남긴 鄭天益(정천익)도 빼놓을 수 없는 人物(인물)이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相臣(상신) 1名(그의 아들이
鄭之産(정지산)이다),大提學(대제학) 2名,文科(문과) 及第(급제)자 59名과 鄭陟(정척),鄭誠謹(정성근)等(등)의 淸白吏(청백리)를
輩出(배출)해냈다.朝鮮(조선) 仁祖(인조)때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鄭經世(정경세),西涯(서애)柳成龍(유성룡)의 首弟子(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湖堂(호당)에 뽑혔던 秀才(수재). 1592年 壬辰倭亂(임진왜란)이일어나자 義兵(의병)을
募集(모집)하여 功(
공)을 세웠고 性理學(성리학)
뿐만아니라 禮學(예학)에도 밝아 金長生(김장생)과함께 禮學派(예학파)를 形成(형성)했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의
名將(명장)
鄭起龍(정기용)將軍(장군)은 壬辰倭亂(임진왜란)當時(당시)
尙州城(상주성)奪還(탈환), 丁酉再亂(정유재란)때의 星州(성주), 草溪(초계), 宜寧城(의령성) 奪還(탈환)戰鬪(전투)에도 눈부신 戰功(전공)을
세웠다.光海君(광해군)9年三道統制使(삼도통제사)兼(겸)慶尙右道水軍節度使(경상우군수군절도사)에 올라 南海岸(남해안)을 防禦(방어)하던 中(중)
統營陣中(통영진중)에서 숨졌다. |